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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4-29 09:55
[기타] 고구려를 건국한 추모왕
 글쓴이 : 관심병자
조회 : 2,977  

고구려의 건국자는 동명성왕 혹은 고주몽으로 알고 있는데, 추모왕은 다른 사람인가?라고 의문을 품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 사람들이 직접 글을 쓰고 만든 「광개토대왕릉비문」에는 고구려를 건국한 분을 추모왕이라고 적고 있다. 주몽이란 말은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부여의 말이며, 추모왕의 별명과도 같은 말이다.

동명성왕은 후대의 존칭이며, 본래는 부여의 위대한 영웅 동명왕을 가리키는 말이다. 다시 말하자면 동명왕과 추모왕은 다른 인물이다. 동명왕은 부여의 북쪽에 있었던 고리국에서 태어나 부여를 건국한 사람이다. 서기 60년경에 쓰여진 『논형』이란 책에는 부여의 건국 시조로서 동명왕이 분명하게 보인다. 동명왕의 탄생 이야기는 추모왕의 것과 그 이야기 구조가 아주 유사하다. 물론 두 이야기의 원형은 동명왕 이야기다.

고구려 사람들이 추모왕을 존경하다 보니 부여의 영웅 동명왕의 이야기를 채용하여 추모왕의 이야기를 만든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가 부여를 능가할 국력을 갖게 되면서 고구려측의 이야기가 주로 전해지다 보니 부여의 동명왕은 잊혀지고 나중에는 동명왕이 곧 추모왕이라고 착각하여 『삼국사기』에서 ‘추모왕〓동명성왕’이라고 잘못 기록했던 것이다. 고구려 사람들은 동명왕이란 칭호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성스러운 임금인 동명성왕이라고 불러 그에 대한 최고의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추모의 출생지는 부여다. 물론 충남 부여는 아니다. 당시 부여는 만주 남부를 가로지르는 길림합달령과 동류송화강 사이에 있는 지금의 길림, 장춘, 농안을 중심으로 사방 2천 리나 되는 나라로 오랜 역사와 강력한 힘을 갖고 있었다.
부여, 고구려, 백제 시대 영토 지도
고조선이 멸망한 후, 동방지역 최강자는 부여였으며, 고구려는 소국에 불과했다.
추모의 어머니는 유화부인임이 분명하지만 아버지는 불확실하다. 대개 해모수라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정확한 것은 아니며 기록에 따라서는 단군으로 기록되기도 한다. 아마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추모가 부여의 왕인 금와왕의 궁궐에서 태어났다는 것뿐이다. 결국 유화부인은 금와왕의 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추모를 금와왕의 아들로 보기도 어렵다. 추모는 비록 부여의 왕자들과 함께 자랐지만, 금와왕이 정실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왕자들과는 다른 대우를 받았다.

부여는 유목국가의 특성을 많이 갖고 있는 나라다. 유목국가에서는 왕위 계승에 있어서 장남보다는 능력 있는 아들이 우선 선발되는 것이 보통이지만, 첩의 아들은 왕위 계승 문제에서는 철저히 소외된다. 유목사회는 일부다처제가 허용되고 재혼이 가능한 사회지만, 정실부인에 대해서는 확고한 지위와 권한이 보장되고 여성의 발언권도 강한 특성이 있다. 따라서 부여국에서 추모가 왕위에 오를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추모는 어릴 적부터 활을 잘 쏘고 재주가 많아 당시 부여에서 영웅, 훌륭한 전사를 뜻하는 영예로운 칭호인 주몽이란 말을 들으며 성장했다. 실력 있는 추모, 하지만 왕이 될 수 없는 추모. 이럴 때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다. 하나는 재주와 실력을 썩히며 그저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모험에 도전하는 것이다.

추모는 새로운 모험에 도전했다. 그것은 부여를 탈출해서 자신이 새로운 나라를 건국한다는 것이었다. 오늘날로 표현하면 벤처창업에 도전했던 것이다. 그의 도전정신이 곧 대제국 고구려의 시작을 가져온 것이다.

