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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5-22 20:50
[기타] 흥선 대원군
 글쓴이 : 관심병자
조회 : 2,682  

흥선대원군 이하응(, 1820~1898)은 아들 고종의 즉위로 조선역사상 유일하게 왕의 자리에 오른 적이 없었으면서 살아 있는 왕의 아버지로 대원군에 봉해지고, 최고의 권력을 휘두르는 섭정을 맡게되었다. 그가 정치를주도했던 19세기 후반 조선은 여러 면에서 많은 변화를 겪었지만, 급변하는 세계정세를 따라잡지는 못했다. 서세동점이라는 새로운 세계사적 흐름과 세도정치로 피폐한 국가의 재건이라는 어려운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해야 했던 흥선대원군은 오늘날 한편에서는 개혁 정치가로, 다른 한편에서는 보수적인 국수주의자로, 엇갈린 평가를 받고 있다.

파락호로 행세하며 왕권을 노리다

이하응은 혈통으로 보면 인조의 셋째아들 인평대군의 8세손으로 왕권과 그다지 가까운 왕족은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 남연군이 정조의 이복형제인 은신군의 양자로 들어감으로써 영조로부터 이어지는 왕가의 가계에 편입되어 왕위와 가까워졌다. 그러나 당시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 상황에서 왕위와 멀지 않은 왕족이라는 것은 그다지 축복이 아니었다. 헌종 이후 끊어진 정조의 직계는 정조의 이복동생 은언군의 손자인 철종으로 이어졌고 철종마저도 후사가 없는 상태에서 그나마 왕위와 가까운 왕족들은 모두 왕이 될 가능성이 있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안동 김씨들로부터 끊임없는 견제를 받아야만 했다.

관복을 입은 흥선대원군.

안동 김씨는 세도를 이어가기 위해 자신들이 골라서 강화도에서 데려온 철종처럼 정치에 문외한인 왕을 원했다. 안동 김씨들은 조금이라도 왕의 재목으로 보이는 왕족들을 끊임없이 견제했고, 견제는 역모라는 무서운 누명으로 이어졌다. 조금만 왕의 자질이 있어 보이는 왕족은 꾸미지도 않은 역모의 혐의를 뒤집어쓰고 멀리 귀양가서 죽임을 당했다. 이런 상황에서 혈통적으로는 왕의 자리와 멀지만 편입된 가계상 왕권과 제법 가까운 자리에 있던 이하응이 택한 목숨을 부지하는 방법은 건달처럼 행세하는 것이었다.

야심 없는 파락호를 자처하고 궁도령, 혹은 상갓집 개라는 치욕적인 별명까지 얻으며 세도가들의 눈을 피한 이하응은 아무도 모르게 조대비와 연줄을 대어 자신의 야망을 이룰 기반을 마련했다. 조대비는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의 세자비로 아들 헌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대비가 되었지만 안동 김씨를 친정으로 둔 시어머니 순원왕후에 밀려 한 많은 궁중 생활을 했던 비운의 대비였다. 당시 조대비는 순원왕후 사망 이후 궁중의 최고어른이 되어 안동김씨에게 친정의 원한을 갚을 길을 찾고 있었다. 이하응은 조대비의 조카 조성하와 친교를 맺어 조대비에게 접근하였고 철종이 후사가 없이 죽을 경우 자신의 둘째 아들 명복을 철종의 왕위계승자로 지명하도록 설득하였다.

