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선교사 제이콥 무스는 서울의 80프로가 초가집이었다고
했습니다 90프로는 전국적인 비율 얘기였네요 80프로로 수정하죠
길거리 오물천지인건 진짜 길에 노상방뇨해도 잡질 않았습니다
하수도가 없어 개천에 변을 뿌려 온 개천이 똥물이었고요
서양도 18세기까지 길에다 변 뿌려서 길가던 사람이 맞고 그랬습니다
19세기에도 정화조없이 템즈강에 하수도 써서 수많은 런던시민들이 콜레라로 죽었죠
구한말 외국 탐방자들이 공통 지적하는게 거리와 개천의 똥입니다
지들도 100년전 겨우 치우기 시작했으면서 더럽네 ㅉㅉ 이렇게 쓰죠
그런면에서 사극은 진짜 판타지입니다
실제 타임슬립해서 조선시대로 가면 아 더런놈들 하면서 욕이 한사발은
나올거에요
건물 구조나 양식에 대한 고증은 어느 정도 배제되었다고 감안하시는 편이 좋습니다. 아시다시피 목조 건축물은 오랫동안 유지되기가 힘든데, 그마저도 여러 환란으로 인해 어지간히 파괴된지라 복원에 참고할 자료가 제한적이긴 합니다.(설계도나 건물의 설계구조를 파악할 수 있는 그림, 기록 등이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있어도 매우 부분적이기도 하고 말입니다.)
주요 유적(왕성, 능, 절 등)을 제외한 민가의 규모나 배치 등도 세세한 맥락에선 고증과 맞지는 않습니다. 주요 도로와 구역의 고증은 감안하여 나름대로 배치한 것이겠지만, 이 또한 아시다시피 경주의 대부분 유적들 위에는 현대의 건축물들이 있고, 또 옛 건물 위에 또 새로운 건물이 지어지는 등(신라->고려->조선 사이에서 있었을 반복적인 건축)으로 인해 집 하나하나 파악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건 해외의 어느 고증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것이니 크게 게의치 않으셔도 될 것입니다.(도시 자체가 보존된 경우는 제외.)
이런 3D 고증은 현대인들이 과거 도시나 건축의 규모를 '어림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만드는 것이 대부분이라, 대략 '저 정도 도시 규모는 되었겠지.'하고 생각하시면 편하게 받아들이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