부여를 탈출한 이야기

이제 추모왕의 어린 시절과 그가 어떻게 부여를 탈출했는지를 살펴보자. 이 이야기는 고려시대 이규보의 작품인 『동명왕편』 등에 자세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추모는 외모가 영특하고 힘이 세었으며, 활 쏘는 재주가 뛰어났고, 다른 아이들과 달리 조숙한 면이 많았다. 부여의 금와왕에게는 대소왕자를 비롯한 일곱 왕자들이 있었는데, 추모는 이들과 사냥도 다니면서 함께 성장하였다.

부여 사람들에게 사냥은 매우 중요한 스포츠이자 생업이었다. 또한 평소에 전쟁을 준비하는 훈련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특히 귀족 자제들에게 사냥은 전쟁 지도자의 경험을 쌓게 해주는 것으로, 사내아이들은 어릴 적부터 사냥터에서 자신의 기량을 연마해야 했다. 사냥은 그저 혼자 활을 들고 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몰이꾼을 대동하고 짐승을 한 곳에 몰아넣고 결정적인 순간에 화살을 날려야 한다. 사냥은 곧 군사훈련이었다. 사냥실력은 젊은이들의 능력을 가늠하는 중요한 잣대였다.

어느 날 대소왕자를 비롯한 부여의 일곱 왕자들은 그들을 따르는 무리 40여 명과 함께 사냥을 나가게 되었다. 물론 추모도 사냥을 나갔지만, 대소왕자처럼 몰이꾼을 대동할 처지는 아니었다. 대소는 가장 많은 짐승을 잡아 왕에게 자신의 능력을 보여 주고 싶었다. 그런데 사냥의 결과는 대소의 기대와는 반대로 혼자 사냥한 추모가 최고였다. 대소왕자 일행은 사슴 한 마리도 잡지 못했는데, 추모는 홀로 많은 사슴을 잡았던 것이다. 대소는 장차 부여의 왕이 될 태자였다.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능력을 보여 준 추모에 대해서 시기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저 녀석이 우리의 사냥감을 모두 잡아가다니, 녀석을 그냥 둘 수 없다.”

평소에도 질투심을 느꼈지만, 이날의 사냥결과는 대소뿐만 아니라 다른 왕자들에게도 참을 수 없는 수모였다. 질투심에 대소왕자 등은 추모를 잡아서 나무에 묶어 놓고 사슴을 빼앗아서 궁궐로 돌아왔다.

그런데 더욱 대소를 질투심에 사로잡히게 한 것은 그날 밤의 일이었다. 사냥터에서 맹수들에게 잡아먹히라고 나무에 묶어 놓았던 추모가 놀랍게도 나무를 뿌리째 뽑아 등에 지고 궁궐로 돌아온 것이다. 대소는 추모의 이런 힘과 재주가 장차 자신의 장래를 위협할 것임을 느끼고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소는 아버지인 금와왕을 찾아갔다.

“대왕마마, 추모를 죽일 수 있게 허락해 주십시오. 놈은 힘이 귀신 같은 장사이고, 재주도 비상하여 만일 일찍 처치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뒷날 부여국 왕의 자리도 빼앗을까 두렵습니다. 부디 추모를 죽이거나 쫓아낼 수 있게 해주십시오.”

금와왕은 자신이 좋아하는 유화부인을 의식하고 있었고, 또한 재주 있는 추모를 아꼈기 때문에 쉽게 대소의 말을 듣지는 않았다. 하지만 왕위 계승권 문제로 대소와 추모간의 알력이 생긴다면 그것은 나라의 장래를 위해 불행한 일이 된다는 것을 금와왕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만약 대소 형제가 아닌 추모가 왕이 된다면 어찌될 것인가. 그렇다면 조상대대로 이어져 온 부여의 왕실이 다른 부족장들로부터 존경을 받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도 했다. 부여의 왕실이 내세울 수 있는 신성한 혈통을 훼손시키고 추모를 왕위에 올릴 수는 없는 일이다.

금와왕은 고심 끝에 추모로 하여금 말의 먹이를 주는 하찮은 일을 하도록 시키면서 그가 나라에 우환이 될 인물인지를 먼저 살펴보기로 했다. 추모는 대소가 밉고, 금와왕의 처사에도 속으로 크게 화가 났다.

추모는 어머니를 만나서 그동안 왕자들이 자신을 따돌렸던 이야기를 하였다.

