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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5-03 22:09
[기타] 독립군, 정치인 이범석
 글쓴이 : 관심병자
조회 : 4,607  

개화사상에 감화된 아버지 이문하는 집안의 노비들을 모두 해방시켰다.
그러나 당시 20여세 되던 노비 정태규(丁太圭)는 이범석의 집을 떠나지 않고 거주하고 있었다.
정태규는 어린 주인집 장남 이범석과의 정이 들어 집을 떠나기를 주저하였다 한다.
노비가 아닌데도 집에 두게 되어 지탄을 받게 되자 아버지 이문하는 정태규를 오씨 성을 쓰는 대한제국 육군 참령의 대대에 병사로 넣어 주었다.
정태규는 이후 박승환 대대의 전투병으로 근무하며 군복 차림으로 종종 이범석의 집을 방문하곤 했다.
1907년 자신을 친동생처럼 보살피던 정태규가 정미 7조약이 강요한 군대해산에 저항하다 참살당하는 것을 보고 이범석은 항일을 결심하고 16세이던 1915년 경성고보 3학년때 중국으로 망명했다.[4]
1907년 8월 1일 이토 히로부미의 지시로 군대 해산명령이 하달되었다. 구한국 군대 해산령에 불복한 박승환 대대장이 자결하면서 대대 병력은 서울 시내의 일본 군대에게 돌격하여 교전하였으나 사살되었다.
일본군은 경성의 민가에 무차별 난입하여 구한국 병사의 색출작업에 나섰고 이범석의 집에도 들이닥쳐 수색하였다.
그날 초저녁 병정이 쓰러졌다는 마을 주민들의 아우성소리를 듣고 누이 이씨와 함께 마을 어귀로 나갔다가 검은 바지에 붉은 동을 맨 군복차림이던 정태규의 시신을 발견하였다.
정태규의 처참한 시신을 보고 그는 복수심에 불타 배일사상(排日思想)을 품게 되었다. 그는 후일 이를 신의 계시인지도 모르겠다고 회상하였다.
소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그는 집안에 훈장을 초빙하여 한학(漢學)을 배웠다.
10세에 부친 이문하의 재혼으로 계모 김해 김씨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 뒤 20년 연하의 이복 남동생 이범혁이 태어났다.
유년기의 이범석은 천하에 둘도 없는 개구쟁이였으나, 그를 독립운동가로 키워 낸 것은 계모였다.[3]

소년기[편집]

계모 김해 김씨
개구쟁이였던 이범석은 장난기가 심하여 동네 아이들을 이끌고 다니면서 못된 짓을 골라하였다
말을 타고 마을 순시에 나선 일본인 순사를 향해 고무 새총을 쏘아 맞추어, 순사가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3] 말에서 굴러 떨어진 일본인 순사는 아버지 이문하를 찾아가 항의하였으나 아버지 이문하는 이를 무마시켰다.
곡식을 넌 멍석을 끌어다 물에 집어던지고 도망치기가 예사였으며, 하루는 암소에게 뱀을 밀어 넣는 바람에 암소가 길길이 뛰다가 죽는 사건이 일어났다.[3]
짖궂었던 그는 뱀을 맨손으로 잡아다가, 외양간의 다른 소들의 항문에도 뱀을 집어넣어 소들이 갑자기 쓰러져 죽게 만들었다.
소 주인은 즉시 아버지 이문하를 찾아가 항의했다.
말에서 굴러 떨어진 왜인 순사의 항의에도 눈 하나 끄떡하지 않던 아버지 이문하는 이번에는 아들을 향해 도끼를 집어 던졌다.[3]
남편의 도끼를 보고 계모 김해 김씨는 아들을 변호하던 중 아들을 감싸려 달려들었고, 도끼는 아들을 살려내기 위해 달려 든 계모의 무릎에 맞고 말았다.
이후 계모는 평생 다리를 저는 신세가 됐다.[3]
계모의 아들 사랑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한다. 가을이 되면 찹쌀로 떡을 빚어 이역만리 만주까지 독립운동에 겨를이 없는 아들을 찾아 나섰다.[3]
이후 이범석은 계모와 배다른 형제들에게 더욱 각별히 대하였다고 한다.
이범석은 만년에 집필한 자신의 저서 '우둥불'에서 개구장이였던 자신을 끝까지 믿고 신뢰한 계모 김해김씨에 대한 사모(思母)의 정을 구구절절이 회고하기도 했다.[3]
이범석에 의하면 계모 김해김씨는 인자하고 한문에도 능할 뿐 아니라 교양이 있던 분이라고 평했다.