어린 아들을 앞세워 10년간 섭정

1863년 12월 초 철종이 사망하자 조대비는 이하응과 맺은 묵계대로 그의 둘째아들 아들 명복을 철종의 후사로 지명했다. 12살 고종은 이렇게 그의 아버지 이하응의 노력으로 왕위에 올랐고 이하응은 왕이 아닌 왕의 아버지, 즉 대원군이 되었다. 조선역사상 대원군은 선조의 아버지 덕흥대원군, 인조의 아버지 정원대원군, 철종의 아버지 전계대원군, 그리고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 4명이 있지만, 왕의 아버지로 왕이 즉위할 때 살아 있었던 사람은 흥선대원군이 유일했다. 어린 나이의 고종을 왕으로 지명한 조대비는 수렴청정을 하면서 정책 결정권을 흥선대원군에게 주어 그의 집정을 이루게 하였다. 오랫동안 세도가 양반들에게 무시당하며 절치부심 기회를 노리던 흥선대원군은 시정의 건달 행세를 하며 깨달은 당시의 문제점을 하나하나 개혁 정책을 통해 해결해가고자 하였다.

척화비. 흥선 대원군은 병인, 신미양요의 승리 후 전국의 주요 장소에 척화비를 세워 쇄국정치의 뜻을 결의했다. 비석에 새겨진 글은 이러하다. “서양의 오랑캐가 침략해 오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 할 수 밖에 없고, 화해를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병인년에 만들고 신미년에 세운다. ( )”
<출처: (CC)Dalgial at Wikipedia.org>

흥선대원군은 일단 19세기 초부터 시작된 세도정치의 고리를 끊기 위해 안동김씨 주류들을 대거 정계에서 몰아냈다. 그 와중에 국정 공백을 막기 위해서 김병학 등 일부 안동 김씨와는 손을 잡았고 당파를 초월한 인재 등용과 부패 관리 척결에 힘썼다. 그는 조선 후기 오랫동안 계속된 붕당 간 갈등과 국가 재정 파탄의 일부 원인이 전국에 널리 퍼진 서원에 있다고 보고 47개의 중요한 서원을 제외한 모든 서원을 철폐했다. 법전간행을 통해 19세기 변화된 사회에 적합한 법률 제도를 확립하였고 세도정치 동안 비대해진 신권을 제한하고 왕권강화를 위한 여러 가지 정책들을 펼쳤다. 비변사를 폐지하고 양반에게도 세금을 징수하였으며 사치를 근절하기 위해 의복제도를 고치고 사창제도의 실시로 지방관리의 부정을 막고 민생을 안정시켰다. 흥선대원군의 개혁정치는 양반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양반들은 크게 반발했지만, 흥선대원군의 개혁으로 국가에 대한 의무와 부담을 고스란히 양인에게 전가하고 상류층의 권리만 누렸던 양반층에게 그 부담이 일부 돌아감으로써 국고는 풍족해졌고 양인의 부담은 줄어들었다.

조선은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표방한 나라였지만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이러한 조화는 세도정치라는 신권의 독주로 사실상 유명무실해진 상태에 있었다. 흥선대원군은 비정상적으로 커진 신권을 제압하기 위해 왕권의 강화를 도모하는 정책을 위주로 개혁을 주도해 나갔는데 이는 조선이 세계사의 커다란 물결 속에 휩쓸리지 않았다면 일정 정도는 주효한 개혁으로 평가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시는 19세기 후반, 일찌감치 산업혁명 등을 통해 발달한 기술문명의 세례를 받고 제국주의화 되어가던 서양국가들은 거침없이 동양으로 진출해오고 있었고, 이러한 서세동점의 위기 속에서 흥선대원군의 왕권강화에 대한 집착은 일부분 시대착오적인 면이 없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는 왕권강화를 상징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무리하게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당백전원납전으로 경제구조를 흐려 백성의 삶을 다시금 피폐하게 만들었으며, 서구의 새로운 사상이 왕권중심의 유교사상을 교란시킬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천주교도들을 박해하고 쇄국정치를 펴 국제관계 악화시키고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일 기회를 놓쳐버렸다. 그가 집권하던 시기 막아낸 두 번의 양요(병인양요, 신미양요)는 집권 초기 행한 개혁정치로 인해 강해진 국방력의 결과이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서구의 세력과 평화롭게 수교할 기회를 놓쳐버린 사건이기도 하였다.