“어머니, 대소를 비롯한 왕자들이 저를 못살게 굴고, 금와왕마저 저에게 말의 먹이나 주는 일을 시키시니 제가 부여에서 뜻을 펼치며 살아가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한평생 냉대를 받으면서 살 수는 없으니 차라리 부여를 떠나고 싶습니다. 남쪽에는 큰 나라가 없다고 들었습니다. 그곳에 가서 나라를 세워 뜻을 이룰까 합니다. 다만 어머님 걱정이 되어서 그 동안 함부로 할 수가 없을 뿐입니다.”

“그래 너의 뛰어난 재주가 부여에서 쓰이지 못하고 질투를 받는다면 이곳을 떠나야 할 것이다. 나는 걱정하지 말아라. 큰 뜻을 펼치려면 좋은 말도 있어야 하고 너를 도와줄 사람들도 있어야 한다. 남 모르게 준비를 해두었다가 때가 되면 떠나거라.”

추모는 이후 은밀히 부여를 떠날 준비를 했다. 마침내 오이, 마리, 협부 등의 벗들과 함께 부여를 떠나 새로운 땅을 향해 출발했다. 그러자 평소 그를 두려워하던 부여의 왕자들은 군사를 보내 뒤쫓았다. 추모가 엄체수에 이르렀을 때 앞에는 강물이 가로막히고, 뒤에서는 부여의 군사들이 추격해 왔다.

『동명왕편』은 이 대목에서 추모가 “나는 천제의 손자요 하백의 외손자인데, 지금 피난하여 여기까지 왔습니다. 하늘의 신과 땅의 신은 이 외로운 사람을 살리어 속히 배와 다리를 마련하소서”라고 말하고 활로 물을 치니, 자라들이 떠올라 와서 다리를 이루었다고 했다. 추모는 이리하여 건널 수 있었는데, 얼마 안 되어 쫓는 군사가 이르렀으나 강을 건너지 못했다고 했다.

이 내용은 추모가 엄체수에 이르러 유화부인의 가문, 즉 강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하백 집단의 도움을 받아 부여의 군사들을 따돌리고 남으로 도망칠 수 있던 사건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좀더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추모 일행은 단지 추모와 오이 등 몇 사람이 아니라, 부여에서 소외받은 상당히 많은 집단세력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들을 이끌고 추모는 남으로 내려오면서 자신과 함께 새로운 나라를 건설할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두드러진 인물은 모둔곡에서 만난 재사, 묵거, 무골 세 사람이었다.

이들은 고구려를 건국한 이후 중요한 일을 하게 되는 개국공신들이다. 추모는 이들과 함께 졸본천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게 되는데, 『삼국사기』에는 이때 추모의 나이는 22세였고, 기원전 37년이라고 적고 있다.

졸본부여를 장악하라

추모가 도착한 졸본천 주변에는 졸본부여라는 나라가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데 「동명왕편」에서는 추모가 어떻게 졸본부여를 처리하고 고구려를 세웠다는 기록이 없다. 추모는 어떻게 졸본 지역에서 왕이 되어 고구려를 세울 수 있었을까?

현재 졸본 지역에 남아 있는 무덤들은 고구려가 건국하기 전부터 내려오는 돌을 쌓아 만든 무덤인 적석총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만주 중북부에서 번성했던 부여국의 무덤은 토광묘라는 흙무덤이다. 만일 추모가 부여사람들을 이끌고 와서 졸본 지역 사람들을 굴복시키고서 나라를 세웠다면, 응당 무덤의 형식도 부여의 방식으로 바뀌어야 했을 것이다. 무덤을 만드는 것은 대개 자기 조상들의 형식을 따르는 상당히 보수적인 문화이기 때문에 한 지역에서 무덤의 변화는 곧 세력의 교체로 보기도 한다. 그런데 졸본 지역에서는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

왜 그럴까. 그것은 추모왕이 졸본 지역을 자신의 무리들을 이용해서 무력으로 정벌한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가 졸본 지역에 융합되어서 나라를 세웠기 때문일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추모가 졸본 지역에서 만난 운명의 여인 소서노를 떠올려 보자.

