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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6-05 09:20
[한국사] 동양대 김운회교수님 말씀 요약
 글쓴이 : 스리랑
조회 : 1,353  


동양대 김운회교수님 말씀 요약


청나라 고증학자 호위(胡渭)는 우공추지(禹貢錐指)에서 “산동반도는 요(堯) 임금 때부터 조선의 땅”이라고 썼다. 사마천의 사기에 “요(堯)임금은 의중을 시켜 우이((嵎夷)의 땅, 즉 해 뜨는 곳(양곡·暘谷)에서 일출을 경건히 맞게 하였다(卷1 五帝本紀 堯)”고 하는데 주석에 “우이(嵎夷)의 땅은 청주(靑州)”라고 했다. 청주는 현재의 산동반도다. 이 기록은 서경(書經) 요전(堯典)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우이(嵎夷)는 누구인가.



우공추지禹貢錐指에 “동이 9족은 우이(嵎夷)이고, 우이는 조선의 땅(四庫全書 經部 禹貢錐指 4卷)”이라고 했다. 나아가 사마천의 사기에서 “양곡은 바로 해 뜨는 곳(日所出處名曰陽明之谷)”이라고 한다. 양곡을 매개로 산둥반도=양곡=고조선의 관계가 성립하는 것이다. 일단 이 기록이 고조선과 관련된 가장 오래된 시기, BC 2400년경의 기록이다.



사마천의『사기』에 “연나라는 발해와 갈석산의 틈새에 하나로 모이는 곳으로, 동북으로는 오랑캐와 접하고 있다”고 한다. 여기서 오랑캐는 동이, 즉 고조선이다. 그래서 이 지역은 고조선 연구에서 중요하다. 대릉하 상류. 고조선 영역의 핵심 쟁점 가운데 하나인 패수(浿水)인데 사서들을 종합하면 패수(浿水)는 란하 또는 대릉하다. 대릉하의 발원지 가까이에 새롭게 떠오르는 최고의 인류문화 발상지인 홍산문화의 유적지가 있다.



고조선 연구에서 더 중요한 부분은 숙신(肅愼)이다. 숙신은 물길(勿吉)·말갈(靺鞨) 등으로 불리다 후일 여진족· 만주족이 되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고조선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



숙신에 대한 가장 이른 기록은 사마천의 사기에 나온다.

“우 임금은 남으로는 북발, 서로는 융적 강족, 북으로는 산융과 발식신(發息愼) 등을 위무했다.”(卷1 五帝本紀 舜) 그런데 이에 대한 주석으로 후한 때 대학자 정현(鄭玄)은 “식신(息愼)은 숙신으로 동북방 오랑캐”라고 해설했다. 일주서(逸周書)에도 “직신(稷愼)은 숙신(王會解篇)”이라고 한다. 숙신은 중국 전설의 시대부터 존재해왔던 민족이며 ‘발식신=발숙신’임도 알 수 있다.





사기(史記)에 “공자(BC551~BC479)가 진나라(현재의 카이펑 인근)에 머물 때 화살 맞은 매들이 떨어져 죽자 공자가 ‘이 화살은 숙신의 것’이라고 했다(卷47 孔子世家)”고 한다. 공자가 숙신의 화살을 정확히 알고 있음을 보여준다. BC 6세기 숙신의 영역은 넓게 잡으면 현재 허베이(河北) 북부, 황하 이북이나 연나라 이북인데 이는 고조선 영역과 일치한다. 이 기록은 국어(國語:춘추시대 8국 역사서)에 바탕을 둔 것으로 전한 때 유향(劉向)이 지은 설원(說苑)(卷18 辨物篇), 한서(漢書)(卷27五行志) 등에도 전한다.




중국 최고(最古) 지리서인 산해경(山海經:BC3~4C)에는 “열수 동쪽에 열양(列陽)이 있고 그 동쪽에 고조선이 있는데 바다의 북쪽, 산의 남쪽에 위치해 열양은 연나라에 속한다(卷12 海內北經)”고 한다. 같은 책에 “동해의 안, 북해의 모퉁이에 나라가 있고 이 나라를 조선이라고 부른다(卷18 海內經)”고 한다.


사기 조선열전의 주석으로 실린 사기집해(史記集解)에는 “조선에는 습수(濕水)·열수(洌水)·산수(汕水) 등의 강이 있는데 이 세 강이 합해 열수가 된다. 수경주에는 습여수(濕餘水)가 나오는데 이 강이 유수(濡水:란하의 다른 명칭)와 합류하는 강이라고 한다(濡水).

현대의 대표적 고대사가 리지린은 “이 습여수가 바로 습수”라고 지적한다. 따라서 열수는 란하다.


리지린은 “열수는 란하의 지류인 무열수(武列水)와 같은 강”이며 그 근거로 수경주에 “유수가 흐르는 도중 무열계(武列溪)를 지나면서 이곳을 무열수라 하고 무열수의 약칭이 열수”라고 한 기록과 열하지(熱河志)에 “란하가 과거 무열수”라 하고, 건륭황제의 저작인 열하고(熱河考)와 수경주에서도 “열하는 무열수”라고 하는 기록을 들었다. 즉 ‘란하=무열수=열하=열수’라는 것이다.