청소년기[편집]

학창 시절[편집]

1910년 이범석은 경성부 장사동(長沙洞)에 있던 사립경성장훈학교(장훈고등학교의 전신)에 입학하였다.[5] 집에서는 훈장 대신 그의 외삼촌 이필승(李弼承)이 한학을 가르쳐 주었다.
종종 그의 집에 외삼촌 이필승의 동창이던 신익희(申翼熙)가 방문했다. 이범석의 회고에 의하면 신익희는 가끔 놀러와 자신을 안아주곤 했다고 회상하였다.
이범석에 의하면 신익희는 당시 무척 가난한 고학생이었다고 회고하였다.
그해 8월 한일 합방으로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아버지 이문하는 3, 4일간 단식하며 통곡하였다.
이후 아버지 이문하가 강원도로 낙향하게 되면서 집안을 따라 이사, 1913년 전학하여 강원도 이천의 이천공립보통학교(伊川公立寶通學敎)를 다니게[6] 되었다.
강원도에 있을 당시 그는 강원도 산골에 은신해 있다가 잡혀가는 의병들을 목격하였다.
그런데 의병들의 은신처를 밀고하거나 수색에 앞장서는 것은 일본인이 아니라 한국인 헌병보조원이었다.
그 중에는 무장해제 후 변절한 한국군도 있었다 하며, 이범석은 후일 헌병보조원들을 가리켜 개만도 못한 인간들이라며 개탄하였다.
'공을 세웠다고 어깨 밑에 빨간 사람 인(人)자 모양의 견장을 달고 우쭐대는 헌병 보조원들은 개만도 못한 인간'이라는 것이다.
1913년 3월 이범석은 이천공립보통학교를 상위권 성적으로 졸업했다.

고등학교 재학 시절[편집]

1913년 이범석은 집을 떠나 경성으로 유학,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추천으로 입학하였다.
이때 박헌영, 심훈 등을 만났고, 그들은 이범석의 동창생이 되었다.
경성고보 1학년, 2학년 재학 중 이범석은 명랑한 성격으로 교내 8선녀로 뽑히기도 했고, 경성 청년회관에 다니며 유도를 배웠다.
2학년 겨울 때에는 스케이트를 배우기도 했으며 경성고보 3학년 재학 중에는 글짓기에 흥미를 두었다. 3학년 재학 중 그는 학교에 한시(漢詩)를 지어 발표한 일이 있었는데, 글을 잘 지었던 그는 한문선생인 여자정 선생으로부터 칭찬을 듣기도 했다.
그는 늘 이범석에게 신동이라 칭찬하면서 앞날에 훌륭한 인물이 되라며 격려하였다.
경성고보 재학 당시 그는 일본인 학생들과 함께 등, 하교하였다.
일본인 재학생들은 그를 수시로 무시하였고, 3학년 1학기 초기에 사소한 말다툼이 감정이 되어 패싸움을 하였다.
교무실에 끌려간 그는 일본인 선생으로부터 성질이 야만스러워 남을 존경할줄 모른다는 모욕적인 꾸중을 듣게 되었다.
그 뒤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7] 수료하고, 이후 중국 항주체육학교를 졸업하였다.[7]
1914년부터 아버지 이문하에 의해 결혼이 준비되었다.
그는 1915년 당시 천안군 군수이던 김승현(金升鉉)의 딸과 약혼하였고, 1915년 가을 김씨와 결혼하여 서울에 집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부인과의 관계에는 관심이 없어 그가 중국으로 떠나면서 헤어졌다.
경성고보 3학년 재학 중이던[7]1915년 그는 일본 육군사관학교 진학을 꿈꾸었으나 성적이 좋지 않아 가망이 없었다.
1915년 여름 이범석은 금릉대학 재학 중 여름방학을 맞아 귀국한 여운형을 만났다.
어느날 그는 여운형을 찾아가 중국으로 망명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했고, 국내 학생들의 중국 망명을 주선하던 여운형은 그의 중국 망명 주선을 수락한다.
그는 강원도 이천의 집으로 내려가 아버지 이문하에게 중국 망명의사를 피력하였으나 아버지는 그가 장남이라는 이유로 망명을 만류하였고, 아버지는 중국 망명에 뜻을 둔 아들을 계속 설득하였다.