소서노는 졸본 지역의 유력자인 연타발의 딸로 우태와 결혼한 여인이었다. 그런데 우태가 일찍 죽어 비류와 온조 두 아들을 키우며 과부로 살았다. 그러다가 소서노는 부여에서 쫓겨온 추모와 만나 재혼을 했다. 추모는 부여에서 예씨부인과 이미 결혼한 적이 있었지만, 졸본 지역에서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재물이 많은 소서노의 도움이 필요했다. 추모는 소서노의 내조와 재물덕에 쉽게 나라를 세울 수 있었다.

다른 기록에는 소서노가 졸본 지역을 다스린 졸본부여의 공주라고도 한다. 졸본부여의 왕은 아들이 없고 세 딸만 있었는데, 추모가 보통 인물이 아님을 알고 둘째 사위로 삼았다. 졸본부여의 왕이 돌아가자 추모가 그 왕위를 이어받았다고 한다.

추모는 이처럼 외래인으로서 졸본 지역의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자신이 정당한 왕위에 올랐음을 과시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내세운 것이 자신이 물의 신인 하백의 외손이며, 하늘의 주제자인 천제의 아들, 혹은 천제의 아들인 해모수의 아들이라는 것이었다.

추모는 왕이 된 후,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고 했다. 하지만 새로 궁궐을 짓지 못하고 비류수 강가에 초막을 짓고 그곳에 거처했다. 처음부터 대단한 나라를 세운 것은 아니었다.

졸본 지역은 그 범위가 넓지 못했고, 주변에는 여러 작은 나라들이 있었다. 따라서 고구려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주변국과의 경쟁이 필요했다.
사신총 벽화
사신총 벽화학을 타고 하늘을 나는 신선의 모습. 추모왕, 해모수를 상징하는 듯하다.

비류국과의 대결

추모왕이 처음 고구려를 세운 곳은 대개 현재 중국 요녕성 환인시 지역으로 산들에 둘러싸여 있는 분지다. 환인 분지에는 압록강의 지류인 비류수가 평야를 적시고 있다. 살기 좋은 고구려와 인접한 세력으로는 말갈 부락과 비류국이 있었다.
환인시 오대산
환인시 오대산산 정상의 넓은 대지에 고구려의 첫 수도가 있었다.
추모왕은 나라를 세우자마자, 먼저 말갈 부락을 공격하여 감히 고구려를 공격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당시 말갈 부락이 어느 정도의 인구를 가진 세력이며 어디에 위치했는지는 알기가 어렵지만, 이들은 정착생활보다는 떠돌이 부락생활을 했던 사람들로 보여진다. 이들은 자신들에게 필요한 곡식을 얻기 위해 정착민들의 식량을 때때로 약탈하였다. 추모왕은 백성들이 농사에 전념할 수 있도록 약탈자를 퇴치하여 고구려인의 생업기반을 안정시켰다.

고구려가 성장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된 것은 비류수 강 상류에 인접한 비류국이었다. 추모왕은 그 나라의 허실을 탐색해 보기로 하고 사냥을 나가는 척하면서 비류국까지 행차했다.

비류국은 역사가 오랜 나라이며, 자칭 선인의 후손으로 자부하는 송양왕이 다스리고 있었다. 여기서 선인은 단군선인을 지칭하는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렇다면 고조선의 후예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부여의 한 갈래인 고구려와 비류국간에 문화적 차이가 존재했다.

추모왕을 만난 송양왕은 주변에 새롭게 등장한 고구려를 달갑게 여길 리 없었다. 송양왕도 고구려를 병합하여 큰 나라가 되고자 하는 욕심이 생겼다.

“이곳은 땅이 작아 두 임금이 있을 수 없고, 그대가 나라를 세운 지 얼마 되지 않으니, 나를 받드는 것이 옳지 않겠느냐?”

“나는 하늘 신의 아들이고, 송양왕 당신은 신선의 자손인데 억지로 왕이라 하니, 만약 나에게 복종하지 않으면 하늘이 그대를 벌할 것이오.”

추모왕과 송양왕은 날카로운 말다툼을 하고 난 후, 재주를 겨루어 누가 우월한지를 결정하고자 했다. 『동명왕편』에는 이들의 대결이 신들의 다툼처럼 재미있게 묘사되어 있다.

먼저 활쏘기 경기. 송양왕은 백보 거리에서 사슴의 배꼽을 쏘았으나 맞추지 못했다. 그렇지만 추모왕은 백보 거리에 옥반지를 걸어놓고 활을 쏘아 맞추었다. 옥이 깨지는 소리가 기와가 부서지는 듯했다. 활쏘기의 천재인 추모왕에게 송양왕은 상대가 되지 못했다.

