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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5-15 12:54
[기타] 신라김씨는 선비족 모용씨(鮮卑族 慕容氏)의 후예인가?
 글쓴이 : 관심병자
조회 : 2,311  

서기 342년 겨울, 「半흉노」의 일파인 鮮卑族 모용황은 5만5천의 군대를 이끌고 두갈래길로 고구려 수도 환도성을 공격했다. 험준하고 좁은 산악길인 南路에 4만을, 평탄한 개활지 길인 北路엔 1만5천을 투입했다.

 

거꾸로 수비병력의 전부를 北路방어에 쏟았던 고구려 는 허를 찔려 환도성이 불태워져 초토화되였고, 미천왕의 무덤 도굴. 미천왕비 주씨와 고국원왕의 왕비가 볼모로 잡혀가고 5만의 고구려인들 포로로 압송당함. 고구려는 무려 13년 동안이나 고초를 겪어야 했다.

반면 장사와 왕우의 지휘로 北路로 신성을 향했던 선비족 기마군단 1만5천은 고구려 고무장군에 의해 모두 죽은 것으로 기록됐다.

 

그러나 그때 그들 가운데 일부가 고구려軍에 쫒겨 들어간 곳이 지금의 新羅였고(선발대의 장군은 모미추(慕味鄒)였다. 삼국사기는 미조(味照)라 했고 삼국유사는 미추(味鄒)라고 쓰고 일명 미조(未租)라고도 썼다) 그들이 왕권을 찬탈했고, 그들 사이에 분열이 일어나 또 하나의 무리가 가야(나아가 왜국)까지 진출했다는 가설이 있다. 「신라 법흥왕은 선비족 모용씨의 후예였다(풀빛출판사)」KBS 장한식 기자

 

 

서기 381년(내물왕 26년) 신라는 북중국의 유목민족 국가 前秦(전진)에 사신을 보낸다. 삼국사기에는 이때 전진의 황제 符堅(부견)과 신라 사신 衛頭(위두) 간의 대화가 기록돼 있다.

<부견이 위두에게 묻기를 『그대의 말에 海東(해동:신라)의 형편이 옛날과 같지 않다고 하니 무엇을 말함이냐』고 하니 위두가 대답하기를 『이는 마치 중국의 시대변혁·명호개역과 같은 것이니 지금이 어찌 예와 같을 수 있으리오』라고 하였다. (符堅問 衛頭曰, 卿言海東之事, 與古不同, 何耶, 答曰, 亦猶中國 時代變革 名號改易, 今焉得同)>

 

 

이 기록에 대해 지금까지는 신라가 내물왕 (356-402)들어 나라가 크게 발전했음을 보여주는 답변이라고 풀이해 왔지만 시대변혁·명호개역은 단순히 나라의 체제가 정비된 수준을 넘어선다. 이전까지의 昔(석)씨 임금 시대가 끝장나고 외부세력이 정권을 장악해 모든 면에서 과거와 완전히 다른 나라가 됐음을 내포한 말로 해석할 수 있다. 사실 내물왕 이후 昔(석)씨는 신라 역사의 주류에서 사라진다. 왕은 물론 왕비나, 재상, 학자, 장군 가운데서 昔씨는 찾아볼 수 없다. 이는 내물왕 집권기에 昔씨가 철저히 제거됐음을 암시한다.

 

 

1. 법흥왕의 창씨개명-본명은 慕秦(모진) (모용→모)

 

 

신라 법흥왕에게는 두 개의 姓(성)과 이름이 있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4권 법흥왕의 기록을 보면

-법흥왕이 즉위하니 이름은 원종이다. 『책부원구란 옛 책에는 성은 募(모), 이름은 泰(태)라 했는데, 태는 遺事(유사:책 이름) 王曆(왕력)에는 秦(진)이라 돼 있다』 지증왕의 원자로서 어머니는 연제부인이요 왕비는 박씨, 보도부인이다. (法興王立, 諱原宗『冊府元龜, 姓募名泰, 泰, 遺事王曆作秦』, 智證王元子, 母延帝夫人, 妃朴氏 保刀夫人)>

 

 

金씨로 알고 있는 법흥왕의 성과 이름을 이런 식으로 표기하고 있는 사례는 삼국사기뿐만 아니고 중국의 다른 역사서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저술하면서 법흥왕 김원종의 성과 이름을 募泰(모태) 또는 募秦(모진)으로 괴상하게(?) 적고 있는 고기록의 출처를 밝혀두었다.

 

 

姚思廉(요사렴)이란 당나라 학자가 쓴 梁書(양서)에는 신라 법흥왕이 즉위 8년, 서기 521년 중국 강남에 자리잡고 있는 漢族의 나라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친 사정을 기록하면서 신라 임금의 성은 「募(모)」요 이름은 「秦(진)」 이라고 적고 있다.

 

 

이연수란 당나라 학자가 편찬한 南史(남사)란 역사책에는 법흥왕의 성을 「募(모)」 이름을 「泰(태)」로 기록하고 있다. 秦과 泰는 글자 모양이 비슷하기 때문에 梁書(양서)의 기록을 南史(남사)에서 옮겨 적다 오기한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중국역사서 通典(통전)에는 법흥왕의 성명을 「慕秦」으로 적고 있다. 梁書와 南史에서는 법흥왕의 성을 「모을 募」로 쓴 데 반해 통전에서는 「사모할 慕」를 쓴 것이 차이점이다.

