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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6-29 12:31
[한국사] 고구려 동천왕은 위나라 관구검에게 털렸나?
 글쓴이 : 식민극복
조회 : 2,724  







참고로 이 글은 고구려사초략과 삼국사기를 참고함.

*고구려사초략 : 남당 박창화 선생이 일본 왕실도서관에서 몰래 필사한 고구려역사책.

(진서,위서 여부는 아직 확정안났으니 학계 정설은 아님)


요동지역은 본래 고구려의 땅이었지만 역적 발기가 요동태수 공손도에게 도움을 청한 뒤 공손씨의 소유가 되어버린 곳이다.

독자세력을 구축한 공손씨는 위나라에게는 눈엣가시였고 고구려와는 완전 적대관계였다.
동천태왕 5년(231) 위나라가 공손연을 요동태수・거기장군으로 봉해 고구려의 현토성을 기습하도록 하자, 이에 태왕은 우위장군 주희에게 명해 이를 쳐서 깨뜨렸다는 <고구려사초·략>의 기록에서 그러한 사실을 엿볼 수 있다.

동천태왕 6년(232) “3월 오나라의 손권이 공손연과 밀통했다. 공손연은 사신을 오나라에 보내 칭송하며 공물을 바쳤다.”는 기록에서 보듯이, 공손연은 간사한 꾀로 위나라와 오나라 사이에서 이익을 취하려고 오왕 손권에게 사신을 보내 신하라 칭하며 위나라를 함께 치기를 제의했다.

이에 손권이 군사를 공손연에게 보냈는데 공손연이 위와의 관계개선을 위한 미끼로 삼기 위해 오나라의 장군들을 죽이려 하자, 이들은 고구려로 도망가 고구려에게 연합해 공손씨를 치자고 제안한다.

동천태왕7년(233) 9월 손권이 고구려에 사신을 입조(入朝)시켜 ‘바치려 했던 금보진대를 공손연에게 빼앗겼으니, 죽을죄를 면할 길이 없습니다.”라고 했다. 이에 태왕은 사신들이 멀리서 왔음을 흡족해하며 술과 음식을 내려주었고 조의들로 하여금 오나라까지 호위해주었으며, 손권에게는 초피와 갈계피 등을 하사(下賜)하며 “공손연은 사람됨이 뒤집기를 잘 하니 믿을 바 못 된다.”고 충고했다는 <고구려사초·략>에 기록에서 당시 고구려와 오나라와의 역학관계를 알 수 있다.

위나라는 간악한 공손연을 제거하기 위해 공손연에게 위나라의 ‘대사마 낙랑공’으로 봉한다는 사신을 보내면서 공손연을 죽이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그러한 음모를 미리 간파한 공손연이 병사를 많이 늘어세워 위엄을 보이면서 책명 받는 곳을 포위해버린다. 이렇게 되자 위나라 사신은 아무런 음모가 없었던 것처럼 행동해야만 했다.


동천태왕 8년(234) 정월 오나라의 사신에게 연회를 베풀었고, 여름 4월에는 위나라의 조예(조조의 손자)가 사신을 보내 병서・보검・옥상 등을 바치며(獻) 함께 공손연을 멸하고 오나라를 토벌하자고 제안했다. 즉 고구려가 공손연을 치면 위나라가 돕고 위나라가 오나라를 치면 고구려가 돕기로 하고, 둘을 멸망시키면 오나라는 위나라가 공손연의 요동은 고구려가 차지하기로 했다. 그러한 낌새를 알아차렸는지

동천태왕 10년(236) 2월 손권의 사신이 찾아와 화친을 청했다. 그런데 그 언사가 심히 방자하고 예물 또한 야박했기에 태왕이 화를 내며 사신에게 “너희 왕은 공손연을 끔찍이도 섬기면서, 짐을 섬기는 것은 어찌 이리도 야박한가?”라고 하문하자, 사신은 “예물은 여러 번의 풍파로 인해 물에 빠뜨렸음이고, 말씀과 뜻은 공손연에게 함과 같았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이에 태왕이 “지난해에도 너희 사신들이 나를 속이더니, 너도 다시 그러는 것이냐?”라고 말하고는 사신을 옥에 가두라고 명했다.

