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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6-05 23:29
[기타] 백제의 중국 대륙진출1 - 요서지역 진출
 글쓴이 : 관심병자
조회 : 1,494  

출처 : 백제문화사대계 연구총서 제3권 '한성도읍기의 백제' 중 백제의 중국대륙진출 / 강종훈(가톨릭대학)

                                  

제1절 요서지역 진출

 

1. 관계 기사의 검토

중국 남북조시대에 남조의 한 나라였던 宋(420~479)의 역사를 기록한 책으로『宋書』가 전해지고 있다. 이 책에는 당시 송나라와 교류한 주변 국가의 사정을 전하는 부분이‘夷蠻’열전의 형태로 들어 있는데, 그 가운데에는 百濟國傳도 있다. 그 첫 머리에는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내용의 기사가 실려 있다.

 

A. 백제국은 본래 高驪(고구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 천여 리에 있었다. 그 후 고려가 遼東을 차지하자 백제는 遼西를 공격하여 차지하였다. 백제가 통치한 곳은 晉平郡晉平縣이라 하였다.宋書 卷97 列傳57 夷蠻東夷百濟國.

한반도 서남부에 자리 잡고 있던 백제가 바다 건너 중국 대륙의 요서 지역을 점령하고 일정 기간 통치를 실행하였다는 것이다. 워낙 간략한 내용이어서 이를 통해 진출의 구체적인 시기와 동기·성격 등을 제대로 파악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사실을 전하고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송서』의 이 기사는 백제사의 입장에서 볼 때 대단히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

 

송나라의 뒤를 이어 南齊(479~502)라는 나라가 잠시 섰다가 곧 梁(502~557)으로 넘어갔는데, 이 양나라의 역사를 기록한『梁書』의 백제전에도 다음과 같은 기사가 들어 있다.

 

B. 그 나라(백제)는 본래 句驪(고구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에 있었다. 晉(265~420)나라 시
기에 구려가 이미 요동을 공격하여 차지하자 백제 또한 遼西·晉平두 郡의 땅을 점거하
고 百濟郡을 설치하였다.
梁書 卷54 列傳48 諸夷東夷百濟.

 

이 역시 백제의 요서 진출 사실을 전하고 있는데, 전체적으로 보아 위에서 인용한『송서』의 기록과 같은 맥락의 내용이다. 다만『송서』와 비교할 때, 백제의 진출이 이루어진 시기를‘진나라 시기’라고 확정하고 있는 것과 진출 지역을‘요서군’과‘진평군’의 두 군으로 언급한 것, 그리고 백제가 설치한 군의 명칭을‘百濟郡’으로 적고 있는 것 등이 차이점이다.

 

이들 두 사서 외에 남조의 역사를 요약한『南史』와 唐나라까지의 중국 역대 왕조의 제도와 지배 권역 등을 정리한『通典』에도 백제의 요서 진출과 관련된 기록이 있다.(南史 卷79 列傳69 夷貊下百濟;  通典 卷185 邊防1 東夷上百濟.) 그렇지만 이들은『양서』의 기록을 거의 그대로 옮겨놓은 정도이므로, 특별히 주목할 것은 없다.<通典 의 기록을 보면, 백제의 진출 지역인 요서와 진평 두 군의 위치에 대해“지금(당나라 시기)의 柳城과 北平사이이다.”라는 세주가 붙어 있다. 저자인 杜佑가 붙인 것으로 여겨지는 이 세주에 의할 때, 당나라 때의 유성군과 북평군 일대가 백제의 진출 지역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 세주는 곧바로 받아들이기에는 주저되는 점들이 많다. 과연 두우가 얼마나 정확한 지식을 갖고 이러한 주석을 붙였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두우는 당나라 때의 유성군을 과거의‘요서군’으로, 북평군을 전대의‘右北平郡’으로 생각하였는데, 후자 즉 우북평군이 곧『양서』기록 등에 보이는‘진평군’이라고 판단하여 이런 주석을 달아놓은 듯하다. 그의 이런 지리 인식은 앞으로 좀더 생각해 볼 여지는 있지만, 아무런 비판없이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한편 위의 기사들처럼 백제가 요서 지역에 진출했음을 직접적으로 전하는 것은 아니지만, 유추를 통해 백제의 진출 사실을 엿볼 수 있는 자료들이 있다.


