커뮤니티
스포츠
토론장


HOME > 커뮤니티 > 동아시아 게시판
 
작성일 : 17-04-26 16:20
[세계사] 이집트학과 유사 피라미드학의 주요 인물
 글쓴이 : 옐로우황
조회 : 1,323  

이집트학 분야 전체는 여전히 기본적으로 샹폴리옹의 언어학적 전통을 따를 것이며 수학과 측량에 중점을 두는 피라미드학의 조마르 학파는 여전히 외곽에서 매우 중요한 역활을 할 것이다.


※ 발췌 : http://yellow.kr/blog/?p=1991



◎ 1798년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


–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은 가장 중요한 사건의 하나였다. 나폴레옹은 과학자, 공학자, 의사, 고전학자 등을 이집트에 데려갔다. 이들이 이집트에 대해 수집한 정보는 역사상 가장 방대한 것이자 중요한 이론적 바탕이 되었다.

– 기자 지역에 대한 가장 중요한 연구는 네 사람이 주도했다. 건축가 레페르, 나폴레옹의 부하인 장 마리 쿠텔 대령, 피라미드 내부 구조를 연구한 에드메 프랑수아 조마르, 예술가이자 공학도인 세실이 그들이었다. 

– 1799년 로제타 스톤 발견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0&aid=0000250885

– 이때의 성과를 정리한 책 『이집트 지』(Description de L’Egypte, 1809~1828) : 본격적인 이집트학의 서막이 열린 셈이었다.

– 나폴레옹은 대피라미드의 왕의 무덤 방에 들어가, 혼자서 일정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하룻밤을 지새웠다는 말도 있고, 한 시간 머물렀다는 이야기도 있다. 나폴레옹이 피라미드 밖으로 나왔을 때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고 했다. 부관이 뭔가 보았느냐고 물었으나 나폴레옹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나중에도 그 일을 말할 듯하다가 말았다고 한다.





◎ 장 프랑수아 샹폴리옹 (Jean-François Champollion, 1790~1832)

– 18세에 박사 학위를 받았고, 19세에 그르노블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이후 정치적인 문제(그는 형과 함께 자코뱅주의를 주장하고 나폴레옹을 지지했다)와 학계에 많은 적을 두어 험난한 이력을 보여준다. 

– 1822년 이집트 상형문자 판독, 이집트학의 창시자로 불린다.

– 1822년 덴데라에 있는 황도대黃道帶의 연대를 로마 시대로 추정하였다.

– 『고대 이집트어 상형문자법 요론』(Précis du système hiéroglyhique des anciens égyptiens, 1823)

– 샹폴리옹은 자신의 역사적 발견을 힉소스 이후의 왕조에 해당하는 것으로, 즉 그 연대를 기원전 2200년까지로 신중히 제한함으로써 성서의 우선성을 인정했다. 그는 이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교 옹호자의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그가 최초의 그리스 문명 훨씬 이전에 존재했던 이집트의 위업으로 주의를 돌린 것은 그리스학 학자의 증오를 불러일으켰다. 그리하여 그는 한동안 그리스도교와 헬레니즘 사이의 동맹을 갈라놓았다.

– 1830년 7월 혁명 이후의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이집트 역법, 즉 이집트 문명이 기원전 3285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자신의 결론을 거리낌 없이 발표했다. 그러자 그리스도교도와 그리스학 학자가 다시 결합하여 그에게 맞섰다.

– 1832년에 그가 사망한 이후 이집트학은 4반세기 동안 퇴보의 길을 걸었던 반면 그의 적인 그리스학 학자와 오리엔탈리즘 학자는 계속해서 프랑스 학술원을 지배했다.

– 『이집트와 누비아의 유적』(1845)




◎ 에드메 프랑수아 조마르 (Edme François Jomard, 1777~1862)

– 수학자이자 측량사로서 나폴레옹의 원정에 참여했다. 『이집트 지』의 편집에 참여했다.

