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는 백은(白銀)의 시대라고 합니다.
16세기 동서양에서 모두 비슷한 시기에 막대한 양의 은이 생산되었고, 이 은이 다시 동양과 서양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무역거래를 하는 상호간의 주요 결제 수단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스페인 제국의 성장은 신대륙에서 생산된 막대한 양의 은을 기반으로 한 것인데, 근세 시기의 일본의 급격한 성장 기반은 일본에서 채굴, 제련된 막대한 양의 은이었다고 합니다.
일본의 유명한 이와미 은광은 16세기 초에 개발되었다고 하는데 이 은광을 놓고 일본 각지의 무장들이 전쟁을 벌였고, 차지한 쪽이 일본의 패권을 두고 유리한 고지를 점하였으며, 산출된 은으로 서구 국가들과 무역을 하여 화승총을 들여오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 은광은 주코쿠 지방의 패권을 차지한 모리 모토나리에게 넘어갔다가, 후에 일본을 통일한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사실상 관리하며 임진왜란 때에는 전쟁 군자금을 이 은광에서 충당했다고 합니다.
문제는 일본이 은광에서 은을 채굴해도 은 제련 기술이 없어서 은을 채굴한 후 조선으로 가져와 은을 제련 받아가곤 했는데, 이 기술이 바로 세계 최초로 조선에서 개발된 '연은분리법(鉛銀分離法)'이며 기존의 은 제련술보다 더 효율적으로 막대한 양의 은을 생산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조선 실록(연산 9년),
김감불과 김검동이 납으로 은을 불리어 바치다.
양인(良人) 김감불(金甘佛)과 장례원(掌隷院) 종 김검동(金儉同)이, 납[鉛鐵]으로 은(銀)을 불리어 바치며 아뢰기를,
"납 한 근으로 은 두 돈을 불릴 수 있는데, 납은 우리 나라에서 나는 것이니, 은을 넉넉히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불리는 법은 무쇠 화로나 남비 안에 매운재를 둘러 놓고 납을 조각조각 끊어서 그 안에 채운 다음 깨어진 질그릇으로 사방을 덮고, 숯을 위아래로 피워 녹입니다."
사실 1560년대에 세계 은 산출량의 80프로를 차지했던 스페인의 중남미 백은은 '수은 아말감법'이라는 제련 기술로 생산되었는데, 이 기술은 중남미 인디오 800만명(...)을 중독시켰던 치명적인 수은가스를 배출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조선의 '연은분리법'은 상대적으로 안전했던 최첨단 은 제련술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첨단 기술이 어떻게 조선 남동쪽 섬의 인디오들에게 유출이 되었느냐...
조선 실록(중종 34년),
유서종[전주 판관]이 범한 죄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왜노(倭奴)와 사사로이 통해서 연철(鉛鐵)을 많이 사다가 자기 집에서 불려 은(銀)으로 만드는가 하면 왜노에게 그 방법을 전습하였으니, 그 죄가 막중합니다. 철저히 조사하여 법대로 죄를 정하소서.
(네...그러하다고 합니다)
이렇게 조선에서 유출된 은 제련기술로 일본은 임진왜란•정유재란 시기를 포함해 1560년에서 1640년 사이에 세계 은 생산량의 1/3을 차지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