C. 慕容의 기실참군인 봉유가 간언하였다. “… 句麗(고구려)와 백제 및 우문부와 단부의 사람들은 모두 전쟁으로 인해 강제로 끌려온 자들이지 중국인들처럼 義를 사모하여 온 자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모두들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지금 십만여 호에 이르러 도성을 비좁게 할 정도로 많으니, 장차 우리나라에 큰 해가 되지 않을
까 걱정됩니다.” 晉書 卷109 載記9 慕容.


진나라의 역사를 기록한『晉書』의 모용황 載記에 실린 이 기사는 선비족 모용씨가 세운 前燕의 왕 모용황에게 그 참모인 봉유가 345년 무렵 시정의 개혁을 논하며 올린 상소문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봉유는 당시 전연의 수도인 龍城(현 중국 요녕성 조양시)에 붙잡혀 온 주변 세력의 포로들에 대해 언급하였는데, 여기서 ‘백제’의 포로가 함께 거론되고 있다.

 

이는 곧 345년 이전의 어느 시기에 백제와 전연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 장소가 어디였는지 확실하게 알 수 없으나, 말을 잘 다루던 유목 민족인 모용씨의 군대가 바다를 건너 한반도 중부의 백제 영역까지 침략을 감행했을 가능성보다는, 이전부터 해상 활동에 익숙해 있던 백제의 군대가 모용씨의 본거지가 있었던 요서 방면으로 출병함으로써 전쟁이 발생했을 가능성이 더욱 높다고 봄이 합리적이다.


사료 C와 연관되는 기사가 중국 역대 왕조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술한『資治通鑑』에도 보이고 있다.

 

D. 앞서 부여는 鹿山에 자리잡고 있다가, 백제의 침략을 받아 부락이 쇠산해졌다. 그래서 서쪽으로 燕(전연)에 가까운 곳으로 근거지를 옮겼는데, 연에 대해서 전혀 방비를 하지 않았다. 이에 연왕 모용황이 세자 모용준으로 하여금 모용군, 모용각, 모여근 세 장군과 함께 1만 7천 기병을 이끌고 부여를 습격하도록 하였다. … 드디어 부여를 멸망시키고 그 왕 玄과 부락 5만여 구를 포로로 하여 귀환하였다.資治通鑑 卷97 晉紀穆帝永和2年正月.


서기 346년의 사정을 전하는 이 기사는 그간 부여 멸망 관련 기사로도 많은 주목을 받아왔는데, 백제의 요서 지역 진출과도 매우 관련이 깊은 기사이다. 이 기사에 의하면, 부여는 전연의 공격을 받고 멸망하기 이전에 이

미 백제의 침략을 받아 쇠약해져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의 백제에 대해 당시 한반도 중부 지역에 존재하던 백제가 아니라 만주 지역 어딘가에 있던또다른‘백제’였다고 하는 주장도 있었으나, 지나친 상상에 의존하여 사료를 자의적으로 다룬 것이어서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 이 기사는 한반도 중부의 백제가 바다를 건너 요하 유역을 거쳐 부여가 있었던 곳까지 진출한 사실을 전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순리이다.

 

앞서 본 사료 C와 연결지어 이해한다면, 345년 이전의 어느 때인가 백제의 군대가 요하 방면에 진출하여 내륙 깊숙이 부여를 공격하기도 했고, 요서 지역의 전연의 군대와 맞서 싸우기도 했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지금까지 백제의 요서 지역 진출과 관련된 자료들을 살펴보았는데, 『송서』와『양서』등의 기록처럼 진출 사실을 직접적으로 거론하는 것들도 있고,『 진서』나『자치통감』의 기록처럼 추론을 통해 간접적으로 그 가능성을 타진해 볼 수 있는 것들도 있다. 어쨌든 이들 자료가 있음으로 인해, 백제가 중국 대륙의 요서 지역에 군사적으로 진출했다는 주장은 충분히 제기될 수 있는 것이고, 실제로 그동안 많은 학자들이 그런 견지에서 연구를 진행해 왔다.