<삼국사기>에는 동천태왕 10년(236) 손권이 화친을 청하는 사신을 보냈는데 구금했다가 7월에 목을 베어 위나라로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고, <고구려사초략>에는 공손연이 손권이 보낸 사신의 목을 베어 위나라로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동천태왕 11년(237) 류흔・선우사・오림 등이 대방・낙랑 등의 작은 나라들을 침략하고는 공손연과 합치니, 공손연은 스스로 연왕(燕王)이라 칭하고는 교만하게 거드름을 피웠다. 이에 태왕은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 공손연을 토벌하는 계책을 상의하도록 명했다. 그러자 위나라는 관구검을 유주자사로 삼아 선비・오환과 함께 요대에 진을 치고 공격했으나 공손연이 먼저 나와 이들을 격파해버린다. 관구검은 다시 싸우고 싶었으나 큰비가 열흘이나 내려 요수가 넘실대는 바람에 군사를 잃을까 겁이 나 우북평으로 철수해버린다. 이를 틈타 고구려 군대가 현토 서쪽 땅 백 여리를 얻게 된다.

동천태왕 12년(238) 위나라 사마의가 사신을 보내 함께 공손연을 멸하자고 청했다. 위나라가 공손연을 치자, 동천태왕은 주희에게 명해 5천 군사를 이끌고 남소로 출병해 관망타가 지원하라 명했다. 이로서 공손씨의 요동은 3대 50년 만에 망하게 된다. 공손연을 멸망시켰더니 사마의가 약속을 저버리고 교만·방자해졌다. 이에 동천태왕이 노해 사마의와의 소통을 끊어버린다.


사마중달.jpg


공손씨가 멸망하면 ‘려위동맹’에 의해 요동을 당연히 고구려에 돌려주어야 함에도 위나라가 약속을 어기자, 동천태왕이 대노해 친히 5도의 장군들과 십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242년 5월 요동의 서안평을 공격해버린다. 이것이 바로 안평대전이다.

중화사대주의에 입각한 <삼국사기>의 이상한 기록상호동맹에 의해 공손씨가 멸망하면 요동을 당연히 원래 주인인 고구려에게 돌려주어야 함에도 위나라가 약속을 어기자, 대노한 동천태왕이 친히 5도의 장군들과 십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출전해 242년 5월 요동의 서안평을 공격해 차지해버린다. 이를 ‘안평대전’이라 부른다.애초에 위나라는 공손연을 멸망시킨 후 서안평으로 주력부대를 옮겨 동쪽에 있는 고구려를 도모하려 했는데, 동천태왕이 사전에 이를 감지하고는 전략적 요충지인 서안평을 미리 점령해버린 것이었다.

그러자 위기를 느낀 위나라가 유주자사 관구검으로 하여금 고구려를 침략하는  것이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동천태왕이 서안평을 점령하자 이상한 기록을 남겼다. “신하 득래가 태왕이 중국을 침략하고 배반하는 것을 보고 이를 중단하기를 수차례 간하였으나 태왕이 그 말을 따르지 않았다. 득래는 탄식하며 ‘머지않아 이 땅이 쑥대밭이 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단식으로 굶어죽었다.

나중에 관구검이 군사들로 하여금 그의 무덤을 헐지 말며 무덤의 나무도 베지 못하도록 하고, 그의 처자들을 찾아 모두 풀어 주도록 명령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중화사대주의에 심취된 후세의 역사가들이 첨가한 기록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고구려사초·략>에는 <삼국사기>와는 전혀 다르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동양대제 16년(242) 5월 임금께서 친히 십만 병력으로 서안평을 쳐서 빼앗았다. 그러자 좌보 목능이 요양하고 있다가 병을 무릅쓰고 들어와 “병력을 다 써버리면 큰 화를 불러들이게 됩니다. 힘을 키우면서 때를 기다림만 같지 않습니다.”라고 간언하자, 임금은 “국로께서는 요양이나 하시면서 손자나 쓰다듬으시지, 어찌 이처럼 정벌에 간여하십니까!”라고 말했다. 이에 목능은 “소신 역시 황가의 후손으로 어찌 가만히 앉아서 폐하가 위험에 빠지시는데도 간언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출병하실 것 같으면 청컨대 신을 죽여주시오!”라고 말했다. 이에 임금이 화를 내자 손녀인 잠후가 목능을 억지로 나가게 했다. 이 일로 목능의 병이 심해져 죽었으나, 집안사람들은 감히 장사를 지내지 못했다. 임금이 안평에서 돌아와 군신들에게 큰 잔치를 베풀고, 목능을 국공 태보의 예를 갖추어 장사지내게 하고는 잠후에게 “당신 조부는 충신이었소.”라고 말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삼국사기>는 중화사대모화주의에 입각하여 ‘고구려 동천태왕이 감히 중국에게 반하였기에 결국 위나라 장수 관구검에게 큰 화를 입은 것이다.’라는 이상한 기록을 집어넣은 것으로 보인다.  

