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서 평가하는것과 달리 동학 농민 운동은
사회주의 혁명과는 크게 관련이 없다.
동학의 기치는 '충효'였다.
부패한 관리를 척결하고 나라를 바로 잡겠다는 것이다.
동학 봉기는 2차례 있었는데,
첫번째 봉기는 성공했으며,
조선이라는 나라에 어느정도 긍정적인 영향을 줬다고 할수있다.
1차 봉기후 관리들은 동학 세력과 협력관계를 맺고 다시 들어와서 통치할수 있었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 백성들의 처우는 좋아졌다고 할수있다.
봉기의 목표대로 더 좋은세상을 만드는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두번째 봉기는 동학군이 이용당해 정치세력화된 봉기이다.
일본이 조선에서 주도권을 잡고 활개치게 된것이, 청일전쟁 이후이다.
2차 봉기 이전의 일본세력은,
조선의 입장에서 근대화 파트너로서 일본, 러시아, 청, 미국 등 여러 나라중에서 저울질했던 하나의 세력에 불과했다.
2차 봉기는 흥선 대원군이 동학에 서찰을 보내 봉기를 부추겼다.
흥선대원군은 이전에도 권력을 되찾기 위해,
조선 정부의 구식군과 신식군의 차별을 이용해 부추겨 반란을 일으켜 구식군을 이끌고 왕궁에 처들어왔던 인물이다.
고종황제의 부친 이긴 하지만 그는 '군'으로 왕자의 신분으로 '상왕'이 아니다.
고종이 친정을 하기 시작한 이후에 권력을 되찾겠다는건 반역이다.
2차 봉기는 1차 봉기와는 다르게 불순한 의도에 이용당했으며,
조선 정부의 적극적 토벌로 동학은 사실상 해산된것이다.
흥선대원군은 이후에도 권력을 잡기위해 일본과도 접촉했으며,
명성황후가 일본자객에게 시해 당했을때 많은이들이 그 흑막으로 흥선대원군을 지목했다.
구식군의 반란당시 궁궐로 들어와 명성황후를 죽이려고 했던게 흥선대원군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