열하지(熱河志)의 기록에 따르면, 한나라 이전까지는 란하를 유수라 했고 그것을 난수(難水)라고 썼으며, 당나라 때 이르러 란하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러므로 열수는 란하 유역이나 대릉하 유역에 있어야 한다. 따라서 산해경에 나오는 동해는 현재의 서해, 북해는 발해인 것이다.


숙신은 한(漢)나라 이전에는 허베이 지역과 남만주 지역에서 나타나고, 한 이후에는 만주와 한반도에서 나타난다. 이는 고조선의 영역과도 일치한다. 고조선 기원을 연구했던 러시아의 L. R. 콘제비치도 한국의 역사적 명칭에서 “사료에 나타나는 고대 조선족과 숙신족의 인구 분포가 지리적으로 서로 일치하고, 숙신과 조선족의 종족 형성 과정이 유사하며 새를 공동 토템으로 가지고 있으며 두 민족 모두 백두산을 민족 발상지로 보고 있다”는 점 등을 토대로 조선이라는 말이 숙신에서 나왔다고 했다.



숙신과 조선이 동계(同系)라는 점을 대표적 선각인 신채호도 지적했다. 신채호는 “발숙신(發肅愼)이 발조선(發朝鮮) 대신 사용되었기 때문에 ‘조선=숙신’인데, 만주원류고에서 건륭대제가 숙신의 본음을 주신(珠申)으로 인정하였기 때문에 조선의 음도 결국은 주신이 된다”고 했다. 고대 문헌에서는 조선·숙신·식신 등이 구분 없이 사용되고 있다.

 

 

 



주희(朱熹)의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에 “천하를 통일한 은나라 탕 임금은 옛 성현들의 후손들이나 은나라에 공로가 있는 사람들을 고죽 등의 나라에 봉했다(古聖賢有功者之後 封孤竹等國 各有差)”고 했다.

이 기록은 BC 1600년경의 일로, 고죽국(孤竹國)이 은나라 초기부터 존재했으며, 은나라의 왕가와 가까운 제후국이었음도 알 수 있다. 이 고죽국은 고조선의 역사와 그 영욕을 함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인들의 주요 이동로인 까닭에 ‘고대 동북아의 화약고’라고 할 수 있다. 고조선과 연(燕)나라의 정세변동에 따라 부침이 많았던 지역이다.



고조선은 한때 연의 침공으로 요하 동쪽까지 밀렸지만 연의 멸망 후 진(秦)나라와 대치했다.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인 진(BC 221~BC 206)은 내부 정비와 흉노의 위협 때문에 ‘멀고 지키기도 어려운’ 고조선까지 공격하지는 않았다. 진 멸망 뒤 한이 들어서자(BC 202) 과거 연나라 지역에서 BC 190년을 전후로 위만(滿)이 고조선으로 ‘망명’한 점 등은 고조선이 절대 속국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런데 철저한 중화주의자였던 사마천이 이런 사실을 무시하고 고조선의 역사를 왜곡한 것이다.

 

고조선과 연의 갈등이 극심했던 점과 연나라 장수가 침입해 고조선이 후퇴한 기록이 분명한 점, 그리고 진 멸망기에도 고조선이 건재했던 점이다.



중요한 것은 고조선이 “왕검에 도읍을 정하였다(都王儉)”는 기록이다. 그 주석에 “창려(昌黎)에는 험독현이 있다(昌黎有險瀆也)”라고 하는데, 이에 대한 해설로 2세기 후반의 학자인 응소(應<52AD>)는 “요동의 험독현은 조선왕의 옛 도읍”(“遼東險瀆 朝鮮王舊都”史記 卷115)이라고 한다. 창려는 과거의 고죽국 지역이므로 왕검은 현재 베이징 동부 지역이다.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BC 200년 태원(太原)을 지키던 한신(韓信)이 흉노에 항복하자 한 황제 유방(劉邦)은 32만 대군을 끌고 친정에 나섰지만 평성(현재의 다둥·大同)에서 포위되어 뇌물을 바쳐 겨우 탈출했고, 이후 엄청난 곡식과 비단·솜을 공물로 바쳐 흉노를 무마하였다. BC 199~196년 유방은 한신의 잔당과 진희(陳<8C68>) 등의 반란을 진압하느라 분주했다.



한서에 “(한무제는) 동으로는 조선(여기서의 조선은 삼조선(三朝鮮,번조선,마조선,진조선) 중, 서쪽의 부단군 준왕(準王)이 다스렸던 번조선을 말한다.)을 정벌해 현도군과 낙랑군을 일으켜 흉노의 왼팔을 잘랐다”(“東伐朝鮮 起玄<83DF> 樂浪 以斷匈奴之左臂” 漢書 卷73 韋賢傳)고 한다. 이 표현은 중국이 흉노와 고조선을 동일 계열의 민족으로 보고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우리가 ‘오랑캐’라 부르던 동호·선비·오환·숙신 등은 서로 다른 민족이 아니며 중국이 흉노라 부르는 민족임을 알 수 있다.