태평어람의 신라왕 누한(樓寒) -누한은 내물왕으로 전해지며, 당시 그의 성 역시 모(慕)씨였다.

 

 

법흥왕 때까지 중국 역사서에서 신라 왕姓을 金(김)으로 기록한 사례는 없다.

신라 왕의 姓을 金으로 적고 있기는 법흥왕을 뒤이은 진흥왕 때부터이다.

진흥왕이 在位(재위) 25년(서기 564년) 北齊(북제)에 사신을 보냈을 때 중국 역사서 北齊書(북제서)는 신라왕의 성명을 「金眞興(김진흥)」으로 적고 있다. 중국 史書에서 신라 왕의 姓을 金씨로 기록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또 隨書(수서)에서 「수나라 문제 14년(서기 594년, 신라 진평왕 16년) 신라왕 金眞平(김진평)이 사신을 보냈다」고 기록하는 등 564년 이후에는 신라 왕의 姓을 金으로 분명히 적고 있다.

 

이후 가야 좌지왕(坐知王)도 김(金)이라는 성으로 바꿨다고 전해진다

 

 

법흥왕은 모진과 김원종 두 개의 성명이 전해지는 반면, 진흥왕은 金으로 시작하는 이름뿐이므로 법흥왕 시절 창씨개명이 단행됐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신라기사관련 중국의 양서 원문]

 

 

梁書 新羅者 其先本辰韓也 辰韓亦曰秦韓 相去萬里 傳言 秦人避役 來適馬韓(另條見前) 馬韓 割其東界居之 辰韓始有六國 稍分為十二 新羅其一也 其國在百濟 東南 東濵大海 南北與句驪 百濟接 魏時 曰新盧 宋時曰新羅 或曰 斯羅(南史同) 國小 不能 自通使聘 普通二年 王名 募秦(按 南史 通志 太平御覽 皆作姓慕 名秦 通考 引梁史 亦同且云 未詳 易姓之由 新羅 金姓相承已久 不應于梁時 忽稱 姓慕 考 中國人本稱秦人 此慕秦二字 當為書語 非姓名也) 始使使 隨百濟 奉方物『양서(梁書) 』

 

 

“신라는 본래 그 선조가 진한辰韓이다. 진한辰韓은 또한 진한秦韓으로도 부른다. {양나라와} 서로 만리가 떨어져 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진秦나라 사람들이 부역을 피해 마한(다른조에서 이미 보았다)에 찾아오자, 마한은 그 사람들에게 동쪽땅을 떼어 주어 살게 하였다. 진한辰韓은 처음에 6개국이었는데 점차 갈라져 12개국이 되었다. 신라는 그 중 하나이다. 그 나라(신라)는 백제의 동남에 있다. 동쪽 끝은 대해이다. 남과 북은 고구려 백제와 접한다. 위魏나라 때는 신로, 송宋나라 때는 신라 혹은 사라(남사와 같다)로 불렀다. 나라가 작아서 스스로 사신을 보내 조빙할 수 없었다. 

 

보통普通 2년 이름이 <모진募秦 >인 왕(살피건대 남사 통지 태평어람 모두 성이 <모慕>, 이름이 <진秦>으로 기록되어 있다.  통고 通考 에는 양사梁史를 인용하면서 ‘또한 이와 같다’ 라고 하였는데, 성이 바뀐 연유를 자세히 모르겠다. 신라는 <김>씨가 왕위를 계승한지 오래되었는데, 양나라에 이르러 갑자기 성을 <모慕>이라 하니, 고찰해 보건대 중국인을 본래 진인秦人이라 부르는데 이 <모진慕秦> 두 글자는  책에서 그렇게 되어 있으나 당연히  성명은 아니다)이 처음으로 백제를 따라 사신과 방물을 보냈다.”고 되어 있다.

 

 

 

법흥왕의 성을 모(MO)로 적고 있는 사례가 국내 문헌에서도 발견됐다.

 

 

1988년 경북 울진군 봉평리에서 발견된 「봉평 신라비」는 법흥왕 즉위 11년, 서기 524년에 세운 비석이다. 여기서는 법흥왕을 「牟卽智(모즉지)」로 적고 있으니 牟는 성이요 卽은 이름 智는 존칭이다(씨?). 봉평 신라비에는 모두 35명의 이름이 나오는데, 임금 모즉지를 비롯해 葛文王(갈문왕:신라 왕족) 牟心智(모심지), 비문을 적은 牟珍斯利公(모진사리공), 비문을 조각한 牟利智(모리지) 등 4명의 이름이 「牟」로 시작되고 있다. 그렇다면 「牟」를 姓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姓을 쓰지 않고 이름만 기록했다면 이렇게 여러 사람이 같은 글자로 시작할 리 없다.