권좌에서 물러난 후

섭정이나 수렴청정은 아무리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다 해도 어쩔 수 없이 임시적이라는 한계가 있다. 어리다는 이유로 권력을 잠시 위임해주었던 왕은 성장하면 원래 자기 것이었던 그 권력을 반드시 되찾으려 한다. 흥선 대원군의 아들 고종도 예외는 아니었다. 12살에 왕좌에 오르면서 아버지에게 권력을 위임했던 고종이 22세가 되어서도 여전히 아버지의 그늘아래 있기를 원할 리는 만무했다. 그는 자신이 왕인 나라를 직접 다스리고 싶어했고 너무나 강력한 아버지 흥선 대원군에게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러나 흥선 대원군은 성인으로 성장한 아들에게 자신이 10년간 휘두르던 권력을 넘겨주지 않으려 했다.

고종 내외는 권력을 되찾아오기 위해 최익현과 반 흥선대원군 세력을 부추겼다. 최익현은 이항로의 문인으로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등에 악감정을 품고 있었다. 그는 동부승지로 기용되면서 명성황후의 측근과 반 흥선대원군 세력들과 손을 잡고 흥선대원군의 실정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고 퇴진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최익현의 탄핵은 결국 흥선대원군의 실각에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1873년 고종은 친정을 선포하였으며 흥선대원군은 원치 않는 정계 은퇴를 했다.

흥선대원군의 집 운현궁. 흥선대원군은 섭정 시기 운현궁과 궁궐을 직통으로 연결시켰다. 운현궁에서 궁궐로 들어가는 문이 폐쇄되면서 대원군의 섭정도 끝이 났다. <출처: (CC)Daderot. At Wikipedia.org>

강제로 물러난 탓에 흥선대원군은 정계복귀를 호시탐탐 노렸다. 그 과정은 그다지 산뜻하지 못했다. 권력에 대한 흥선대원군의 집착은 이전에 그가 보여준 확고한 개혁의지와 경세가로서의 품위마저 손상시키는 것이었다. 재집권에 대한 야망은 결국 며느리 명성황후와 갈등으로 이어졌다. 외척의 정치 참여를 극단적으로 막고자 하였던 그의 섭정기간 동안과는 너무나 상반되게도 그가 권력을 잃어버린 후 정국은 완전히 왕비의 친정인 민씨가가 주도하고 있었다.

흥선대원군은 고종을 폐립하고 자신의 다른 아들을 왕위에 올리고자 하는 역모에도 연루되었으며, 1882년 임오군란 때는 난도를 이끌고 궁궐에 들어가 피신한 명성황후의 사망을 공포하고 잠시 정권을 잡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잠깐의 재집권은 청나라의 힘을 빌린 명성황후의 역습으로 청나라에 납치되며 물거품이 되었다. 정권을 다시 잡기 위해 그는 그 어떤 세력과도 제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는 한때 위안스카이와 손을 잡기도 했고 1894년 갑오농민전쟁 때는 동학세력에 손을 뻗었으며 갑오경장 때는 일본과 줄을 대어 재집권기회를 노렸으나 실패하기도 했다.

흥선대원군의 이런 행동들은 아들 고종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 1895년 고종은 대원군의 정치활동을 대부분 제한하는 조치를 취해 그의 바깥 활동을 막았다. 사실상 유폐나 다름없는 생활 속에서도 흥선대원군은 정계복귀를 꿈꾸었으며 만년의 그의 헛된 꿈은 며느리 명성황후의 시해사건(을미사변)과 관련해 일본 공사 미우라에게 이용당하는 빌미를 제공하였다. 을미사변 이후 대원군은 또다시 잠시 정권을 잡지만 신변에 위험을 느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아관파천)하여 친러파가 대두하면서 축출되었다. 3년 후인 1898년 흥선대원군은 78세를 일기로 사망하였으며 1907년(광무 11) 대원왕()에 추봉()되었다. 19세기 후반 격변하는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조선의 정치사를 관통했던 흥선대원군은 그의 정치적 공과를 떠나 참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것에는 틀림이 없는 인물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흥선대원군 [興宣大院君] - 왕을 대신한 섭정으로 19세기 후반 정치를 주도하다 (인물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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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를 망하게한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완용은 매국노지만 나라가 어지러운 상황에 나온 단순 기회주의자라면,

흥선대원군은 나라를 어지럽힌 장본인이라고 생각.

