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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5-15 02:54
[기타] 원균
 글쓴이 : 관심병자
조회 : 3,371  

본관은 원주()이고, 자는 평중()이다. 무과에 급제한 뒤 조산만호()가 되어 북방에 배치되어 여진족을 토벌하여 부령부사(使)가 되었다. 전라좌수사에 천거되었으나 평판이 좋지 않다는 탄핵이 있어 부임되지 못했다. 1592년(선조25) 경상우도 수군절도사에 임명되어 부임한 지 3개월 뒤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왜군이 침입하자 경상좌수영의 수사 박홍이 달아나버려 저항도 못해보고 궤멸하고 말았다. 원균도 중과부적으로 맞서 싸우지 못하고 있다가 퇴각했으며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이순신에게 원군을 요청하였다. 이순신은 자신의 경계영역을 함부로 넘을 수 없음을 이유로 원군요청에 즉시 응하지 않다가 5월 2일 20일만에 조정의 출전명령을 받고 지원에 나섰다.

 5월 7일 옥포해전에서 이순신과 합세하여 적선 26척을 격침시켰다. 이후 합포해전·적진포해전·사천포해전·당포해전·당항포해전·율포해전·한산도대첩·안골포해전·부산포해전 등에 참전하여 이순신과 함께 일본 수군을 무찔렀다.

1593년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자 그의 휘하에서 지휘를 받게 되었다. 이순신 보다 경력이 높았기 때문에 서로 불편한 관계가 되었으며 두 장수 사이에 불화가 생기게 되었다. 이에 원균은 해군을 떠나 육군인 충청절도사로 자리를 옮겨 상당산성을 개축하였고 이후에는 전라좌병사로 옮겼다.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 때 가토 기요마사가 쳐들어오자 수군이 앞장서 막아야 한다는 건의가 있었지만 이순신이 이를 반대하여 출병을 거부하자 수군통제사를 파직당하고 투옥되었다. 원균은 이순신의 후임으로 수군통제사가 되었다. 기문포해전에서 승리하였으나 안골포와 가덕도의 왜군 본진을 공격하는 작전을 두고 육군이 먼저 출병해야 수군이 출병하겠다는 건의를 했다가 권율 장군에게 곤장형을 받고 출병을 하게된다. 그해 6월 가덕도해전에서 패하였으며, 7월 칠천량해전에서 일본군의 교란작전에 말려 참패하고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이억기 등과 함께 전사하였다. 이 해전에서 조선의 수군은 재해권을 상실했으며 전라도 해역까지 왜군에게 내어 주게 되었다. 그가 죽은 뒤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이 다시 수군통제사에 임명되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1603년(선조 36) 이순신·권율과 함께 선무공신 1등에 책록되었고, 숭록대부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원릉군()이 추증되었다. 선조가 그를 선무공신으로 책록한다는 '원릉군 원균 선무공신 교서'는 보물 제1133호로 지정되었다. 이 교서는 왜적을 격퇴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한 데 대하여 공을 기리고 포상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어 그를 새롭게 평가할 수 있는 자료가 된다. 묘소는 경기도 평택시 도일동에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원균 [元均] (두산백과)



원균은 폄하 된 장수입니다.

원균이 사후 1등 선무공신이 된 이유는 선조의 편애뿐만 아니라 원균 휘하에있던 부하들이 원균의 억울함을 탄원했기 때문입니다.

이순신과 사이가 좋지 않은 라이벌 이었던것과 유성룡의 파벌과 대립했던점이 원균을 깍아내리게된 이유였습니다.

이순신이 대단한 장수였던것은 맞으나 그게 원균이 최악의 장수라는건 아닙니다.

이순신과 권율은 유성룡 파벌의 군인이었습니다.

원균은 이순신과 대립했지만,

이순신이 파직되고 투옥된건 모함때문이 아니라 명령불복종 때문입니다.