망명과 상하이 도착[편집]

1915년 여름방학이 끝나고 경성으로 상경할 때 아버지 이문하는 그에게 간곡히 만류하였다.
그는 공부에 전념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아버지를 안심시켰다.
출국 전 이범석은 아버지 이문하가 재산의 일부를 한성은행(漢城銀行)에 예금한 것을 확인, 아버지 이문하와 친분이 있던 한성은행장 한상용을 찾아갔다.
그는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한상용 댁을 수시로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이를 이용 한상용에게 집에서 전보가 왔는데 급히 토지를 매입하게 되어 돈을 출금하라는 전갈을 받았다고 하고, 돈 1,300원을 인출해왔다.
1,300원을 인출한 그는 여비를 넉넉히 마련하고자 누나 이씨의 집을 찾아갔다.
누나 이씨는 조선일보 사장으로 있다가 망명한 신석우(申錫雨)의 아내로, 남편의 뜻을 이해하던 누나는 자신을 찾아온 남동생에게 자신의 패물을 팔아서 마련한 돈 100원을 장만해주었다.
그는 '내가 떠난 후 1주일이 되기 전에는 절대로 집에 알리지 말라'고 애원한 뒤 이별하였다.
1915년 12월 하순 그는 이천을 떠나 영등포로 갔다.
이때 그의 친구 중 신필(申弼)만이 그를 전송해주었다. 여러 친구가 있었으나 그 중 비밀을 지킬 친구는 신필 한사람으로 본 그는 신필에게만 알리고 그에게 부모님에게 전하는 편지를 맡겼다.
일인학생을 가장하고 열차편으로 신의주에 도착, 압록강 철교를 도보로 건너 만주 안둥 현(安東縣)에 도착, 중국으로 망명했다.
안둥 현에 도착하여 중국인 옷으로 갈아입고, 고등학교 3학년 때 친구 이병삼(李丙三)에게서 배운 중국어를 구사하며 중국인으로 위장, 열차편으로 산해관, 봉천에 도착했다.
봉천의 고려 여관에서 여운형이 묵는 호실로 찾아가 해후했다.
그는 여비 부담을 우려하였으나 이범석은 여비가 있음을 알렸고, 그와 함께 남경으로 가는 차를 타고 이동했다.
그는 여운형에게 매부가 신석우임을 알렸고, 여운형은 신석우가 예관 신규식과 가까이 지낸다는 사실을 그에게 알렸다.
상해에 도착하여 매부(妹夫)인 신석우(申錫雨)를 찾아갔다.
그곳 불조계(佛租界)의 어양리(魚陽里)에서는 상하이 한인 지도자 신규식(申圭植)을 만났으며, 신규식의 집에 유숙하며 6개월간 항주(抗州)의 항주군관예비학교를 수료하였다.
신규식의 집에 유숙할 때 그의 집을 방문한 손문을 보게 되었다.

독립운동과 광복군 활동[편집]

독립 운동[편집]