 

 

 

2. 요서진출 불신론
그런데 이 같은 근거 자료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백제의 요서 지역 진출에 대해 사실 자체를 의심하면서 부정적으로 파악하는 견해들이 다수 있어 왔다. 사료 자체에 의문이 많을 뿐더러 당시의 정황상 사실로 보기에는 어렵다는 것이 불신의 주된 이유였다.

 

먼저 백제의 입장에서 볼 때 요서 지역은 지리적으로 대단히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백제가 자리잡고 있던 한반도 중부지역에서 요서 지역까지 가는 것은 당시로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인데, 이러한 지리적 장애에도 불구하고 굳이 군사를 보내어 영역을 확보해야할 이유가 마땅치 않다는 주장이다.또 백제가 그렇게 먼 거리까지 군대를 보내려면 많은 전함과 뛰어난 항해술을 갖추고 있어야 하는데, 당시 백제의 상황에서는 상정하기 어렵다는 주장도 덧붙여진다.

 

다음으로 백제가 군을 설치했다고 전해지는 요서 지역의 상황을 살펴볼 때, 백제의 진출은 사실로 보기 어렵다는 주장이 있다. 요서 지역에는 3세기 말부터 선비족의 일파인 慕容部와 段部등이 자리잡고 있었다. 4세기 전반에는 모용씨의 나라 전연이 일어났으며, 370년 이후 한때 前秦의 영역이 되었다가 380년대 중반 다시 後燕의 소유가 되었다. 5세기 초 北燕을 거쳐, 438년 무렵에는 북중국의 패자 北魏에게 지배권이 넘어갔다. 요서지역을 장악했던 이들 유목민족 왕조는 하나 같이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백제가 이들의 영역을 침략하고서 군을 설치했다는 것은 도저히 믿기 어렵다는 주장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들이 대체로‘정황론’에 입각한 불신론이었다면, 사료적 측면에서의 문제 제기, 즉‘전거론’에 토대를 둔 불신론도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우선 백제의 요서 지역 진출을 전하고 있는 사서들이 모두 중국 측 사서라는 사실에 착목하여 사료 자체의 신뢰성에 의문을 표하는 경우가 있었다. 즉 관련 기사가 중국 측 사서에서만 보이고 우리 측 사서인『삼국사기』나『삼국유사』등에는 보이지 않으므로, 사실로 믿기 어렵다는 주장이다.

 

중국 측 사서 가운데서도 주로 남조의 역사를 기록한 책에만 나오고, 북조의 역사를 적은 책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요서 진출의 사실성을 의심하는 논거의 하나가 되었다. 백제가 군사적으로 진출했다고 전해지는 요서 지역은 실상 남조의 나라들과는 멀리 떨어져 있던 반면 북조 영역 내에 들어 있었는데, 진출이 있었다면 당연히 관련 사실을 전해야 할 북조 측의 사서에서는 정작 나오지 않고, 요서 지역의 사정에 어두웠을 남조 측의
사서에서만 거론되는 것은 무엇인가 착오에 의한 것이 아닐까 의심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백제가 요서 지역에 진출한 시기로『양서』에 전해지는 진나라 시기의 역사를 기록한『진서』에 구체적으로 그 실상을 알려주는 언급이 보이지 않고 있다는 것과『송서』와『양서』에 나오는‘진평군 진평현’혹은 ‘백제군’등의 지명이 여타 사서나 지리서의 어느 곳에서도 확인되지 않는다는 것도 불신론의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이와 함께 지난 세기 후반에 새로 알려진 다음과 같은 자료도 요서 진출 불신론을 확장시키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E. 백제는 옛 東夷馬韓에 속해 있었는데, 晉나라 말기에 駒驪(고구려)가 요동을 공략하여 차지하자, ‘樂浪’이 또한 요서 진평현을 차지하였다. 梁職貢圖』百濟國使條


