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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5-16 01:25
[기타] 을지문덕
 글쓴이 : 관심병자
조회 : 827  

수나라 백만 대군을 물리친 고구려의 을지문덕(乙支文德)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순신(李舜臣)과 더불어 가장 존경하는 민족적 영웅이다.

그러나 이순신에 관한 기록은 많이 남아 있지만, 을지문덕은 기록이 매우 빈약하다.

을지문덕이 수나라 대군을 전멸시킨 살수대첩(薩水大捷)의 주역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잘 알아도 그의 가계가 어떻게 되는지, 언제 태어나 어떤 벼슬을 지냈으며, 언제 어디에서 죽었고, 무덤은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이 없다.
을지문덕은 평원왕이나 양원왕 재위 시에 평양 근처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측된다.

평양에서 가까운 평남 증산군·평원군 지방에 을지문덕에 관한 전설이 서려 있다.

그가 태어났다는 마을의 석다산은 현재 평남 증산군 석다리에 있다. 석다리에는 을지문덕이 어린 시절 글 읽고 무술 훈련을 했다는 전설이 있다.

또 평남 평원군 화진리 불곡산 동굴 속에서 글 읽고, 석다산 남쪽의 마이산으로 말을 타고 다니며 무술 훈련을 했다는 전설도 있다.
수양제(隋煬帝)는 612년 정월에 고구려원정에 나섰다.

<수서(隋書)>는 이때 양제가 동원한 군사가 24군에 113만 3천 800명이라고 한다.

군량 등 물자 수송에는 그 2배의 인원이 동원되었다고 하니 이는 거의 300만에 이르는, 중국 역사상, 아니 당시까지는 세계 역사상 최대 규모의 원정군이었다.

그러나 6월이 될 때까지 요동성 하나를 함락시키지 못 하자 양제는 자신이 직접 요동성으로 달려와 독전을 했으나 그래도 성은 요지부동이었다.

초조해진 양제는 신임하는 장수인 우문술(宇文述)과 우중문(于仲文)에게 30만 5천 명의 정예군을 주고 평양성을 직접 공격토록 명령했다.

우문술과 우중문은 요동성을 우회하여 압록강에 이르렀다. 고구려의 대신 을지문덕이 우문술과 우중문의 수나라 본영에 나타난 것이 그 무렵이었다.
을지문덕은 적진으로 찾아들어가 우문술과 우중문 등에게 항복하겠노라는 뜻을 전했다.

사실은 항복이란 거짓이고, 항복한다는 핑계로 적군의 허실을 탐지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우문술 등이 평양 근처까지 침노했다가 군량이 떨어져 퇴각하자 곳곳에 매복해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고구려 군이 사방에서 이들 지친 수나라 군사들을 사정없이 추격하며 맹렬히 공격했다.

수군이 결정적 타격을 입은 것은 살수에서였다. 여기에서 우둔위장군 신세웅(辛世雄)이 전사하는 등 수군은 참패했다.

그렇게 해서 압록강을 살아서 건너간 자는 30만 5천 명 가운데 2천 700명뿐이었다. 이것이 저 유명한 살수대첩이다.
그러다가 617년에 마침내 양제가 친위군의 쿠데타로 피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양제를 죽인 사람은 그의 평생 동지였던 우문술의 아들 우문화급(宇文化及)이었다.

수 양제의 피살로 수나라는 중국을 재통일한 지 불과 40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그 이듬해에 이연(李淵)이 새로운 나라를 세웠으니 당나라이다.
살수대첩 이후 을지문덕에 관한 기록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을지문덕의 자취가 그 뒤 전혀 알려지지 않은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필자가 을지문덕 장군 일대기를 쓰기 위해 자료를 조사하다가 재미있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35년에 을지문덕 묘를 답사한 기록을 발견한 것이다.

1935년 10월 1일, 2일, 3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김준연(金俊淵)의 답사기이다.

그 글에 따르면 을지문덕의 묘는 평남 강서군 잉자면 2리 현암산 동쪽 기슭에 있으며, 을지문덕의 후손 돈종각(頓宗珏) 씨도 만났다고 한다.
평남 대동군 대보면 태평외리에 살고 있던 돈씨는 자신의 조상 을지문덕의 묘가 평북 의주에 있다는 말을 듣고 평북 의주군 옥상면 자물촌 싸리골에 찾아가 보니 그 묘는 을지문덕의 조상 을파소(乙巴素)의 묘였다고 한다.

거기에는 을파소의 조부 을두지(乙豆智)의 묘도 있었다고 한다.
을지문덕의 후손이 어찌하여 돈씨가 되었는가.