 

중국 사서에는 고구려 발상 지역이 중국 란하~현재 선양 지역으로 나타난다. 초기 고구려 영역 가운데를 대릉하가 흐른다. 대릉하 상류에는 조양이란 지역이 나타난다. 아침을 뜻하는 조(朝)와 햇빛을 뜻하는 양(陽)이다. 이조양은 우리말로 아사달이라는 뜻이 담겨있다고 한다. 아사는 아침을, 달은 벌판을 의미하는데 조양이 아침해가 뜨는 벌판이라는 뜻이다.

 

 


후한서(後漢書)에 “예와 옥저, 고구려는 본래 모두가 옛 조선 지역”(東夷列傳濊)이라 했고

수서(隋書)에는 “고려(고구려)의 땅은 본래 고죽국이었다”고 했다(裵矩傳).

구당서는 “고려(고구려)는 본래 고죽국이다라고 했다.”(“高麗本孤竹國)

즉 수·당 시대에는 ‘고죽국=조선=고구려’로 파악하고 있다. 고죽국은 현재의 베이징 동부 지역이므로 고구려는 고조선 옛 땅에서 시작된 것이다.




  

유주는 후한 때의 주 이름으로 현재의 베이징~랴오닝(遼寧)성 남부 지역이다.

여기에 “고구려는 본래 고죽국”이라는 수서와 구당서의 기록을 고려한다면 현도는 현재의 베이징에 가까운 지역이다. 이를 한서와 수경주(水經注)가 검증해준다.

한서에 “고구려현의 요산은 요수(遼水)가 나오는바 서남으로 요대(遼隊)에 이르러 대요수(大遼水)로 들어간다.”(“高句驪 遼山遼水所出 西南至遼隊入大遼水.”(地理志 玄<83DF>郡)라고 한다. 수경주에 따르면 대요수와 합류하는 백랑수(白狼水)는 교려(交黎)를 지나는데 이곳이 바로 창려(베이징 동남)다.



문제는 요수를 달리 요하(遼河)라고도 하고 고대에는 상류를 낙수(樂水), 하류를 대요수라고도 했다는 점이다. 수서에 “요산은 북위가 요양(遼陽)이라고 했는데 … 개황 16년(596) 요주에 속했다(遼山后魏曰遼陽 … 十六年屬遼州)”고 했다.






중국에서 호(胡)는 일반적으로 흉노(匈奴)를 말한다.


단석괴는 선비족(동호東胡의 후예)의 영웅으로 현재의 허베이(河北)에서 둔황(敦煌)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다스린 지배자였다.


고구려와 부여의 원뿌리가 되는 나라의 왕을 금와왕(金蛙王)이라고 한 부분이다. 금와왕(금개구리왕)은 알타이인의 시조다. 알타이에 퍼져 있는 알타이인의 아버지, 탄자강 설화는 “옛날 알타이에 탄자강(개구리왕이란 뜻)이란 노인이 살았는데 하루는 붉은 개구리와 싸우던 흰 개구리를 구했다. 이 일로 그는 소원을 들어주는 댕기를 선물로 받아 부자가 되고 꾸르부스탄(하늘의 신)의 막내딸을 아내로 맞는다”(양민종 알타이 이야기)라는 것이다. 따라서 부여의 기원이 바로 알타이 지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알타이 지역의 민담과 설화는 1940년대 러시아 민속학자 가르프와 쿠치약 등에 의해 집중적으로 채록되었는데, 알타이 지역은 콩쥐팥쥐 우렁각시 나무꾼과 선녀 혹부리 영감 심청전 등의 원산지다. 이 가운데 나무꾼과 선녀는 만주족의 건국신화다.


삼국지(三國志)에 “고구려는 북으로는 부여에 접하고 있다… 동이들이 과거에 하던 말에 따르면 고구려는 부여의 별종으로 언어라든가 다른 대부분의 일들이 부여와 같다고 한다”(魏書 高句麗)라고 했다. 부여세력 일부가 고구려 건설에 합류했음을 알 수 있다. ‘고조선·부여계→고구려’라는 역사의 흐름이 생겨난 것이다. 부여에서 유입된 세력과 연합해 고구려를 건국한다. 다른 갈래들은 고조선 북부에서 국가 형태를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선비나 오환으로 불리며 할거했다. 크게 보면 고조선 후예들은 고구려부(高句麗部)와 선비오환부(鮮卑烏桓部)로 나눠지고, 선비오환부는 다시 모용부(慕容部)·탁발부(拓拔部)·우문부(宇文部)·단부(段部) 등으로 분류된다.