명성황후와 흥선대원군의 대립은

단순히 가족간 권력욕의 갈등으로 보이지만,

고종이 누구와 같이 행동을 함께했는가를 살펴보면

흥선대원군은 왕권을 가지기위해 나라를 뒤흔든 역적입니다.

고종은 자신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직접 어떻게 처리를 할수 없었던것.

흥선대원군은 자신이 권력을 잡기위해

동학농민군과 접촉하였고, 임오군란에도 참가, 청군을 끌어들이고 일본과도 접촉하며

권력에 미쳐서 나라를 망쳤습니다.

개화기 외부적으로도 혼란한 상황에 군사반란, 전국적인 대규모 민란에 외국군대까지 들여오고 왕을 교체하려 하는등 극심한 내부혼란 상태를 만들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은 당시 시대상황을 봤을때 어느정도 타당성이 있으나,

그의 권력욕에 조선이란 나라에 끼친 해악은 일제시대를 불러왔습니다.

왕족이고 고종황제의 부친이라 제대로 평가를 내릴수 없었겠지만,

저 개인적 생각에는 일제시대를 불러들인건 흥선대원군입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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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민석 17-05-22 21:00
   
응 개소리~ 홍선대원군 없었으면 더 빨리망했음
Marauder 17-05-22 21:27
   
민비가 행한것을 보면 빈말로도 흥선대원군을 단순히 권력욕이라고 생각하기 힘듬. 대원군은 실제로 힘이있었지만 알아서 물러났음
mymiky 17-05-22 21:39
   
아들이 장성했는데, 계속  섭정을 할수 없죠.. 그래서, 명분이 없으니,, 일단은 물러났지만..
절대로 가만히 집에서 쉬고 있었던 분은 아님..

나중엔, 고종이 자기 말을 안 들으니까 .
고종 형의 아들.. (고종의 조카/즉 자기 손자)를 다시 왕위에 올리고,
본인이 정치를 하려고도 했었고;;

흥선대원군 죽었을때, 고종과의 관계는 이미 파탄이 나서, 
아들이 아버지 장례식에 참석도 안 했음..

대원군 할배가 권력욕이 없다고 하면, 지나가던 개가 웃지요ㅋ

물론,, 대원군 뿐만이 아니라..
뭐랄까?? 권력의 달콤한 맛을 본 사람들은.. 중독 증상처럼.. 그걸 잘 못 끊는다고 하잖음?
청나라 서태후도 그렇고..

흥선대원군 권력에 대한 집착은 동의하는 부분이지만..

그분 때문에, 일제시대가 온 것은 아님.
그것은 좀더 복합적인 요인이 합해진 것이지/

흥선군 혼자 잘못해서 일제시대가 왔다?
너무 큰 비약이라, 공감하기 힘드네요.
촐라롱콘 17-05-22 21:46
   
흥선대원군 방식의 개혁과 쇄국정책은 당시의 세계사적 시대의 흐름을 역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조선이라는 중병환자에게 일시적인 수혈의 효과는 거두었을지 몰라도.....

결국에는 사망선고를 막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관심병자 17-05-22 22:24
   
당시 조선은 현재 생각하는것보다 탄탄한 나라였습니다.
신미양요를 예로들면
피해가 조선이 훨씬 컷으니 이긴게 아니다라고 하지만
냉정하게 봐서는 조선이 이긴 전투입니다.
미국은 약간의 병사피해와 물자를 손해보고 최종적 전략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습니다.
조선은 미국에 비해 많은 병사손실을 입었지만 목표를 달성했습니다.
미국의 요구는 사과와 개항을 요구했고,
조선은 사과도 하지않고 개항도 하지않았으며 결국 미국함대를 물러가게 했습니다.

