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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5-28 15:44
[한국사] 중국인의 고구려사에 대한 생각,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
 글쓴이 : leehisto
조회 : 3,079  

안녕하세요 
가생이 닷컴 해외번역 글 재밌게 눈팅하다가 역사게시판이 활발하고,
전공이시거나 해박하신 분들이 많은 것 같아

다른분들의 의견이 궁금한 것 있어 가입하고 올립니다.
 

제목 없음.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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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를 아주 가끔보는데, 
얼마전 역사관련 동영상에 한 중국인이 고구려는 한국(고려)과 관계없다는 글에 '욱'해서 
제가 알고 있는것  + 동북아역사재단의 반박 내용 영작으로 장문의 글을 올렸습니다. 
그러자 그 중국인은 자신은 고구려가 중국역사라고 주장하는 것이 절대 아니라고 답글 달았습니다. 

내용 정리 

 - 중국은 정치적 목적으로 고구려사를 왜곡하지 않는다 역사는 역사다. 
 - 오늘날 한국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지만  지배층/서민층/도읍지 등 많은 것이 다르다. 
 - 고구려의 귀족 왕족 계층은 한반도가 아닌 북쪽에서 왔다 (부여/ 고리국 말하는듯) 

 - 고구려는 신라(한국)와 당나라(중국)이 멸망시키고 병합한 나라다.  
 - 고구려는 말갈과 거란 과 같은 개념으로, 한국과 중국 어느나라에 귀속된 역사가 아니다.  
 

 한때 저도 관심있게 역사를 공부했기에 알고있는 것으로 더 반박하고 싶었지만 도돌이표가 될 것 같아 보류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정보를 찾아보니 우리쪽에서 주장하는 것이 관념적인 내용이 좀 있다고 생각이 되었구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고구려 빼았기, 자신들의 역사라고  주장한다고 들어온 것과는 좀 다른 의견이었습니다. 물론 이 중국인 개인의 소견이겠지만요 


이 중국인은 당나라가 중국이라 말하는데 고구려에 대한 논리를 고대로 당나라에 적용하면,
당나라 지배층은 선비족이었잖아요. 그럼 당나라도 중국의 역사가 아니라 주장할 수도 있는것인데..

또한 한국을 신라만으로 보는듯합니다. 신라에서 정체성이 확립되긴했지만 백제,고구려 유민들과 당나라를 몰아내는 과정에서 확립된것 아닌지요 ?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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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좀와라 17-05-28 15:53
   
문제는 당나라가 지금의 중국과 무슨 관련이 있냐는 말이죠.

지금의 중국은 대만과 같이 남중국 즉 남만계 국가 세운 나라 입니다. 그래서 일본과 같은 계열 이에요.

북중국과 북방민족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국가가 지금의 중국이란 말입니다.

북중국계와 남중국계의 알력이 얼마나 심한데요. 남중국은 언제나 북중국의 지배하에 놓여 있었으면서 자신이중국의 전통을 이었다고 하죠. 그럼 도대체 남중국이 중국문명에 얼마나 기여 했는지 증명이나 하고 그런 말을 했으면 하네요.

애당초 지금의 중국은 당나라 / 고구려 / 백제와 신라 모두와 관련이 없는 과거의 피 지배층 이었단 말입니다.
하등 아무련 관련이 없어요.
설설설설설 17-05-28 16:03
   
-중국은 정치적목적으로 고구려사를 왜곡하고있음. 한반도북부와 만주일대에 존속했던 고구려는 중국의 중화사상에 배반하는 대표적인 국가중 하나. + 부여,발해 이하동문

-고구려는 한국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훗날 우리나라에 고려라는 나라의 국가형성에 엄청난 영향을 끼침. 동아시아 국가는 우리를 한국이라 부르지만 세계인들은 우리를 korea 즉, 고려인 고구려인이라 부르고있음.
지배층은 철처한 예맥계 현 한국민족의 중요구성원들이며 도읍지가 만주일대에 있다고해서 이것을 다르다라고 명시할순 없음. 우리가 예속시키지 못한 영토일뿐

- 고구려의 귀족 계층은 부여에서 나왔고 그건 백제 역시 마찬가지. 부여 역시 한국사의 연장선이며 한국사의 중요한 일부중 하나임. 부여는 고구려에 최종적으로 병합되었으며 부여인들 역시 고구려에 흡수되었고 그것은 현 한국민족의 중요구성원중 일부가됨. 애초에 한반도에서 왔다는 말에서 부터 철처한 반도사관을 기준으로 역설하고 있음. 엄연히 말하지만 지금 현 한국의 영토가 한반도에 비정된것은 맞다만 만주일대는 고대에 우리의 영토였고 현 시점에 영토가 우리에게 예속되지 못했다고해서 역사 역시 예속되지 못한다는 근거는없음.

- 신라,당나라가 멸망 시킨것은 맞지만 그렇다면 그건 백제 역시 마찬가지. 신라가 삼한을 통합한후 조직된 9서당중 절반은 백제,고구려,말갈 계로 구성되었음. 고대에서 인구란 곧 국력이며 신라는 모두 포용시킬려고 노력했음.

- 고구려는 말갈과 거란 같은 개념이 아님. 말갈은 후대에 만주족으로서 중국에 동화되었지만 우리는 중국에 동화되지 않고 역사를 유지하고있음. 그 어떤 나라도 고구려가 멸망 후 천년이 넘은시간동안 제사를 지내면서 그에 대한 공을 보답하고자 하는 노력은 없었음. 이런 인식은 후대에도 이어지며 중국의 왕조 송나라,명나라 역시 고구려를 한국사의 일부로 보았으며 수 많은 기록에서 그것을 말해줌. 예로 조선에 방문한 명나라 사신들 역시 " 귀국들은 도대체 무슨 재주가 있었길래 수,당의 백만대군을 2번이나 격퇴시켰습니까 " 이런 시선은 중국뿐만 아니라 몽골역시 마찬가지.

-추가적으로 훗날 금나라 역시 시조가 우리나라 사람이고 한반도북부에서 부터 영역을 중원으로 확장시켰으니 그러면 금나라는 한국사임?
     
leehisto 17-05-28 16:13
   
님의 지식이 든든합니다.

후.. 맘같아서는 영작해서 반박하고싶은데 ㅋㅋㅋ 엄두안남..
          
설설설설설 17-05-28 16:18
   
중국에서 기록한 많은 " 동이전 " 기록들 역시 읍루,왜를 제외한 나머지 국가들을 대체적으로 하나의 문화권으로 인식하는 부분 역시 중요한 근거중 하나입니다.
tuygrea 17-05-28 16:22
   
저런식으로 처음에는 고구려는 한국과 관련없다로 시작해서 나중에는 고구려는 중국역사다라고 차근차근 뺏어가려고 할껄요?ㅋ
     
leehisto 17-05-28 16:24
   
이미 옛날부터 고구려 유적 표지판에 중국 지방정권이라고 설명해두고 있잖아요  에효
          
설설설설설 17-05-28 16:26
   
고구려가 지방정권이면 동아시아전체가 중국의 지방정권임;;

중국이 고구려사 왜곡은 정치적목적이 아니다. 라고 말하지만 결국 뻔하죠

그냥 정치적목적이 있는 왜곡입니다.

