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사(金史)》 고려열전(高麗熱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 지역은 압록강 동쪽과
갈라로(曷懶路) 남쪽에 위치하였으며, 동쪽과 남쪽은 모두 바다에 닿았다.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는, 남쪽은 요해(遼海)로 막히고 서쪽은 요수(遼水)로 막혀 있고 북쪽은 옛 거란(契丹)의 땅과 접하였고 동쪽은 금(金)나라와 맞닿았다. 또한 일본(日本), 유구(琉球), 탐라(耽羅), 흑수(黑水), 모인(毛人) 등의 나라와 땅의 경계가 서로 맞물려 있다. 신라(新羅)와 백제(百濟)가 스스로 그 국경을 견고히 하지 못하여 고려 사람들에게 병합되었으니, 지금의 나주도(羅州道)와 광주도(廣州道)가 그 지역이다. 그 나라는 경사(京師)에서 동북쪽으로 있다. 연산도(燕山道)에서 육로(陸路)로 가다가 요수를 건너 동쪽으로 가면 그 국경에 이르는데, 무릇 3790리이다. 바닷길로 갈 경우에는, 하북(河北), 경동(京東), 회남(淮南), 양절(兩浙), 광남(廣南), 복건(福建)에서 모두 갈 수가 있다. 지금 세워진 나라는 등주(登州), 내주(萊州), 빈주(濱州),
체주(棣州)와 마주 보고 있다. 옛날에는 봉경(封境)이 동서 간의 거리가 2000리이고 남북 간의 거리가 1500여 리였는데, 지금은 이미 신라와 백제를 병합하였으며, 동북쪽은 조금 넓어졌고, 그 서북쪽은 거란과 접하였다. 옛날에 대요(大遼)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가 뒤에는 대요의 침입을 받게 되어 내원성(來遠城)을 쌓아 요새로 삼았다. 그러나 역시 압록강을 험요처로 믿었다.
《오대사(五代史)》 고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왕건(王建)이 군사를 출동시켜 신라와 백제를 격파하였다. 이에 동이(東夷)의 여러 나라가 모두 고려에 귀속하였다. 2경(京), 6부(府), 9절도사(節度使), 120군(郡)이 있다.
《송사(宋史)》 고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곽원(郭元)이 스스로 말하기를, “본국의 도성에는 담장이 없다. 부(府)를 개성(開城)이라고 하는데, 6현(縣)을 관할하고, 주민은 3000호에서 5000호를 밑돌지 않는다. 주(州)마다 군사 100여 명씩을 두고, 10로(路)에 전운사(轉運司)를 설치하여 그들을 통할하고 있다. 주마다 5, 6개의 현을 관할하는데, 작은 주는 3, 4개의 현이며, 현마다 3, 4백 호가 산다. 국경은 남쪽에서 북쪽까지가 1500리이고 동쪽에서 서쪽까지가 2000리이다.” 하였다.
《송사》 고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 왕은 개주(開州) 촉막군(蜀莫郡)에서 사는데, 이곳을 개성부(開城府)라고 한다. 신라 지역을 동주(東州) 낙랑부(樂浪府)로 삼아 동경(東京), 백제 지역을 금주(金州) 금마군(金馬郡)으로 삼아 남경(南京), 평양(平壤)을 진주(鎭州)로 삼아 서경(西京)이라고 부르는데, 서경이 가장 번성하다. 통틀어서 모두 3경, 4부, 8목에 군이 118개, 현(縣)과 진(鎭)이 390개, 주도(洲島)가 3700개이다. 작은 군읍은 간혹 100호밖에 안 된다. 인구는 남녀가 총 210만 명이며, 병사, 백성, 승려 등이 각각 3분의 1씩을 차지한다. 지역은 기후가 춥고 산이 많다.
《고려도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의 주현(州縣)의 설치는 실제와 명칭이 맞지 않고, 다만 취락이 번성한 곳일 뿐이다. 나라의 서북쪽으로부터 거란(契丹), 대금(大金)의 접경에 이르기까지 간간이 보루(堡壘)와 참호(塹壕)가 있고, 그 동남쪽의 바닷가에도 도서(島嶼)에 설치한 것이 있다. 오직 서경이 가장 번성하여 성과 시가(市街)가 대략 왕성(王城)과 같다. 또한 3경, 4부, 8목이 있고, 또 방어하는 군이 118개, 현과 진이 390개, 주도(洲島)가 3700개가 있는데, 여기에는 모두 수령(守令)과 감관(監官)을 두어 백성을 다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