 

 

모(용)씨란 기마민족의 성을 버리고 중국식 金씨 성을 취한 배경은 殉葬(순장)의 금지(법흥왕의 아버지 지증왕 때 일), 율령제 실시, 불교 公認 등을 통해 기마족의 나라 신라를 농경문화민족으로 바꾸고자 했던 법흥왕의 개혁정책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시조가 나라를 창건한 이래로 나라 이름을 아직 정하지 못한 채 사라라고 부르기도 하고, 사로라고 부르기도 하였으며 또는 신라라고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저희들은, "신(新)"은 덕업이 나날이 새로워진다는 뜻이요, "라(羅)"는 사방을 모두 덮는다는 뜻이므로 "신라"를 나라 이름으로 삼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예로부터 나라의 군주를 살펴보면, 모두 "제(帝)"나 "왕"으로 칭호를 삼았는데, 우리 시조가 나라를 창건하고 지금까지 22대가 되도록 오직 방언으로 왕호를 삼았을 뿐 아직도 존귀한 칭호를 정하지 못했으니, 이제 여러 신하들이 한 뜻으로 삼가 "신라 국왕"이라는 칭호를 올립니다."왕이 이를 따랐다.)--지증왕

 

 

신라 金씨왕 뿐만 아니라 금관가야 金씨왕, 나아가 5세기 초 일본열도에 거대한 고분을 조성하는 왜국왕들도 선비족 모용씨의 일파로 보고 있다.

 

 

新撰姓氏錄(신찬성씨록)이란 일본의 옛 책에는 수로왕으로 보이는 임나(=가야) 임금의 성명을 牟留知(모류지)로 적고 있으니 신라 법흥왕의 성명 牟卽智(모즉지)와 통한다. [삼국사기]에 호족들에게 시해당한 백제의 문주왕부터 동성왕까지 성씨가 모씨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김수로왕은 서기 42년 시기로 선비족이 경주지역으로 유입된 324년보다 훨씬 이전 시기로 신나라가 말한 이후 중국에서 한반도로 이주해 온 김일제 동생의 후손이 맞다고 할 수 있고, 개로왕의 동생 문주왕에서 일본열도에서 건너온 곤지왕의 아들 동성왕이 선비족일 이유가 전혀 없으니 기록된 내용은 잘못된 기록이거나 오류라 할 것이다.

 

 

그러나,분명한 사실은 신라.가야.일본열도의 적석목곽분의 주인은 324년 고구려군에게 쫓겨 동해안을 따라 경주로 들어온 흉노계 선비족이라는 사실이다. 이들 선비족이 3-4세기 경주.김해.일본열도지역 적석목곽분의 주인공들이며, 신라와 가야지배자들이며,백제세력이 유입되기 전까지 일본열도를 지배한 세력들이다. 분석정리/윤복현

 

 

 

2.慕容씨가 신라 지배층이었다는 또다른 증거로 慕容씨의 시조신화와 신라의 시조신화-건국신화가 유사한 점을 들 수 있다.

 

 

 

3.엉성한 왕의 계보

 

내물왕은 미추왕의 조카이자 사위인데 미추왕은 284년에 숨진다. 그 사위 내물왕은 402년에 숨진다. 장인과 사위의 사망 연대가 1백18년이나 차이날 수는 없다. 또 제3대왕과 14대 임금은 둘 다 儒理(유리), 또는 儒禮(유례)로 그 이름이 똑같다.

국사를 편찬한 김씨 왕족이 자신들의 조상이 昔씨 왕실을 몰아낸 사실을 숨기려고 昔씨 임금으로 이어지는 계보 한가운데 미추왕을 끼워넣다 보니 이같은 엉성한 王曆(왕력)이 나왔다고 여겨진다.

 

 

장한식님은 '신라 법흥왕은 선비족 모용씨의 후예였다.'라는 책에서 339년 고구려를 침공한 전연의 모용황의 부대 중 일부가 남하하여 신라로 간 것으로 주장하는데 이 주장을 받아들일 경우 262년 즉위한 미추왕은 김씨일 수가 없다. 이 경우 미추왕은 연대가 조작된 것일 수가 있다. 339년에서 내물왕이 즉위한 356년까지의 일정 기간 재위한 왕이라고 봐야 한다.

 

 

삼국사기에는 박혁거세가 居西干, 3대 유리왕부터는 尼斯今, 내물왕 시대부터는 麻立干으로 적었다. 今(금), 干(간)이란 호칭은 흉노-알타이 계통의 부족장, 제사장, 또는 왕을 가리킨다. 尼斯今은 제사장적인 성격이 강한 부족연맹체 시대 신라의 맹주를 이르는 호칭이고, 麻立干은 왕권이 강화된 고대 신라의 왕이라는 의미이다.

 

 

내물왕은 삼국유사에선 麻立干, 삼국사기에서는 尼斯今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金氏王族의 실질적인 中始祖라고 볼 수 있는 내물왕이 이사금 시대에서 마립간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왕이었다는 암시이다.

 

 

17대 내물마립간(356~402)은 고구려를 침략했던 전연의 북흉노- 선비계가 정권을 빼앗았다가,18대 실성마립간(402~417)은 중국 신나라에서 망명해온 김알지 후손 남흉노 -선비계로 넘어 갔다. 그러다가 19대 눌지마립간(417~458), 20대 자비마립간(458~479),21대 소지마립간(479~500 )은 전연계가 이어 간다.

 

그러다 22대 지증왕(500~514)때에 이르러 완전히 한국식 법제와 토대를 구축하게 된다.이때에 완전히 외부계 일반 백성들이 선비어를 졸업하고 한국어를 사용하게 된 듯 보인다.