– 샹폴리옹과 경쟁 관계 유지

– 나폴레옹 탐사대의 다른 위원과 함께 대피라미드를 정확하게 실측하고 기록하면서그 주변까지 철저히 탐사했다.

조마르는 대피라미드를 천체 관측을 위한 시설이자 동시에 각종 측량 기록을 정리 보관하는 곳으로 보고 있다. 즉 피라미드의 각종 규격에는 그 지리적 위치와 관련된 정보, 그리고 이를 정확하게 계산할 모든 천문학과  측량학적 지식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 조마르는 기자의 대피라미드와 그 정확한 지리학적 위치를 직접 측량한 결과를 토대로 대피라미드의 측정치에 나타나는 수학적 의미에 관한 고대의 기록과 연결시켰다. 그는 고대 이집트인이 지구의 둘레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으며 그것을 근거로 길이의 단위를 구성했음에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 어떤 이유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조마르의 연구 결과는 30년이 지난 뒤에야 책으로 출간되었고, 당시 유럽 학계를 지배하던 변덕스러운 지식인들이 그리스 문화에 심취되어 이집트 문명을 폄하하던 시기라 조마르의 정밀한 연구 결과는 실수투성이 혹은 지적 사기에 불과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 샹폴리옹에 의해 덴데라 황도대의 연대 추정과 관련된 조마르의 명성에 일격이 가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상은 잔존하거나 혹은 종종 재발견되어 19세기 내내 발전하였다.

– 조마르는 왕정 복고 이전에 프랑스 학술원 회원이 되었으며 왕정 복고 이후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 플린더스 피트리 (William Matthew Flinders Petrie, 1853~1942)

– 영국의 고고학자. 근대 이집트 관련 고고학의 창설자이기도 하다. 현대 이집트학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 대단한 지구력과 근면성을 가진 그는 특히 기자의 피라미드들에 관한 연구에서는 이후 모든 연구가 나아갈 바를 제시할 정도였다.

– 피라미드학 학자는 피트리의 변절로 인해 가장 큰 타격을 입었다. 피트리는 기술자이자 측량사로서의 경력을 지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초기에는 피아치 스미스를 비롯한 다른 조마르 후계자의 사상에 열광했었다.

– 진정한 의미에서 피트리가 쓴 첫 번째 책인 『대피라미드 연구』(Researches on the Great Pyramid, 1874)에서 피트리는 피아지 스미스를 조롱하는 사람들을 단호한 어조로 반박한다. 그러나 몇 가지 반대 의견도 있었는데, 예를 들어 영국인은 잃어버린 이스라엘 민족의 후손이라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 1875년~1880년 스톤헨지의 고적을 조사, 발굴했다.

– 피트리는 1880년에 최신 측량 기구를 가지고 이집트로 건너가 이전 측정치의 정확성을 몸소 점검했다.

– 대피라미드가 이후의 어느 건축물보다도 더욱 정확하게 나침반의 기본 방위에 따라 배치되었으며 내실의 치수는 파이π(22/7)와 피타고라스 삼각형에 관한 지식을 나타낸다고 주장했다. 대체로 그 역시 대피라미드 건축에 투입된 기술적 · 수학적 기량에 경탄했다. 다른 한편, 그는 건축에 사용된 큐빗의 길이에 관해 피아치 스미스와 의견을 달리 했으며, 그 건축물이 1년의 정확한 길이를 반영한다는 스미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 피트리는 기자의 피라미드들을 연구한 성과를 종합하여 『기자의 피라미드들과 신전들』(The Pyramids and Temples of Gizeh, 1883)이라는 책을 펴냈다.

– 피트리는 뛰어난 측량과 다양한 토기 양식을 순서대로 배열하는 유형학의 개발을 통해 이집트 고고학뿐만 아니라 모든 근대 고고학의 창시자가 되었다. 이후 그는 기사 작위를 받았으며 이집트학 학계의 일원으로서 학계에 필수불가결한 버팀목을 제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계는 결코 순탄치 않았다. 그는 학계 외부 기부자에게 힘입어 대학 교수직을 얻어야 했으며, 1942년에 오랜 생애를 마감할 때까지 학계 안의 외톨이로 남아 있었다.