이 기사는 6세기 전반 양나라의 簫繹이 제작한 화첩인『梁職貢圖』에 나오는 것인데, 요서 진출의 주체가 백제가 아닌‘낙랑’이라고 적혀 있다. 이를 근거로, 실제 요서 지역으로 건너간 세력은 낙랑이며, 4세기 전반에 한반도 서북부의 낙랑군이 고구려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요서 지역의 모용씨 세력에게 귀부한 사실이 남조의 사관들에게 잘못 전해져, 마치 백제가 요서 지역에 진출했던 것인 양 오해가 생긴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논자에 따라서는『양직공도』의 이 기사를 “진나라 말기에 고구려가 요동과 낙랑을 공략하여 차지하자, (백제가) 또한 요서 진평현을 차지하였다.”는 식으로 띄어읽기를 달리 하여, 낙랑은 고구려에 의해 공략당한 객체이
고 요서 진출의 주체는 숨어 있는 전체 문장의 대주어‘백제’로 보기도 한다. 그렇지만 문맥상으로 보면 낙랑을 요서 진출의 주체로 보는 것이 아무래도 순리이다. 이럴 경우, 『양직공도』에 보이는‘낙랑’의 요서 진출 관련 기사는 그동안의 막연한 긍정론을 반박할 수 있는 자료로서 활용될 여지가 충분히 있다.

 

이처럼 정황론적 관점에서나 전거론적 관점에서 백제의 요서 진출을 부정하는 논의들이 결코 만만치 않게 제기되어 있다. 여기에 덧붙여서, 그동안 요서 지역에서 발굴 조사된 유적과 유물 가운데 백제의 지배 사실을 입
증할 만한 것이 뚜렷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불신론의 입장을 강화시켜주었다.

 

      

3. 불신론의 제문제
문헌에 관련 자료가 남아 있다고 해서 곧바로 사실로 인정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전승 과정의 오류나 사관의 착각 또는 고의적 왜곡 등에 의해 사실과 다른 내용이 역사서에 수록되는 경우는 동서고금에 흔히 보이는 일이다. 따라서 어떤 사실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는 상황에서, 그 의문점들을 무시하고 일단 자료가 있으니 무조건 믿어야 한다는 식의 긍정론으로 흘러서는 곤란하다. 백제의 요서 진출 사실을 부정하는 견해들은 섣부른 긍정론을 경계하게 한다는 점에서 나름의 의의를 지닐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이런 점을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즉 불신론자들이 제기하고 있는 의문점들은 과연 아무 문제가 없는 합리적인 것인가라는 점이다. 혹시 불신론의 근거가 되고 있는 의문점들이 사료에 대한 편견 또는
선입견에 좌우된 것이 아닐까라는 의문을 가져보는 자세가 또한 요망된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견지에서 그간 제기된 불신론의 논거들이 어느 정도합리적일지 하나씩 재검토해 보도록 하자.

 

1) 전거론에 입각한 불신론의 문제점
전거론적 측면에서 거론된 의문점부터 살펴보면, 첫 번째로『삼국사기』를 비롯한 우리 측의 사서에 관련 사실이 기재되어 있지 않으므로 백제의 요서 진출은 사실이 아닐 것이라는 주장은 과연 논리적으로 타당할까?

이런 주장이 타당성을 인정받기 위해서는『삼국사기』, 그 가운데서도 특히 백제의 역사를 연대기적으로 기술한 백제본기 부분이 사료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 먼저 확인이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백제사의 전개 과정에서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사건들이『삼국사기』에 거의 빠짐없이 그리고 상세하게 실려 있어야 이런 주장이 설득력을 지닐 수 있다. 그런데 아쉽게도『삼국사기』는 이런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못하고 있다.

 

이미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삼국사기』는 사료의 양과 질에서 많은 결함을 안고 있는 사서이다. 백제본기 부분은 그 결함이 가장 심한 부분이기도 하다. 백제의 국력이 최고조에 달하였던 4세기 후반의 사실만 하더라도,
『삼국사기』는 근초고왕대와 근구수왕대의 대고구려 관계 기사 정도를 전할 뿐, 당시 백제가 한반도 남부의 가야 지역과 마한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해 가던 모습은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근초고왕 시기에 바다 건너 동쪽의 왜와의 교류가 시작된 것도, 일본 측 사서인『일본서기』의 관계 기사나 칠지도 명문 등이 만약 남아 있지 않았다면, 『삼국사기』의 기록만으로는 알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삼국사기』를 비롯한 우리 측 사서가 사료적으로 많은 문제점을 갖고 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백제의 요서 진출 관련 기사가 거기에 실려있지 않다는 것이 사실 자체를 부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다음으로 중국 측 사서라 해도 북조 계통의 사서에서는 관련 내용이 보이지 않고, 유독 남조 계통의 사서에서만 보이니, 신뢰하기 어렵다는 주장에 대해 생각해보자. 왜 남조 측의 사서에만 백제의 요서 진출 사실이 실리게 되었을까에 대해 답을 찾아볼 필요는 있겠다.