 

 

오환이 처음 나타나는 사마천 사기의 기록에는 “연나라는… 북으로 오환부여, 동으로 예맥조선과 서로 접하고 있다(貨殖列傳 烏氏<502E>)”고 한다. 또 부여는 북만주 일대이므로 연나라 ‘북’이라면 고조선 지역인데 사마천의 사기에서는 이를 오환 지역으로 본 것이다. 결국 부여와 조선을 ‘오환부여’와 ‘예맥조선’이라 했다.




요사 지리지에 의하면 “오주(烏州)는 원래 오환의 땅으로 요하(遼河)·오환산(烏桓山) 등이 있으며 경주(慶州)에는 적산(赤山)이 있다”고 한다. 오환산은 현재 홍산문화의 중심지인 츠펑(赤峯)이다. 츠펑은 몽골어로 ‘울라간 하다(Ulagan Hada)’라고 하는데 원사(元史)에도 적산(赤山)으로 명기돼 있다. 붉은 산(울라간)은 태양을 상징하는 것으로 ‘아사달’ ‘조선’과 연관된다.




흉노는 내분으로 남북 흉노로 분열했다(48년). 이를 틈타 고조선의 후예(또는 동계)인 오환선비는 흉노를 막남(莫南) 지역까지 몰아 오르도스(현재 네이멍구(內蒙古) 바우터우 인근) 일대까지 세력을 확장했다(後漢書 卷90 烏桓鮮卑列傳).


단석괴 사후 2세기 말 이 지역은 구력거(丘力居)로 이어진다. 황제를 칭한 그는 영역을 확장해 청주·서주·유주·기주 등 네 주를 점령했다(三國志 魏書오환전). 3세기 초에는 구력거의 조카 답돈(踏頓:?~207)이 황제위를 이었다. 당시 북중국의 실력자였던 원소(袁紹:? ~ 202)는 답돈과 우호 관계를 맺고 친척의 자식을 자기 딸로 꾸며 시집을 보냈다(魏書 무제기).


답돈은 위 무제 조조(曹操)의 정벌 때 참수됐다. 그 후 가비능(軻比能:?~235)이 여러 부족을 통솔해 위(魏)나라와 대립하다 암살되자 분열돼 모용부·탁발부·우문부·단부로 재편됐다. 이들 가운데 모용부가 가장 강해 전연(前燕:337∼370)과 후연(後燕:384∼409)을 건국했다.


진서에는 모용외(慕容<5EC6>)가 조선공에 봉해진 뒤 모용황(재위 337∼348)이 이를 계승하자 내분이 일어났고, 모용황은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험독(險瀆)으로 갔다는 기록이 있다(晉書 卷109). 수경주(水經注)나 청나라 고염무의 일지록(日知錄)에 따르면 이 지역이 바로 현재 베이징 인근으로 과거의 고죽국이다. 이로써 베이징 인근~요동에 이르는 고조선 옛 지역은 조선왕 모용외·모용황이 회복했다.


조선왕 모용황은 기존의 고조선 영역뿐만 아니라 훨씬 더 남하해 북중국 주요부를 대부분 장악했다. 중국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국호를 연(燕·전국시대 연과는 다름)이라고 했다. 이런 현상은 고조선의 후예들이 중국을 지배할 때 나타나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후연은 모용운(慕容雲)으로 이어진다. 진서(晉書)는 “모용운은 모용보(慕容寶)의 양자로 조부는 고화(高和)인데 고구려의 한 족속이다(慕容雲傳)”고 한다. 모용운은 즉위 후 성을 다시 고(高)씨로 하고 광개토대왕이 사신을 보내어 종족(宗族)의 예를 베풀자(408년), 시어사 이발(李拔)을 보내어 답례함으로써 종족 간의 유대감을 표시했다(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모용씨 세력이 약화된 뒤 탁발씨가 대두해 건설한 국가가 북위(北魏:386∼534)다. 북위 헌문제(454∼476)는 ‘고구려를 정벌해 달라’며 472년 백제 개로왕이 국서를 보내자 꾸짖으며 장수왕을 두둔했고, 장수왕에게 딸을 보낼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헌문제의 아들 효문제(471~499) 탁발굉은 고구려 왕족 고조용(高照容:469~519)을 황후로 맞았는데, 그녀가 유명한 문소황태후(文昭皇太后)로 다음 황제인 선무제(499~515)를 낳았다(魏書 文昭皇太后列傳). 선무제의 등극에 황족 일부가 반발하자 문소황태후의 오빠인 고구려의 고조(高肇)가 대군을 몰고 와 북위 조정을 장악했고, 남조 송나라의 대군을 격파하기도 했다(502).



“491년 장수왕이 서거하자, 북위의 효문제가 부음을 듣고 흰 위모관과 베로 지은 심의를 입고 동교(東郊)에서 거애(擧哀)하였다”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기록에 따르면 효문제는 천자(天子)가 아니라 할아버지가 서거한 듯한 애도의 정을 보였다.

이 같은 전연·후연·북위·고구려의 관계는 모용부·탁발씨·고구려가 중국 북부 지역에 서로 다른 나라를 만들었지만 ‘고조선의 후예’라는 인식을 공유했음을 보여 준다.