– 그의 제자였던 하워드 카터(Howard Carter)는 투탄카멘 무덤을 발견한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가생이닷컴 운영원칙
알림:공격적인 댓글이나 욕설, 인종차별적인 글, 무분별한 특정국가 비난글등 절대 삼가 바랍니다.
 
 
Total 19,949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공지 [공지] 게시물 제목에 성적,욕설등 기재하지 마세요. (11) 가생이 08-20 83957
19760 [한국사] 대고구려제국(大高句麗帝國) 다큐 아비바스 09-03 1167
19759 [한국사] 고대 한국인, 예맥제국(濊貊帝國) (1) 아비바스 09-02 1285
19758 [한국사] 알려지지 않은 고조선(古朝鮮) 설들 아비바스 09-02 950
19757 [한국사] 역사 매국부역에 지분 태우지 말라 (1) 금성신라 08-23 1365
19756 [한국사] 태극기 민족 티벳 (충격) (6) 금성신라 08-23 2507
19755 [한국사] 400년전 보도검열 실태 ㄷㄷ (1) 금성신라 08-22 1391
19754 [한국사] 공험진을 반박할수없게되자 학계에서 뿌리는 요상… (4) 금성신라 08-22 1314
19753 [한국사] 고려의 국경 동계는 잠수함 감시용 해안초소인가? (3) 금성신라 08-22 1126
19752 [한국사] 강화도에 10만 인구가 38년간 거주한 흔적이 있능가? (4) 금성신라 08-21 1288
19751 [한국사] 노걸대 실로 놀라운 발음기록 ㄷㄷ (1) 금성신라 08-21 1037
19750 [한국사] 붓다 사카무니의 씨족명, 국명 금성신라 08-21 934
19749 [한국사] 금나라는 신라다 (2) 금성신라 08-21 1248
19748 [기타] 양심을 지키기 위해서 증조부의 비석을 파헤친 후손 관심병자 08-18 964
19747 [기타] 북한군이 촬영한 한국전쟁 관심병자 08-17 1449
19746 [기타] 대한제국의 황제 고종의 삶 관심병자 08-16 1119
19745 [기타] 세금 1억 들어간 춘향이 그림..여러분의 의견은 (4) 관심병자 08-03 2682
19744 [한국사] 미국 옥션에 나온 신라금관 Korisent 07-30 3414
19743 [기타] 무능했던 제국 그리고 시작된 관동군의 폭주(황고둔… (1) 관심병자 07-27 1637
19742 [기타] 칭기즈칸의 마음을 홀랑 빼앗은 고려 여인은 누구일… (7) 관심병자 07-27 2268
19741 [기타] 옛날 사람들도 봉급을 받았을까? 관심병자 07-24 1183
19740 [한국사] 동아게가 주의하고 싸워야할 점 (3) 하이시윤 07-18 1190
19739 [한국사] 서악 華山 이동과 馬邑山 즉 평양성 (2) 구르뫼 07-18 1439
19738 [한국사] 윤내현교수의 기자신고 요약 (9) 하이시윤 07-13 1506
19737 [기타] 한국사는 미스테리한 점이 많지요 (20) 관심병자 07-11 2389
19736 [기타] 잡설) 청동거울은 일반적인 거울이라고 보기는 힘들… (2) 관심병자 07-11 1345
19735 [한국사] 5백년전 명나라 지도, 明과 高麗 등 지명 분석 #대명… (5) 레종 07-09 2310
19734 [한국사] 정읍 시의원 - 중국 본토에서 삼국사기 백제의 정… (2) 조지아나 07-06 1711
 1  2  3  4  5  6  7  8  9  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