이순신이 백의종군할 시기에는 삼도수군통제사라는 직책에도 불구하고 권율에게 부하들이 보는앞에서 얻어맞고 억지로 출전한후 패전하고 전사하게 되었습니다.

이당시 원균의 건의는 육군과 해군의 동시 작전이었고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강압적으로 해군 단독으로 출전하게 된겁니다.

왜수군 1000여척과 안골포에서 왜군의 육지의 포격을 받아가며 수군 단독으로 싸우라는 무리한 명령이었습니다.

유성룡, 이순신, 권율은 서인으로 분류되는 집단이었고,

원균에 대해 기록한 세력 역시 서인이었습니다.

서인과 대립한 원균에 대해 좋게 기록할리가 없죠.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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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당자강 17-05-15 03:17
   
옛다 관심.........
dfafadfa 17-05-15 03:23
   
그러시구나...
피의숙청 17-05-15 04:44
   
아~ 그렇구나 관심이 필요하면 말하지ㅋㅋ
그노스 17-05-15 04:44
   
이 당시 원균의 건의는 육군과 해군의 동시 작전이었고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강압적으로 해군 단독으로 출전하게 된겁니다.

//////////

원균을 지지하던 윤근수(서인입니다...)가 조선 수군이 거제 앞바다로 나가 수로를 장악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선조를 위시한 대다수 조정 대신들이 그것에 동조하니, 이순신 장군이 반대하며 육군•수군 합동 작전을 촉구했습니다.

이런 이순신 장군을 향한 비판에 특히 앞장 선 것이 서인입니다. '유성룡, 이순신, 권율이라는 서인(?)으로 분류되는 집단'(?)들이 끼리끼리 봐주고 한 것이 아니라...

그리고 이런 조정의 분위기를 파악하고 고니시 유키나가가 경상우병사 김응서와 왕래하던 요시라를 시켜 조선 수군을 끌어낼 거짓 정보를 조정에 흘린 것이지요.

문제는 원균 장군이 '수군이 출동해서 부산 앞바다에서 무력 시위를 한다면 수전에 약한 가토 기요마사가 그냥 물러날 것'이라는 식의 상소를 이순신 장군보고 보란듯이 조정에 올렸다는 것입니다.

이순신 장군에 대한 선조의 불신이 극에 달해 있을 때, 이러한 원균의 상소는 선조가 원균이라는 대체 카드를 뽑게 만들며 선조의 이순신 장군 숙청에 일조합니다.

정작 원균 장군은 자신이 통제사에 오르자 돌변해 육군•수군 합동작전을 주장합니다...

무리한 공명심 때문에 원균 장군 스스로 자기 발목을 잡은 것입니다.
     
그노스 17-05-15 12:58
   
논란이 있는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 모두에서 원균의 공과는 별개로 그의 잘못을 기록한 대목을 아래에 인용해 봅니다.

<선조실록 27권, 선조 25년 6월 28일 병진 4번째기사>

좌수사(左水使) 박홍(朴泓)은 화살 한 개도 쏘지 않고 먼저 성을 버렸으며, 좌병사(左兵使) 이각(李珏)은 뒤이어 동래(東萊)로 도망하였으며, 우병사(右兵使) 조대곤(曺大坤)은 연로하고 겁이 많아 시종 물러나 움츠렸고, 우수사(右水使) 원균(元均)은 군영을 불태우고 바다로 나가 다만 배 한 척만을 보전하였습니다. 병사와 수사는 한 도(道)의 주장(主將)인데 하는 짓이 이와 같으니 그 휘하의 장졸(將卒)들이 어찌 도망하거나 흩어지지 않겠습니까. 양산(梁山)의 가장(假將) 밀양 부사(密陽府使) 박진(朴晉)도 창고와 병기(兵器)를 불태우고 도망하였습니다.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 5월 1일 경신 20번째기사>

전라 수군 절도사 이순신(李舜臣)이 경상도에 구원하러 가서 거제(巨濟) 앞 나루에서 왜병을 격파하였다. 왜병들이 바다를 건너오자 경상 우수사 원균(元均)은 대적할 수 없는 형세임을 알고 전함(戰艦)과 전구(戰具)를 모두 물에 침몰시키고 수군 1만여 명을 해산시키고 나서 혼자 옥포 만호(玉浦萬戶) 이운룡(李雲龍)과 영등포 만호(永登浦萬戶) 우치적(禹致績)과 남해현(南海縣) 앞에 머물면서 육지를 찾아 적을 피하려고 하였다.