6세기 북위의 멸망 수·당시대(7~10세기)가 열렸다. 수·당나라는 선비족 전통과 중국 한족(漢族)의 발달된 문화를 결합해 퓨전(fusion) 통치체제를 구성했다. 수나라를 건국한 양견(楊堅)은 선비족이었고 당나라를 세운 이연(李淵)은 양견의 이종사촌이었다.



동아시아 최초의 거대 국제 국가 당은 ‘선비(鮮卑)의 나라’지만 한화가 극심했고 중국도 한·당나라를 중화의 꽃으로 보고 있어 이 시기를 고조선의 고유성(固有性)만으로 보기는 어렵다. 당나라는 그 정체성을 중립적, 비한비이(非漢非夷)로 파악해야 한다.

이 시기는 많은 북방민족이 한족으로 귀화 또는 편입했고 만리장성 이북에서 북방민의 고유성이 많이 상실되는 계기가 됐다.



고조선의 고유성은 만주에서 거란·고구려·발해가 유지했다.

10세기 번성했던 거란(요나라 중심세력)은 우문부의 후예다. 우문부는 모용부에 의해 궤멸된 뒤 남은 사람들로 후에 거란으로 불렸다. 위서에는 “거란국은 고막해(庫莫奚)의 동쪽에 있는데 고막해와 같은 민족으로… 선조는 동부 우문의 별종이고 처음 모용원진(慕容元眞)에게 격파돼 송막지간(松漠之間)으로 달아나 숨었다(魏書 庫莫奚 契丹)”고 기록했다. 송막지간은 현재 네이멍구다.



요사(遼史)는 “요나라는 그 선조가 거란이고 본래는 선비의 땅이다. 요택(遼澤)에 살았다(“遼國其先曰契丹 本鮮卑之地 居遼澤中” 遼史 地理志)”고 한다. 이 요택(요하의 삼각주 유역)은 대릉하~요하 유역의 세계 최대 습지로 전국시대에는 고조선 땅이었다.


요사는 “요나라는 조선의 옛 땅에서 유래했으며, 고조선과 같이 팔조범금(八條犯禁) 관습과 전통을 보존하고 있다” 했고 요사의 지리지에는 “(수도의 동쪽 관문인) 동경요양부는 본래 조선의 땅(“東京遼陽府本朝鮮之地” 遼史 地理志2)”이라고 기록한다. 고조선의 후예인 거란(동호의 후예)은 모용부·탁발부 등 타 부족의 기세에 눌려 지냈지만 이전의 북위, 수·당과 달리 고조선의 고유 전통을 유지하면서 고조선의 옛 지역을 모두 회복하고 더욱 세력을 키워 중원으로 진출했다.



고조선의 후예들은 4C 모용씨 이후 중국 지배를 본격화하는 특성이 나타나면서 중국 대륙으로 남하하기 시작했다. 이후 대부분의 중국 비(非)한족 왕조는 이들이 건설했다. 그러나 중국을 지배하는 과정에서 고조선의 고유성을 상실했다. 고조선의 고유성은 주로 고구려·거란(요)·금·고려·청 등에 의해 유지됐다. 
 

 

 

한민족에게 ‘오랑캐의 왕’으로 각인되어 있는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183;872?~926 )는 요나라의 1대 황제다.

10년(916~926) 재위하면서 거란 여러 부족을 통합하고 외몽골에서 동투르키스탄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정복했다. 사서는 요遼가 고조선을 이었다는 기록을 보여준다. 거란족의 나라 요遼의 요사(遼史)에도 요나라는 조선의 옛 땅에서 유래했으며, 고조선과 같이 팔조범금(八條犯禁) 관습과 전통을 보존하고 있다. [遼本朝鮮故壤 箕子八條之敎 流風遺俗 蓋有存者(遼史 卷49)]


요사의 지리지에는 (수도의 동쪽 관문인) 동경요양부는 본래 조선의 땅이라. [東京陽府本朝鮮之地(遼史 地理志2)]고 기록하고 있다.

8조범금은 고조선 법제로 8조법(八條法)이라고도 한다. 동경요양부는 현재의 랴오양(遼陽)시다. 선비족이 조선왕이고, 요遼가 고조선 법제를 갖고 있다.







고조선사에서 핵심 쟁점의 하나는 패수(浿水) 문제이다. 즉 위략에 연나라 사람 위만이 망명을 하였는데 오랑캐의 옷을 입고 동으로 패수를 건넜다. [燕人衛滿亡命 爲胡服 東渡浿水(魏略)]라는 대목이 나온다. 위만이 건넌 패수가 어디인지에 따라 고조선의 ①대동강 중심설, ②요동 중심설 등으로 나뉜다.



대동강 중심설(패수=대동강)은 대부분의 한국이나 중국 학자들의 일반적 견해였다. 여기에는 삼국사기와 수경주(水經注,중국 북위 때 저술된 중국의 하천지)의 주석자인 력도원(道元, 북위 시대의 지리학자)의 견해가 큰 영향을 미쳤다. 력도원은 수경에 나오는 패수는 낙랑현에서 흘러나오고라는 말을 중시하여 북위에 온 고구려 사신에게 낙랑이 평양성이라는 것을 확인했다는 기록을 남기면서 패수는 대동강임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틀렸다.