춘추필법으로 기록된 관구검의 고구려 침공이렇듯 국제정치적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위나라 관구검의 고구려 침략에 대해 중국과 우리의 기록이 서로 다르다. 그 이유는 중국이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한때나마 고구려를 패망의 위기로 몰아넣었기 때문이다. 

먼저 그러한 관구검의 침공에 대한 중국기록인 <삼국지 위서 관구검열전>을 보기로 한다.“정시(3대왕 조방, 240-248) 중 고구려가 배반해 수차례 침범하자 관구검이 보·기병 1만 명을 이끌고 현토에서 출전해 여러 길로 고구려를 쳤다. 고구려왕 궁(동천태왕)이 보·기병 2만 명을 거느리고 비류수(沸流水) 상류로 진군해 양구(梁口)에서 크게 싸웠다. 양음갈이 연파하자 궁이 패주했다. 관구검은 말이 미끄러지지 않게 말발굽을 싸고 수레를 서로 매달아 뒤떨어지지 않도록 하여 환도에 올라 고구려의 도읍을 도륙내고 수천 명을 참수하고 포로로 잡았다.”

(원문) 正始中 儉以高句驪數侵叛 督諸軍步騎萬人出玄菟 從諸道討之.句驪王宮將步騎二萬人 進軍沸流水上 大戰梁口 梁音渴 宮連破走. 儉遂束馬縣車 以登丸都 屠句驪所都 斬獲首虜以千數.“

정시 6년(245) 관구검이 다시 고구려를 정벌하자 궁이 매구로 달아났다. 현토태수 왕기를 보내 추격해 옥저를 지나 천 여리를 가서 숙신씨의 남쪽 경계까지 이르러 환도산과 불내성에 글자를 새겨 각석기공을 했다. 죽이거나 포로가 모두 8천여 명에 이르렀고, 논공행상으로 제후로 봉해진 자가 백여 명에 달했다. 산을 뚫고 물을 대니 이로써 백성들이 이로움을 얻었다.”

(원문) 六年復征之 宮遂奔買溝. 儉遣玄菟太守王頎追之 二過沃沮千有餘里 至肅愼氏南界 刻石紀功 刊丸都之山 銘不耐之城. 諸所誅納八千餘口 論功受賞 侯者百餘人. 穿山溉灌 民賴其利.

또한 <삼국지 삼소제기(조방/조모/조환전)>에는 “정시 7년(246) 봄 2월에 유주자사 관구검이 고구려를 치고, 여름 5월에 예맥을 토벌해 이들을 모두 격파했다 (七年春二月 幽州刺史毌丘儉討高句驪, 夏五月 討濊貊, 皆破之)”는 기록이 있고,

<오환·선비·동이전 동옥저 조>와 <양서 동이열전 고구려 조>와 <한원(翰苑)>에는 위 <삼국지 관구검열전>과 거의 같은 기록이 있다.  