운룡이 항거하여 말하기를 ‘사또가 나라의 중책을 맡았으니 의리상 관할 경내에서 죽는 것이 마땅하다. 이곳은 바로 양호(兩湖)의 요해처로서 이곳을 잃게 되면 양호가 위태롭다. 지금 우리 군사가 흩어지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모을 수 있으며 호남의 수군도 와서 구원하도록 청할 수 있다.’ 하니, 원균이 그 계책을 따라 율포 만호(栗浦萬戶) 이영남(李英男)을 보내 순신에게 가서 청하게 하였다.

<선조수정실록 31권, 선조 30년 7월 1일 경인 2번째기사>

당초 원균이 한산도(閑山島)에 도착하여 이순신이 세워 놓은 규약을 모조리 변경시키고 형벌에 법도가 없어, 군중의 마음이 모두 떠났다. 권율은 원균이 적을 두려워하여 머뭇거린다고 하여 불러 매를 쳤는데, 원균이 분한 마음을 품고 가서 마침내 수군을 거느리고 절영도(絶影島)에 이르러 제군(諸軍)을 독려하여 나아가 싸우게 하였다. 적은 아군을 지치게 할 계책으로, 아군의 배에 가까이 접근하였다가 문득 피하였다.

밤이 깊어 바람이 심하게 불어서 우리 배가 사방으로 흩어지자, 원균은 남은 배를 수습하여 가덕도(加德島)로 돌아왔는데, 사졸들이 갈증이 심하여 다투어 배에서 내려 물을 먹었다. 그러자 적이 갑자기 나와 엄습하니, 원균 등이 황급하여 어찌할 줄을 모르고 급히 배를 이끌고 퇴각하여 고성(固城)의 추원포(秋原浦)에 주둔하였는데, 수많은 적선이 몰려와 몇 겹으로 포위하였다.

----------

실록의 다른 기록을 보면 원균도 분명 공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훗날의 그의 죄가 그의 공적과는 비교도 안되게 너무나 크고 뚜렷하니 1등 공신 책봉이 적절한지 모르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선조가 원균을 1등 공신으로 책봉한 것은 선조 자신이 결코 틀리지 않았다는 주장을 표하기 위한 선조의 정신승리로 봅니다.
선조의 요동 도주 계획으로 인해 동인, 서인 가리지 않고 대신들에게 군주의 몸으로 '필부' 소리까지 들었으니...

원균이 사후 1등 선무공신이 된 이유는 선조의 편애뿐만 아니라 원균 휘하에 있던 부하들이 원균의 억울함을 탄원했기 때문이라고 보시는데,

실록을 보면 선조가 대부분 원균을 감싸주는 부분이 보이고, 또 원균의 부하들이 원균의 억울함을 탄원했다는 것이 그다지 이상하게 들리지 않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상관의 공적이 인정이 되야지 그 직속 부하들의 공적이 인정되므로...

덧붙이자면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는 그가 후세에 그의 치적을 전하려고 한 기록이 아니라 그의 개인적인 사생활까지 솔직하게 기록한 그의 일기이므로 저는 난중일기에서의 원균에 대한 인물평을 크게 불신하지는 않습니다.
mymiky 17-05-15 08:24
   
저기요!

