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께서 전쟁 초기에는 군량 문제로 상당히 곤란을 겪으셨으나 이후에는 둔전제로 상당한 군량을 비축하셨더군요.
충무공께서 평소 둔전을 얼마나 세심하게 관리하는 분이셨는지, 전쟁 전인 1587년에도 충무공께서 녹둔도 둔전관으로 부임하시자 처음으로 녹둔도에 풍년이 들었다고 합니다.
통제사라는 고위직으로 영전하셨어도 직접 스스로 둔전을 챙기고, 전쟁 중에도 둔전이 계속 되어 남해안과 섬 일대의 토지에다 농사를 지어 군량미를 충당하셨다고 합니다.
군인들이 지켜주고 군령 또한 엄하니 백성들이 충무공의 진중으로 몰려 들어 이들도 같이 경작과 목축을 했다고 하네요.
칠천량 해전 이후 수군이 사실상 와해가 된후 다시 복직하시었어도, 정유년 10월 29일부터 이듬해인 무술년 2월 16일까지 108일 동안에만 무려 486석의 군량을 비축하는 집념을 보이시기도 했다고 합니다.
휘하 장병들이 굶주리지 않게 최선을 다하셨던 충무공께서 정치를 하셨어도 여간해선 휘하 백성들도 굶주리지 않게 하셨을 것 같다는...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사노비 관노비 승려 포작(고기잡이 천민) 등 급하게 잡다한 군졸들을 동원해서 급변해가는 전황 속에 부족한 군량으로 옥포해전에서 승리를 이끌어 냅니다.
같은 날 선조는 개성을 떠나 이미 평양에 당도했는데, 그 다음 날에는 어선(임금에게 올리는 음식)을 풍족히 하라는 전교를 내립니다.
'어선은 생물로 할 것이며 수량도 풍족하게 하라. 동궁 이하도 다 이 예에 따르도록 하라.'
집 뺏기고 쫓기는 와중에도 챙겨먹을 것 다 챙겨먹는 강력한 군주를 무시하시면 안됩니다.
위의 충무공식단을 떠나서...조선시대의 설령 국왕의 식단이라 하더라도
우리나라 전왕조 시기 또는 다른 나라의 왕국들과 비교해서는 상대적으로
검소하고 소박한 밥상이라 할 만 합니다.
최고지존인 국왕이라 하더라도 평소 12첩 반상 이상을 접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았으며
권력층 사대부들의 대다수도 일반적으로는 7첩~9첩 반상 위주였습니다.
심지어 큰 흉년이나 기근 또는 전란 등 국가적 위기상황이 닥치면 국왕이라 하더라도
고통분담 또는 근신의 차원에서 3첩~5첩 반상으로 끼니를 때우는 경우 또한 흔했습니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왕실과 사대부들이 근본적으로는 검약을 미덕으로 삼았기 때문에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귀족중심의 전왕조 시기나 타 국가들과 비교하면 소박하다 할 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