후에 모용진(모진)은 법흥왕 김원종으로 개명하여 박씨,석씨와같은 성을 따르게 되었다.

 

 

 

4.신라고분의 변천

 

 

신라지역에서 신라 이전의 무덤양식은 여느 지역의 변천과 동일한 양상을 보인다. 초기의 지석묘(고인돌), 굴장(굴안에 매장 또는 유기), 옹관묘(옹기를 관대신 사용), 토광묘 (청동기시대 후기부터 초기 철기시대에 걸쳐 발달한 움무덤)으로 구분이 된다.

 

·석곽묘-미추왕릉 지구와 같이 2×1×0.6m(깊이) 정도 크기의 석곽으로서 냇돌로 벽을 쌓고, 천장은 판석을 몇장 덮었으며, 봉토 주위에는 호석열이 돌려져있다.

이 석곽묘는 확실히 경주 지구에서 가장 오랜 무덤 양식이라고 생각되지만, 적석목곽분이 보급되고 있을 때도 일부에서도 계속 건설된 양식이다.

 

적석목곽분이전 낙랑형 토광목곽분이었으나 전승되지 않았고, 이후 횡혈식석실분으로 그 형태가 바뀌게 되었다.

 

 

 

5.적석목곽분(돌무지 덧널무덤)

 

 

적석목곽분이란 시신을 木槨 안에 넣고 그 위에 냇돌을 쌓은 다음 흙으로 반구형(半球形) 봉분을 만든 무덤이다. 나중에 세월이 지나 木槨이 썩어 무너지면 적석 중앙 부분이 함몰되어 낙타 등처럼 되고 냇돌이 무덤을 메워 도굴을 방지해 준다.

 

 

원래 북방 초원(스텝) 지역에서는 유력자가 죽으면 그가 생전에 살던 통나무집을 돌과 흙으로 그대로 덮어버린다. 그래서 스텝지역의 적석목곽분을 파보면 난방시설의 흔적도 남아 있고 심지어 창문도 발견된다.

땅을 파고 안에 흰 자작나무로 통나무집을 만들고(지하로 6∼7미터의 땅을 파고 그 안에 대형 목곽을 설치한 쿠르간도 있음) 시체와 부장품들을 안치한 후에 위에는 상당히 많은 돌로 둘레를 쌓고(護石) 흙으로 커다란 봉분을 만드는 북방유목민족의 무덤

 

 

적석목곽분은 4세기 무렵 즉 나물왕대에서부터 6세기 지증왕대에 이르는 마립간 시기의 묘제(내물-실성-눌지-자비-소비-지증마립간, 간이라는 칭호는 북방 기마민족들이 주로 사용). 경주일원에만 존재한 적석목곽분의 기원에 대해서는 시베리아 쿠르간 계통의 묘제로 보고 이를 만든 신라김(金)씨 왕족의 뿌리가 대초원지대의 기마민족임을 증빙한다(고구려.백제는 한반도 남방식 고인돌양식의 적석총)

 

 

 

1) 유물 발견 장소

적석목곽분이 발견되는 지역은 중앙아시아의 카자스탄, 알타이 산맥주변의 과거 초원유목민이 확동하던 지역과 알타이산맥에서 동쪽으로 멀리 떨어진 현재 경상도지역인 과거 신라 김해 지역 두곳이 유일하다-현재 카자스탄 박물관과 러시아 박물관에 유물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몽골박물관에도 있기는하나 많이 훼손되어 있다고 한다. 스키타이 계통

 

 

적석목곽분이 아시아 최동단 중에서도 가장 남쪽인 신라 지역에서 발견된다는 것은 세계 학자들을 놀라게 했다. 일반적으로 북방기마민족이라면 서쪽으로는 스키타이지역으로부터 동쪽으로는 몽골지역까지 초원을 근거로 하여 농경민과 수없이 혈투를 벌인 것으로 추정하는데 신라와 같이 전형적인 농경문화 지역에서 전형적인 북방기마민족의 무덤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2) 시기적인 측면

이시기에 동북아에서는 큰 전쟁이 일어나는데 342년에 모용선비족(慕容氏鮮卑族)이 세운나라 전연의 모용황이 고구려를 침공했었고 356년에 신라 김씨왕조가 시작되어 내물마립간(奈勿麻立干)으로 재탄생한다

 

 

4세기 이후 등장한 경주지역의 적석목곽분의 주인은 시베리아 샤먼문화의 원형인 신라금관이 증명하듯이 인류학자들이 세계 샤먼문화의 시원지라고 규정하고 있는 동북아 시베리아 지역의 북방 유목민족인 선비족이다.

 

김해. 일본열도지역의 적석목곽분의 주인은 신라권력에서 소외당하고 추방당한 선비세력이다.

