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절요』 제33권
○ 박의중이 남경에서 돌아왔다. 예부(禮部)가 황제의 명을 받들어 자문(咨文)을 보내기를, “표문에 이르기를, ‘철령(鐵嶺)의 인호(人戶)에 대한 일은 조종(祖宗) 이래로 문주(文州)ㆍ화주(和州)ㆍ고주(高州)ㆍ정주(定州) 등 고을이 본래 고려에 예속되어 있었다’ 하였으니, 왕의 말대로 하면 그 땅이 고려에 예속되어야 마땅하나, 이치와 사세로 말하면 그 몇 고을의 땅을 지난날에는 원 나라에서 통치하였으니, 지금 요동에 예속되어야 마땅하고, 고려가 말하는 것을 경솔히 믿을 수 없으니, 반드시 끝까지 살피고야 말겠다. 또 고려는 큰 바다로 막히고 압록강으로 한계하여, 일찍이 옛날에는 따로 나라를 이루었으나, 중국의 역대 조정의 정벌을 자주 입은 것은 분쟁의 단서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고려는 외교를 통하여 원래 고려 땅을 찾고자 노력하였으나 명나라의 회신은 고려의 노력을 무시였다. 외교적인 노력이 무산되어 결국 양국 간에 무력대결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결국 고려와 명나라가 외교적 마찰이 일어난 것은 원나라가 지배하였던 땅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다투는 과정에서 일어난 영토 전쟁이었다. 이것은 고려가 비록 원나라와 전쟁에서 져 고려 땅 일부를 원나라에게 점령당하였지만 언젠가는 이를 되찾기 위한 마음을 갖고 있다고 봐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고려에서 인식하는 서북방의 영토는 어디까지였나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성계가 우왕에게 올린 상소문에서 나타나고 있다.
『고려사절요』辛禑[三]
○ 우리 태조가 변방을 편안히 하는 계책을 올렸다. 아뢰기를, “북계(北界)는 여진ㆍ달달ㆍ요동ㆍ심양의 지역과 서로 연하였으니, 실로 국가의 중요한 땅입니다. 비록 일이 없는 때라도 반드시 양식을 저축하고 군사를 길러 의외의 사태에 대비하여야 하겠는데, 이제 그 곳 주민들이 매양 저들의 풍속에 접하여 서로 물자를 교역하고 날마다 서로 친압하여 혼인을 맺기까지 하여 그 족속들이 저들에게 유인 당하여 가고, 또 앞잡이가 되어 들어와 약탈하기를 그치지 않으니,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다는 말은 동북 한 방면의 걱정일 뿐만이 아닙니다.
이 상소를 보면 당시 고려와 원의 국경선은 지금의 중국 요녕성 어느 지방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요동과 심양 지역과 연접한다는 기록으로 봐서, 요동은 어디라고 집어서 말하기 어려우나, 지금우리가 알고 있는 광의의 요동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구체적인 지역명인 것이다. 왜냐하면 광의의 뜻이었다면 ‘요동’이라는 표현으로 충분하지 굳이 ‘심양’이라는 지명을 넣지 않았을 것이다. 상소의 내용은 요동, 심양을 한 축으로 놓고 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내용을 보면 고려와 원나라의 국경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압록강에서 원산만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고, 요양, 심양, 개원을 잇는 선과 맞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의 학자들도 그들의 태조가 올린 상소였기 때문에 함부로 손을 대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상소 내용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원나라 당시 고려의 영토는 이미 지금의 압록강을 넘어 요양, 심양과 가까운 곳에 원나라와 접경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위에서 본바와 같이 고려는 지금의 압록강 너머에 국경선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고려는 원나라에 빼앗긴 영토를 되찾는 노력을 했던 것이다. 고려는 명이 갓 왕조가 성립되어 아직 안정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던지, 명에게 반환을 요청했던 것이다. 고려의 입장에서 볼 때는 원나라가 지배하였던 동녕로 땅은 본래 고려의 영토였으니 그대로 돌려받아야 된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명나라의 입장은 달랐다. 이에 대하여 명나라는 역사적인 연고권은 인정하나, 지금의 명나라가 원나라 지역을 모두 지배하였으니, 당연히 옛 원나라 땅은 모두 명나라에 귀속되어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것에 대한 기록은 고려사절요에 기록되어 있다. 고려와 명나라의 현안을 풀기 위하여 당시 명의 수도인 남경으로 박의중을 보냈고, 그는 명 황제의 답신을 가지고 돌아 왔다. 고려는 좋은 말로 영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는데, 명이 이를 거부하고 그들 나름대로 이유를 달아 반환거부의사를 분명히 할 뿐만 아니라, 철령위를 설치할 것임을 결연하게 표했다. 명나라의 이런 태도에 고려는 나름대로 대책을 강구하고 있었다.
『고려사절요』戊辰辛禑4
○ 최영이 여러 재상과 함께 정요위(定遼衛)를 칠까, 화친을 청할까의 가부를 의논하니, 모두 화친하자는 의논을 따랐다. 이때 요동 도사가 이사경(李思敬) 등을 보내어 압록강을 건너 방을 붙이기를, “호부가 황제의 명을 받드노라. 철령(鐵嶺) 이북ㆍ이동ㆍ이서는 원래 개원(開原)의 관할이니 여기에 속해 있던 군민(軍民)ㆍ한인(漢人)ㆍ여진ㆍ달달ㆍ고려는 종전과 같이 요동에 속한다." 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의논이 있었다.