수경 원문에는 패수는 동으로 바다로 간다 ‘패수는 낙랑의 루방현(鏤芳縣)에서 나온다로 기록돼 있다. 그러므로 루방이 어딘지가 문제다. 사서들에서 루방은 현재의 베이징 인근으로 나타난다.

요사遼史에 따르면, 루방은 요나라 때는 자몽현(紫蒙縣)이었다[紫蒙縣. 本漢鏤芳縣地. [(遼史 卷 38 地理志2 東京道)]고 나온다.


청의 대표적 고증학자 고염무(顧炎武)의 영평이주기(營平二州記)에 따르면, 자몽현은 백랑과 창려에 가까운 곳이라고 한다. [秦漢之間 東胡邑紫蒙之野 唐書 地理志 平州有紫蒙, 白狼 昌&#63881; 等城, 蓋平州之界;丹之南界(顧炎武, 營平二州記)]. 즉 자몽현은 현재의 베이징 동부 해안지대인 것이다. 이렇게 되면 패수가 동으로 바다로 들어간다는 설명에 딱 들어맞는다.



진서(晉書)에는 모용외가… 자몽을 도읍으로 정하고 동호라 불렀다(邑于紫蒙之野, 號曰東胡)는 기록이 나온다(晉書 卷 108)). 이는 중요한 말이다. 이 말은 고조선의 중심지와 동호(東胡,요나라의 선민족)의 중심지가 일치하며 후대 요遼의 영역에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동호東胡, 즉 고조선이 베이징까지 뻗쳐 있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대개는 고조선을 한반도 국가로 본다.



동호東胡의 후예이자 실존 인물인 선비족 영웅 단석괴의 탄생 설화가 동명이나 고주몽의 출생 설화와 거의 일치한다. 부여나 고구려가 동호&선비, 동호와 우리의 역사는 하나의 범주에서 파악할 수밖에 없다.




사마천의 사기 흉노열전에는 동호東胡는 오환(烏桓)의 선조이며 후에 선비(鮮卑)가 되었다. 흉노의 동쪽에 있어 동호東胡라고 하였다고 했다. 즉 흉노 동쪽의 광대한 부족을 통칭하는 단어다. 다시 요나라로 돌아가 보자. 요遼나라는 전체 동이족의 맹주로서 동이 풍속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보였다. 고려사에 고려가 요遼나라에 대해 조공을 바치겠다는 의사를 밝히자, 요遼 황제는 동이(東夷) 풍속을 따라 거듭 고시(<695B>矢)를 바치던 의식을 올린다니 정성이 갸륵하여 진실로 애대(愛戴)하는 바가 되었도다라고 감격한다.



고려가 동이족 전통을 고수하는 데 대한 요遼 황제의 찬사로, 요遼 역시 동이족이며 고려와 한 민족임을 의식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한국인의 직계 조상으로 인식되는 예맥과 동호東胡가 다르지 않다는 것은 1960년대 역사학자 이지린(址麟)이 분석한 바 있다. 그는 동호(東胡)=맥(貊)으로 보고 맥(貊)과 예(濊)는 고대 조선 종족으로 예족은 BC 8~7세기 이전에 고조선을 세웠고, 맥족은 그보다 늦게 부여와 고구려를 세웠다고 한다. 이 부분은 오랫동안 한국의 역사학자들에 의해 거부되었다.


진서 요사 당서 등의 기록들은 고조선이 동호東胡이며, 후일 요遼로 이어졌음을 보여준다. 요사(遼史)에도 요遼와 고조선의 연관성을 지속적으로 언급한다. 한민족 선조는 좁은 한반도에서 머물지 않고 넓은 북방 벌판에서 역사를 썼다는 의미다. 후대가 잊고 있을 뿐이다.



 








기자箕子는 유학으로 무장된 조선 위정자에게 정신적 절대자로 군림하며 국조(國祖) 단군왕검에 수백 년간 설움을 안겼다.


기자箕子는 ‘조선 성리학 이데올로기 말살’ 전략을 펴는 일제 때문에 무너졌지만 해방 뒤 유학자 사회에 의해 복권돼 절대적 힘을 발휘하고 있다. ‘국조(國祖)’ 단군왕검에 천 년 가까이 싸움을 거는 기자箕子는 누구인가.




중국 주나라 무왕이 기자箕子 고조선의 왕으로 봉냈다고

약 1,000 년 후에 기록한 한나라 초기의 '상서대전(尙書大傳) 기록을 보자.

