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余)씨의 기원은 백제의 왕족인 부여(扶餘)씨에 둔다.
중국 《수서》(隨書) 《송서》(宋書)와 《일본서기》 백제복국군 편에 백제 의자왕의 왕자를 여풍장(余豊璋), 왕숙을 여충신(余忠信), 정승을 여의수(余宜受)로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백제본기〉와 《송서》〈백제전〉, 《일본서기》 등에 백제가 나당연합군에게 패망한 후 왕후장상 1만2천여 명이 당장 소정방에게 피납되어 당나라 수도 장안에 백제촌(百濟村)을 이루어 살았고, 일본에 있던 왕자 여풍장은 복국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복흥군과 함께 고구려로 피신하였다는 기록과 그 뒤 부왕(父王)이 왕족 일행과 군거하는 당나라의 백제촌(百濟村)으로 잠입 합류하여 후일을 기하였다는 학설이 있다. 의령 여씨 문중에 따르면, 백제 왕자 여풍장의 후손 여선재가 고려 때 환국하였다고 전한다.[1]
의령 여씨의 시조는 백제 의자왕의 후손인 여선재(余善才)이다. 여선재(余善才)는 송나라 간의대부(諫議大夫)에 올랐다. 그가 1103년(고려 숙종 8) 송나라에서 고려에 귀화하자, 고려 조정에서는 그를 의춘군(宜春君)에 봉하였다. 의춘은 의령(宜寧)의 옛 지명이다. 여선재의 아들 여영후(余英候) 이후의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 때 문과에 급제한 여현경(余玄景)을 1세로 하여 세계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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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서씨(扶餘徐氏)의 시조는 백제 의자왕의 첫째(혹은 셋째 아들이라고도 함, 아직도 학계의 설이 분분함) 아들 부여융(扶餘隆)이다. 660년(의자왕 20)에 백제가 나당(羅唐) 연합군에 패한 뒤에 멸망되어 의자왕과 태자 등 2,000여명은 당나라에 압송되었다. 당나라 고종은 의자왕에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의 품계를 내리고, 아들 부여융에게 서씨의 성을 하사하여 본국으로 보냈다고 한다. 부여서씨의 문호는 열렸으나, 그 후 세계는 알 수 없었는데 서융의 원손으로 고려 때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내고 태원군(太源君)에 봉해진 서존(徐存)을 1세조로 받들고 부여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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