역사라는건 정치적권력에 휘둘려선 안되고 정치적목적에도 휘둘려선 안됩니다.
               
정욱 17-05-28 21:57
   
언제는 환빠라고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던 기역이납니다.
관심병자 17-05-28 20:00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가 고조선이고,
우리 민족 시조가 단군왕검 입니다.

이건 현대의 대한민국에서 정한게 아니고,
조선도 그렇게 생각했고, 고려도 그렇게 생각했고,
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 부여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고구려, 백제, 신라가 같은 민족인 것이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삼한일통 이라고 칭한것은,
한반도 남부의 삼한이 아니라 고조선의 삼한을 가르킨 겁니다.
우리 조상들이 생각한 우리민족은 한반도에 사는 민족이 아니라,
단군왕검이 세웠던 고조선의 백성을 가르키는 겁니다.

우리가 인식하는 북방의 우리민족 국가들은 고조선이라는 공통적인 기원이 있기때문에 성립되는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일제가 그렇게도 고조선을 부정한것일 겁니다.
나라가 독립하지 못하고 일제의 식민사학 원형대로 우리스스로 고조선을 부정했다면 고조선의 후손인 부여, 고구려, 발해등은 이민족의 역사가 됐겠죠.

광복이 된지 70여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식민사학의 잔재가 남아 고구려, 발해의 소수의 지배층만이 우리조상이고 대다수 백성은 이민족이었다는 개논리가 우리역사학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일제 사학자들이 우리 조상들이 지배층이었다고 띄워주니까 대다수가 좋다구나 하고 넘어갔습니다만,
소수의 지배층만이 우리 조상이라는 주장으로는 언젠가는 우리민족의 국가라고 할수 없게될것입니다.
러시아가 발해를 러시아 소수민족의 역사라고 말했습니다.

신라는 고구려, 백제를 같은 민족으로 여기고 있었고,
고려도 발해를 같은 민족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거란은 고조선의 8조금법이 유지됐고, 고구려를 계승한다고 주장했던 나라입니다.
고려는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멀리했습니다.
당시 떠오르는 거란보다 망해서 사라진 발해를 더 중요시 여겼다는 겁니다.
조상들은 발해를 그리도 중시했는데도 러시아의 지방역사로 소수민족 역사로 뺏기는걸 눈뜨고 지켜보게 된겁니다.

만주, 간도, 연해주, 한반도의 국가들과 부족들은 고조선과 단군이라는 공통의 기원을 갖고있습니다.
현재의 주류사학의 한민족은 일제가 지정한 조선민족의 범위를 그대로 이어받아,
이성계가 세운 조선 백성만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고구려, 발해 전체를 우리민족이라 하지못하고 일부 지배층만이 우리민족이라고 하게되는 것입니다.
이 주장대로 라면,
고조선 내에서도 한민족은 소수를 차지하던 부족으로,
고조선도 우리역사라고 할수없게 되는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생각하던 민족관과 달라지는 것으로, 일제의 학자들이 조선통치를 유리하게 우리역사를 조작해놓은 결과가 나오게 되는겁니다.
몇백년후의 한국인들이 과연 고구려, 발해가 우리 민족의 국가가 맞을까라고 생각할수도 있게 되는것입니다.
굿잡스 17-05-28 22:08
   
되레 반문할 것이 서토 짱개들은 청왕조와 지금의 중국과는 전혀 다른 불계승관계로

서토 내부 민중의 태평천국이나 쑨원의 근대 신해혁명 자체가 멸만흥한(滅滿興漢) 즉 청의 만주족을 멸하고

한족 어쩌고 쳐하자고 나와놓고는 뭔 고대 쭝국과 엮으려 하는지 되레 반문하고 싶군요.(지금 짱개들이

남의 역사인 고구려 동북공정질이나 배놔라 감놔라 쳐할 때인지??)

19세기 말, 만주족 팔기군 병사가 한족 성주(시장)을 구타한 사건이 있었지만, 팔기군 병사는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을 정도로 청나라 내내 만주족들은 정복자이자 지배자라는 신분적 특권을 누리고 살았다.

서구 열강과 일본의 공세에 몰려 위험한 상황에서도 청나라의 지배층들은 "나라를 외국에게 넘겨줄 지언정, 집안의 종(한족)에게는 절대로 줄 수 없다."라고 단언했을만치, 청나라는 엄연한 정복 왕조였다.

1850년대, 한족들로 구성된 태평천국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남경을 지키던 만주 팔기군 병사들이 태평천국군에게 모조리 살육당하자, 분노한 청나라 조정은 태평천국에 가담한 반란군 병사들이 항복해와도 절대로 항복을 받아주지 말고 전부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고 그 바람에 태평천국의 난은 16년이나 오랫동안 계속되고 말았을 정도로 만주족과 한족 사이의 민족적 갈등은 심각했다.

- 청사 저자 임계순 -

청제국의 만주족은 시작부터 말까지 만주본위 서토인 차별의 철저한 이원적

정치체재 아래 서토를 지배 강점한 정복왕조사.



청황실의 사회상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95283&sca=&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EC%B2%AD%EC%A0%9C%EA%B5%AD&sop=and
굿잡스 17-05-28 22:24
   
세종실록 45권, 세종 11년 7월 4일 무신 6번째기사 1429년 명 선덕(宣德) 4년 

예조에서 삼국 시조에게 제사지낼 것을 건의하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신라·고구려·백제의 시조(始祖)에 대해서는 이미 사당을 세웠으니, 청하건대 사전(祀典)에 기재(記載)하고 치제(致祭)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禮曹啓: "新羅、高句麗、百濟始祖, 今已立廟, 請載祀典致祭。" 從之。



세종실록 51권, 세종 13년 1월 10일 을해 5번째기사 1431년 명 선덕(宣德) 6년 

호조에서 백제·고구려·신라 시조의 제전을 2결씩 급여하다
 
호조에서 아뢰기를,

"충청도의 백제(百濟) 시조(始祖)와, 경상도의 신라(新羅) 시조(始祖)와, 평안도의 고구려(高句麗) 시조(始祖)의 제전(祭田)을 각기 2결(結)씩 급여하시기를 청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戶曹啓: "忠淸道 百濟始祖, 慶尙道 新羅始祖, 平安道 高句麗始祖祭田, 請各給二結。" 從之。


세조실록 22권, 세조 6년 10월 17일 기미 1번째기사 1460년 명 천순(天順) 4년 

영숭전·단군·고구려 시조·기자전에 나아가 제사를 행하다
 
임금이 친히 영숭전(永崇殿)에 제사하고, 마침내 단군(檀君)·고구려 시조(高句麗始祖)·기자전(箕子殿)에 나아가 제사를 행하였다. 승지(承旨) 홍응(洪應)에게 묻기를,

"고구려 시조가 누구인가?"하니, 홍은이 대답하기를,
"고주몽(高朱蒙)입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삼국(三國) 중에서 고구려가 막강하였다." 하였다.