2차대전 독소전에서 독일이 패망하기 직전까지도 소련군과의 병력 손실비는 3:1 이었습니다.
독일군 1명 전사할때 소련군 3명이 전사했다는 거죠.
하지만 아무도 독일이 이겼다고 하지않고 소련이 이겼다고 합니다.
소련은 전략목표를 달성했고,
독일은 달성하지 못했습니다.
전쟁은 외교의 연장이고 하나의 수단이라고 볼수있습니다.

신미양요의 조선군의 저항을 고려해서
미국에서는 조선을 힘으로 누르기위해서는 당시 미국이 보유한 거의 모든 해군함대를 동원해야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오게 됩니다.
그렇게 총력전을 벌이면서 까지 조선을 개항시켜서 얻는 이득이,
손실을 덮을수 없다는 판단으로 함대를 철수시키게 된겁니다.
당시 조선은 강대국이라고 할수는 없지만,
자기 역량을 총동원했다면 나라를 지킬 힘은 있었다고 볼수있습니다.
내부에서부터 무너진겁니다.
없는 살림에 기껏 훈련시킨 신식군이 제대로된 전투도 하지못하고 명령에의해 무장해제되고 해산됐고,
대신들이 외세와 결탁해 배신했으며,
이에 저항하는자는 역적이 되었습니다.
그노스 17-05-22 22:00
   
헐...대원군을 이완용보다 더 나쁘게 보시는 듯...
무리한 경복궁 중건이나 당백전의 발행, 쇄국정책 등등을 말하자면 대원군의 책임이 있겠으나,

흥선 대원군이 집권했던 시기는 조선 말기로 '삼정의 문란'(전정, 군정, 환곡)으로 인해 조선의 국력이 심각하게 약화한 상황이었는데,

어느 정도였냐면 대원군이 집권하기 바로 전인 1862년에는 전국적으로 70여개 지방에서 농민의 항쟁이 일어나 남쪽의 제주에서부터 북쪽의 함흥에까지 확산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조선의 저런 폐단들을 바로 잡기 시작한 인물이 아시다시피 대원군입니다.

그리고 조선인으로서 일제시대를 불러들인 것이 누구였느냐를 물으신다면,

조선의 국력을 밑바닥까지 끌어내리며 대를 이은 세도정치의 권신들과 무능한 전 왕들, 그리고 직접적으로 매국을 한 인물들을 탓해야지 폐단을 고쳐보겠다고 나선 인물만을 비난하시는 것은 적절치 않은 듯 합니다.

그 시대 조선의 절박한 문제들은, 수대에 걸쳐 정통성과 권력을 가졌음에도 아무 일도 하지 않으려 한 인물들이나 집단이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라, 비록 정통성이 부족해도 권력이 있다면 스스로 일을 해보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고 봅니다.
즉 난세였다는 것이지요.

솔직히 님의 말씀처럼 대원권 역적 운운이 문제가 아니라, 그 당시에 조선 출신으로 대의와 힘을 가졌다면 그가 혹 다른 성씨의 인물이라 할지라도 왕조 교체를 해주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합니다.
대원군 시기에는 너무 늦었는지 모르지만...
     
관심병자 17-05-22 23:50
   
임오군란때 반란군을 이끌고 궁궐로 들어오는등 깊숙히 관여한 이가 흥선대원군이었고
이때 명성황후를 살해하려고 하나 놓치고 실패했습니다.
동학운동 2차 봉기때 전봉준에게 밀지를 내려 궐기하게 부추긴이가 또한 흥선대원군 이었습니다.
일본군이 경복궁을 강제로 점거했을때 입궐해 정권을 잡은이가 흥선대원군 입니다.
그후 다시 청군을 끌어들이고 동학농민군을 움직여 고종을 폐위시키고 일본군을 몰아내려다 실패하고 쫓겨납니다.