 

 

김일제세력도 흉노족이나 이미 한나라에 투항하여 한족화되어 버렸기 때문에 적석목곽분의 주인이 될 수 없다

 

 

스키타이는 기원전 7세기부터 러시아 대평원의 패권을 장악했던 기마민족으로 앗시리아의 에사르하돈(Esarhaddon, 기원전 681∼669년 재위) 연대기에 처음 나타난다. 앗시리아인들은 그들을 아쉬쿠즈(Ashkux 또는 Ashkuzai), 페르시아인이나 인도인들은 사카(Saka)라고 불렀으며 그리스인들은 스키타이(Skythai 또는 Skythes)라고 불렀다. 그러나 스키타이들은 스스로를 스콜로텐(Skoloten) 혹은 슈크(Shk)라고 불렀으며 이란인 계통으로 추정된다(밀러는 남부 러시아의 스키타이 비문들을 분석하면서 지역에 따라 적게는 10퍼센트에서 많게는 60퍼센트까지, 다양한 이란적 요소가 발견된다고 발표했다).

 

 

 

경주 대릉원의 천마총과 황남대총

 

이 원형 고분군은 기원전 3∼4세기 스키타이를 비롯하여 흉노 등 북방기마민족들이 사용한 스키타이-알타이 쿠르간과 동일한 구조와 형태를 갖고 있으므로 신라가 북방기마민족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는 중요한 증거로 제시되었다.

 

 

천마총은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조성된 무덤으로 추정된다. 밖에서 보면 높이 12.7m의 거대한 원형 봉분이고 내부는 나무 관 위로 돌을 쌓아 만든 전형적인 북방 유목민들의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이다. 대릉원(大陵苑-경주 황남동 고분군 일대) 안 서북쪽에 위치. 1973년에 발굴되었는데 무덤 내부에서 금관, 금제과대, 요패(腰佩), 팔지, 반지, 목걸이, 환두대도(換頭大刀), 금제조익형관식(金製鳥翼形冠飾)과 금제접형관식(金製蝶形冠飾), 금동모(金銅帽), 금동제경갑(金銅製脛甲) 등의 유물과 이외에도 많은 칠기와 그릇 등이 발견되었다.

 

 

경주 금령총에서 출토된 기마인물형 토기.

 

말에 달려 있는 曲玉(곡옥)이었다. 곡옥은 굽은 옥으로 커다란 머리와 가는 꼬리로 구성되고 머리 부분에 구멍이 뚫려 끈을 꿰어 매달 수 있는 장신구이다. 동물의 태아 때 모양

한국고대사에서 曲玉은 신라, 가야에서만 유행하였다.파지리크의 曲玉- 生命(생명)의 상징     多産(다산)

 

 

1990년 김해 대성동 고분에서 북방계 기마민족이 사용하는 오르도스형 동복이 출토-

이 오르도스형 동복은 청동으로 만든 솥으로 기마민족이 이동하면서 사용하던 취사도구이다. 동복은 저 멀리 황하의 만곡부(灣曲部) 오르도스 지방에서 유래되었는데, 몽골 초원 실크로드를 따라 만주와 시베리아 그리고 한반도로 유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동복이나 황금은 모두 북방계 기마민족의 대표적 유물이다.

 

 

3세기에 쓰인 陳壽의 三國志 魏志 東夷傳에는 韓(백제, 신라, 가야의 전신인 마한, 진한, 변한의 통칭) 사람들은 구슬을 좋아하고 비단이나 금을 보배로 여기지 않는다고 쓰고 있다.

황금 숭배는 유목 민족의 특징이다

 

 

그렇다면 금관을 쓰고 서방과 교류하면서 페르시아와 로마에서 만든 유리잔을 수입하고 騎馬부대를 지휘하였던 이 집단은 3세기 이후에 경주지역에 들어온 새로운 흉노족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 金秉模 교수 등 많은 학자들의 견해이다. 김병모 교수「금관의 비밀」(푸른역사)

 

 

(1)금관은 1921년 금관총에서 처음 발굴된 이래, 1973년 천마총, 이듬해 皇南大塚 등 신라 적석목곽분에서만 나왔다. 이 적석목곽분은 내물마립간(356~402)에서 지증마립간(500~514)에 이르는 여섯 대의 마립간 시대 왕족 무덤에서만 나온다.

 

 

(2)이 금관은 그 형식과 상징성이 모두 스키타이-흉노계의 금관·샤머니즘·토템에서 유래한 것이다. 최근 무역전시관에서 전시된, 내몽골의 흉노 單于(선우: 왕) 무덤에서 나온 금관 꼭대기엔 날개를 벌린 새가 앉아 있다. 스키타이 전사의 투구에도 새가 앉아 있다.

 

 

(3)새는 북방 유목민족이 숭배하는 동물로서 신화에도 많이 등장한다. 박혁거세, 김알지, 석탈해 신화는 물론이고 지증마립간의 어머니 이름은 鳥生부인이다.

 

 

(4)이란계 스키타이 유목민, 몽골-투르크계 흉노 등이 활약하던 곳에서 많이 나오는 술잔인 角杯는 한반도에선 동해시, 포항, 경주, 부산, 창녕 등 신라·가야지방에서만 나온다. 角杯는 뿔로 만든 술잔인데 戰士들이 맹세를 할 때나 출전할 때 승리를 다짐하면서 사용하는 것이다.