위 중국기록들만 보면 동천태왕이 위나라의 일개 장수 관구검에게 대패해 도망쳐버렸고, 고구려의 도성인 환도(丸都)가 함락당하고 백성 8천명이 목이 베어지거나 포로로 잡히는 대참사를 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일 정말로 그랬다면 당시 고구려는 위나라에게 멸망당해 아마도 사직을 이어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당시 고구려는 멸망하지 않았다는 역사적 사실이다. 위 기록들이야말로 중국 특유의 춘추필법의 아래 사필원칙(史筆原則)에 입각해 기록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위나라 관구검을 대파했다는 우리 기록들 그러나 이는 많은 역사적 사실을 생략한 기록으로 실제와는 많이 다르다. 실제 관구검은 2차례 고구려를 침공했는데, 1차 전쟁은 고구려의 완벽한 승리였다. 고구려 동천태왕이 직접 2만의 군사를 이끌고 나가 위나라 관구검의 1만 군사를 비류수에서 대파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중국은 2번 다 동천왕이 패해서 도망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남당 박창화 선생이 일본 궁내청에서 필사한 <고구려사초·략>에는 “동양대제 18년(244) 7월에 위나라 관구검이 현토에 쳐들어와 노략질했다. 태왕이 보병과 기병 2만을 이끌고 나가 비류수(沸流水)의 상류에서 이를 받아쳐서 크게 이기고 3천여 수급을 베었다. 이를 비수대전(沸水大戰)이라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에도 “20년(246) 가을 8월, 위나라 유주자사 관구검이 1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현토를 침공했다. 태왕이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거느리고 비류수에서 전투를 벌여 그들을 쳐부수고 3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라는 같은 기록이 있어 고구려 동천태왕은 위나라 관구검과의 1차 비류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었던 것이 확실하다.

<고구려사초략>은 관구검의 고구려 침공을 1차와 2차로 구분해 1차 침공연도를 동양대제 18년(244)으로 2차 침공을 20년(246)으로 기록한 반면, <삼국사기>는 1차와 2차의 구분 없이 모두 동천태왕 20년으로 기록했다. 중국기록은 구분되어 있으나 역사적 사실이 사실과 다르게 기록되어 있으며, 2번 모두 고구려 왕이 패해서 관구검이 고구려의 도성을 함락했다고 한다.

필자는 <고구려사초략>의 기록이 훨씬 신빙성이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위나라 관구검의 1만 병력 중 3천명이 참수될 정도라면 그야말로 기록 그대로 ‘비수대전’이기 때문에 전의를 상실한 관구검이 일단 돌아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삼국지 위서 관구검열전>에서 비류수에서 싸운 연도를 명확히 기록하지 않고 ‘정시 중’이라고 애매하게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관구검의 재침공 때 자만한 동천태왕<삼국사기>에는 관구검의 침략이 한 번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20년(246) 가을 8월, 위나라 유주자사 관구검이 1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현토를 침공했다. 태왕이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거느리고 비류수에서 전투를 벌여 그들을 쳐부수고 3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1차 침공에서 인용)또 군사를 이끌고 양맥의 골짜기에서 전투를 벌여 역시 적군을 쳐부수고 3천여 명을 죽이거나 생포했다.

태왕이 여러 장수들에게 "위나라 대군이 오히려 우리의 적은 군사만도 못하구나. 관구검이란 자는 위나라에서는 명장이라 하나, 지금은 그의 목숨이 내 손에 달려 있구나."라고 말하고는 철갑기병 5천명을 거느리고 공격했다.” 위와 같이 고구려 동천태왕은 관구검의 2차 침공 때도 초전에서 3천명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는 큰 전과를 올렸다. 그러한 전과를 올린 곳이 <삼국사기>에는 ‘양맥(梁貊)의 골짜기’라고 기록되어 있고, <삼국지 위서 관구검열전>과 <고구려사초·략>에는 양구(梁口)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양구는 바로 양수(梁水)의 입구를 말하는 것이다. 양수를 <중국고대지명대사전>에서 찾으면 “양수는 산서성 장자현 동쪽에 있다.


양구에서의 대승에 도취된 나머지 극도의 자만에 빠진 동천태왕은 아예 관구검과 위나라 병사들을 전멸시키기 위해 무모하게 정면공격을 감행한다. 막다른 골목에 몰리게 된 관구검이 방진(方陣)을 치고 결사적으로 싸우자, 이번에는 오히려 고구려 군사가 대패해 1만8천여 명이 전사했다. 자만하다 허를 찔려 대패한 태왕은 1천여 기병을 거느리고 압록원으로 달아났다.방진이란 방패와 장창으로 중무장한 보병이 어깨를 맞대고 보통 8열종대로 늘어서는 전술대형으로, 말을 타거나 땅 위에서 활을 쏘는 사수들의 공격에는 다소 약점이 있으나 철갑기병의 공격을 막아내는 데는 효과적인 단단한 수비대형이다. 