이것은 명나라가 고려에 선전 포고해온 것에 대한 대책회의 기록이다. 이 회의에서는 전쟁보다는 화친을 하자는 쪽으로 결말이 났다. 그러나 명나라는 신속하게 행동을 하였다. 이 내용을 분석해 보면 명은 고려까지도 복속시키고자 하였다. 고려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고, 많은 고민을 한다. 이때 명나라에 갔던 설장수가 돌아와 구두로 명황제의 말을 전하였다.
『고려사절요』 제33권 신우 4(辛禑四)
○ 설장수(偰長壽)가 남경으로부터 돌아와서 구두로 황제의 명을 전하기를, “-------- 철령(鐵嶺) 이북은 원래 원나라에 속하였으니 모두 요동에 귀속시키고, 개원ㆍ심양ㆍ신주(信州) 등처의 군사와 백성은 생업을 회복하도록 들어주라" 하였다.
이 말에서는 '고려는 요동에 속한다'는 말은 빠졌지만, 명나라는 꾸준히 철령 이북을 자국에 귀속하겠다고 하였다. 이에 고려 조정은 다시 한 번 회의를 열었다.
『고려사절요』 제33권 신우 4(辛禑四)
“최영은 백관을 모아 철령 이북을 명나라에 바칠 것인가를 물었다. 모두 안 된다고 하였다. 우왕은 최영과 비밀리에 요동을 칠 것을 정하였다.
당시 수시중(守侍中)이었던 최영은 모든 신하들을 모아 놓고 의견을 물어보았다. 이 회의에서는 당연히 고려 땅이었던 철령 이북 땅을 명나라에 내주는 것에 모두 반대하였다. 뿐만 아니라 명과의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서북면 병마사가 급보를 해온다.
『고려사절요』 제33권 신우 4(辛禑四)
서북면 도안무사 최원지(崔元沚)가 보고하기를, “요동 도사가 지휘(指揮) 두 사람을 보내어 군사 1천여 명을 거느리고 와서 강계에 이르러 장차 철령위(鐵嶺衛)를 세우려 하여 요동(遼東)에서 철령에 이르기까지 역참(驛站) 70군데를 두었다." 하였다. 우가 동강에서 돌아오다가 말 위에서 울며 이르기를, “군신들이 요동을 치려는 나의 계책을 듣지 않아서 이 지경이 되게 하였다." 하고, 드디어 팔도의 군사를 징집하였다.
고려에서 철령위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을 한참 의논하고 있는 차에, 명에서는 확실하게 행동으로 나선 것이다. 이에 대하여 당시 고려왕은 자기의 계획에 따라주지 않은 신하들을 원망하며 바로 팔도에 징집령을 내렸다. 이것이 요동정벌의 시 발이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박의중을 통하여 명의 입장을 공식적으로 통보하였다. 여기에 명나라 후군도독 왕득명을 통하여 고려에 철령위를 설치한다고 통보하였다.
『고려사절요』 제33권 신우 4(辛禑四)
○ 대명(大明) 후군도독부(後軍都督府)에서 요동 백호(百戶) 왕득명(王得明)을 보내와서 철령위 설치를 통고하였다. 우가 병을 칭탁하고 백관에게 명하여 교외에서 맞이하게 하였다. 판삼사사 이색(李穡)이 백관을 거느리고 득명을 맞이하여, 돌아가 황제께 잘 아뢰어 주기를 요청하였다. 득명이 말하기를, “천자의 처분에 달려 있는 것이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요." 하였다. 최영이 노하여 우에게 아뢰고, 요동 군사로서 방문(榜文)을 가지고 양계(兩界)에 이른 자를 죽이니, 죽은 자가 모두 21명이나 되었다. 단지 이사경(李思敬) 등 5명만이 남았는데 영을 내려 그 지방에 머물러 두고 단속하게 했다.
명나라는 사신을 보내 당시 고려가 가장 싫어하는 말인 철령위를 설치하였다고 전하였다. 이에 고려에서는 명나라 황제에게 다시 한 번 설득해줄 것을 당부하였는데, 사신인 왕득명은 거부하였다. 이에 최영은 우왕에게 보고하고 철령위 설치하겠다고 통고한 자들을 죽였다. 이때 죽은 자가 21명이었는데 고려는 중국 사신단을 죽인 것이므로 이는 곧 명과의 전쟁을 선포한 것과 다름이 없게 되었다.
이것을 다시 정리해보면 철령뿐만 아니라 철령 주변의 많은 땅이 원래 고려의 것이었지만, 대몽항쟁기에는 원나라 관할이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원나라가 기울자 고려는 그 땅을 되찾으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명은 원나라를 대신한 것이 명나라이기 때문에, 원나라가 다스리던 땅은 바로 명나라의 땅에 속하는 것이므로 돌려줄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고려는 군사적인 행동은 피하려고 최대한 노력하였다. 요동에서 처음 사단이 났을 때만 하여도 고려는 외교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화친 쪽으로 기울었다. 하지만 명황제의 확고한 의지를 알고 고려도 이에 적극적으로 대응책을 세우기 시작했다. 급기야는 왕득명 일행을 처단하는 것으로 명에게 단호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한편으로 외교상으로 명나라를 설득시키는 작업이고, 다른 하나는 군사력을 동원하는 방식이었다. 결국 명나라가 무리하게 철령위를 설치한다고 통보하는 바람에 고려는 군사행동을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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