 

(5)가야에서 출토된 기마인물형 토기에는 角杯 모양이 붙어 있다. 기마민족과 각배의 상관관계를 잘 보여 준다. 삼국유사에는 신라의 昔脫解 신화와 관련하여 각배가 등장한다. 金秉模 교수는 신라와 가야에서만 각배가 나오고 고구려·백제에선 나오지 않는 이유는 민족의 고향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6)4~6세기 적석목곽분에서는 로마지역에서 만든 유리그릇이 많이 나오고 있다. 이는 물론 신라가 북방초원 루트를 통해서 이 지역에서 수입한 것이다. 이런 서방 유리 그릇은 백제·고구려·가야 고분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이것도 신라의 金氏 왕족이 북방초원 루트를 통해서 서방과 교류할 수 있었던 민족임을 보여 준다. 부여족 계통의 행동 범위는 그렇게 넓지 못했다. 몽골-중앙아시아 초원을 무대로 설쳤던 흉노 출신만이 그런 노하우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7)알타이 산맥, 즉 金山 부근에서 살던 金을 좋아하던 흉노계 金氏 집단이 金城(경주)에 들어와서 왕이 되더니 금관, 금팔찌, 금목걸이, 금허리띠 등 금공예품을 많이 만들고 무덤에까지 가져갔다는 이야기이다. 金이야말로 흉노의 브랜드이다.

 

 

신라의 금관은 백제의 그것과 약간 다르다. 나갈 出자 문양을 쓰고 있는데 이것은 흉노의 스키타이 문명의 상징이다. 금관에 사용된 出자 모양의 문양은 한자의 出이 아니라, 스키타이족 샤머니즘에서 연유한 사슴뿔모양에서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켈트족(갈리아) 왕이 선물했다는 칼도 있고 그리스 미케네식의 투구도 발견되었다.

 

 

신라 김씨 왕족의 무덤은 황금으로 도배를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이런 신라 김씨 왕족의 황금 문화는 인접한 백제나 고구려와 너무도 다르다.

유목민족은 이동하기때문에 재산을 전부 금으로 하여 말에 싣고 다니고 금을 숭상한다

농경민족은 정착해서 살기 때문에 금을 숭상하지 않는다. . 중국은 농경민족이고 황실에선 옥을 숭상했다 백제도 금을 숭상하지 않았다.

이들의 본거지였던 알타이 산맥의 그 알타이가 金이란 뜻이다

 

 

말을 순장한 무덤을 비롯해 안장과 등자(발걸이), 배가리개 등 호화롭게 장식한 각종 馬具類(마구류)가 다수 발굴되고 있어 적석목곽분을 조성한 金씨왕 세력이 기마족임을 거듭 확인시켜주고 있다.

 

 

김알지는 한무제에 투항한 흉도휴도왕의 아들 김일제 후손이 맞다. 그러나, 한나라에 투항한 김일제는 한무제에게 충성을 다하고 제후(금성의 투후)까지 되어서 지나화된 흉노족으로서 한나라의 유물을 무덤에 묻었을 것이다. 그러나, 경주 적석목곽분에서는 한나라의 유물들이 출토되지 않았다. 고로 경주 적석목곽분 무덤군들의 주인을 김알지 세력으로 규정하면 안 되고, 흉노족을 흡수하여 왕성한 초원문화를 소유하고 있던 모용선비족이라고 해야 맞는 분석이다.

 

 

김일제 후손 김알지세력은 김씨로 개명한 모용씨 신라의 기반세력이 된다. 골품제에서 왕족은 모용씨(성골)이 되고, 귀족(진골)은 김알지세력이라 할 것이다.

 

 

내물왕때부터 혈통을 유지하기 위해 근친혼, 진평왕때에는 근친혼의 종결(선덕여왕).

화랑세기와 흉노적 性풍습

 

 

중국의 삼국지 위지(魏志)의 진한(辰韓)조에는 진한과 마한의 언어가 달랐다는 분명한 기록이 있다.

其言語不與馬韓(그 언어가 마한과 닮지 않았다; 與는 닮을 여)

 

 

DNA조사-KBS 역사스페셜에서 나온 유전자 검사결과에 의하면 신라왕족은 흉노족중에서도 스키타이인에 더 가깝다고 한다.

 

 

부여-고구려-백제의 지배층과 신라의 지배층은 出自가 다르다. 부여계통은 퉁구스族이고 신라 金氏 왕족은 좀더 유목적이고 서방적인 흉노-알타이계통이다.

(적석목곽분이란 墓制, 북방系 출토 유물들, 풍부한 馬具와 금제품, 金씨, 麻立干이란 호칭 등이 흉노의 표시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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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박물관장 李鍾宣 박사는 자신의 著書 「古新羅王陵硏究」(學硏文化社)에서 이렇게 썼다.

 

 

<최근 흉노계 분묘를 종합한 연구에 따르면 거기에는 몇 가지의 유형이 있다. 흥미롭게도 반도 서북부의 소위 낙랑故土에 그러한 유형의 고분

 

들이 모두 남아 있다는 엄연한 사실은 오르도스(지금의 내몽골 지역)와 연결해서 볼 때 매우 주목할 현상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오르도스 철기문화의 주인공들이 漢의 팽창으로 그 일파가 서쪽으로 밀려가서 헝가리, 즉 훈족(흉노)의 나라를 세운 주체가 되었고, 뿐만 아니

 

라 동쪽으로 이동한 다른 일파가 여러 차례에 걸쳐 반도로 진출하였고, 일부는 일본열도에까지 상륙하였다고 봐야 당시 시베리아 민족들의 대

 

이동의 일부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내몽골 오르도스 지방에서 살던 흉노족의 일파가 기원 전 3세기경부터 한반도의 서북지방으로 들어와 고조선의 중심세력이 되었다. 이들은 평

 

양 근방에서 수백 년 살다가 고조선이 망하거나(서기 전 2세기), 낙랑이 고구려에 점령되는(서기 1세기) 등 정치변동기에 한반도의 동남쪽으

 

로 이동하여 지금의 경주지역에 정착했다. 그 후 4세기 그들이 신라의 집권세력으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내물왕 이후 신라 金氏 왕족이 바로

 

북방草原이 고향인 흉노족의 후예라는 것이다.