그후 일본인에 의한 명성황후 시해의 유력한 배후로 의심받고 있고,
개화파를 암살, 제거하면서 조선의 인재를 없앴으며,
무리한 경복궁 중건사업으로 국고를 탕진하고 높은세금과 몇만명을 노역에 동원하며 백성들을 쥐어짰습니다.
이때 재정을 확보하기위해 돈을 세로 만들어냈고, 이는 유통에 혼란을 초래하게됩니다.
결국 흥선대원군때 재정을 확보했다는건 이런식으로 백성에게 세금을 쥐어짜고 돈을 찍어내서 늘이는식으로 결국에는 나라의 재정을 악화시키는 무책임한 정책이었습니다.

몇번이나 왕을 몰아내려고 했고 왕후를 살해하려고했으니 그가 왕족이 아니고 고종의 부모가 아니면 목이 여러번 잘렸을 역적입니다.
          
그노스 17-05-23 01:18
   
네, 발제글로 올려주셨던 내용을 대부분 다시 댓글로 주셨는데,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대원군의 실정을 저도 인식합니다.
 
제가 다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기나 긴 세도정치 속에 쇠락을 맞은 조선왕조라는 배의 키를 대원군이 뒤늦게 잡고 국정운영을 했다는 상황을 감안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과, 대원군의 공적과 실책을 공정히 평가해야 하는데 그런 그가 이완용과 비교되는 것은 적절치 않아 보인다는 취지로 제가 댓글을 올린 것입니다.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이나, 당백전 발행 이전의 철종 시기에 이미 국고가 파탄 지경에 이르렀고 민란이 끊이지 않았는데, 삼정의 문란을 극복하고 조선 역사상 최초로 양반이 호포를 부담하게 해서 재정을 확충하며, 이런 제도가 고종의 친정 시기에도 계승이 되어 재정 확충에 일조했다고 하니,
 
훗날 대원군의 악의는 없었던 실정으로 조선의 경제가 다시 흔들렸다해도, 철종 시기까지의 참담하고 무능력한 세도정치와 과연 비교가 될것이며, 하물며 대원군이 사욕으로만 가득한 이완용과 비교되는 것이 적절하냐는 것입니다.
대원군의 실정 이후에도 대원군이 여전히 적지 않은 민심을 얻었다는 여러 기록들이 그 증거입니다.
이완용은 당연히 그렇지 못했지요.

말씀대로 대원군이 일본군을 이용했다거나, 청군을 끌어들였다하는 것도, 훗날 명성황후를 추종하는 민씨 척족들도 비슷한 일을 했고,

또한 대원군이 명성황후 시해의 유력한 배후로 의심받고 있다고 말씀하신 것도 말씀하신 그대로 의심인데 그것을 그의 죄로 단죄하기는 연구가 더 필요할 듯 합니다.
 
님의 역적 언급에 대한 제 요지는 조선 법률로 대원군이 역적으로 처단되기 부족하고 죄가 없다가 아니라, 꼭 대원군이 아니어도 대의와 힘을 가진 조선인이라면 누구라도 왕조교체를 이루었었으면 하는 제 바램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물론 대원군 시기에 그것이 많이 늦었는지는 모르지만, 말씀하신 일제시대를 피하기 위해서라면 조선이든 다른 역성혁명 정부이든, 조선의 역적이든 간에 그것이 무엇이 중요하냐는 것이지요.
태조 이성계도 결국 고려의 역적이었음을 기억하시리라 믿습니다.

사실 대원군은 그의 공적과 실책으로 평이 극과 극으로 나뉘고 호불호가 갈리므로, 딱히 제 개인적인 의견을 더 이상 강조하지 않고, 저도 여기까지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다만 이완용은 좀 ㅜㅜ
비좀와라 17-05-22 22:33
   
흥선 대원군이란 인물을 과소평가 하시는 듯...