류성룡은 동인 (동인이 남/북 분화 후 남인)에 속합니다
이순신은 당파는 없었지만 류성룡과 친분이 있었고요

선조실록은 광해군때 북인정권이 썼는데 편파적이라 해서
인조반정 후 서인정권이 선조수정실록을 편찬합니다.

원균은 서인들과 친분이 있었는데?
서인들이 나쁘게 쓴거다? 말이 안 됩니다
내일을위해 17-05-15 11:28
   
원균이 평가절하된건  맞습니다.  당시 배를  버리고  달아난 박홍이나 다른 장수들의 언급은 잠시 나오는 반면 원균은 지속적으로 나오면서 악의 축을 담당하죠. 분명 이순신보다 능력은 떨어진  인물일지모르지만 현  평가처럼 악의축으로 평가받을  인물은  아닙니다.  원균의 상소로 이순신이 파직되었다?  아니죠. 선조의 질투와 아집, 열등감에 의한 파직이죠.  이순신대원균이 아니라  이순신대 선조로 가야맞는거라봅니다.
버드나무 17-05-15 11:30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읽어보고 느낀 점인데, 난중일기 내용의
40%가 전투, 전략, 전술에 관한 내용.
30%가 기타 전반적인 내용.
10%가 몸이 아프다거나 사적인 내용.
10%가 류성룡에 대한 신뢰와 친분에 관한 내용.
10%가 원균을 원망하는 내용.

난중일기를 읽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류성룡에 대한 절대적 신뢰와 원균에 대한 절대적 불신이 노골적으로 표현되어 있다는 사실을 느낄것입니다.

원균의 후손들이 원균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하겠지만,
분명한 역사적 사실은 원균은 무능했고, 오판에 의해 조선군에 막대한 손실을 입힌 장수입니다.
신립이 지정학적 잇점을 버리고 무모하게 정면 대결로 정예 육군을 괴멸시키는 오판을 한것처럼
원균도 정면 대결을 피하고 왜군을 유인해야 했슴에도 무식하게 정면 대결로 조선 수군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습니다.
관심병자 17-05-15 11:44
   
원균에 대한 인물 묘사는 '선조실록'과 후세의 '선조수정실록' 에서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선조실록 내용에서는
'이기고 싸운 공은 이순신과 같은데 그의 공을 오히려 이순신이 가로챘다'고 기록되있고

선조수정실록에서는
유성룡이 쓴 '징비록'에서 원균이 간사하여 이순신을 모함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선조수정실록을 쓴 서인들은 원균을 서인들이 몰아냈던 북인 계열로 보고 있습니다.
지금 전해지는 인물평가는 공기록인 '선조실록'보다 유성룡 개인의 '징비록'에 기록된 내용이죠.
당시 백성들도 말할수있는 입이있고, 임금도 들을수 있는 귀가 있습니다.
원균의 억울함을 호소한 부하들은 해전 초기부터 참여해서 이순신과 마지막까지 해전을 치루고 살아남은 수군들입니다.
당시 조정의 주도세력의 눈밖에 났지만 1등공신이 될수 있었던건 능력이 있었고 전과가 있었다는 걸로 생각합니다.
     
TheCosm.. 17-05-15 15:22
   
기록의 변경 여부만 바라보고 있을 뿐, 정작 그 기록이 적혀있던 상황을 무시하시는 것 같습니다.
우선 '이기고 싸운 공은 이순신과 같은데 그의 공을 오히려 이순신이 가로챘다.'라는 점은 매우 우스운 부분입니다.

임진왜란 초기 원균 장군이 이순신 장군과 합류하면서 몇 척의 전선과 병력을 데리고 온 줄 기억하십니까? 본인이 탄 1척과 오는 길에 합류한 몇 척을 더한 게 전부입니다. 결국 임진왜란 당시 왜의 수군과 다툰 것은 전적으로 전라좌수영과 우수영이 주력이된 병력이었습니다. 이런 기본적인 조건에서 원균 장군이 이순신 장군과 동일한 공을 세웠다? 아무리 군사방면에 무지하다고 쳐도, 그럴 수가 없다는 걸을 인지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차라리 상대적으로 온전하게 함선을 이끌고 합류한 전라우수영이 더 공이 높았으면 높았을 것입니다.
          