○己未/上親祭于永崇殿, 遂詣檀君、高句麗始祖、箕子殿行祭。 問承旨洪應曰: "高〈句〉麗始祖誰?" 應對曰: "高朱蒙。" 上曰: "三國高句麗莫强焉。"


성종실록 219권, 성종 19년 8월 24일 을묘 3번째기사 1488년 명 홍치(弘治) 1년 

성절사 채수가 북경으로부터 돌아와 문견 사건을 올리다


1. 신(臣)이 옥하관(玉河館)에 있을 때에 운남(雲南) 향공 진사(鄕貢進士) 최헌(崔瓛)과 서로 통어

(通語)하였는데, 하루는 경사(經史)를 담론하다가 최헌이 신에게 이르기를, ‘새 천자(天子)는 심

히 엄명(嚴明)하여 온 천하가 모두 심복(心腹)하고 있으며, 또 기순(祁順)·동월(董越) 등의 사신들

이 돌아와서 모두 그대의 전하(殿下)는 현명하다고 하고 칭송하여 중국(中國)에서도 다 알고 있

습니다. 그대의 전하는 과연 어떠한 임금입니까?’고 묻기에, 신이 대답하기를, ‘우리 전하께서는

성명인서(聖明仁恕)하시고, 학문을 좋아하시고 정사를 부지런히 하시며, 재예(才藝)에 이르러서

도 그 정묘함이 극에 이르지 아니함이 없으시어, 온 나라 사람들이 떠받들기를 부모와 같이 하

며, 두려워하기를 신명(神明)과 같이 하니, 참으로 성주(聖主)입니다. 또 우리 나라 옛날의 고구려

(高句麗)·신라(新羅)·백제(百濟)·동옥저(東沃沮)·북옥저(北沃沮)·예맥(穢貊) 등지를 모두 하나로

합하여 땅은 수천리(數千里)를 보유하고 갑병(甲兵)이 수십만이며, 나라는 부(富)하고 병정은 강

하며, 지성으로 사대(事大)하여 무릇 진공(進貢)하는 토산물은 모두 친히 감동(監董)하고 선택하

며, 배표(拜表)722) 하는 날에는 새벽에 교외(郊外)까지 나와 전송하고, 성절(聖節)과 정조(正祖)

에는 백관을 거느리고 배하(拜賀)하십니다.’ 하니, 최헌이 말하기를, ‘과연 사람들의 말과 같습니

다. 참으로 현군(賢君)이십니다. 그러나 그대의 말로 성(聖)이라 함은 지나치거니와, 황제는 참으

로 성명(聖明)이십니다. 성(聖)자를 번왕(蕃王)에게 붙이는 것은 적당하지 않습니다.’ 하기에, 신

이 대답하기를 ‘순(舜)임금은 동이(東夷)의 사람이고, 문왕(文王)은 서이(西夷)의 사람입니다. 현

인(賢人)·성인(聖人)이 나는 바를 어찌 화이(華夷)로 구분하겠습니까? 공자(孔子)도 또한 필부(匹

夫)이면서 성인이시거늘, 어찌 우리 전하께서 해외(海外)에 거(居)한다 해서 성인이 되지 못한단

말입니까?’ 하니, 최헌이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정말 옳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一, 臣在玉河館, 與雲南鄕貢進士崔瓛相語, 一日談論經史, 瓛謂臣曰: "新天子甚嚴明, 天下皆心服。 且自祁順、董越等使還, 皆稱君之殿下亦賢明, 中國皆知之。 君之殿下果何如主也?" 臣答曰: "我殿下聖明仁恕, 好學勤政, 至於才藝, 無不極其精妙, 一國之人, 戴之如父母, 畏之如神明, 眞聖主也。 且我國昔之高句麗、新羅、百濟、東沃沮、北沃沮、穢貊等地皆合爲一, 有地數千里, 帶甲數十萬, 國富兵强。 至誠事大, 凡進貢土物, 皆親自監擇; 拜表之日, 晨出郊外送之; 聖節、正朝, 率百官拜賀。" 瓛曰: "果若人言, 眞賢君也。 然君言聖則過矣。 皇帝則眞聖明矣, 聖字不宜加於蕃王也。" 臣答曰: "舜, 東夷之人; 文王, 西夷之人。 賢聖所出, 豈分於華夷? 孔子亦匹夫而聖, 豈以我殿下居海外而不得爲聖乎?" 瓛曰: "君言正是。"
     
leehisto 17-05-28 22:56
   
이런 역사 기록들도 확실히 있긴 한데 저 중국인이 말하는 것은
한국인들이 고구려를 자기네 역사라고 생각(착각)하지만 실제로(계승의식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관계가 없다는 게 골자같습니다. 동북공정도 같은 궤 같구요 .

종족(?)  문화 유물  같은 실질적인 면에서 고구려가 우리의 일부라는 것.
이 관점으로 알아두어야지 싶습니다

중국은 송사宋史에  고려가 고구려 계승했다는 것도 헷갈려서 오기한것이라 하는데..
          
굿잡스 17-05-28 23:07
   
한국인들이 고구려를 자기네 역사라고 생각(착각)하지만 실제로(계승의식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관계가 없다는 게 골자같습니다>?? 아래도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데
짱개들이 다르다는 그 골자 내용이 몬가요? ㅋ
               
leehisto 17-05-28 23:09
   
골자 : 주 내용
저 중국인의 주장이
' 한국인들이 고구려를 본인들의 역사라 착각하는데 실제로 한국과 관계가 없다' 라고 주장하는거요 .
                    
굿잡스 17-05-28 23:34
   
?? 한글이 이해가 안되시는지??

<' 한국인들이 고구려를 본인들의 역사라 착각하는데 실제로 한국과 관계가 없다' 라고 주장하는거요 > 그 짜장이 주장하는 그 내용이 뭔지 묻는 겁니다. 역사 토론에서
근거나 내용없이 그냥 아니다 주장하는 게 토론이고 논할 가치가 있는지?? 그냥
유아들이 칭얼대는 소리거나 정치적 궤변이지.
                         
leehisto 17-05-28 23:41
   
어투가 공격적이신데.. 자제합시다

본 게시글에 캡쳐에 중국인이 쓴 바와 같이 고구려 지배층이 북쪽에서 왔기 떄문에 한국과 다르다고 한 것이나, 신라만이 한국 원류라고 생각하는것. 
수도 , 인종, 지배층이 다르다.