흥선 대원군의 측근세력은 알다시피 보부상들 이었죠. 그리고 이 보부상들이 온갖 분탕질을 하는데 그게 과연 자신들의 의지 였을 까요? 당연히 흥선 대원군의 정치적인 목적에서 행해 졌습니다. 그리고 이 보부상들은 악질 친일파가 되었고요.

명성황후 침해시에도 당시 경복궁 시위군들 대부분이 일본군에 동조 했습니다. 당시 시위대 책임자 중 극히 일부만이 자신의 역활을 한 반면에 우범선 등의 대원군 패거리 들은 일본군에 적극적으로 가담 했죠. 흥선 대원군이 어떤 개혁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의 욕심을 위해서 조선을 팔아넘긴 것은 확실한 사실이에요.
비좀와라 17-05-22 22:50
   
흥선 대원군과 원세계에 관해서 지금도 이해가 안되는 대목은...

흥선 대원군은 자신이 재 집권 하려는 욕심으로 경복궁으로 일본군을 이끌고 명성황후를 죽였을 뿐만 아니라 순종비도 중상을 입혀서 결국 순종비도 죽었고 순종 역시 엄청난 정신적인 충격을 받아 병을 얻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재 집권을 하지 못했죠. 외세간섭으로 인해서 집권을 하지 못했는데 특히 러시아의 반대가 가장 심했습니다. 물론 러시아 역시 아관파천으로 인해서 엄청난 이익을 조선에서 얻기 했죠.

이 것이 청일전쟁 후에 일본이 청나라에 받은 영토를 삼국간섭에 의해 빼앗긴 것과 관련이 있단 말입니다.

후일 원세계가 황제가 되려 할 때 가장 큰 반대를 한 세력이 손문이고 일본을 손문을 이용해 원세계를 압박하는 한편 원세계에게 영토 할양 약속을 촉구 합니다.

재미 있는 것은 우리가 알기로는 요동반도라고 알고 있는데 중국 쪽 자료를 보니 산동반도라 하더군요. 다시 말해서 당시의 요동반도는 산동반도란 말입니다. 그래서 독일이 청도를 가지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한국에서는 아직도 요동반도라고 우긴단 말이죠.

이 사건이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고 후일 엄청난 파장을 불러 일으키는 사건이라 왜곡도 못하는데 무슨 배짱으로 그러는지...

하여가 원세계의 행보와 흥선 대원군이 행한 행보가 거의 같아요. 이것이 미스터리란 말이죠. 그 밖에 이상한 점은 또 많습니다. 고작 100년 전의 역사인데 말이죠.

산동반도를 내놓으라는 일본의 요구로 인해 5.4 학생운동이 일어나는 것이고 이 학생운동의 주동자들이 후일 중국의 좌익세력으로 성장하며 이들에게 영향받은 이가 바로 모택동 입니다. 바로 5.4 학생운동이 바로 중국 공산당을 만들게 되는 것 이죠.

이런데도 어떻게 요동반도가 바로 산동반도라는 사실을 왜곡하려 하는지 또 그걸 지적하지 않는지 아직도 이해 불가. 그래서 한국 역사 학자들을 별로 신용 안 합니다. 조금만 뒤져보면 나오는 사실을 도대체 언제까지 왜곡 하려는지 아직도 이해불가 임.
     