촐라롱콘 17-05-15 16:10
   
TheCosm님 댓글에 동의하면서.....

임란발발 당시 편제상으로는 경상우수영이 수군 군영들 가운데 전선과 병력규모면에서
가장 규모가 컸습니다. 전라좌수영을 비롯한 타 수영들에 비해 2배에 달하는 규모였고
전선 100여척에 병력수 1만여 명에 달할만큼... 이는 당시 조선전체 수군규모에서도
1/3에 해당하는 규모였음에도 불구하고....

왜선들이 아직 경상우수영 인근에 출몰하기도 전에 지레 겁부터 집어먹고
많은 병선과 무기,물자를 폐기하고 단 몇 척의 초라한 규모의 전선만 이끌고
경상우수영관할 끝인 곤양앞바다까지 후퇴하여 전라좌수영에 구원을 요청하는 꼴이라니...

물론 임란 발발당시 조선의 수많은 육군병영과 수군병영에 편제된 병력수와 무기-물자,
전선의 숫자라는 것이 당시로서는 서류상에만 존재하는 규모였던 점들을 감안한다 해도~

반면 이순신의 전라좌수영 관할 병력과 전선 규모는 서류상으로도 거의 차이나지 않을 만큼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으니.... 그것도 전라좌수사 부임이후 1년 정도의 기간안에.....

육군병영과 수군병영 통틀어 서류와 일치하는 병력과 무기-장비를 갖춘 군영이 통틀어
몇 군데 정도만 되었어도 임란 초기에 그토록 허무하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물론 임란당시 싸워보지도 않고 도주하기에 급급했던 수령방백들이 수없이 많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당시 조선의 지방관-무관들 가운데 원균이 상대적으로 그리 떨어지는 인물은
아니라고 할 수 있지만....

이순신과 비교하면 넘사벽일 정도의 졸장에 불과하다보니~~~
남아당자강 17-05-15 12:17
   
언제쯤 원균에 대한 이런 잡소리를 안듣게 될려나......
하얀그림자 17-05-15 17:28
   
이순신이 출정명령을 거부하고 있을 때
원균이 저는 할 수 있어요....라는 식의 상소를 올렸죠

전시 명령불복종은 지금도 즉결입니다 걍 쏴죽여도 됩니다
근데 그 시기 신하가 군주의 명을 거부합니다
나아가 싸우라는데 싫다고 그럽니다
그 군주 자신은  땅끝까지 도망도 갔었습니다
근데 백전백승하는  신하
이순신이  감히 자신의 명을 거부했을 때
자존심 자격지심 열등감 수치심 범벅이 되었겠죠
근데 그 때  선조의 심중을 알아 챈 북인의 공작이었는지
아니면 원균의 자의적 판단이었는지 몰라도
나는 할 수 있어요.....라는 의미의 상소를 올리는데
이것은
선조가  이순신 옷을 벗길 명분을 주는 겁니다
원균의 상소는 일종의 친위시위죠
현실( 현재의 이순신은 연승의 대체불가 장수다)과 율법(유교적 질서)이 괴리(이순신의 명령불복종)된 전시의 급박한 혼돈 상황 속에서
원균이 이순신의 대안이 될 수 있다면 
선조는 자신의 정적?
이순신의 불충을 당장 징계하도록 명을 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원균의 상소는 당시 당파적 반대를 위한 반대이자 주도권 다툼의 하나였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즉  선조를 수행하는 북인 계열이 원균에게  " 꼰대한테 메일 하나 보네라"고 찔렀을 겁니다
마치 동인 김성일이가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와서는 전쟁이 날것 같지만 서인 황윤길이 전쟁날것 같다고 했음으로
자신은 반대로 말했던 것처럼 말이죠

이순신도 서인입니다
최소한 서인의 은혜로  빠른 진급을 할 수 있었죠
원균은 동인에서 파생된 북인입니다

원균은 왜  상소와는 반대로  권율에게 쳐맞을 때까지 출정하지 않았을까요?
쓰라고 해서 썻지만 막상 와서 보니 그게 아니거등....