더 나아가자면 동북공정에서 멸망 후 다수의 유민들이 당으로 유입됬다거나 그런내용이죠

저 중국인도 그런걸 자세히 쓰지는 않았네요

예로부터 고구려에 계승의식 가지고 제사 지냈다
명나라사신의 인식 이런것은 사실 관념적이지요

고구려의 근본이 되는 예맥족은 한국민족을 형성한  주요한 원류이다 
이런것은 구체적 사실입니다

물론 님에게 다른 자료를 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구체적 사실들을 체계화해서 우리가 알고 왜곡에 대응해야  한다는견해를 적은겁니다~
          
굿잡스 17-05-28 23:29
   
1.한국인의 혈통

 한국인은 백제와 신라 외에도 많은 고구려인의 피를 이어받았다. 남북국시대 신라의  9주 중 3주(오늘날 경기도, 황해도, 강원도 일대)가 고구려의 옛 지역에 설치됐고, 이 지역 주민들은 대부분 고구려 왕조의 지배를 받던 고구려인이었다. 고구려인의 인구가 적어도 통일 신라 인구의 1/3 즈음에 육박했다고 볼 수 있는 증거로 경주를 지키던 9서당 중 3서당인 황금서당, 벽금서당, 적금서당이 고구려인으로 구성된 부대였다는 사실을 들 수 있을 듯하다. 이 수치는 오히려 백제인의 서당 부대였던 흑금 서당 개수보다 훨씬 많은 것이다. 남국 신라 인구 중 고구려인의 비율이 백제인보다도 오히려 많았다고 까지 조심스럽게 추측해 볼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서당의 숫자로 인구 비율을 추측하는 것은 분명한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므로 이것을 분명한 논거로 삼기에는 무리가 있다.(고려 전성기나 조선 시대를
보면 남북국시대의 신라보다 훨씬 세력권이나 지배영역이 확장된건 말할 필요 없을 것이고)

  남북국 시대 신라 시기 고구려인들은 9주와 패강진을 제외한 신라 남부 지역에도 많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전라북도 익산(금마저), 경상남도 진주(강주의 중심지)에는 당시 고구려 유민들이 상당 수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보덕국왕이자 보장왕의 아들이었던 서자 고안승은 신라왕에게 김씨 성을 하사 받고 경주에 거주하였다. 이 사실은 오늘날 한국 성씨의 다수를 차지하는 김씨 성 중에도 상당수 고구려 유민 특히 고구려 왕족 안승의 후손도 있다는 증거인 셈이다. 발해 멸망 후에도 많은 고구려 혈통이 고려로 귀순하여 오늘날 한국인의 조상이 됐으며, 이후 고려, 조선조가 평안도, 함경도 지역을 수복하면서 그 지역에 살던 다수의 고구려인의 후예들도 우리 역사 무대에 다시 들어와 오늘날 한국인의 조상이 됐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한국에는 고구려인을 조상으로 삼는 성씨가 여럿 있다. ㅡ 물론 조선조를 거치며 성씨가 많이 뒤바꼈기 때문에 성씨로 조상을 따진다는 것은 아주 믿을만한 것은 아니다 ㅡ 오늘날 진주 강씨, 횡성 고씨, 봉성 온씨, 협계 태씨 등은 고구려인들을 시조로 모시는 성씨들이다. 이러한 혈연적은 계승은 한국인이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직접적인 증거인 것이다.

 2.한국어

한국어에는 많은 고구려어의 흔적들이 남아있다. 고구려어 수사가 현재 한국어 수사와 일치하지 않는 문제는 있지만, 그래도 한국어가 고구려어의 큰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2000년 임병준이 제작한 자료에 따르면 현재 남아 있는 고구려어 어휘 70여개 중 50개 내외의 단어가 현대 한국어와 관련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정도의 관련성은 한국어가 고구려어의 직접적이고 강한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사실을 볼 때, 고구려어가 일본어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고, 한국어와 관련이 적다는 말은 기존의 일부의 주장은 옳다고 볼 수 없다. 한국어는 분명 고구려어를 계승한 언어이다.

 
3.국호 Korea

  세계에 고구려의 국호를 나라의 국호로 사용하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Korea는 고려에서 나왔고, '고려'는 고구려 중엽 이후 고구려인들이 직접 사용했던 고구려의 국호였다. 오늘날 '고려'라 하면 왕건의 고려만을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는 잘못된 것이다. 삼국유사에서 일연은 고구려라는 단어 대신 '고려'라는 말은 고구려라는 의미로 썼고, 오늘날 한국과 중국에 남아있는 많은 지명들에서는 '고려'라는 명칭이 고구려의 뜻으로 많이 쓰이고 있다. 한국은 오늘까지도 고려(고구려)라는 나라 이름을 쓰는 나라이다.

*근대시기 고종의 대한제국의 대한 자체도 고구려 백제 신라의 대삼한을 아우러는 국호로서

이후 이게 현대에 와서 국민이 국가인 대한민국으로 명확히 이어짐.

 
4.계승 의식

 고구려 멸망 후 통일 신라, 발해 시대에도 고구려 계승 의식을 유지했고, 이는 고려 시대를 거치면서 더욱 강화되어 오늘날 한국에 까지 이어졌다. 고구려 계승 의식이 계속 전승될 수 있었던 큰 이유 중 하나는 고구려 계승 의식을 가진 고구려 유민들이 통일 신라 사회, 발해 사회에서 영향력 있는 귀족의 지위를 어느 정도 유지했다는 점이다. 발해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남북국시대 신라에서도 고구려 귀족은 백제 귀족들보다 더 높은 대우를 받았다. 백제 귀족이 4, 5두품으로 몰락한 반면 고구려 귀족은 6두품 신분을 계속 유지했고, 고구려인의들의 탄탄한 세력은 이는 결과적으로 태조 왕건의 고려라는 나라가 세워질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고려 건국의 주축 세력이 과거 고구려의 영역이었던 패서 출신이었다는 점을 본다면 적어도 초기 고려의 귀족들은 상당수가 고구려 혈통을 지닌 사람들이었다고 보아야 옳다. 패서 지역은 고구려 시기 고구려 3경(평양, 국내, 한성) 중 한 곳이었던 한성(재령, 장수산성)이 있었던 곳이고, 고구려 계승 의식이 매우 강했을 수도 평양과 강 하나를 두고 있는 지역인 만큼 순수 고구려 혈통을 지닌 사람이 많은 곳이었다. 이들은 고구려 변방의 고구려 계승 의식이 적었던 거란, 말갈(여진)인들과는 달랐다. ㅡ 이런 까닭에 오늘날에도 만주족들은 발해에 대한 계승 의식은 밝힐 지언정 고구려에 대한 계승 의식은 거의 갖고 있지 않다. ㅡ태조 시기 황해도 평산, 봉산 지역을 뿌리로 삼으며 등장하여 이후 고려의 귀족들이 된 성씨들의 경우 고구려인의 혈통과 상관이 있다고 보는 것은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발해 멸망 후 발해의 유민들이 고려 귀족들에 합쳐지면서 이런 고구려의 계승 의식은 한층 강화되었다. 오늘날 한국인들이 고구려의 후손을 자처하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4.평양이라는 도시