촐라롱콘 17-05-23 13:01
   
[[재미 있는 것은 우리가 알기로는 요동반도라고 알고 있는데 중국 쪽 자료를 보니 산동반도라 하더군요. 다시 말해서 당시의 요동반도는 산동반도란 말입니다. 그래서 독일이 청도를 가지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한국에서는 아직도 요동반도라고 우긴단 말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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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무슨 말씀인지 전혀 이해가 안되네요....???
요동반도가 산동반도라니 무슨 말도 안되는~~~

청일전쟁을 마감하는 시모노세키조약에서 일본이 대만-팽호열도와 더불어
할양받은 지역은 분명히 요동반도가 맞습니다만......???
하지만 러시아가 주도한 삼국간섭으로 인해, 일본이 3,000만냥의 배상급을 추가로
지급받는 조건으로 다시 청나라에게 토해내게 됩니다만...
다만 청일전쟁이 진행되는 와중에 일본이 점령했던 산동반도 북단의 '위해위'는 일본이
청나라측의 배상금지불이 완료될 시점까지 계속 점령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이후 러시아는 요동반도 남단의 여순과 대련을 조차하고 이를 시베리아철도와
연결시키는 동청철도부설권을 청나라로부터 획득하게 됩니다!

그리고 1898년에는 독일이 산동지역에서 일어난 독일선교사들 피살사건을 구실로
청나라에게 압력을 가해 청도(칭타오)가 포함된 산동반도의 교주만을 조차하게 됩니다.

독일의 교주만조차는 이후 1차대전 시기에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1차대전에 참전한 일본이
악전고투끝에 청도의 독일군을 몰아내고 청도를 점령하게 되며....
일본은 이를 발판으로 이전 독일의 세력권이었던 산동반도지역 전역으로 일본의 권익을
확장하기 위해... 당시 원세개 정권에게 압력을 가해 산동지역에서의 일본의 권익을 보장하는
21개조의 요구안을 관철시키게 됩니다.

1차대전 이후 체결된 파리강화회의에서 중국은 승전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차대전 이전의 서구열강들로부터 강요받았던 불평등관계가 거의 개선되지 못했으며....
더구나 중국의 주권을 심각하게 침해하게 되는 일본의 21개조의 요구안은 승전국들부터
승인받은 사실에 분노한 중국의 학생과 민중들이 대대적으로 들고 일어난 것이
바로 5.4운동입니다.
rozenia 17-05-24 13:10
   
많은 분들이 대원군을 두고 개화시대의 역행을 주도해서 조선근대화를 막았다던가, 아니면 반대로 부패청산하고 그래도 제대로 나라꼴을 만들었다던가 하시는데

개인적으로 장단점모두 맞는말이겠지만 사람일이기에 대원군도 근대화를 하긴해야겠다고 생각했을거라 봅니다. 다만, 청나라만 들여봐도 아편전쟁과 에로우전쟁 이후 개털리고 개항장을 필두로 각지에서 이권들이 열강들에게 나눠지고 일본도 굴복한 상황에서 두려웠겠죠.

최소한 국내를 정치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안정시키고 차근차근 접근하려 생각했을거라 생각합니다. 천주교인학살같은 경우 여느 소설에서 등장하듯이 정치적인 선택이 아닐까요? 서원을 철폐하고 제한적으로 종교를 개혁하며 세수를 정비하고 나름 중앙군을 정비할정도로 국정에 착실하고 나라돌아가는 꼴을 제대로 보던 사람이 단순하게 싸우려고 든건 아닐겁니다.

다만, 확실히 권력욕이 강한 사람이었고 후반에 기반을 잃은 이후의 행보는 좋지 못했던 것 또한 사실이죠. 다만, 철종의 무개념한 시절이 가고 대원군이 집권했던 10여년간 국가적인 시각에서 볼때 조선은 철종시절에 비해 획기적으로 경제와 산업, 민생 모든분야가 회복되었고 안정되었으며 근본적으로 부패를 바로잡는부분과 당대 지방부패의 근본이라 할수있는 서원을 정리했다는 것은 업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명성황후 쪽이 심각했다고 봅니다. 나름 10년간 쌓고 안정시켜놓은 모든걸 삽시간에 말아먹었다고 봐야겠죠. 부패의 상징 민씨패밀리와 본인 스스로의 사치스러움. 중국의 서태후를 연상하게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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