사관생도 시절[편집]
이범석
1916년 이범석은 신규식의 추천으로 중국 국민당 정부의 총통 손문을 만날 수 있었다.
손문은 신규식에게 무슨 관계냐고 물었다. 신규식을 통해 손문에게 소개되었다.
손문은 그에게 "사관학교에서 공부하겠다니 일본에 대항해 싸울 용기가 있느냐?"고 거듭 물었고, 그는 손문의 천거로 손문이 혁명간부를 양성하던 운남육군강무학교 기병과에 12기로 입학하였다.
그는 일본 영사관 경찰의 눈을 피해 배달무(裵達武), 김정(金鼎), 김세준(金世晙), 최진(崔震) 등의 청년들과 함께 상하이에서 배로 홍콩, 통킹, 하노이를 거쳐 운남철도를 타고 운남강무학교에 도착했다.
입학 당시 길림성 출신으로 위장하여 입학하였으나, 신원조회에 문제가 발생하였다.
그러나 신규식과 손문의 추천으로 중국 윈난성의 독군(督軍) 당계요의 신원보증을 받아 연령을 2세 올리고 해외 화교 이국근(李國根)이라는 위장 명의로 중국군 정규사관학교인 운남 육군강무학교에 입교[1] 할 수 있었다.
당시 이범석 일행의 국적을 알던 인물은 당계요만이 유일했다 한다.
6개월간 신병교육 수료 후, 기병과에 편입하여 32개월간 훈련을 받았다.
육군강무학교 재학 중 그는 뒷날 중국군 장군 섭검영(葉劍英) 등을 만나 친분관계를 형성했다.
독군 당계요의 지시를 받은 강무학교장 정개문(鄭開文)의 특별 배려가 있었고, 그는 상하이를 떠날 당시 신규식의 훈시를 잊지 않고 운남강무학교 재학 중 학업에 정진하였다.
3학기 이후 부터는 계속 수석을 차지하였다.
축성학(築城學) 과목 당시 일본육군사관학교 공병과를 나온 유탁양(劉卓陽)이 강의 중에 '조선은 중국의 식민지였으며 현재는 일본의 지배하에 있다.
사람들은 술만 먹고 자포자기에 빠져 있다.'는 말을 듣자 울분을 느낀 그는 목합을 들고 일어섰다가 동료 최진이 꿇어 앉혀서 다지 앉았다.
그때 그가 들고 있던 목합은 신규식이 선물로 준 것이었다.
그 후 남에게 뒤쳐지지 않으려는 각오로 소등 시간 후에도 담요를 덮어 쓰고 공부하였다.
그는 반우들의 도움으로 불침번에게 발각되지 않아 처벌을 모면한 적도 있었다.
견습사관 시절[편집]
북로군정서 연성대장 시절
1919년 1월중국 운남 육군강무학교를 기병과를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수석졸업을 기념하여 기병과의 교관 서가기(徐家驥)는 자신의 이름중 「천리마(驥)」자 앞에 철(鐵)자를 덧붙여서 철기(鐵驥)라는 아호를 지어주었다.
육군강무학교 졸업 이후 이범석은 중국군 견습사관을 지냈고, 건해자(乾海子) 기병연대에 배속되었다.
4월, 견습사관 재직 중 국내에서 발생한 3.1 만세운동 소식을 접하였다.
그는 상급자를 거치지 않고 다섯 명의 한국인 견습사관들과 함께 독군 당계요를 찾아가 친람 서신을 상신했다.
그들의 한국 독립운동 참여 의사를 본 당계요는 그들의 뜻을 이해하고 상하이로 가는 여비를 지불해 주고 비자문제도 해결해 주었다.
곧 운남성을 출발하여 6월 상하이에 도착, 신규식, 이시영 등을 만났다.
임정 요인들은 그에게 임시정부의 군무처를 맡으라는 권고를 했고 이범석은 그 권고를 모욕으로 받아들여 항의했다.
그가 임정 군무처직을 사양한 것에는 상하이에서 발생한 파벌싸움에 실망한 것도 있었다.
2개월간 상하이에 체류하며 유격전투 준비를 한 후 나머지 네 명과 헤어졌다. 이시영 등의 추천으로 그는 1919년 가을 중국 상하이를 출발, 만주 신흥무관학교로 갔다.
만주 독립군 활동[편집]
이시영의 소개로 그는 만주 봉천성 유하현에 있던 신흥군관학교에 도착, 김광서(金光瑞), 신팔균(申八均), 지청천(地靑天)을 만났다. 1919년 가을부터 1920년 만주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으로 독립군을 양성하였으며,[7] 근교의 장작림 군벌의 영향으로 일본의 간접적 압력을 받아 고충이 심했다.
1920년 이범석은 길림성(吉林省)의 왕청현(汪淸縣)에 도착, 김좌진(金佐鎭) 장군이 이끄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에 가담하여 중대장으로 청산리 대첩에 참전했고 이어 사령관이 되었다.[7][8]