고려 인종 때 묘청(妙淸)의 봉기가 있을 때 이 고을에 살던 을지문덕의 15세손 을지수(乙支遂)·을지달(乙支達)·을지원(乙支遠) 3형제가 의병을 일으켜 관군을 도왔고, 그 공로로 인근 돈산(頓山)에 봉해졌으며, 돈씨를 사성(賜姓)받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을씨가 을지씨로, 다시 돈씨로 변하게 됐다는 것이다.
또 한편 1938년 5월 24일자 동아일보에 이런 기사가 실렸다.

‘조만식·최윤옥·김병연·김성업 씨 등 평양의 지식인들이 평남 강서군 잉자면 현암산에 있는 을지문덕 장군 묘의 보수 모임을 조직했다’는 내용이다.

평남 강서군은 현재 남포시에 편입되어 있고, 이에 관한 기록을 더는 찾을 수 없어 매우 아쉽다.

평양 근교에 정권의 정통성을 강조하려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단군릉을 조성한 북한이 을지문덕 묘에 대해서는 어떤 조치를 취했는지 궁금하다. 또 후손인 돈씨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도 궁금하다.

황원갑 소설가, 역사연구가  


http://www.econotalking.kr/news/articleView.html?idxno=148258


을지문덕은 어느 민족일까? 엉뚱하게 느껴지는 이런 질문이 던져지는 것은 그의 조상·출생지·성장 과정에 대해 전하는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삼국사기는 “출생과 성장 배경을 알 수 없다”고 했다. 조선시대 후기에 홍양호(洪良浩)가 지은 ‘해동명장전(海東名將傳)’에는 “평양 석다산(石多山) 출생으로 어려서 부모를 잃고 혈혈단신으로 자랐다”고 돼 있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는 없다.

한편 중국 쪽 역사서인 ‘자치통감’에 인용된 ‘혁명기(革命記)’라는 책에는 을지문덕의 이름이 ‘울지문덕’으로 나온다.

중국 북쪽의 유목민인 선비족에는 ‘울지’라는 성이 있어 중국 왕조에도 관료로 많이 진출했다. 을지문덕과 비슷한 시기에는 ‘울지경덕’이란 인물이 활동하고 있었다.

학계 일각에서는 이를 근거로 ‘을지문덕’이 선비족이었다고 주장하고, 다른 학자들은 고구려나 백제에도 ‘명림(明臨)’ 같은 복성(複姓)이 있었다는 점을 들어 이를 반박한다.

하지만 고구려가 부여족이 중심이 돼 말갈·거란 등 여러 민족을 아우른 다민족 국가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을지문덕이 선비족 출신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설사 그렇다고 해도 을지문덕이 ‘고구려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http://www.chosun.com/culture/news/200410/200410150290.html





돈씨가보(頓氏家譜)에 의하면, 을지(乙支)씨는 원래는 을(乙)씨였는데, 고구려 을지문덕 때에 ‘을지’씨로 바뀌었다가 후에 ‘돈씨(頓氏)’로 변했다고 한다. 이와 관련된 이야기는 1930년에 간행된 ‘별건곤’ 34호의 ‘을지문덕묘참배기’에도 실려 있다. 을지문덕의 16세 후손 을지수(乙支遂)가 동생인 을지달(乙支達), 을지원(乙支遠) 등과 함께 고려 인종 때 일어난 묘청의 난에 의병장(義兵將)으로 서경(西京)을 수복하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워 돈산백(頓山伯)에 봉해졌고 돈(頓)씨를 사성 받았다고 한다.[1] 임진왜란 때 평양성을 탈환한 조방장(助防將) 돈정신(頓貞臣)은 을지수(乙支遂)의 17대손이라고 한다.[2] 평양직할시 평남선 대평역(大平驛) 근방에 을지묘라고 전해 오는 큰 고분이 있는 이 인근에 돈뫼(頓山)라 하는 동네가 있고 이 곳에 을지문덕 장군의 후손들이라는 돈씨 집안 30~40호 가량이 있어 이 일대가 돈산군(頓山君)의 봉토로 여겨지고 있다. 수(遂)의 증손 돈예숭(頓禮崇)이 목천으로 이주해 살면서 본관을 목천으로 하였다고 한다.


조선 성종 때 지리지인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후삼국을 통일하던 당시, 목천 지방의 백제 유민들이 백제 부활을 도모했다는 이유로 왕건이 이 지방민에게 우(牛; 소), 상(象; 코끼리), 돈(豚; 돼지), 장(獐; 노루) 등의 성씨를 내렸다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후손들이 뒷날 우(于), 상(尙), 돈(頓), 장(張)씨로 성씨를 회복하였다고 한다.


https://ko.wikipedia.org/wiki/%EB%AA%A9%EC%B2%9C_%EB%8F%88%EC%94%A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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