“주나라 무왕은 은(殷)을 정벌한 후에 기자箕子를 풀어 주었다. 기자箕子는 주나라에 의해 풀려난 치욕을 참을 수 없어 조선으로 도망했다. 무왕이 이를 듣고 그를 조선후에 봉하였다. 기자箕子는 이미 주나라의 봉함을 받았기 때문에 신하의 예가 없을 수 없어 (무왕) 13년에 내조하였는데 무왕은 그에게 홍범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武王勝殷, 繼公子祿父, 釋箕子之囚, 箕子不忍爲周之釋, 走之朝鮮. 武王聞之, 因以朝鮮封之. 箕子旣受周之封, 不得無臣禮, 故於十三祀來朝, 武王因其朝而間鴻範” ?尙書大傳? 卷2 ?殷傅?)”

 

기자箕子가 조선에 봉해졌다는 기록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중국 주나라로부터 약 1,500 년 후에 기록한 '서진(西晉)의 진수(陳壽:233~297)가 편찬한 삼국지위지동이전(三國志魏志東夷傳)'에는 “옛날에 기자箕子가 조선으로 가서 8조의 법을 만들어 가르치니 문을 닫고 사는 집이나 도둑질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 40여세 후손인 (고)조선후(朝鮮侯) 준(准)이 왕을 칭하였다”

(“昔 箕子旣適朝鮮 作八條之敎以敎之 無門戶之閉而民不爲盜 其後四十餘世 朝鮮侯准 僭號稱王” ?三國志? 魏書 ?東夷傳? 濊)고 나와 있다.



'상서대전(尙書大傳)'과 '삼국지(三國志)'의 기록들을 바탕으로 이후의 역사서들은 하나같이 주나라 무왕이 기자箕子를 조선후로 봉했다고 한다. '삼국사기'에도 “해동에 국가가 있은 지 오래되었는데 기자箕子가 주나라 왕실로부터 봉작을 받으면서 시작되었다”('三國史記'年表)라고 한다. 이것이 이른바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이다.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과 관련해 먼저 살필 것은 은(殷) - 기자箕子 - 동이족의 관계다. 은(殷)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사서(史書)는 중국 역사상 최초의 나라로 알려진 은(殷)의 실체를 전혀 다르게 보여준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은(殷)나라가 오랑캐의 나라(“殷曰夷周曰華” '史記')로 되어 있다. “(은나라 시조인) 설(契 또는 卨)의 어머니가 목욕하다가 현조(玄鳥)가 떨어뜨린 알을 삼켜 설을 낳았다”고 한다('史記''殷本紀'). 그런데 이 신화는 만주족의 시조신화와 일치한다. 선문대 이형구 교수는 “은殷나라가 부여와 습속이 거의 같아서 흰색을 숭상했으며 하늘에 제사를 지내거나

군대를 일으킬 때 점을 쳤고 부여는 은殷나라 역법을 사용했다”고 한다. 이는 은나라 멸망 이후 잔존 세력들이 만주로 유입되었음을 의미한다.



BC 2세기 사마천의 '사기(史記''송미자세가는 “공자는 은殷나라의 3현인으로 미자(微子)와 기자(箕子), 비간(比干)을 지목했다.

세 사람 모두 은나라 주(紂)왕의 친척이라고 했다”고 기록한다.




'상서대전'은 BC 2세기에 편찬됐다. ‘기자동래설은 이보다 800~1,000 년 전의 사건이다. '상서대전'은 흔히 '서경(書經)'이라 하는데 이미 소실된 것을 한 문제(文帝)가 신하를 복생(伏生)에게 보내어 복생이 구술(口述)한 것을 기록한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조차도 황당무계한 내용들이 많다. '사기' 조선전'에도 기자 동래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문제는 고려 중기다.


고려는 북방민족적 건강성이 사라지고 문신(文臣) 위주의 중화주의적 풍조가 널리 퍼지면서 기자箕子는 날개를 폈다. 기자동래설은 부동의 사실(史實)로 용인되어 고려 숙종 7년 기자사당을 세우고 국가적으로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다(1102). 김부식의 '삼국사기'(1145)는 “기자箕子로 인하여 우리 역사가 시작됐다”고 선언한다. 이는 김부식의 생각만이 아닌 그 시대 지배층들의 보편적 인식을 반영한 것이다.


고려 말기 '삼국유사'와 더불어 나라를 세운 국조(國祖) 단군왕검이 잠시 부각되더니 조선에 이르러서는 기자 숭배의 열풍이 불었다. 조선의 위정자들은 600년 동안 고조선을 기자箕子가 계승한 나라로, 중화의 충실한 외변(外邊)으로 자처했다.


조선의 건국 이념을 정리한 '조선경국전(朝鮮徑國典)'에는 “우리나라는 국호가 일정하지 않았다. … 고구려·백제·신라·고려 등은 모두 한 지방을 몰래 차지하여 중국의 명령도 없이 스스로 국호를 세우고 서로 침탈만 일삼았으니, 비록 그 국호가 있다 해도 쓸 것이 못 된다. 오직 기자만은 중국 주나라 무왕의 명령을 받아 조선후에 봉해졌다. … 명나라 천자가 ‘조선’이라는 국호를 권고하시니 … 이는 아마도 주나라 무왕이 기자에게 명했던 것을 전하여 권한 것이니, 그 이름이 이미 정당하고 말은 순하다”('國號') 라고 썼다.