그해 초 그는 북로군정서의 무기 구입을 담당하였는데,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러시아를 떠나 자국으로 귀국하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주둔 체코 군대가 각자 자기가 소지한 무기를 팔겠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는 자신의 전재산과 교포들의 모금과 모금결사대의 활동의 성과로 체코군으로부터 다량의 탄환과 소포, 중기관총, 포탄, 화약 당을 사들였다. 무기를 대량으로 구매한 뒤 그는 사관생도들을 모집하여 군사훈련을 시작하였다.
1920년 봄 그는 소수의 병력으로 마적과 합세하여 훈춘의 일본영사관을 습격, 일본군의 러시아군 대토벌 작전을 입수했다. 일본군 13사단과 14사단은 러시아 군의 포로가 된 체코군을 석방한다는 구실로 남으로 진군하였고, 21사단은 토문강을 건너 북상하였다. 만주철도수비대는 송화강을 건너 서쪽으로 진군한다는 것이었다.
청산리 대첩[편집]
1920년 3월 그는 북로군정서 총사령관 김좌진의 부름을 받고 수천리를 도보로 강행군하여 왕청현(汪淸縣)에 있는 북로군정서로 가서 연성대장(硏成大長)으로 부임하였다.
이때 중국은 중일(中日) 외교상 부득이 독립군을 간섭하게 되자 길림성의 행정관장은 중국군 영장(營長) 맹부덕(孟富德)을 시켜 1923년 10월에 독립군 부대 및 항일 단체에 대하여 국도(國道)변에서 멀리 옮기라고 교섭함에 그들과 타협하여 앞으로 국내 진입전 전개에 편리한 장백산(長白山) 산속으로 이동해가기로 했다.
8월 23일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사관연성소(士官鍊成所) 학생 3백 수십명을 졸업시키고 그 중 150명과 사령부 경비대원 및 새로 모집한 병사들로 북로군정서 보병 1개 대대를 조직하여 이동했다.
9월 7일 이범석과 김좌진은 병력을 이끌로 청산리로 이동했다.
탄띠와 소총으로 무장 옥수수 가루와 콩가루로 만든 떡과 추위를 견디고 이동 중 천보산(天寶山) 근교에서 일본인 광산을 지키는 광산수비대대를 만났으나 더큰 적을 섬멸하기 위해 그들을 살려두고 진격하였다.
훈춘 일본영사관 습격 당시 도와주었던 마적 대엄귀(戴嚴鬼)의 연락과 정찰대의 보고로 일본군 동지대의 이동경로와 동정을 접하였다.
산맥을 타고 1개월간의 도보 이동으로 20년 10월 5일 길림성 화룡현(和龍縣) 삼도구(三道溝) 청산리(靑山里)에 도착하였다.
이때 북로군정서의 정보를 입수한 일본군의 토벌군이 청산리 주위를 포위하여 오자 북로군정서와 대한독립군은 임시 전투조직을 개편하고 총사령관 김좌진, 군정서 참모장 나중소(羅仲昭), 사령관 부관 박영희(朴英熙) 등으로 개편 편성되었으며, 이때 이범석은 다시 북로군정서 연성대장(硏成隊長) 겸 중대장이 되어 본대인 보병부대 1개 대대를 송림평의 진을 쳤다가 운평(白雲平) 숲속의 지형에 매복시켰다.
첩보원으로부터 왜병이 도착한다는 전갈을 받은 이범석은 산꼭대기에 올라 망원경으로 일본군의 이동을 지켜봤다.
정탐군을 보내 보병, 포병, 기병, 공병을 합친 병력이 1만 명으로 5만 대군의 선발대라고 하였다. 이범석은 근처 한인 교포와 사냥꾼을 모은 뒤 마을의 부녀자와 노인들에게는 독립군은 수가 얼마 되지 않고 총을 가진 병사 수가 적어서 몇안되고 굶주려 지쳤다 고 증언하도록 사전에 지시했다.
소총, 중기관총, 수류탄 80만발의 탄환을 집결한 뒤 10월 20일 새벽 그는 우진 이민화(李敏華), 좌진 한근량(韓根凉) 중우 진의 김동(金動), 중좌진의 이교성(李驕成)에게 각각 2백발의 탄환을 직접 분배하였다.
10월 20일 9시경부터 청산리 백운평에서 일군과 교전이 시작되어 그날 저물도록 격전을 전개하고 일본군의 선봉부대를 기습공격하여 섬멸시켰다.
오래된 말똥을 뿌린 뒤, 일본군의 척후병이 나타나 말똥을 채취하여 오래전에 지나간 것으로 알고 일본군 주력부대 5만이 골짜기에 다다랐을 때, 집중 사격을 가했다.
1차 선발대와 2차 선발대가 전멸하고 3차 선발대가 나타났다가 우왕좌왕 흩어질 때 이범석은 마상에서 독전 연설을 했다.
10월 21일부터 10월 23일 화룡현내 천수동(泉水洞), 어랑촌(漁郞村), 만록구(萬鹿溝) 등으로 부대를 이동하면서 일본군을 습격, 독립군 전사자는 20여명이었으나 일본군 수만명의 사상자를 내는 전과를 올렸다.