하지만 송양왕은 자신의 나라가 오래되었다며 활쏘기 결과에 승복하지 않았다. 추모왕은 송양왕의 트집거리를 없애기 위해 고구려를 오래된 나라로 보이게 하려고 고민했다. 이때 충성스런 부분노가 나와서 아뢰었다.

“제가 대왕님을 위하여 비류국이 자랑하는 오래된 북과 나팔을 가지고 오겠습니다.”

“남의 물건을 네가 어떻게 가져오겠단 말이냐?”

“이것은 하늘이 내린 물건이니 어찌하여 가져오지 못하겠습니까. 대왕님이 만번 죽을 위태한 땅에서 몸을 빼와 천하에 이름을 날리게 되었으니, 이것은 천신께서 명령하시어 이루신 일입니다. 무슨 일이든 못 이루겠습니까.”

부분노는 두 사람을 더 데리고 비류국에 가서 북과 나팔을 훔쳐왔다. 추모왕은 북과 나팔을 검게 색칠해서 오래된 것처럼 해놓았다. 이를 본 송양왕은 감히 다투지 못하였다. 송양왕은 이번에는 누가 먼저 궁궐을 만들었느냐로 트집을 잡았다. 그러자 추모왕은 썩은 나무로 기둥을 삼아 천년이나 묵은 듯이 궁궐을 만들어 놓았다.

그렇지만 송양왕은 여전히 굴복하지 않았다. 추모왕은 마침내 송양왕을 굴복시킬 최후의 방법을 택했다.

추모왕은 흰 사슴을 잡아서 거꾸로 매달아 저주했다.

“하늘이 만약 비를 내려 비류국을 물바다로 만들지 않는다면 나는 참말로 너를 놓아주지 않겠다. 그러니 사슴아, 네가 고통을 면하려거든 하늘에 호소를 하여라.”

고구려 사람들은 사슴뿔이 하늘과 통하는 안테나라고 여겼던 모양이다. 사슴이 슬피 울어 추모왕의 청을 하늘에 호소하니, 소나기가 7일 동안 비류국에 내려 물바다를 만들었다. 추모왕이 오리를 타고 있다가 채찍으로 물에 금을 그으니 물이 줄어들었다.

이렇게 신통력을 발휘하자, 마침내 송양왕은 백성들을 이끌고 항복하고 말았다.

종교지도자 추모왕

『동명왕편』에 전해 오는 신화적인 이야기는 어느 정도의 사실성을 갖춘 것일까?

양국의 결전은 두 왕이 서로 누가 정통성을 갖고 있느냐는 명분상의 대립, 그리고 왕으로서 신령한 능력을 갖고 있느냐는 것을 통한 상호 실력 겨룸, 마지막에는 총력전을 펼쳐 고구려가 비류국을 정복하는 3단계 상황으로 구성되어 있다. 비류국을 물바다로 만든 것은 결국 고구려군이 비류국을 침입하여 항복을 받았다는 표현에 불과하다.

그런데 왜 『동명왕편』에서 이러한 양국의 관계를 신화처럼 다루었을까?

그것은 당시 고구려가 강대국으로 성장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국가 건설의 신성화와 시조의 신격화였기 때문이다. 고대사회에서는 종교지도자가 곧 정치지도자인 경우가 많다. 고구려에서 벌어진 가장 큰 축제이자 종교적 제전인 동맹행사는 왕이 전체를 주관하게 된다. 왕은 곧 대사제, 종교적 지도자다. 그것은 중국의 역대 왕들도 마찬가지다. 그들도 하늘에 제사 지내는 종교지도자에서 출발했다.

무력에 의한 복종보다는 마음으로 복종하는 것이 훨씬 강한 충성심을 유발한다. 물론 종교지도자만으로는 더 큰 집단의 지도자가 되기에는 부족하다. 집단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군사지도자로서의 능력과 정치력이 점차 중요해진다. 고대사회에서는 종교·군사·정치지도자의 면모를 고루 갖춘 인물이어야만 제대로 나라를 다스릴 수 있었다.