 

 

 

 

李관장은 신라김씨 계통의 이동경로를 알타이 산맥-내몽골(오르도스)-평양 부근-경주의 서북-동남방향으로 설정했다.

 

 

 

李鍾宣 관장은 신라는 馬具와 금공예품은 발달했으나 갑옷 등 무기류는 가야가 더 발전했다고 말했다. 가야 지배층의 종족적 분류에 대해서

 

기마민족 일본 정복설을 주장했던 일본의 에가미 나미오 교수는 부여族이라는 주장을 했고 국내학자들 가운데서도 동의하는 이들이 있다.

 

 

李鍾宣 관장은 가야 유물로 볼 때 그 지배층은 신라 김씨와 비슷한 흉노-알타이 계통인 것 같다고 말했다. 고조선-낙랑지역에 거주하던 흉노

 

계가 신라지역보다 먼저 가야지역, 지금의 부산 부근에 들어온 흔적이 부산·김해 등지에서 발견되는 토광목곽분과 무기류, 그리고 銅(동복: 유

 

목민이 쓰는 구리 항아리)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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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가야)는 스키타이족이 될 수 없다.

                                                                     이문수

 

 

300년 가까이 잠잠하던 그들이 갑자기 북방문화를 일으킬 근거가 부족한 것 같습니다

한양대에 계시는 김병모교수님께서 중앙아시아를 답사하고 '금관의 비밀'을 비롯한 책을 쓰셨는데, 북방기마민족의 영향을 목곽적석총, 금관과 각배를 중심으로 논하셨더군요. 파지리크고분과의 연계성은 시간상으로 400년 이상의 거리가 있어서 유물의 여러가지 면에서 가장 가까울 것 같지만 확신할 수 없다고 합니다.

 

 

각배는 고구려 덕흥리 고분 주인공뒤에 각배를 들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러므로 신라에만 발견된 것도 아니고 신라에 대한 고구려의 영향력을 생각한다면 전파되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굳이 유목민들과 관련지어 생각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대구와 출자모양의 왕관은 신라에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백제 영토였던 나주 반남면에서도 등장했습니다. 만약 이것을 모용씨가 백제로 가서 그 영향이 끼친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왜 신라에는 이 때의 고분 형식이 유목민들의 적석목곽분으로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또 같은 유물이 나온 백제의 나주에는 옹관묘가 성행했는지

 

 

적석목곽분에 대해 주장하면서 이 저자는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의 무덤 양식과 똑 같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장은 이 뿐입니다. 선비족의 무덤양식에 대한 것은 단 한 구절도 없습니다.

 

 

기원전후에도 있었던 해상루트를 4세기에도 없었다고 하면 안된다.

 

 

유리로 만든 그릇이나 공예품은 신라뿐만 아니라 고구려와 백제에도 있습니다.

 

 

4세기에 갑작스레 나타나는 마구류와 북방기마적인 유적 유물이 나온다고 한 것에 대해 의문점을 품었던 것은 좋았습니다. 하지만 4세기라는 점에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에 대해 왜 간과했을까 하는 아쉬움이 듭니다. 4세기중엽말 고구려는 신라와 관계를 맺기 시작하였고 4세기 말에는 신라가 고구려에 질자까지 보냈으며 실성이사금은 고구려에 의해 세워지기 까지 합니다. 상황이 이러하기 때문에 신라에 대한 고구려의 영향력이란 엄청났을 것이고 고구려의 문화가 급속도로 신라에 들어간 것은 더할나위 없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각배나 마구류 같은 기마민족적 성격을 가진 유물이 충분히 나올수 있는 것입니다.

 

 

 

쿠르칸은 천산지역에는 최근것이라야 bc3 세기 정도이고 그후에 신라에서나 나타나는 대형 적석목곽분이라는것이 4세기 동북아 끝에서 발견이 되니 약 500여년의 시간차가 있다.

출처: 역사문

 

 

鮮卑族(선비족)

 


鮮卑族은 원래 東胡(동호:내몽골-만주 일대에 살던 옛 민족)의 일파로서 흉노족의 지배를 받은 민족이다. 기원 전 200년께, 좀 어리숙했던 東胡族의 임금이 아무런 준비도 없이 흉노에 싸움을 걸었다가 묵특 선우가 거느린 흉노군에게 멸망당했다.「동호」는 망하고 그 무리는 크게 세 갈래로 흩어진다. 한 무리는 흉노로 흡수되고 하나는 오환(烏桓), 나머지는 선비로 통합된다.