퇴각, 이승만과의 만남[편집]

청산리에서 성과를 올린 뒤 그는 따로 병력을 이끌고 갑산촌(甲山村)으로 이주, 새벽 2시에 천수동 골짜기에서 19사단을 공격하고 포로로 잡힌 독립군을 구출했다.
마록구(馬麓溝)에서는 2천 명의 군사로 2만 명의 일본군을 상대, 한인 교포들이 탄환과 물자를 수송하였고 90명의 독립군 전사자를 내고 2만 명의 일본군을 섬멸했다.
청산리 전투에서의 대승(大勝) 소식을 접한 이승만은 이후 매년 이범석과 서신 연락을 주고받았고, 선물과 피복을 보내 왔다. 1920년 이승만은 그에게 파커 만년필을 선물로 보내왔는데, "이제는 나도 전 세계를 향해 자랑할 밑천을 얻었소. 청산리 전투의 대승리로 거짓말을 하지 않고도 외교를 펼칠 수 있는 중요한 선전자료를 얻게 된 것이요.
청사에 길이 빛날 대첩을 이곳 동포들과 함께 충심으로 축하하는 바이오."라며 격려하였다.
1921년 1월 26일 간도참변의 참화를 피해 홍범도, 서일 지청천, 김좌진이 이끄는 독립군 연합부대는 러시아령 이만에 도착했다.[9]
이 연합부대는 러시아로 넘어오기 직전 홍범도대한독립군서일북로군정서, 신흥학교 교관 지청천, 광복단 등 몇 개의 부대가 모인 것이다.[9] 이범석도 이들을 따라 이만까지 갔다.
2월 말, 이들은 다시 아물 주 자유시(알렉셰프스크)란 곳으로 옮겨갔다. 새 무기를 받는다는 러시아측의 약속 하에 생명과도 같은 무기들을 죄다 반납한 채였다.[9]
러시아행을 탐탁해하지 않던 김좌진, 김규식, 이범석은 함께 가지 않고 되돌아왔다.[9] 덕택에 이범석은 21년 6월 자유시 참변의 화를 면할 수 있었다.
1921년 이승만은 그에게 서신으로 연락하였다.
이후 이승만은 그에게 유럽과 미국에 대외 선전, 홍보를 위한 자료를 요청하였고 이범석은 자료를 미국의 구미위원부로 발송했으며,
이승만은 그에게 계속 군사 자금과 독립군을 위한 피복과 가죽 옷을 발송해주었고, 이범석의 이동 이후에도 서신연락으로 소재지로 격려 편지와 군 자금, 선물을 계속 보내왔다.
이승만의 계속된 후원과 편지에 감격받은 이범석은 후에 그를 돕게 된다.

고려혁명군, 광복군 활동[편집]

