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가 한심하거나 약했다고 마냥 비난받기에는, 워낙 대외/대내 사정이 복잡하였으닌깐요. 오랜 무신정권의 집권, 몽골군의 침략과 이어지는 내부 간섭, 몽골이 쪼그라드나 했더니 홍건적은 날뛰고, 성질 사나운 명나라가 들어서는 등 내부 사정을 안정시킬 여력이 부족하기도 하였습니다.
왜구들의 성격도 단순히 먹고살기 힘들어서 배타고 건너온 어중이떠중이들도 아닌, 무장과 훈련면에서 정규군에 이르거나 실제로 정규군에 속하는 부류가 상당수 포함되어있기도 해서. 국가 차원의 침략이 아니라 두드러지지 않았을 뿐이지, 그 규모는 상당했다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후에 최영 장군을 시작으로, 이성계 장군, 최무선 부원수 등이 이런 왜구들을 소탕하고 몰아내는 데에 뛰어난 활약을 보였지만. 당대의 그들도 이러한 왜구와의 전투/전쟁을 어렵게 평가했을 정도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잡병 이미지의 왜구는 결코 아니라는 걸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럴 가능성도 있습니다. 고려 중-말 시기에는 비단 고려만이 아니라 중국의 사정도 상당히 어지럽게 돌아가던 상황(원-명 교체기)이었기 때문에, 소수 또는 일정한 숫자가 해적에 포함되었을 수 있습니다. 또한 내륙으로의 침입 당시에, 고려의 내부 또는 지형적 여건들에 밝은 인원이 포함되어 있었기에 상당히 적극적으로 움직일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추측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주력에선 왜구가 차지하는 비중이 월등히 높다고 밖에 볼 수 없는 당대의 기록들이 많긴 합니다.
'진짜 왜인은 열의 셋이고 왜인을 따르는 자들이 열의 일곱' 이라는 『명사』의 기록이 있더군요.
제가 알기로는 저렇게 왜구가 다국적군(?)으로 많이 구성된 시기는 보통 16세기로 치며, 저 『명사』의 기록은 일반적으로 중국인 왜구들을 지칭할 때 많이 인용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대다수 왜구들의 우두머리도 중국인들이었다고 합니다.
훗날 일본인들이 기념해서 비석까지 세운 '왕직' 같은 유명한 왜구 우두머리도 중국인이었다고 합니다.
고려가 한심한게 아니라 당시의 왜구의 세력이 극강.
범 아시아 해적 토탈 패키지 였음.
당시 왜구들 중엔 일본 해적들 뿐만 아니라 남북조 시대에 패배한 일본 남조 정규군들도 상당수 포함 되었고
제주도에 상주하던 몽골군들이 대거 합류 거기에 명나라 해적들과 세력 다툼에서 밀려난 고려무신 세력들도
포함되었고 심지어 홍건적 잔당들도 합류했던 상황에서 이넘들은 그 세력권이 고려 뿐만 아니라 본토인 일본 명나라 동해안과 남중국해 연안, 심지어 말라카 해협까지 세력권을 둔 강대한 세력이었음.
500번 진거 외에 졌다는 말은 어느 정도 인정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만, 그 일뽕은 당시 고려 상황을 쌩무시하고 볼 것만 봤네요. 애초에 당시 나라꼴이 원의 간섭기 이후부터는 홍건적의 침입도 있었고 말도 아니었는데. 표현을 하자면 본진이며 멀티며 완전 개털린 상황에서 왜구들이 들어온 건데, 어쨌든 기세등등하다가는 결과적으로는 막았으니 고려의 승리기도 하죠.
일뽕도 일뽕이지만 그냥 어그로라고 보는게 맞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