조선은 한민족의 역사를 대변하는 국호가 아니라, 중화(中華)의 신하인 기자箕子를 기리기 위한 국호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친명적(親明的)·친한족적(親漢族的)·모화적(慕華的)이었다.




국조 단군왕검의 몰락은 중화민족주의 유학인 성리학의 발전에 직접 영향을 받았다. '조선경국전'을 필두로 15세기의 '동국통감''삼국사절요''응제시주''동국세년가' 등을 거쳐, 16세기 후반 '기자지(箕子志: 윤두수)'가 편찬됐다. 조선 중기 대표 석학 율곡 이이는 '기자실기(箕子實紀)'를 편찬했다.




‘동방거유(東方巨儒)’라는 칭송을 받는 송시열은 “오로지 우리 동방은 중국인 기자箕子 이후로 이미 예의의 나라가 되었으나 지난 왕조인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도 오랑캐의 풍속이 다 변화되지는 않았고 … 중국에서 보낸 기자箕子께서 동쪽으로 오셔서 가르침을 베풀었으니 오랑캐가 바뀌어 중국인[夏]이 되었고 드디어 동쪽의 주(周)나라가 되었습니다['숙종실록(肅宗實錄)' 7, 9]”라고 하였다. 이 글은 2004년 고교 국사교과서에 실린 글이다.





송시열의 주장은 ‘중국의 속국인 기자조선이 한반도 역사의 출발’이라는 현대 중국 정부의 동북공정의 주장과 일치한다.

1756년(영조 32년)엔 기자묘가 있다는 평양과 한양, 전국 각 도에 기자묘를 세워 기자箕子를 영원히 숭배하자는 상소가 등장하기도 했다. 행주 기씨, 청주 한씨, 태원 선우씨 같은 일부 가문은 기자의 후손으로 인정됐다.





국조 단군왕검은 찬밥이 됐다. 조선 태종 때 국조(國祖) 단군은 국가 제사의 반열에 잠시 올랐지만(1412) 기자箕子보다는 서열이 낮았다. '삼국사절요(1476)'에서는 “단군이 조선을 개국했지만 기자箕子가 오기 전 아사달로 들어가 산신이 됐다”고 했다. 아예 자리를 비켜준 것이다. '동국통감(1484)'은 기자 조선과 그 후계자인 마한·신라 등을 높이고 단군조선, 고구려, 백제, 발해, 고려의 위치를 낮췄다.



지금 한국의 사학자들은 고조선의 대동강 중심설이 일반적 견해였다. 고려 때 삼국유사, 조선의 동국통감(東國通鑑)과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동사강목(東史綱目)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 등을 거치면서 견고해졌다. 고조선의 수도는 현재의 평양, ‘패수(浿水)=청천강(또는 대동강)’ ‘열수(冽水)=대동강(또는 한강)’ 등으로 보고 있다.




소위 기자동래설에 대한 비판이 조선시대에 없었던 것은 아니다.


기자箕子 관련 기록 가운데 한반도와 무관한 기록들이 많기 때문이다. 당나라 때 사마정의 '사기색은(史記索隱)'은 “기자箕子의 묘가 하남성 몽현[蒙縣: 현재의 상구현(商邱縣)]에 있다”고 썼다. 이규경(李圭景)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중국에만 기자묘가 있는데 어떻게 평양에 기자묘가 있는가”라고 따졌다. 조선을 만들었다는 사람의 묘가 어떻게 중국 하남성에 있느냐는 원초적 질문이지만 ‘기자箕子 광풍’은 이런 의문을 지워버렸다.



극심한 ‘중화 사대주의’에 대해 만주족 국가인 청의 태조 아이신조뤄 누루하치는 “중국과 조선, 이 두 나라는 말이나 글은 다르지만 그 옷이나 생활방식은 완전히 똑같다('滿文老''太祖' 卷13, 14)”고 개탄했다.

중국 한족(漢族)은 주변 민족들의 선조를 한족화(漢族化)하기를 즐기는데 기자箕子도 그 예다.

중국 한족은 흉노의 시조 순유는 하나라 걸왕의 후손, 서융은 하나라 말기 이주민, 선비는 유웅의 후손, 왜는 오나라 태백의 후손 등이라고 했다.





최남선도 “평양의 기자묘는 고려 중기 이후 견강부회하여 만들어진 것이고 중국 한족은 항상 주변 종족의 선조와 중국 한족(漢族) 조보(祖譜)를 연계시켜 종조화(宗祖化)한다”고 했다. 기자조선설은 “중국인이 이민족을 동화하는 정책의 산물”이라고 했다.



기자箕子가 한반도로 와 왕을 한 어떤 역사적 증거도 없다. 작은 먼지 같은 소문에 정치적 뼈와 살이 붙어서 점점 자라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나 천 년 이상 유학자들의 머리에 뿌리 박히고 그들의 지배와 억압을 받는 한국 민중의 생각을 지배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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