때문에 고구려를 건국한 추모왕도 이와 같은 면모를 갖추고 있다고 묘사된 것이다. 이 가운데 종교적 능력에 대해서는 후대로 내려오면서 과장되고 신성시되어 추모왕을 신의 경지까지 끌어올리게 된 것이다. 특히 천신의 아들(혹은 손자) 추모왕이란 믿음은 고구려인을 단결시키는 강력한 힘으로 전환되었다. 그것은 고구려인에게 선민의식을 심어 주기도 했다. 이스라엘인들의 선민의식이나, 한족들이 천명이 자신들에게 있다고 믿었던 것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추모왕에 관한 기록에는 신비로운 것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그 가운데 하나가 고구려의 첫 궁궐 건설에 관한 일화이다.

『동명왕편』에 인용된 『구삼국사기』에는 비류국을 굴복시킨 바로 다음달인 “7월에 검은 구름이 골령에 일어나서 사람들은 그 산성을 볼 수가 없었으며, 오직 수천의 사람 소리가 토목공사를 하는 듯이 들렸다. 왕이 말하기를 ‘하늘이 우리를 위하여 성을 쌓는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7일 만에 구름이 스스로 흩어지니, 성곽과 궁실, 누대들이 자연히 이루어져 있었다. 왕이 하늘에 절을 하고 나아가서 살았다”고 전한다.

이런 신비로운 이야기는 막상 고구려의 첫 수도인 오녀산성을 방문하고 나면 마치 사실인 양 느껴지기도 한다.

고구려의 첫 궁궐은 환인 분지에서 바로 올려다볼 수 있는 높은 산 위에 있다. 그곳에는 오녀산성이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고색창연한 자태를 여전히 과시하고 있다. 주변이 전부 절벽으로 둘러싸인 산 정상은 둘레 2킬로미터나 되는 넓은 평지를 이루고 있다. 백두산 천지를 닮은 것처럼 그 꼭대기에는 천지라고 이름한 연못 등에서 일년 내내 물이 끊이지 않고 솟아나오고 있다. 그 꼭대기에 왕궁이 지어졌던 것이다.
오녀산 정상에 위치하고 있는 천지
오녀산 정상에 위치하고 있는 천지
천연의 요새 오녀산. 환인 분지에서 오녀산 꼭대기를 우러러보면 자연스럽게 경외감이 생긴다. 어떻게 절벽 꼭대기에 궁궐을 짓고 성벽을 만들었을지 궁금하기조차 하다.

당시 고구려 사람들이라면, 오녀산 꼭대기에 사는 왕을 하늘의 자손으로, 또는 신으로 높게 받들 수밖에 없을 만큼 경외감을 가졌을 것이다. 이런 자연조건을 충분히 활용해서 추모왕은 자신이 신의 아들이며, 고구려는 신성한 나라라고 선전했다.
고구려의 첫 수도로 여겨지는 오녀산성 성벽
고구려의 첫 수도로 여겨지는 오녀산성 성벽

건국자의 임무

고구려가 건국할 당시 만주와 한반도 상황을 보자. 기원전 108년 위만조선이 초한지의 주인공 유방이 세운 한나라에게 멸망당한 이후 이 지역에는 강력한 국가가 없었다. 그저 작은 소국들뿐이었고, 있다면 그것은 추모왕의 모국인 부여국이다. 그러나 부여국은 한반도 북부 지역이나 남만주까지 세력을 뻗치지는 못했다. 오히려 한나라의 일개 군에 불과한 요동군, 현도군 등이 주변의 작은 나라들보다 인구도 많고 큰 힘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한나라는 동방 지역에 강력한 세력이 출현하는 것을 막기 위해 나라들간의 결속을 방해했다. 한나라에 대한 반감은 저항과 공격으로 나타났고, 그것은 곧 작은 나라들이 힘을 증진해 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이때 한나라 현도군에 대항하던 졸본부여를 기반으로 고구려가 새롭게 등장했던 것이다.

추모왕은 자신에게 주어진 역사적 과제를 알고 있었다. 그것은 고구려가 크게 성장할 발판을 마련하는 것과 고구려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일이었다.

추모왕은 송양왕을 굴복시킨 후, 비류국을 통합하면서 그 지역을 일컬어 다물도라고 했다. 다물도란 다물을 담당하게 할 기반이 되는 도시라는 뜻이다. 다물이란 순수한 고구려말로 옛 영토를 되찾자는 말이다.