 평양은 한국 역사에서 가장 유구한 전통을 지닌 도시이다. *오늘날 학계 연구를 보면
평양은 고유 명사보다 일반명사로 보이면서 여러 군데가 존재하는 듯 하며* 평양은 동천왕 시기 일시적으로 고구려의 수도인 적도 있었고, 고국원왕 시기에도 잠시 수도로 삼은 적이 있었다. ㅡ 물론 고국왕왕 시기 평양 동황성을 오늘날 평양이라고 확정할 수는 없다 ,ㅡ 427년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를 한 후 평양은 한국 역사상 최강국이던 고구려의 전성기 시절을 보낸 곳이었다.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고구려의 유명인들인 연개소문, 을지문덕, 온달, 영양왕, 보장왕, 연남생 등의 고구려인들은 평양을 무대로 활동했고, 고려 시대에는 평양을 수도 중 한 곳인 서경으로까지 삼아 매우 중시하게 됐다. 조선조에도 평안도 지역에서 오늘날로 치면 광역시, 거점 중심 도시일 '부'(평양부)의 자위를 받은 평안도 지역의 유일한 도시이기도 했다. 이러한 정서는 오늘날 한국인에게까지 고구려의 수도이자 북방 지역의 중심지 '평양'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각인시키고 있다. 분단된 북한 지역의 수도가 평양이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평양이 한반도 북방의 중심지였던 것은 적어도 수천년 전인 고조선, 고구려, 고려의 서경 시기와 그 연원이 닿아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평양은 분명 고구려가 한국에게 물려준 큰 고구려의 유산임이 분명하다.

5.거문고

 한국 국악의 양대 현악기는 거문고와 가야금이다. 가야금이 남방의 가냘프고 여성적이며 섬세한 음률은 내는 악기라면, 거문고는 북방인의 단단하고 거칠고 투박한 음을 내는 악기이다. 왕산악이 만든 이 악기는 고구려의 소리를 전해주는 악기이다. 오늘날까지 한국인들은 거문고를 한국의 중심 전통 악기로 계승 발전시켜왔다. 고구려 멸망 후 거문고는 전라북도 남원 지역에 거주하던 고구려 유민에게서 전수돼 온 한반도로 퍼져나가 계승됐다고 한다. ㅡ 출처 : 위키ㅡ  옥보고는 고구려의 거문고에 많은 곡들을 붙여 명실상부한 한반도 전체의 악기로 확립하는 역할을 했다. 고구려의 악기를 사용하는 나라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 오직 한국뿐이다. 한국은 분명 고구려의 음악을 계승한 나라이다.

 
6.해서탈춤(복식)

 

한국의 황해도 일대에서 전승돼 오는 봉산 탈춤과 같은 춤들은 본래 해서 탈춤에서 유래했다고 알려져 있다. 봉산탈품은 약 200년 전 생겼지만 그 연원은 훨씬 오래 전인 고구려까지 추측해볼 수 있다. 봉산 탈춤의 춤사위는 무용총에 그려진 한삼을 손목에 잡고 춤을 추는 고구려인의 춤사위와 매우 닮아있다. 한국 춤에만 남아있는 한삼은 부드러운 선을 표현하는 춤 도구로서 한국 이외에는 없는 매우 독특한 춤 도구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한국인의 느린 3박자의 전통 춤사위는 고구려인의 춤과 관련이 있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7.온돌

  오늘날 세계적으로 퍼져있는 온돌은 본래 부여와 고구려 등 만주와 북부 한반도에서 쓰이던 난방 장치였다. 이후 한반도 전역으로 전파됐다. 이 특이하면서도 매우 효율적인 장치 온돌은 일본이 빼앗아간 조선 건물에 하룻밤을 묵던 미국인이 너무나 효과적으로 난방을 하는 조선 건물의 온돌이라는 장치를 보고 오늘날 현대식 보일러의 영감을 얻었다고도 알려져있다. 전 세계인이 지금은 향유하는 이 온돌은 중국, 일본에는 본래 없는 고구려인의 요소를 계승한 한국의 전통적인 난방 장치이다.

*오늘날 고고학적 상황에선 고조선시대 우리 열국중 하나인 북옥저에서 온돌의 기원으로
보는 비중의 무게가 높으며 이 북옥저는 이후 고구려에 흡수되어 고구려의 전통 난방양식으로 나아가 오늘날 우리 고유의 난방으로 현대에까지 이름.

 8.별주부전

별주부전은 한국의 대표적인 전통 서사 작품이다. 이 이야기는 김춘추가 연개소문을 만나러 평양을 방문하여 위기에 처했을 때, 목숨을 건질 수 있게 귀띔을 해준 고구려 사람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이다. 별주부전이 고구려에서(아마 신라에서도) 널리 퍼져있는 이야기였던 것으로 보이며, 이후 별주부전은 한국 서사 문학 작품으로 고려, 조선 시대를 거쳐 오늘날 한국에까지 이어져왔다.

 

이밖에도 문학면에서 고구려는 한국 한문학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한시 황조가, 여수장우중문 시 등 뛰어난 고구려의 한시 작품은 오늘날 한국 한시의 거의 시조격으로 평가받는 작품들이다. 한국인들의 고려, 조선 시대 시기 뛰어난 한문학 실력은 고구려인에게도 물려받은 면이 있다고 할 것이다. 고구려인은 매우 문학적인 사람들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들이 입으로 아님 글로 남긴 여러 서사 문학 작품들과, 벽화에 나타나는 별과 천체에 대한 고구려인의 상상력은 한국인의 우수한 언어 감각, 과학적 상상력 등으로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다고 볼 수 있다.

 9.한국성의 '치'

조선조 까지 한국 성에는 ‘치’라는 독특한 구조물이 있었다. 치는 본래 고구려의 성에 있는 시설로 적을 사방에서 포위하여 공격할 수 있는 시설이다. 이러한 시설은 조선조 시기 지어진 수원 화성에도 잘 나타나는데, ‘치성’이라는 구조물로 남아있다. 한국 축성술에는 과거 우수했던 고구려의 축성 기술이 이어져 왔다고 볼 수 있으며, ‘치’와 같은 축성법은 중국, 일본성과는 차별되는 한국의 전통 축성 기술이다. 이러한 축성술의 계승은 당연히 통일 신라, 고려 시대 고구려 축성술을 아는 고구려인들을 통해 전수됐을 것으로 생각된다.

*치는 앞선 요하 고조선 선대 홍산문화에서 이미 그 원형이 나옴.