백제는 4세기 후반 근초고왕 시기에 東晉과 공식적인 외교 관계를 맺은 이후 중국의 남쪽 지방에 자리잡고 있던 왕조들과 줄곧 우호 관계를 유지하였다. 5세기대의 송과 남제, 6세기대의 양은 모두 백제와 긴밀한 관계를
가졌던 나라였다. 당연히 이들 나라의 사관들이 백제에 대해 갖고 있는 정보는 결코 적은 것이 아니었다. 반면 중국의 북조와 백제 사이에는 거의 교류가 없었다. 북조 측의 사관이 백제에 대해 축적한 지식은 사실상 보잘 것 없었다고 보는 편이 합리적이다.


이처럼 남조 측과 북조 측의 사관들이 백제에 대해 갖고 있었던 지식의 양에는 현저한 차이가 존재했지만, 백제의 요서 진출 사실을 양자가 다 알고 있었다고 가정할 때에도, 관심을 갖고 사서에 기록할 쪽과 그렇지 않을 쪽은 확연하게 구분이 된다. 漢族의 왕조인 남조는 스스로‘失地’라고 생각하고 있던 화북 지방을 수복하기 위해 줄기찬 노력을 경주하였다.

 

만약 남조 측의 사관이 자신들과 우호 관계를 맺고 있던 백제가 과거 한 때 요서지역에 진출한 적이 있음을 알았을 경우, 백제에 관한 기록을 남길 때 그 진출 사실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앞서서 다루어질 수밖에 없다. 한편 북조측의 사관의 입장에서는, 설사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한들, 언젠가 백제가 자신들의 영역에 군을 설치하고 다스린 적이 있음을 일부러 부각시켜 기록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불신론의 입장에 서 있는 논자들 가운데에는 최초의 관련 기사를 담고 있는『송서』의 편찬자가 백제에 대해 잘못된 정보를 전달받고 사실 관계에 대한 아무런 확인 없이 요서 진출에 관한 기록을 남길 것일 뿐이라고 추단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송서』는 송이 멸망한 지 불과 9년 뒤인 남제의 무제 영명 8년(488)에 완성된 책이고, 그 편찬자 沈約(441~513)은 송나라 시기에 백제와 송 사이에 있었던 활발한 교류를 직접 눈으로 목도한
인물이었다. 따라서『송서』는 사건이 발생된 시점과 그것이 사서에 기록된 시점이 현저하게 떨어져 있어 誤傳의 가능성을 심각하게 따져보아야 할 성질의 책이 아니며, 편찬자 심약이 자신 외에도 수많은 남조의 지식인들이 백제가 어떤 나라인지를 잘 알고 있던 상황에서 터무니없는 사실 날조를 자행했다고 볼 수는 없다. 결국 심약은 백제의 요서 진출 사실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던 것이며, 『송서』를 읽어볼 동료 지식인들이 자신의 記述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기에 백제전의 첫머리에 관련 기록을 남겼던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세 번째로 진나라 시기의 역사를 기록한『진서』에는 왜 진출 사실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지 않았는가라는 의문에 대해 생각해보자. 백제의 요서 지역 진출이 진나라 시기에 있었다고『양서』등에 나오고 있으므로, 당연히『진서』에도 관련 기록이 나와야 정상이라는 생각은 당연히 해볼 수 있다. 그런데 현재 전해지고 있는『진서』의 편찬 시기는, 『송서』처럼 해당 왕조가 망한 후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 아니라, 이백여 년 이상 지난 시점인 당나라 태종의 貞觀연간이었다. 이 시기에『진서』가 만들어진 이유는 당 이전 왕조의 역사책 가운데 유독 진나라 시기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현전『진서』보다 앞서 만들어진『진서』가운데에는『송서』의 편찬자 심약이 지은『진서』가 들어가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현재는 전해지고 있지 않지만 만약 심약의『진서』가 남아 있었다면, 백제의 요서 진출에 관한 구체적 사실을 그 책을 통해 당연히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그 책이 사라짐으로 인해 요서 진출의 실상은 오랜 기간 미궁에 빠지고 말았다.