권율에게 원균이 맞아서  억지로 출정했다는 건 말이 안됩니다
애초에  원균 자신이 나는 할 수 있다라고 했기에
삼도 수군 통제사가 된거죠
권율탓이 아니라
귀책사유는 자신에게 있는 겁니다

대책없는  무뇌아들은 지금도 많습니다
공약남발하는 정치인들....

어따대고 원균을 이순신 장군에 비교하는지....
저도 유성룡 디따 욕하는 사람이지만
이순신장군  구하고 키워준건 잘한 거라고 생각함
     
남아당자강 17-05-15 17:37
   
서애 류성용선생은 서인이 아니라 동인.... 그중의 남인에 속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순신 장군께서는 동인의 지원을 받았고, 원균은 윤두순의 서인에게서 지원을 받았습니다. 원균은 자신이 속한 서인에게서도 배척을 받은 졸장중의 졸장이였어요. 도저히 실드가 불가능하니까 자신이 속한 정파에서도 배척을 받은......
          
하얀그림자 17-05-15 17:54
   
그렇습니까?^^ 배운지 너무 오래되서  기억의 오류가 생겼나 보네요
제가 말하고 싶었던건  원균의 상소는  당파적 배경과  선조의 열등감이 맞아 떨어져서
이순신 파직의  시/발점이 됬다는 의미입니다
즉  원균의 상소가 선조에게 힘을 실어주엇다는  의미입니다
지적 감사합니다^^
다음 부터는 불확실한건 검색해보고  기재하겠습니다
               
남아당자강 17-05-15 18:27
   
가끔 권율이 곤장을 쳐서 어쩔 수 없이 부산포로 나갔으니 권율이 원흉이라고 몰고 가는 사람들이 있더군요. 애시당초 이순신 장군을 경계하는 선조를 부추긴 원균의 찌질함은 생각지도 않고 말입니다. 아무튼 선조나 원균을 옹호하는 사람들이나.........
남아당자강 17-05-15 17:48
   
https://namu.wiki/w/%EC%9B%90%EA%B7%A0

원균이 얼마나 개망나니 였는지......
관심줄께 17-05-15 18:04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영웅문 17-05-15 19:27
   
당시 조선의 무관 중에 이순신장군이나 이억기장군을 제외하고는 제대로 된 무장이 없었죠.
수많은 무장중에 원균은 평균이상이었죠.
이순신장군이 너무 뛰어나서 평가절하됐을뿐이죠.

다만 현재의 우리군 장군들 중에 과연 원균정도의 인물이라도 될 장군이 몇이나 될런지 의문입니다.
     
남아당자강 17-05-15 23:01
   
평균이상????? 위에 링크나 한번 보세요. 개쌍놈중에 그런 개쌍놈 없습니다.
     
자기자신 17-05-16 02:33
   
전쟁터지자 모든무기들하고 판옥선등 전선들을 모조리 바닷속으로 수장시킨 인간이 평균이상? 웃고 갑니다
푸른마나 17-05-18 22:24
   
역사책에 나온내용을 보면 원균은 육상전투는 어느정도 한걸로 보이지만 해상전투는 이순신이 지휘할때 수하무장으로 참여한 해상전 빼고는 직접 지휘한 마지막 해전에서 대패하고 전사하죠..한마디로 능력이 없으면서도 지위를 탐해 나라를 더 위기속으로 몰고간 인물이죠.. 뭐 그렇다고 해도 나라의 위기속에서 항복하지 않고 일본과 맞서 싸운 용기만큼은 인정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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