“나는 천신의 아들이며, 물의 신 하백의 외손이다”라고 자기 정체를 확립한 추모왕은 “옛 고조선의 영광을 회복하고 강력한 대제국을 건설하자!”는 구호로써 고구려의 국가적 목표를 제시하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을 것이다.

고구려가 고조선을 계승하자는 의지를 가졌다는 것은 장천1호 벽화고분과 각저총 벽화고분에 그려진 그림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곰과 호랑이의 이야기가 그대로 담겨진 그림들은 고구려 사람들이 단군에 대해 친숙하게 여기고 있었음을 알려 준다. 추모왕이 ‘다물’이란 말을 내세운 것은 고구려의 땅이 과거 고조선의 영토에 속했기 때문이다. 그곳에 살던 사람들에게 고조선을 다시 부흥시키자는 구호는 한나라에게 짓밟혀 잠시나마 손상되었던 자존심을 회복하는 자극이 되었다. 또한 고구려라는 국가로 사람들을 모으게 하는 힘이 되었다.
각저총 벽화 씨름장면
각저총 벽화 씨름장면옆에 큰 나무가 그려져 있고, 좌우에 곰과 호랑이가 있다. 단군신화를 보는 듯하다.

전문 전투집단과 대외 팽창

요나라, 금나라, 청나라의 건국과정에서 보듯 대제국은 그 국가를 건국한 시조와 그 아들들의 시기에 급속한 영토 팽창의 과정을 겪으면서 시작된다. 대제국의 건국 초기에는 대개 군사집단이 권력을 잡게 된다. 즉 전문적 전투집단이 국가건설의 주역이 된다. 기업도 초기에는 영업파트가 관리파트보다 중시되며, 시장점유율을 급속히 높이는 과정을 겪으면서 대기업으로 성장하듯이, 국가도 비슷하다.

고구려 초기 이러한 역할을 맡은 집단은 대가()들로 이들은 농사를 짓지 않으며 앉아서 먹는 사람들이란 뜻을 지닌 좌식자()로 불렸다. 부여의 제가()들처럼 이들은 몸소 전투를 하는 무리들이고, 그 아래 신분인 하호()들은 그들을 위해 식량공급을 책임졌다.

이들은 아테네, 로마의 시민군처럼 전쟁을 책임지면서 정치도 담당하는 자들로 볼 수 있다. 고구려 초기에는 이들이 약 1만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고구려가 약탈경제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회·경제적 구조를 가졌음을 말한다. 만주족이 전문 전투집단인 팔기군을 육성하여 명나라를 멸망시켰듯이, 고구려도 이러한 전투집단을 바탕으로 세력을 키웠다.

이들 전투집단의 구성원은 조의, 선인으로 불리었다고 추측이 되지만, 아직까지 구체적인 논증은 되어 있지 않다. 다만 고구려 후기에 하급 관등인 조의, 선인은 관등체제의 분화과정으로 볼 때 고구려 초기에는 전투집단의 구성원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전투집단의 상층부를 이루는 지휘관은 형()이라고 불리운 듯하다. 형은 나중에는 소형과 대형, 위두대형 등으로 분화되어 고구려 관등의 주요 유형이 된다. 칭키스칸의 몽골제국에서도 어른, 지도자, 수장이란 의미로 형을 뜻하는 ‘아카’란 말이 사용되었다. 대왕을 칭하는 ‘칸’은 아니지만, 우구데이 가문의 쿠덴 울루스의 초대 쿠덴이나, 카사르 가문의 3대 이숭게가 동시에 아카의 칭호로 불렸으며, 몽골의 2대 칸인 우구데이(1229~1241) 치세에는 우구데이의 형이면서 실력자인 차가다이가 ‘차가다이 아카’라고 불렸던 바가 있다.