 
10.씨름, 태권도(수박도)

고구려 각저총 벽화에는 현재 한국의 전통 투기 종목인 씨름으로 보이는 힘겨루기 경기 장면이 나온다. 각저총에 나오는 자세로 겨루기를 하는 경기는 한국, 중국, 일본에서 한국의 씨름이 거의 유일하다. 세계에서 고구려의 각저총에 나오는 씨름을 하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요새 침체기를 맞고 있는 전통 씨름은 본래 한반도 전역에서 널리 행해졌던 전통 투기 종목이었다. 한국의 전통 씨름은 분명 고구려에서 유래한 것이 분명해 보인다. 한국의 국기 태권도의 기원 역시 고구려에서 찾을 수 있다. 안악3호분 벽화에는 마치 오늘날 택껸을 하는듯한 자세로 손으로 무예를 겨루는 장면이 나온다. 수박도는 고려, 조선 시기에도 행해졌고, 오늘날 태권도의 성립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1.삼국, 삼한 -역사기록

중국, 일본의 어느 전통적인 사서도 고구려를 자국의 역사로 기술한 역사서는 없다. 한국의 삼국사기, 제왕운기, 삼국유사 등 고려 시대 쓰여진 사서에서는 고구려를 분명한 한국사의 일부로 기술하고 있다. 이렇듯 사서에 고구려를 자국사로 서술한 것이야말로 고구려가 한국사의 부정할 수 없는 역사의 일부이며 20C 후반에 들어와 중국에 내새운 고구려가 중국사라는 논리가 얼마나 허구적인 것인지를 분명히 꼬집는 증거이다. 이런 사서의 증거 때문에 중국에서도 고구려가 한국사가 아니라는 것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 가령 중국인들이 쓴 중국어판 위키백과를 보니 조선의 역사의 일부로 고구려를 분명히 기술해 놓았더라.

http://islmoa.blog.me/120132382482
     
굿잡스 17-05-28 23:00
   
선조실록 39권, 선조 26년 6월 5일 무자 5번째기사 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 

유 원외를 접견하고 관의 설치, 중국군의 주둔 등을 논의하다

.
.

또 말하기를,

"귀국은 고구려 때부터 강국이라 일컬어졌는데 근래에 와서 선비와 서민이 농사와 독서에만 치중한 탓으로 이와 같은 변란을 초래한 것입니다. 지금 천조는 귀국을 금구 무결(金甌無缺)한 국가로 삼으려고 하는데 귀국은 이를 알고 있습니까?"
하였다.

又曰: "貴國自高句麗, 號稱强國, 邇來士民, 唯事耕田、讀書, 馴致此變。 今天朝使貴國爲金甌, 貴國知否?


고종실록 36권, 고종 34년 9월 29일 양력 2번째기사 1897년 대한 광무(光武) 1년 

김재현 등 716명이 황제로 칭할 것을 연명으로 상소문을 올리다


우리나라는 지역 경계가 중국과 잇닿아 있고 나라가 나누어지고 통합된 것이 일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신라(新羅),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 세 나라는 각각 그 땅의 주인으로 다같이 왕의 칭호가 있었으며 심지어 송양(松讓), 가야(伽倻), 예맥(濊貊), 여진(女眞), 탐라(耽羅) 등의 작은 나라들도 각기 왕으로 불렀습니다. 고려 때 통합하여 다만 묘호(廟號)만 썼으며 본조(本朝)에서는 옛 관습을 그대로 물려받았습니다. 이것은 당(唐) 나라와 송(宋) 나라 이후 그 나라들이 멀리서 존호(尊號)를 견제하였기 때문입니다.
.
.

그러나 우리나라는 삼한(三韓)의 땅을 통합하여 영토는 사천리를 뻗어있고 인구는 2천만을 밑돌지 않으니 폐하의 신민(臣民)된 사람치고 누군들 우리 폐하가 지존(至尊)의 자리에 있기를 바라지 않겠으며 지존의 칭호를 받기를 바라지 않겠습니까? 옛 것을 인용하여 오늘에 증명하고 여정(輿情)을 참작하고 형세를 헤아려 보아도 실로 시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라건대 폐하는 여정(輿情)을 굽어 살피셔서 높은 칭호를 받아들여 만국에 공표하여 천하에 다시 새로운 관계를 세우신다면 종묘 사직(宗廟社稷)을 위하여 더없이 다행하고 신민에게 더없이 다행이겠습니다."


고종실록 36권, 고종 34년 10월 13일 양력 2번째기사 1897년 대한 광무(光武) 1년 

국호를 대한으로 하고 임금을 황제로 칭한다고 선포하다

반조문(頒詔文)에,

"봉천 승운 황제(奉天承運皇帝)001) 는 다음과 같이 조령(詔令)을 내린다. 짐은 생각건대, 단군(檀君)과 기자(箕子) 이후로 강토가 분리되어 각각 한 지역을 차지하고는 서로 패권을 다투어 오다가 고려(高麗) 때에 이르러서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을 통합하였으니, 이것이 ‘삼한(三韓)’을 통합한 것이다.

우리 태조(太祖)가 왕위에 오른 초기에 국토 밖으로 영토를 더욱 넓혀 북쪽으로는 말갈(靺鞨)의 지경까지 이르러 상아, 가죽, 비단을 얻게 되었고, 남쪽으로는 탐라국(耽羅國)을 차지하여 귤, 유자, 해산물을 공납(貢納)으로 받게 되었다. 사천 리 강토에 하나의 통일된 왕업(王業)을 세웠으니, 예악(禮樂)과 법도는 당요(唐堯)와 우순(虞舜)을 이어받았고 국토는 공고히 다져져 우리 자손들에게 만대토록 길이 전할 반석같은 터전을 남겨 주었다.

짐이 덕이 없다 보니 어려운 시기를 만났으나 상제(上帝)가 돌봐주신 덕택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안정되었으며 독립의 터전을 세우고 자주의 권리를 행사하게 되었다. 이에 여러 신하들과 백성들, 군사들과 장사꾼들이 한목소리로 대궐에 호소하면서 수십 차례나 상소를 올려 반드시 황제의 칭호를 올리려고 하였는데, 짐이 누차 사양하다가 끝내 사양할 수 없어서 올해 9월 17일 백악산(白嶽山)의 남쪽에서 천지(天地)에 고유제(告由祭)를 지내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정하고 이해를 광무(光武) 원년(元年)으로 삼으며,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의 신위판(神位版)을 태사(太社)와 태직(太稷)으로 고쳐 썼다. 왕후(王后) 민씨(閔氏)를 황후(皇后)로 책봉하고 왕태자(王太子)를 황태자(皇太子)로 책봉하였다. 이리하여 밝은 명을 높이 받들어 큰 의식을 비로소 거행하였다. 이에 역대의 고사(故事)를 상고하여 특별히 대사령(大赦令)을 행하노라.