 

 

그후 약 3백년이 지나서야 鮮卑족은 흉노에 복수를 하게 된다.

기원 후 85~91년 사이, 鮮卑는 後漢조정의 부탁을 받고 南흉노, 丁零(정령:시베리아 예니세이강 유역에 살던 유목민족 국가)과 함께 北흉노 토벌에 나서 北흉노를 패퇴시켰다.

 

이때 10여만 落(가구를 뜻함)의 北흉노인들이 선비족으로 귀속됐다는 내용이 後漢書에 나온다. 10여만 落이라면 매 落마다 5인 정도로 계산해도 50~60만명에 이르는 막대한 인구다. 원래 선비족의 인구는 40만명 정도였는데 이때 2배 이상 커지게 된다.

 

 

半匈奴(반흉노)」라 할 수 있는 선비족 가운데 한 일파가 「慕容부족」이다. 모용 부족의 명칭은 서기 150년경에 활동했던 「慕容」이란 추장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선비족 내부에는 拓跋部(탁발부)와 宇文部(우문부) 등 여러 부족이 존재했지만 「모용」의 5대손쯤 되는 모용 涉歸(섭귀)가 추장이 되었을 즈음 모용부가 汎(범)선비족 가운데 최강의 부족으로 떠오르고 섭귀는 「선비 單于(선우)」에 올랐다.

 

모용외를 뒤이은 아들 慕容(모용황)은 337년 자신의 영역이 춘추전국시대 燕(연)나라와 겹친다하여 국호를 燕(연)이라 정하고는 왕위에 오른다 「5호16국 시대」 모용씨 왕조가 탄생한다.

 

 

서기 342년 모용황은 5만5천명의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삼국사기는 「왕우(북로 침공군 대장) 등은 북쪽 길에서 싸우다가 패하여 모두 죽었다(會王寓等戰於北道, 皆敗沒)」고 기록하고 있다 북로로 진군한 1만5천명이 아무도 본진으로 귀환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수문제 당테종도 모두 선비족 탁발씨 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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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민석 17-05-15 19:40
 
그럼 흉노역사가 우리나라 역사임?
전쟁망치 17-05-15 22:09
 
삼국시대 초기에는 우리는 순수 우리말 이름을 사용하다가
한자를 받아 드리면서 성씨를 한자성씨로 사용했습니다.

그걸 감안해서 추측을 해야 됩니다
비좀와라 17-05-15 22:48
 
흉노족과 동호 그리고 조선은 같은 족속 입니다. 밑의 글은 사기 흉노열전에 나오는 내용으로 저 내용에 흉노 뿐만 아니라 동호 그리고 조선의 역사도 같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연나라의 현능한 장군 진개(秦開)가 흉노에 인질로 잡혀가 그들의 신임을 얻은 후에 연나라에 귀국해서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가 동호를 패주시켰다. 동호는 이로써 천여 리나 물러갔다. 형가(荊軻)와 함께 진시황을 암살하려고 했던 진무양(秦舞陽)은 진개의 손자다. 연나라 역시 조양(造陽)에서 양평(襄平)을 연결하는 장성을 쌓고 상곡(上谷), 어양(漁陽)、우북평(右北平)、요서(遼西)、요동(遼東) 등의 군을 설치하여 흉노를 막았다. 당시 의관속대의 풍속으로 문화가 발달한 나라에는 전국칠웅이 있었는데 그 중 세 나라가 흉노와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 그후에 조나라의 장군 이목이 있는 동안은 흉노는 감히 조나라의 국경을 침범하지 못했다. 후에 육국을 멸한 진나의 시황제는 몽염(蒙恬)을 시켜 10만의 군사로 흉노를 공격하여 하투(河套)의 남쪽 지역을 모두 진나라 땅으로 만들었다. 황하를 요새로 삼아 황하의 강변을 따라 44개의 현성(縣城)을 축조하고 죄수들을 군사로 보충하여 지키게 했다. 직도(直道)를 건설하여 구원(九原)에서 운양(雲陽)까지 개통시켰다. 또한 험준한 산의 능선을 국경으로 삼고 계곡을 참호로 삼아 수선이 가능한 곳은 보수하여 임조(臨洮)에서 요동(遼東)까지 만여 리에 이르는 장성을 건설했다. 또 황하를 건너 양산(陽山)에 거점을 마련하고 북가(北假)를 점령했다. "

목특선우 시절 흉노는 동호를 격파하고 동호의 포로 일부를 선비산에 다른 일부를 오환산에 배치 하였고 후일 이들이 선비족과 오환(오손)족이 되며 이들을 남흉노라 합니다. 선비족은 몽골부근에 오환족은 요동에 위치하는데 이들은 동호(고조선)로 같은 족이고 후일 백제와 고구려의 일부가 되는 것 이고요.
꿀돼지꿀꿀 17-05-18 09:00
 
모진, 모즉지왕, 무즉지태왕. 법흥왕이 다른 호칭들에 공통적으로 보이는
모 혹은 무 는 성씨가 아니고 이름임
즉. 모진은 그 자체가 그냥 이름이고 성이 없음
  모용황은 모용씨 이고

모용황과 모진간에는 아무 연관이 없습니다.
코스모르 17-05-19 00:06
 
신라 가야의 왕족이 먼 북방의 출신인건 맞는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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