이처럼 지휘관인 ‘형’과 전투원인 ‘조의·선인’으로 구성된 전투집단은 고구려 건국 직후부터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이들 집단의 총사령관은 활쏘기를 비롯한 무예에 출중한 추모왕이었다. 무용총 벽화에서 보듯 말을 자유자재로 타면서 기마궁술에 능숙한 고구려의 군대는 보병전에 익숙한 주변 세력들과는 크게 차별되는 전투력을 가졌다.
무용총 수렵도
무용총 수렵도
전문적 전투집단은 전쟁이 있어야만 자신들의 부유한 삶과 지위가 보장된다. 전쟁에서 얻은 약탈물자와 인질은 그들의 재산을 늘려 주고, 생산을 담당할 노예를 갖게 해준다. 그러므로 이들은 평상시에 열심히 전투훈련을 하게 마련이다. 고구려인이 활을 잘 쏘고 힘이 세며 전투에 능하다고 한 것은 이들을 일컫는 것이다.

추모왕은 이들을 이용해 주변의 국가들을 정벌하기 시작했다. 말갈과 비류국을 공격하여 항복을 받은 후에도 고구려는 팽창정책을 지속했다. 뛰어난 군사지도자와 잘 훈련된 군대를 갖춘 고구려 앞에 주변의 여러 작은 나라들은 적수가 되지 못했다.

추모왕은 자신과 함께 부여를 탈출했던 고구려 건국공신인 오이와 비류국 정벌에 큰 공을 세운 부분노로 하여금 태백산 동남의 행인국을 쳐서 그 땅을 빼앗아 성읍으로 삼았다. 고구려를 건국한 지 불과 6년 만의 일이다. 이어서 4년 후에는 부분노와 혈연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이는 부위염을 시켜 북옥저를 멸망시키고 역시 성읍으로 삼았다.

추모왕은 건국 당시 주변의 여러 나라에 둘러싸여 옴짝달싹하지 못할 것 같던 고구려를 변모시켜 주변으로 팽창함으로써, 주변의 위치에서 중심의 위치로 고구려의 국가적 위상을 변모시켰다.

이러한 고구려의 변화는 구조조정을 눈앞에 둔 중소기업을 단번에 혁신시켜 성장성이 큰 첨단기업으로 변화시키는 과정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때문에 추모왕이 졸본부여국의 사위가 되어 왕위를 계승받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진정한 고구려의 건국자는 추모왕인 것이다.

신으로 섬겨진 추모왕

추모왕은 임금으로 있은 지 19년 만에 나라를 다스리는 것에 싫증을 느끼고 왕위를 아들 유리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고 그해에 나이 40세로 죽고 말았다. 39세에 죽은 광개토대왕처럼 무엇인가 아쉬움이 남는 죽음이었다.

그래서일까? 고구려 사람들은 그가 세상에 싫증을 느끼자, 하늘에서 황룡을 보내와 그것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믿었다. 고구려 사람들은 나라를 건국한 추모왕이 영원히 죽지 않고 천상에 계시다고 믿은 것이다.

천신의 명을 받아 나라를 세워 고구려인이 살아가야 할 방향을 가르쳐 준 위대한 신의 아들 추모왕. 고구려 사람들에게 추모왕은 신으로서 어머니 유화부인과 함께 매년 10월에 열리는 동맹행사에서 고등신과 부여신으로 받들어졌다.

「광개토대왕릉비문」 등에는 고구려가 천하의 중심이며, 최고의 신성한 땅이라는 표현과 함께 추모왕이 천제()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고구려가 하늘 신의 자손인 추모왕에 의해 세워진 국가라는 고구려인의 마음속에 깊숙이 자리잡은 자부심과 믿음의 표현이다. 고구려인에게 추모왕은 신성한 나라 고구려를 세웠으며, 고구려와 고구려인을 보호해 주는 수호신이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벤처창업가 추모왕 (인물로 보는 고구려사, 초판1쇄 2001., 3쇄 2007., 도서출판 창해)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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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닉호랭이 17-04-29 12:31
   
참고할것이 있다면 고구려 추모왕과 부여 동명성왕은 다른 인물이죠.

이 오류는 부여의 건국신화를 고구려가 그대로 배껴서 차용하면서 생긴 이름의 오류.

이것을 증명할 기록은 연개소문 장자인 연남생의 비문입니다.

고구려건 백제건 똑같은 날 동명왕에게 제사를 지냈죠.

우리는 백제가 고주몽에게 제사를 지냈다고 잘못 배워왔음.

고구려를 부정하면서 시작하고, 부여의 정통을 이은 백제가 그런 짓을 할리가 전혀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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