결론> 중세 고려는 이미 삼국시대 고려(고구려) 계승 의식으로 역사관과 영토,문화, 천하관을

가지고 국호를 통해서도 분명히 드러내었고 이후 조선시대에 와서도 고조선 단군과 삼국 시조의

사당을 모시어왔고 이후 근대 시기 고종의 대한제국의 이 대한(大韓)

역시 고구려 백제 신라의 큰 삼한을 이어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이후 임시정부의 대한민국은

이런 대한제국의 국호를 다시 계승해서 오늘날 국민이 주인인 대한민국으로 도도히 이어져 왔군

요. 서토 역시도 지금의 일당 독재 공산당의 동북공정질 쳐하기 이미 고대부터 고구려를

우리 역사로 인식해왔고 이는 여러 문헌 및 금석문등 고고학적 부분에서도 다르지 않군요.
설설설설설 17-05-28 22:33
   
" 왕의 별궁 및 그 자제들이 거처하는 곳을 모두 궁이라 한다. 왕의 모비(母妃)와 자매 중에 따로 사는 사람은 집과 전토(田土)를 받아, 탕목(湯沐 생활비)에 쓰도록 하는데, 더러는 비워 두고 거처하지 아니하며, 민간에게 이득을 보게 하여 세금을 바치도록 한다. 계림궁(鷄林宮)은 왕부(王府) 서쪽에 있고 부여궁(扶餘宮)은 유암산(由巖山) 동쪽에 있으며, 또한 진한(辰韓)ㆍ조선(朝鮮)ㆍ장안(長安)ㆍ낙랑(樂浪)ㆍ변한(卞韓)ㆍ금관(金冠)의 6궁이 성안에 나뉘어 배치되어 있는데, 모두 왕의 백숙(伯叔)ㆍ곤제(昆弟)가 거처하는 곳이다. 왕의 계모(繼母)가 거처하는 궁을 적경궁(積慶宮)이라 한다. 지금 공족(公族)으로서 현달한 자리에 있는 사람을 볼 수 없고, 별궁은 10채 중 9채는 비어 있다. 그 전토를 과거는 수창궁(壽昌宮)에서 관할했는데, 지금은 모두 왕부에 소속시켜 또한 관원을 두어 관장하게 한다. " -  고려도경(高麗圖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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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별궁에다가 한반도 고대국가 이름 그대로 사용함.
별궁뿐만 아니라 주요관직에도 부여,조선 이라는 이름 사용.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고려시대의 이자겸 조선국공으로 책봉됨.
그리고 고려의 왕자들은 부여공으로도 책봉됨.
     
설설설설설 17-05-28 22:34
   
문종의 아들 왕수 같은 경우는 1080년(문종 34)에 개부의동삼사 검교사공 수상서령 상주국 부여후 식읍 일천호(開府儀同三司檢校司空守尙書令上柱國扶餘侯食邑一千戶)에 봉해졌고 형제들은 금관후 비(金官侯丕), 변한후 음(卞韓侯邈), 진한후 유(辰韓侯愉) 등에 봉해졌습니다. 그리고 고려 최고가문으로 우리에게도 이름이 익숙한 이자겸 같은 경우는 처음에 한양공漢陽公으로 봉해지고 1124년 조선국공朝鮮國公으로도 봉해짐 출처 - 고려사(高麗史)
설설설설설 17-05-28 22:39
   
성종 12년인 서기 1481년, 명나라에서 사신이 오자 조선에서는 창덕궁 인정전에서 연회를 베푼다. 이 때 사신은 어린 기생이 추던 춤이 꽤 마음에 들었나 보다. 그래서 사신과 성종 사이에 이런 문답이 오갔다.

“이것이 무슨 춤입니까?”
하였는데, 임금이말하기를,
“이 춤은 고구려때부터 있었던 것으로이름을 동동무(動動舞)라 하지요.”
- 성종실록 132권 12년 8월 3일

성종의 답변은 조선이 고구려를 계승하였다는 전제로 한 말이며, 사신도 이런 성종에게 전혀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로부터 7년 후, 역시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였던 원접사 허종이 올린 상소에는 다음과 같은 언급이 나온다.

묘문(廟門)을 나와 단군묘(檀君廟)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는 무슨 사당입니까?’ 하므로 말하기를, ‘단군묘(檀君廟)입니다.’ 하니, 말하기를, ‘단군(檀君)이란 누구입니까?’ 하기에 ‘동국(東國)에 세전(世傳)하기를, 「당요(唐堯)가 즉위(卽位)한 해인 갑진세(甲辰歲)에 신인(神人)이 있어 단목(檀木) 아래에 내려오니, 중인(衆人)이 추대하여 임금으로 삼았는데 그 뒤 아사달산(阿斯達山)에 들어가 죽은 곳을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하니, 말하기를, ‘내 알고 있습니다.’ 하고,드디어 걸어서 사당에 이르러 배례(拜禮)를 행하였습니다. 사당 안에 들어가 동명왕(東明王)의 신주(神主)를 보고 이르기를, ‘이 분은 또 누구입니까?’고 하기에, 말하기를, ‘이 분은 고구려 시조(高句麗始祖) 고주몽(高朱蒙)입니다.’
-성종실록 214권 19년 3월 3일

역시 사신은 조선이 고구려시조의 사당을 지었다는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뿐, 당시엔느 조선의 학자들도 사실로 여기던 기자에 대하여 주로 관심을 가졌을 뿐이고, 고구려가 중국 역사라는 인식을 보이지는 않는다. 여기에 단군묘와 기자묘가 평양에 있는 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고구려는 물론 고조선 역시 조선의 역사라는 사실을 인정하였다 할 수 있다.

같은 해 이번에는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채수의 장계에는 명나라 관리 최헌과의 대화가 실려 있는데, 여기서도 당대 중국인들의 역사의식을 엿볼 수 있다.

하루는 경사(經史)를 담론하다가 최헌이 신에게 이르기를, ‘새 천자(天子)는 심히 엄명(嚴明)하여 온 천하가 모두 심복(心腹)하고 있으며, 또 기순(祁順)·동월(董越) 등의 사신들이 돌아와서 모두 그대의 전하(殿下)는 현명하다고 하고 칭송하여 중국(中國)에서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대의 전하는 과연 어떠한 임금입니까?’고 묻기에, 신이 대답하기를, ‘우리 전하께서는 성명인서(聖明仁恕)하시고, 학문을 좋아하시고 정사를 부지런히 하시며, 재예(才藝)에 이르러서도 그 정묘함이 극에 이르지 아니함이 없으시어, 온 나라 사람들이 떠받들기를 부모와 같이 하며, 두려워하기를 신명(神明)과 같이 하니, 참으로 성주(聖主)입니다. 또 우리 나라 옛날의 고구려(高句麗)·신라(新羅)·백제(百濟)·동옥저(東沃沮)·북옥저(北沃沮)·예맥(穢貊) 등지를 모두 하나로 합하여 땅은 수천리(數千里)를 보유하고 갑병(甲兵)이 수십만이며, 나라는 부(富)하고 병정은 강하며, 지성으로 사대(事大)하여 무릇 진공(進貢)하는 토산물은 모두 친히 감동(監董)하고 선택하며, 배표(拜表)19881) 하는 날에는 새벽에 교외(郊外)까지 나와 전송하고, 성절(聖節)과 정조(正祖)에는 백관을 거느리고 배하(拜賀)하십니다.’ 하니, 최헌이 말하기를, ‘과연 사람들의 말과 같습니다. 참으로 현군(賢君)이십니다. 그러나 그대의 말로 성(聖)이라 함은 지나치거니와, 황제는 참으로 성명(聖明)이십니다. 성(聖)자를 번왕(蕃王)에게 붙이는 것은 적당하지 않습니다.’ 하기에, 신이 대답하기를 ‘순(舜) 임금은 동이(東夷)의 사람이고, 문왕(文王)은 서이(西夷)의 사람입니다. 현인(賢人)·성인(聖人)이 나는 바를 어찌 화이(華夷)로 구분하겠습니까? 공자(孔子)도 또한 필부(匹夫)이면서 성인이시거늘, 어찌 우리 전하께서 해외(海外)에 거(居)한다 해서 성인이 되지 못한단 말입니까?’ 하니, 최헌이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정말 옳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성종실록 219권 19년 8월 24일