 

네 번째로『송서』나『양서』에 보이는 ‘진평군 진평현’ 또는 ‘백제군’ 등의 지명이 중국의 다른 역사책 어디에서도 확인되지 않으므로 요서 진출 사실 자체가 허구라고 하는 주장에 대해 검토해보자. 이 주장은 얼핏 보면
그럴 듯하게 보일 수도 있으나, 실은 스스로 모순을 내포하고 있는 주장이다. 백제가 요서 지역을 점령하고 새로 설치한 군현의 명칭이 중국의 역사책이나 지리서 등에 실려 있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굳이 실려야 한다면 그것은 중국의 사서나 지리서가 아니라 백제의 역사 기록에 실리는 것이 합당하다.


요서 지역에 대한 백제의 지배가 끝나고 다시 그 지역이 중국 측의 수중에 들어갔을 때, 진평군이나 진평현 등의 명칭은 자연스럽게 사라지고 본래부터 쓰이던 중국 측의 지명이 다시 사용되었을 것이므로, 중국 사서나
지리서에서 백제가 설치한 군현의 이름이 찾아지기를 기대하는 것은 애초 부터 헛된 것이다.

 

마지막으로『양직공도』기사에 백제가 아닌‘낙랑’이 요서 진출의 주체인 것처럼 나오는 것을 들어 백제의 요서 진출 사실을 부인하려는 견해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자. 이 주장도 일견 그럴 듯해 보이지만, 곰곰이 따져보
면 문제가 노출된다. 우선『양직공도』의 관련 기사가‘낙랑’과 그 사신을 소재로 하여 작성된 것이 아님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이 기사는 백제에서 보낸 사신의 모습을 그리고서 이 사신을 파견한‘백제’라는 나라가 어떤나라인지를 밝히는 내용 중에 들어 있는 것이다. 물론 기사 내용에는 분명히 ‘백제’가 아닌‘낙랑’이 요서 진출의 주체인 것처럼 되어 있으나, 백제에 관한 사실이 아니라면 굳이 여기에 들어가야 할 이유가 없다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논의의 핵심은 ‘왜 백제에 관련된 내용에서 주체가 백제로 기재되지 않고 낙랑으로 기재되어야 했을까?’, 그리고‘백제와 낙랑은 도대체 어떤 관계일까?’가 되어야 한다. 이런 고민 없이 기록이 그렇게 나온다고 해서 섣불리 요서 진출이 백제와는 무관한 것처럼 단정 내려서는 곤란한 것이다.


아울러『양직공도』의 사료적 가치에 대해서도 면밀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 앞서 언급한 바 있듯이, 『양직공도』는 6세기 전반,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520년대 후반에서 530년대 전반의 어느 시기에 제작된 것이다. 현재로서는 가장 시기가 올라가는 관계 사료라고 해야 할『송서』백제전의 기사가 작성된 시기로부터는 40여 년 가량 뒤늦은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사료적 가치를 논한다면, 앞선 시기의『송서』의 기록이 늦은 시기의 『양직공도』의 기록보다 못할 이유가 없다. 『송서』가 두찬과 오류 투성이의 역사서라면 모르겠지만, 전체적으로 내용의 정확성과 구체성을 인정받는 사서임을 감안할 때, 『송서』보다『양직공도』의 가치를 낮게 평가하는 것이 오히려 합리적이다.

 

『양직공도』보다 백여 년 가량 뒤늦은 시기에 편찬된『양서』의 기록에, 물론 표현상 약간의 혼란이 있기는 하지만, 『송서』의 내용이 거의 반복되고 있다는 것도『양직공도』기사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면서 최초의 관련 기사를 전하는『송서』기사의 신빙성을 낮추어 보려는 논의가 그다지 설득적일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요컨대 전거론적 견지에서 제기된 불신론의 주장들은 모두 오해와 선입견으로 인해 문제에 잘못 접근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는 기사에 대해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고 과장해서 선전해서는 안되겠지만, 똑같이 조금이라도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기사에 대해서는 신중하면서도 면밀한 사료 검토를 통해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하려는 노력이 당연히 필요한 것이다.