개마무사.jpg


<고구려사초략>에는 “동양대제 20년(246) 8월 임금께서 관적(관구검)이 우회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우근 등을 보내 맞서 싸우게 했다. 그러나 우리는 수가 적고 저쪽은 수가 많은데다가 그들의 예봉을 마주하더니 자못 전황이 상당히 어려워졌다. 이에 상께서 철갑기병 5천을 추려서 양구(梁口) 서쪽에서 적진을 들이쳐 크게 이겼고, 노획한 병장기과 마필은 셀 수 없이 많았다. 상이 주황후와 함께 포로를 접수했다.관구검의 대군이 또 다시 밀려오니 우근이 싸우다 전사했다.

관구검이 방진을 펼쳐 선봉의 위세가 파죽지세인데다가 우리의 남쪽통로도 빼앗겼다는 보고가 들려오자, 후비들까지 데리고 있는데다가 상황이 녹녹치 않아 날랜 기병 천여기와 함께 압록원으로 물러났다. 주전의 군대 역시 패해 죽은 병사가 만 명이나 되자, 상께서 옹구(壅口)로 동천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동천태왕이 2번 모두 관구검에게 패한 것이 아니라 동천태왕이 친전했던 비류수(1차)와 양구(2차)에서는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후 관구검이 다시 침공한 전투에서 출전한 장수들이 크게 패하자 동천태왕은 도성인 환도성을 내어주고 작전상 후퇴를 할 수 밖에 없는 비극적인 처지가 되고만 것이었다. 그러면서 고구려는 후퇴하며 대역전승을 거둘 작전을 수립할 시간을 벌었던 것이다.

동천태왕 20년(246) 겨울 10월에 위나라 장수 관구검은 고구려의 도성 환도성을 공격해 함락시키고는 백성들을 도륙내고 보물들을 챙겼다. 그리고는 바로 현토태수 왕기로 하여금 동천태왕을 추격하게 했다. 도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은 동천태왕은 통곡하면서 목능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한탄하며 남옥저(南沃沮)로 달아나다가 죽령(竹嶺)에 이르렀다.

군사들은 다 흩어져버려 거의 없어지고 오직 밀우(密友)만이 동천태왕 곁에 있게 되었다. 밀우는 태왕에게 "지금 추격해오는 적병이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으므로 이를 벗어나지 못할 형세이오니 제가 결사적으로 적군을 막아보겠사오니 그 틈을 타서 태왕께서는 달아나소서.”라고 말하고는 결사대를 모아 함께 적진으로 달려가 전력을 다해 싸웠다. 백성들 역시 평소에 태왕의 성덕을 흠모하고 있었던지라 모두들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다.

그사이 동천태왕은 샛길로 빠져나와 산골짜기에 의지하며 흩어진 군사들을 모아 자신을 호위하게 하고는 군사들에게 "만약 밀우를 구해오는 자가 있다면 후한 상을 내리겠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유옥구가 앞으로 나서며 "제가 해보겠습니다."라고 자청하고는, 전장으로 달려가 땅에 쓰러져 있는 밀우를 발견하고는 들쳐 업고 돌아왔다. 동천태왕이 자신의 허벅지에 밀우를 눕혔더니 한참이 지나서야 깨어났다.

동천태왕은 다시 사잇길을 헤매다가 남옥저에 이르렀다. 그러나 위나라 군사들이 쉬지 않고 추격하는지라 태왕은 적절한 계책도 없고 형세가 어려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때 유유(紐由)가 나서며 "형세가 위급하다해서 헛되이 죽을 수는 없습니다. 신이 어리석으나마 한 가지 계책이 있습니다. 제가 음식을 가지고 가서 위나라 군사들을 대접하다가, 기회를 보아 적장을 찔러 죽이고자 합니다. 만약 저의 계책대로 된다면, 그 때 태왕께서 적을 맹렬하게 공격하시면 승리할 수 있을 겁니다."라고 말하자, 태왕이 "그리 하겠노라"라고 말했다.