최헌은 고구려까지 합하였다는 채수의 말에 반론을 제기하지 않음은 물론 중국 삼황오제 중 한 명인 순임금이 한족이 아닌 동이족이라고 말하면서 성종의 현명함을 칭송하며 조선의 왕이 성군이 될 수 있겠냐는 최헌에게 반박하고 있으며, 최헌은 이를 받아들인다. 여기서 ‘순임금도 우리 민족, 그러므로 중국 고대사도 우리 역사’라는 결론을 이끌어내는 건 동북공정 못지않게 과장스럽지만 적어도 당시 중국인의 고대사에 대한 인식을 엿볼 수는 있다.

이 뿐만이 아니다. 아예 명나라 사람이 조선이 고구려를 계승하였다는 걸 직접적으로 인정한 기록도 나온다.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장수 유원외와 선조의 대화 중 일부이다.

(유원외가) 또 말하기를,
“귀국은 고구려 때부터 강국이라 일컬어졌는데 근래에 와서 선비와 서민이 농사와 독서에만 치중한 탓으로 이와 같은 변란을 초래한 것입니다. 지금 천조는 귀국을 금구 무결(金甌無缺)한 국가로 삼으려고 하는데 귀국은 이를 알고 있습니까?”
-선조실록 39권 26년 6월 5일

요동 부총병으로 임진왜란에 참전한 조승훈은 요동 출신이라고 조선에 대해 동족의식과 비슷한 발언까지 한다.

총병이 말하기를,
“앞서 많은 후사(厚賜)를 받았는데 나는 조선과는 한 집안 사람입니다.【요동(遼東)은 옛 고구려(高句麗)의 땅으로 동령위(東令衛)의 사람들은 우리 나라를 가리켜 본향(本鄕)이라고 했다.】 중국 조정의 문무 관원들이 이곳에 많이 나와 있어 용도가 매우 많으니 두루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받으려면 선뜻 받지 어찌 근교(勤敎)를 기다리겠습니까.”
- 선조실록 103권 31년 8월 9일

그렇게 조선을 한 집안으로 여겼으면 좀 잘 싸우지 그랬냐는 생각은 잠시 접어두고, 고구려가 멸망한지 수백년이 지난 상황에서도 요동 출신 사람들이 요동이 고구려의 옛 땅이라는 이유로 조선을 본향으로 여겼단느 점은 역시 고구려의 계승자는 명나라가 아닌 조선이라고 인식되었음을 알려준다.

1598엔 명나라 병부조사 정응태가 조선이 일본을 끌어들여 명나라를 친공하려 한다고 무고한 사건이 일어났다. <선조실록>에는 정응태의 무고 내용이 실려 있는데, 그 일부를 보자면 다음과 같다.

찬획 주사(贊畫主事) 정응태(丁應泰)의 한 주본(奏本)에,
“속번(屬藩)의 간사함은 증거가 있고 적당(賊黨)의 떼지은 음모는 이미 드러났습니다. 신이 협강(夾江)의 중주(中洲)에 행차하여 콩과 기장이 무성한 것을 보고 길가는 요동(遼東) 사람에게 물었더니, ‘이곳은 기름진 땅이어서 수확이 서쪽 지방보다 몇 배나 된다. 전년에 조선이 요동 백성과 쟁송(爭訟)하자, 요동 도사(遼東都事)가 여러 차례 단안(斷案)을 내렸는데, 조선 사람들이 불평을 가지더니 만력(萬曆)4103) 20년4104) 에 끝내 저들 나라에 세거(世居)하는 왜인을 사주, 제도(諸島)의 왜노(倭奴)를 불러 군사를 일으켜서 함께 천조(天朝)를 침략함으로써 요하(遼河) 동쪽을 탈취하여 고구려의 옛 지역을 회복하려 하였다.’는 등의 말을 하기에, 신은 놀라움과 괴이함을 금하지 못하였습니다.
- 선조실록 104권 31년 9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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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고구려를 확실히 동일국가로 보고있었음.
고구려가 한국사냐 아니냐는 솔직히 논란거리도아님.
우리보고 너넨 한국 아니야!! 이거랑 뭐가다름?
꽃보다소 17-05-29 00:10
   
역사에 전문가는 아니지만 토론을 하려고 한다면 우선 근거를 들고 자신의 주장을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중국인이나 일본인들은 그런 것이 없죠.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설득하려고 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을 합니다.
최종적으로는 전부 날조다라고 얘기하기 때문이죠.

옛 역사에서 우기려고 한다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완벽할 수 없기 때문이죠.

몇가지 사안으로 그럴 확률이 높다는 것이지 영상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합리적 추론이죠.
우리나라 역사에 기록이 남아도 그 기록을 부정할 수도 있고요.

즉 국력만이 답입니다. 죽기전에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고 싶군요.
정욱 17-05-29 08:22
   
하다하다 못해서 고구려가 중국역사가 아니니까 이젠 한국역사가 아니다? 그럼 누구 역사야 짱개들아? 한나라.당나라가 짱개역사냐? ㅋㅋ ㅂㅅ 짜장들. 지들이 만주족들부터 300년 동안 노예생하면서 살다가 한국역사보니까 배아픈 모양이죠. 타이완보다 못한 주제에 아주 ㅈㄹ하네.
     
위구르 17-05-29 18:41
   
수천년간 만주족-한민족-거란족-몽골-선비족-흉노족-저족-갈족-강족-티베트-위구르-튀르크-일본 등에게 차례로 돌림빵 당하며 더러운 중화사상을 머릿속에 주입시키기는데 사활을 걸었던 미개한 짱개들이 대륙을 장악한 대가입니다. 그런 놈들은 다 멸절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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