 

2) 정황론에 입각한 불신론의 문제점
이제부터는 당시 여러 가지 상황으로 볼 때, 백제가 요서 지역에 진출했을 가능성이 없다고 하는 주장들의 타당성 여부를 검증해보자. 먼저 백제가 요서 지역이라는 멀리 떨어진 곳에 군대를 보낼 마땅한 이유가 없다는 주장은 과연 합당할까?


요서 지역이 백제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단지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었다는 것을 이유로 군사적 진출이 아예 없었다고 보려는 것은 지나치다. 백제는 372년에 양쯔강 하류에 자리잡고 있던 동진에 공식적인 사절을 파견하였고, 이후 중국 남조의 여러 왕조들과도 활발하게 교류하였다. 당시 백제의 입장에서 볼 때, 양쯔강 하류 지역은 요서 지역보다 훨씬 멀리 떨어져 있었던 곳이었다. 그런 먼 곳에도 백제는
사신단을 자주 파견했고, 무역을 목적으로 한 상인들의 중국 왕래 역시 잦았다. 따라서 백제의 해상 활동 능력을 과소평가하려는 선입견에서 벗어난다면, 백제가 바다를 건너 요서 지역까지 군사적으로 진출했을 가능성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유를 애써 찾아보지도 않으면서 가야 할 마땅한 이유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독단적 사고의 산물일 뿐이다.


사실 이 주장은 매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요서 지역의 사정을 면밀히 살펴볼 때, 장기간에 걸쳐 이 지역에 대한 유목 민족의 지배권이 상실된 적은 없기 때문이다. 특히 전연과 후연, 북연의 경우, 요서 지역이 그 본거지였으며, 전연은 이곳에서 힘을 키운 후 화북 지방으로 진출하여 북중국의 강자로 성장했다. 또 전연을 멸망시키고 요서 지역을 장악한 전진은 북중국을 제패한 후 남쪽의 동진을 압박하면서 중국 대륙 전체를 통일하려 했던
5호 16국 시대의 최강자였다. 그래서 이처럼 강력한 힘을 지닌 유목 민족의 영역에 백제가 군사적으로 진출하여 수십 년 이상 지배권을 행사했을 가능성은 그다지 높지 않다고 보는 것이 순리이다.

 

그런데 백제의 요서 지역 지배 기간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장기간에 걸친 것이 아니었다면, 문제는 달라질 수 있다. 즉 백제가 요서 지역의 일시적인 정세 변동을 틈타 군사적 진출을 감행하여 짧은 시간 동안 군을 설치하고 지배했을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 지역을 지배하던 유목 민족 왕조가 다른 세력에게 무너지면서 잠시나마 힘의 공백 상태가 노출된 적은 4세기만 하더라도 몇 차례 있었다. 전연이 후조의 공격을 받아 국가 존망의 위기에까지 몰렸던 338년의 상황이 그러하였고, 전진에 의해 전연이 결국 멸망을 맞은 370년의 상황도 역시 그러하였다. 이와 같이 요서 지역의 지배권이 일시적으로 동요되던 틈을 타서 백제가 군사적 진출을 감행했을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고 보아야 한다.

 

지배 기간이 구체적으로 얼마나 되었을지 곧바로 단정내리기는 어려우나, 짧게는 몇 달 정도에 그쳤을 가능성도 고려해 넣을 필요가 있다. 이렇게 본다면, 고고학적으로 관련되는 유물·유적이 요서 지역에서 확인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백제의 진출 사실에 의구심을 가졌던 것 역시 저절로 해결이 될 수 있다. 관련 유적을 남길 만큼 충분히 길지 않은 아주 단기간에 걸친 영유였다면, 고고학적 증거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이미 무리한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백제의 요서 지역 진출은 성급히 부정하는 것보다는 긍정적인 측면에서의 신중한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된다. 비록 단편적인 기사들이기는 하지만『송서』등에 보이는 관련 사료를 세밀하게 분석한다면,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제 절을 바꿔 관련 사료를 다시금 살펴보면서, 백제의 요서 진출이 과연 언제 어떻게 이루어졌을지 실상을 파악해 보도록 하자.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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