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세기 태조왕 시기의 고구려는 요서에 있었다
(현토군 역시 요동이 아닌 요서에 있었다)
글 : 문성재
|
|
|
고구려의 초기 강역은 요서지역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가 중국 북부의 독특한 지형에 유념한다면 그것은 역사적으로도 사실일 수밖에 없지요. 이것이 단순한 과학적 사실일 뿐만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기도 하다는 점은 중국의 각종 사서, 문헌들이 잘 뒷받침해 주고 있습니다. 중국 정사 속의 그 기사들이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반영한 것인지 아닌지는 지금까지 <설문해자>, <수경>, <십삼주지> 등의 문헌자료들에 소개된 패수 및 낙랑군의 위치를 근거로 재구성해 보면 충분히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후한서><고구려전> “건광 원년”의 기사입니다.
|
|
(건광 원년) 봄, 유주자사 풍환, 현토태수 요광, 요동태수 채풍 등이 군사를 이끌고 요새를 나가 예맥의 거수를 사로잡아 목을 베고 병력과 말, 재물들을 노획하였다. 이에 궁(태조왕)이 세자 수성을 보내 2,000여명을 거느리고 요광 등을 따라잡은 후 사자를 보내 거짓으로 투항하니 요광 등이 속아넘어갔다. 수성이 그 일로 지세가 험한 요지를 거점으로 삼고 대군을 차단하면서 한편으로는 3,000명을 몰래 보내 현토, 요동을 공격하고 성곽을 불태워 2,000여명이 사상하였다. 그래서 (풍환, 요광, 채풍 등이) 광양, 어양, 우북평, 탁군 속국의 기병 3,000여 기를 차출하여 구원에 나섰지만 맥인(고구려군)들은 벌써 사라지고 없는 것이었다.
春, 幽州刺史冯焕、玄菟太守姚光、辽东太守蔡讽等, 将兵出塞击之, 捕斩濊貊渠帅, 获兵马财物. 宫乃遣嗣子遂成将二千餘人逆光等, 遣使诈降, 光等信之. 遂成因據险厄以遮大军, 而潜遣三千人攻玄菟、辽东, 焚城郭, 杀伤二千餘人. 于是发廣阳、渔阳、右北平、涿郡属国三千餘骑同救之, 而貊人已去.
|
|
|
이 기사에 따르면, 유주자사 풍환, 현토태수 요광, 요동태수 채풍이 대군을 이끌고 노룡새를 나와 고구려를 선제공격 하자 태조왕의 밀명을 받은 세자 수성은 3,000명을 데리고 한나라에 거짓으로 투항한 후 지세가 험한 요충지에 배치된 셈입니다.
얼마 후 풍환 등이 수성에게 방어를 맡기고 떠나자 그는 즉시 자기 휘하의 3,000명을 데리고 현토, 요동 두 군에 대한 공격에 나섰고, 그제서야 그에게 속은 것을 안 풍환 등이 광양, 어양, 우북평, 탁군 속국으로부터 3,000여 기의 기병을 차출하여 허겁지겁 두 군을 구원하러 나섰으나 수성은 이미 두 성을 불태우고 철수한 후였습니다.
|
|
여기서 우리가 주의깊게 살펴보아야 할 부분이 한나라의 풍환 등이 현토, 요동 두 군을 구원하는 과정에서 차출한 기병들이 광양, 어양, 우북평, 탁군 속국의 병력이라는 점입니다. 현재 중국 학계에서는 광양은 지금의 계현, 어양은 지금의 북경 북쪽 밀운현, 우북평은 지금의 내몽고 영성현, 탁군은 지금의 탁주시로 각각 비정하고 있지요. 이 비정에 큰 문제가 없다는 전제하에서 이를 지도에 나타내면 다음과 같은 셈입니다.
|
|
<지도 - 현토, 요동 구원에 차출된 각지 병력들>
|
|
|
그런데 여기서 가장 동쪽에 위치한 내몽고자치구 적봉시의 영성현에서 현재 학계에서 제3기 현토군 치소로 비정하는 요동성 신빈현까지는 지리적으로 결코 가까운 거리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현재의 고속도로 직선거리로 따져도 대략 581 km 즉 위진대의 ‘1리 = 425m’ 수준으로 치더라도 1,366리 가까이 되는 먼 거리이니까요.
|
|
비슷한 시기인 삼국시대에 위나라에서는 “전군교위 하후연은 사흘만에 500리, 엿새만에 1천리를 주파한다(典军校尉夏侯渊, 三日五百, 六日一千)”는 말이 유행했다고 합니다. 하후연(夏侯淵)은 정예 기병부대를 이끌었던 조조의 최측근 명장이지요.
만일 저 말이 어느 정도 믿을 만한 말이라면 위진대에 기병부대는 사흘에 212km, 엿새에 425km를 주파한 셈이니까 매일 70km를 진군했다는 이야기이지요.
|
|
문제는 아무리 훌륭한 명마라고 해도 1,000리가 넘는 장거리를 계속 달릴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칭기스칸 당시에는 몽골 기병대가 1인당 8-9필의 군마를 보유하면서 장거리를 행군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도 말이 지치지 않고 처음과 동일한 속도를 유지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족, 특히 칭기스칸 당시보다 최소 1,000년 전인 한나라의 경우에는 그같은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마필 관리 시스템이 존재했을 리가 없지요.
|
|
따라서 풍환 등이 차출한 한나라의 기병들은 목적지인 현토, 요동 두 군으로 달려가는 중간 중간에 속도를 늦추거나 휴식을 취하면서 목적지까지 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요령지방은 천산산맥이 높게 솟아 있고 산들이 첩첩이 늘어서 있기 때문에 행군 속도는 더더욱 늘어졌을 것은 자명하지요.
그렇다면 현토군에서 가장 가까운 영성현에서 출발하여 매일 70km를 주파한다고 해도 열흘 이상이나 걸렸을 겁니다.
|
|
풍환 등이 현토, 요동을 구원하는 과정에서 지원 병력을 굳이 광양, 어양, 우북평, 탁군에서 차출했다면 그 이유는 단 하나 뿐입니다. 현토의 실제의 위치가 지금까지 학자들이 주장해 온 요령성 신빈현이 아니라 이들 지역과 지리적으로 인접한 곳 즉 위의 지도에 표시되어 있는 것처럼 하북성 동북부와 요령성 서부 사이의 모 지역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지요.
|
|
(이 내용은 수정을 거쳐 후속작 <낙랑군은 요서에 있었다>에 수록될 예정입니다. 이 내용과 관련하여 여러분께서 많은 가르침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지도가 튕겨 나와서 따로 올립니다. 갈색 네모는 광양,, 어양, 우북평, 탁군의 위치이고 왼쪽 흰 덩어리는 현토와 요동의 추정 위치, 오른쪽 요동반도의 표시는 현재 학계가 정설로 맹신하는 요령성 신빈현(제3 현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