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문선비(宇文鮮卑, Yuwen)는 중국 고대 오호십육국시대에 존재한 선비(鮮卑)의 일파이다.
우문선비는 모용부(慕容部)·탁발부(拓跋部) 등과 같은 선비(鮮卑)의 한 부족으로서, 시라무렌 강 유역을 중심으로 유목 생활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우문부는 처음에 모용부에 복속하였고, 모용부가 탁발부에 의해 멸망하자 거주지를 북위(北魏) 초 무천진(武川鎭)으로 옮겨 그 현민(縣民)이 되었다.
557년우문부출신의 우문태(宇文泰)는 처음 북위에서 일어난 6진의 난에 참가하였다가 하발악(賀拔岳)에게 귀순하여두각을 나타내었다. 하발악의 사후 그가 가지고 있던 기반으로 관중지방에서 세력을 과시했다. 세력을 확대한 우문태는 서위를 멸망시키고 북주(北周)를 세웠다. 북주는 581년수나라에게 멸망하였다.
탁발선비(拓跋?卑)는 선비의 한 지파이다. 화북지역에 북위등 왕조를 세웠다. 돌궐어로는 탑가치라 했다.
단석괴의 통일선비가 붕괴하고 다시 분열된 선비들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이 탁발선비이다. 3세기 후반 탁발역미가 내몽골호흐호트분지로 남하하여 거기를 근거지로 하였고, 4세기 초 탁발역미의 손자 탁발의이와 탁발의로가 서진을 멸망시킨 흉노와 유연과 싸워 대선우(大?于)를 칭함으로써 음산 일대의 선비의 통령이 되었다. 탁발의로는 병주자사 유곤에게 상건하(桑乾河) 상류, 구주산(句注山) 이북의 영토를 요구하고 대동분지를 포함하여장성너머의 땅을 영유했다. 이와 같이 북아시아의 유목민족이 화북의 영토를 요구한 것은 탁발선비가 처음이다. 그리하여 탁발선비는 화북의 중국인과 정치적 군사적 문화적으로 직접적인 관계를 가졌다.
315년 박발의로는 대나라를 건국하고 그 왕을 칭하였다. 호흐호토 분지 성락(盛?)에 도성을 쌓고 여기를 북도(北都), 대동분지 평성(오늘날의산서성다퉁 시)에도 도성을 쌓고 남도(南都)로 삼아 수도로 정하였다.
이처럼 탁발선비의 지배가 화북에 미치면서탁발선비는 중국 스타일의 성을 쌓고 제도도 중국풍으로 바꾸었다. 그 뒤 일시적으로 분열 상태에 빠졌지만 탁발십익건이 왕이 되자 성락 남쪽에 새로운 성을 쌓고 중국인 관료를 기용한 뒤, 형제상속에서 부자상속으로 바꾸는 등 국가의 제도를 중국식으로 바뀌었다. 그 뒤 일시적으로 전진이 화북의 패권을 쥐었던 적이 있지만, 동진과 항쟁하다 이내몰락하고 386년 탁발십익건의 손자 탁발규가 대나라의 국화를 위나라(북위)로 개명, 황제에 즉위했다. 북위가 태무제시기에 화북을 통일하고 강남에서는 유송이 동진을 대체함으로써 중국에는 남북조시대가 시작되었다.
독발선비(禿髮鮮卑)는 선비족의 일파로서, 남량을 건국하였다. 독발부는 돌궐에 가까운 선비족으로 남양이 멸망한 이후에 북위에 귀족되었다.
모용선비(慕容?卑)는 고대 북아시아의 유목 민족중 하나인 선비족의 일파이다. 4세기 이후 중국의 오호 십육국 시대때 전연, 후연, 서연, 남연등의 여러 나라들을 건국했다.
삼국 시대때 지금의 허베이성의 우북평(右北平) 서쪽 상곡(上谷)에 이르는 지역에 목연(木延)이라는 이름의 대인(大人, 혹은 大酋長)이 인솔한 선비계 부족이 출현하였는데, 선비족은 부족명과 부족 구성원들의 성씨를 대인의 이름으로 정하는 관습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따라 부족명을 모용, 성씨를 모용씨라 정하였다. 2세기경은 모용선비가 활약한 시기라 추측된다.
3세기에는 주거 영역을 대릉하(大凌河) 하류 지방으로 옮겨 유목 생활 외에 농경도 하였다. 3세기 말에 당시의추장 모용외(慕容?)는 스스로를 선비대도독(鮮卑大都督)이라 일컬었고, 서진에서 영가의 난을 피하여 투항해온 한족사람들을 임용하여 정무를 맡게 하였다. 또한 한족풍의 예법과 제도를 채용하였으며, 동진으로부터 평주목(平州牧),요동군공(遼東郡公) 등의 관작을 받았다.
그의 아들 모용황(慕容?)은 스스로를 연왕(燕王)이라 칭하고, 수도를 용성(龍城)에 정함으로써 전연을 건국하였다. 모용황은 이후에도 세력을 확장하여 황제로 즉위하였고, 화북 지방의 동부를 지배하였다. 전연이 멸망한 뒤 후연과 남연이 건국되었다. 5세기초 북위의 화북 통일로 북위에 병합되었다.
모용선비의 일부는 티베트계의 현지인을 제압하고 토욕혼을 세웠다. 토욕혼은 중국의 남북조와 관계를 맺고 있었으나 635년에 당나라에 항복하여 예속상태에 놓이게 되었고, 663년티베트계의 토번(吐蕃)에게 멸망하였다.
단부선비(段部鮮卑)는 서기 2세기경에 단석괴(壇石槐)가 세운 선비족의 일파이다. 그러나 단석괴의 사후 다시 분열되었다.
걸복선비(乞伏鮮卑)는 선비족의 일파이다.
오호십육국중 하나인 서진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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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족은 중원과 하서회랑, 청해, 요하유역에 전연(모용), 후연(모용), 남연(모용), 토욕혼(모용), 서진(걸복), 남량(독발), 북위(탁발), 서위(탁발), 북제(고), 북주(우문), 수(보륙여=양), 당(대야=이)등 수많은 왕조를 세웠다.
선비족은 북만주흥안령 자락과 눈강 유역, 동몽골 시라무렌강 유역과 요하 유역에서 수렵과 목축, 조방농업을 영위하던 몽골-퉁구스계 부족이다.
선비족은 모두 몽골-퉁구스계이기는 했지만, 시공의 차이에 따라 혈연적 근친성과 풍습을 달리하고 있었다.
이는 같은 퉁구스 계열인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고대 일본, 고려, 금, 청 등이 시공의 차이에 따라 성격을 달리하고 있던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중국, 외교관의 눈으로 보다 -백범흠
북위시대(탁발선비) 호한융합정책때 바꾼 성
탁발-원
모용-모
우문-우
보육여-양
대야-이
독고-류
나, 연, 위, 안, 왕, 낙, 소, 채, 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