부인 김마리아
이후 독립군 진영은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만주 밀산에 집결했다가 소비에트 연방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이범석은 소련으로의 이동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였다.
1922년부터 1925년까지 소련에서 소련합동민족군 연해주지구 지휘관으로 활동하고[8] 1923년 5월에는 김규식(金奎植), 고평(高平) 등과 함께 연길현(延吉縣), 명월구(明月溝)에서 고려혁명군(高麗革命軍)을 조직하여 수 년간의 실전 체험에서 그보다 진보적인 이념과 방법으로 통일성 잃은 산만한 행동을 집중, 체계화 하였으며 군사교육을 강화하였다.
고려혁명군 창설시 그는 기병사령(騎兵司令)이 되어 활약하였다.
그 후 만주, 노령(露領)등지를 전전하며 독립운동의 기회를 기다렸다.
소련 혁명전 참가하던 중 1921년 자유시 참변 이후의 소련의 대일본정책에 불만을 품고 다시 북만주로 돌아와 고려혁명군 결사대의 조직에 참여하고, 고려혁명군결사대 정치부원, 피복창 주임 등을 역임했다.
두 번째 부인은 이때 만난 러시아 여인으로 올레리아로, 시베리아의 톰스크에서 올레리아와 만나 동거하였다. 그러나 소련일본과 협정을 체결하면서 조선인 독립군에 대한 탄압이 계속되었고 그는 탄압을 피해 중국으로 가야 했다. 헤어진 후 1925년무렵 올레리아의 xx 소식을 듣고 통곡하였다.
한편 이때 만나서 함께 이동한 1925년 8월 러시아로 귀화한 교포 경주김씨 김미하일로비치의 딸인 김마리아와 결혼하였다. 이후 소비에트 연방 붉은 군대의 한국 독립군 무장해제에 반대하였다.
그러나 소련 톰스크에서 일시적으로 감금되어, 억류 생활을 하였다.
1926년 4월, 감금 8개월만에 부인 김마리아와 함께 톰스크를 탈출하였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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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3 [기타] 왜의 실제 위치, 왜 어디에 있었나 (6) 관심병자 12-10 1868
19872 [한국사] [FACT] 황현필 - 드라마에서 다루지 않은 거란의 1차 … 아비바스 12-02 1470
19871 [한국사] [FACT] KBS 호평일색 "고려거란전쟁" ‘역사고증에 첨단… 아비바스 12-01 1662
19870 [한국사] [FACT] 역사유튜버 글림킴, 규원사화 원문 번역문 아비바스 11-29 1356
19869 [한국사] 고려영토 논란 종결. 지도, 고려사<고려거란전쟁?>… (9) 하늘하늘섬 11-27 2617
19868 [한국사] 우리가 몰랐던 사실 탐라와 임나가라. "왜국은 대방… (1) 하늘하늘섬 11-27 1264
19867 [한국사] 놀라운 사실! 대륙백제! 요서백제. 최초백제는 북경… 하늘하늘섬 11-27 1433
19866 [한국사] 100년 전 지도에 표기된 고려 지명 (1) 하늘하늘섬 11-27 1299
19865 [한국사] 거란군을 궤멸시킨 귀주대첩, 그 역사의 현장은 어디… (1) 하늘하늘섬 11-26 1261
19864 [기타] 흑룡강을 국경으로 그린 조선의 고지도 (2) 관심병자 11-26 1426
19863 [기타] 우리가 알고있던 고려영토는 가짜 관심병자 11-26 1148
19862 [한국사] [FACT] 역사학자 임용한, 침착맨 "전쟁사에 대한 오해… 아비바스 11-26 759
19861 [세계사] [FACT] SBS - 과학박사 궤도가 다룬 영화 오펜하이머 아비바스 11-26 679
19860 [세계사] [FACT] 문화평론가 이동진, 영화 오펜하이머 다루다. 아비바스 11-26 617
19859 [한국사] [FACT] 캘리포니아 석사 썬킴, 정형돈 - 해병대는 왜 귀… 아비바스 11-26 628
19858 [한국사] [FACT] 역사학자 김재원, 정형돈 - 한국사 희대 매국노,… 아비바스 11-26 599
19857 [한국사] [FACT] 역사학자 임용한, 정형돈 한국사 훑어보기 아비바스 11-26 514
19856 [한국사] 번조선의 반역자 5명이 받았던 봉지封地는 어디인가 (1) 하늘하늘섬 11-25 452
19855 [한국사] 새로운 광개토대왕비 탁본, 프랑스서 발견 Korisent 11-25 622
19854 [기타] [고증甲]프로 불편러들 때문에 사라졌던 고구려모드 … (1) 아비바스 11-25 538
19853 [기타] 일본, 중국, 한국의 고조선에 관한 역사기록들 검토 관심병자 11-24 538
19852 [기타] 식민사학자들의 임나일본부의 허구 (1) 관심병자 11-24 475
19851 [기타] 거란족, 거란 8부의 기원 관심병자 11-24 529
19850 [한국사] [FACT] 우리나라 사극에서 병력 고증 불가능한 이유 (1) 아비바스 11-24 491
19849 [기타] [FACT] 우리나라 사람이 병력 수에 둔감한 이유 아비바스 11-24 382
19848 [세계사] [FACT] 인류 최악의 선동꾼 "요제프 괴벨스" / 거짓말도… 아비바스 11-24 352
19847 [세계사] [FACT] 파멸을 위한 교육 : 2차 세계 대전 시절. 디즈니… 아비바스 11-24 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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