유유가 위나라 진중에 들어가 거짓 항복을 위장하고는 "우리 임금이 대국에 죄를 짓고 해(海)로 도망했으나 이제 의지할 곳이 없으므로 장차 귀국의 진영에 항복해 귀국의 법관에게 목숨을 맡기려고 합니다. 그에 앞서 소신을 먼저 보내 변변치 못한 음식이나마 대접하라 하셨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위나라 장수가 이 말을 듣고 그의 항복을 받으려 했다. 이 때 유유가 식기에 감추어 간 칼을 뽑아 위나라 장수의 가슴을 찌르고 그와 함께 죽자 위나라 진영이 대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그때 동천태왕이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급습하니 위나라 병사들은 전열을 가다듬지 못하고 마침내 낙랑으로부터 퇴각해버렸다. 이때 관구검의 군대는 고구려 도성(환도)에서 이미 물러나 있는 상태였다. 

고구려가 위나라 장수 관구검에게 잠시나마 큰 난리를 겪는 중에 낙랑태수 유무와 대방태수 왕준이 남쪽으로부터 들어와 관구검을 돕자, 백제의 고이왕은 그 허를 틈타 장수 진충을 시켜 이 두 곳을 기습해 많은 수의 변방 백성을 잡아가는 어부지리를 취했다.

마침내 승리를 거두고 도성으로 돌아온 동천태왕마침내 동천태왕이 위나라 군대를 물리치고 도읍인 환도성으로 돌아와 공적을 평가하니 단연 밀우와 유유가 1등 공신이었다. 밀우에게는 거곡과 청목곡을 주고, 유옥구에게는 압록과 두눌하원을 주어 식읍으로 삼게 하고, 유유에게는 대사자로 추증하고 또한 그의 아들 다우로 하여금 그 자리를 잇도록 했다.

태왕은 도성인 환도성이 관구검에게 몹시 파괴되어 다시 도읍이 될 수 없다고 판단하고는, 본래 선인 왕검의 택지였던 평양(平壤)에 성을 쌓아 백성과 종묘사직을 옮겼다. 동천태왕은 위나라 관구검에게 잠시나마 변을 당한 이후로는 정사에 권태감을 느껴 오로지 유람하며 사냥하기와 여색에 빠져 세월을 보내면서, 태자에게 정사를 맡아보게 했다.

22년(248) 7월 태왕의 모후인 주통태후가 더위를 먹어 심한 설사병으로 춘추 67세에 죽자 고향인 주통촌에 모셨다가 나중에 아들 동천태왕의 릉에 합장했다.


길림성 집안에서 발견된 관구검기공비중국의 기록인 <삼국지 관구검열전>에 “(정시 6년(245) 관구검이 다시 고구려를 정벌하자 궁이 매구로 달아났다. 현토태수 왕기를 보내 추격해 옥저를 지나 천 여리를 가서) 숙신씨의 남쪽 경계까지 이르러 환도산과 불내성에 글자를 새겨 각석기공을 했다.(至肅愼氏南界 刻石紀功 刊丸都之山 銘不耐之城)”라는 는 기록이 있고, <삼국사기>에는 “이 전쟁에서 위나라 장수가 숙신의 남쪽 경계에 이르러 돌에 전공을 새겨 기념하고, 또한 환도산(丸都山)에 이르러 불내성(不耐城)에 기념비를 새기고 돌아갔다.”는 기록이 있으나 <고구려사초략>에는 그러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이는 <삼국사기>가 무분별하게 중국기록을 보고 그대로 베낀 것이 아닌가 한다. 


출처 : http://www.greatcorea.kr/sub_read.html?uid=511&section=sc2&section2=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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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auder 17-06-29 19:53
   
뜬금없는 의문이지만... 낙랑의 위치가 생각나는군요. 낙랑이 있음에도 평양을 세웠다는것도 주의깊게 볼만하구요...
뚜리뚜바 17-07-02 00:30
   
이제서야 의문을 가지지만 그뒤로 요동은 어떻게 된건가요? 혹 사람들이 얘기 하기를 요동은 광개토태왕에 이르러서야 회복을 했다는데;; 이 말이 사실인지 잘모르겠더군요.  저뒤로 쭉 요동은 우리 땅이 아니었던건가요?
자기자신 17-07-02 02:44
   
고구려동천왕이 위나라유주자사 관구검에 패한것 너무 지나친자만심때문이죠 2번에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위나라군을 깔보고 얕잡아보다가 아주 크게 당했죠 고구려군의대패로 끝났고 결국 고구려수도까지 함락되는 상황까지 발생했죠 동천왕은 저멀리 피신했고요 차짓 잘못했다가 고구려가 수백년 좀더 훨씬 빨리 멸망할뻔했죠
인류제국 17-07-02 10:50
   
근대 동천왕 그렇게 무능한 군주는 아니었다고 합니다

당시 위나라를 너무 얕본거죠

당시 고구려는 부여 백제한테도 밀리는 수준이었으니

당시 위나라 부여는 동아시아 투톱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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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2 [한국사] 고려 후기 의주의 영토: 형제산, 청수구자 (지도 첨부 (3) 보리스진 11-03 1001
19791 [기타] 우리가 알고 있던 고구려 평양성은 가짜다! 원사(元… (1) 관심병자 11-02 944
19790 [한국사] [FACT] 역사 유튜버중에 이분만큼 정리 잘하는 사람 없… (1) 아비바스 11-01 1007
19789 [기타] 일제 강점기 지명 변경 (1) 관심병자 10-31 1011
19788 [기타] 한반도로 줄어든, 우리영토의 비밀 (4) 관심병자 10-30 1094
19787 [기타] 동이족의 어원은 퉁구스이며 아홉 개의 한국을 의미 관심병자 10-30 743
19786 [한국사] 학자들이 주장하는 고조선 영토 아비바스 10-28 1121
19785 [한국사] 고조선은 초기부터 굉장히 강성했었다. (3) 아비바스 10-28 951
19784 [기타] 한민족 고대 국가 가설 관심병자 10-24 1076
19783 [중국] 허풍 삼국지의 실제영토를 까발린다 (유비관우장비) … (6) 레종 10-17 2353
19782 [한국사] 고려시대 역참 이리간을 통해서 본 압록강 위치(지도… (1) 보리스진 10-15 1579
19781 [일본] 조선에 건너온 왜군이 대부분의 시간을 바닷가에 성 … (2) 전략설계2 10-15 1611
19780 [기타] 진국왕-징기칸-징기즈칸으로 (1) 관심병자 10-10 1148
19779 [한국사] [ KBS 다큐 ] - 제 5 의 문명, 요하문명(遼河文明) (1) 아비바스 10-08 998
19778 [한국사] [ EBS 특강 ] - 우실하 교수 - 고조선(古朝鮮)이 건국연… 아비바스 10-08 815
19777 [한국사] [ EBS 특강 ] - 우실하 교수 - 한민족의 피라미드형 무… 아비바스 10-08 743
19776 [한국사] [ EBS 특강 ] - 우실하 교수 - 요하문명(遼河文明)을 말… 아비바스 10-08 768
19775 [한국사] 우실하 교수, 요하문명과 고조선(古朝鮮)을 우리에게… 아비바스 10-08 738
19774 [기타] 중국 사극" 대명풍화" 에서 거론된 흉노의 청동봉황 (5) 조지아나 10-04 1681
19773 [한국사] [ 고조선제국(古朝鮮) ] 화북, 산동, 양쯔강까지 지배… (1) 아비바스 10-03 1139
19772 [한국사] 우실하 교수의 대 고조선 ( 大 古朝鮮 ) 명강의 1부 ~ 4… (1) 아비바스 09-25 1154
19771 [한국사] 네이처(NATURE) - 한국어와 중국어가 뿌리부터 다른 이… (7) 아비바스 09-21 1549
19770 [한국사] 네이처(NATURE) - 한국어 기원, 9000년전 "요하문명" 서요… (3) 아비바스 09-21 1165
19769 [한국사] 네이처(NATURE) - 요하문명은 한국인과 어떤 관계가 있… (3) 아비바스 09-21 1051
19768 [한국사] 네이처(NATURE) - 한국어는 9000년 전, 서요하의 농경민 (1) 아비바스 09-21 931
19767 [한국사] 네이처(NATURE) - "트랜스유라시아어족" 언어의 기원 (1) 아비바스 09-21 833
19766 [한국사] 네이처(NATURE) - 한국인의 기원은 요서, "트랜스유라시… (21) 아비바스 09-18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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