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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7-15 14:24
[기타] 구한말 일본군과 한국군의 시가전
 글쓴이 : 관심병자
조회 : 2,179  

한국군 군대 해산 명령에 비분 강개 하고 있던 한국군 시위대 제1 연대 제1대대장 참령 박승환(朴昇煥)의 권총xx은 그동안 참고 있던 한국군들의 불똥을 건드렸다.

웅성 거리고 있던 군인들은 박승환 대대장의 xx 총소리에 깜짝 놀라 제일 먼저 제1중대장 남상덕이 대대장실로 뛰어 들어왔다.

마룻 바닥은 박승환이 쓸어져 선혈이 낭자 하였다.

남상덕은 위생병을 불러 조치 토록하고 밖으로 나왔다.


"장병 여러분, 우리 대대장께서 몇시간 후면 우리 대한 제국군대가 해산 되는것에 대한 항의로 목숨을 스스로 끊으셨소.... 침략자 왜놈들을 한놈도 죽이지 못하고 옷을 벗게 되신데 대하여 이를 죽음 으로 대신 하신것이오  장병 여러분 이 얼마나 원통한 일입니까?"


남상덕의 연설을 듣고 있던 장병들은 울분이 끓어 올라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자, 싸우자. 싸워서 대대장의 원수를 갚고 쓰러저 가는 나라를 지키자"

장병들은 제1 중대장 지휘로 무기고에서 무기를 꺼내 들고 영밖 서소문 쪽 일본군 진영으로 돌진하였다.


한편 남대문 안에 있던 시위 보병 제2 연대 제1대대에서도 교관의 지시로 훈련원으로 출발 하려다가 이웃 병영인 제1연대 제1대대 장병들이 서소문쪽으로 돌진 하는것을 보고 훈련원 가던것을 포기하고 이에 호응하였다.


이들은 남대문 근처에서 일본군과 마주치었다.

때아닌 한국군과 일본군간에 시가전으로 서울 장안은 총소리가 콩 볶듯이 들리고 화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일본군은 일이 심상치 않음을 알고 일본군 보병 제51 연대 제3 대대 전병력과 기관총 3문을 투입하고 제2 대대, 응원병을 확보하는 동시 남대문과 서소문 위병까지 합세하여 대한 제국군과 혈전이 벌어지었다.


시간이 갈수록 한국군은 초조해 질수 밖에 없었다.

탄약이 바닥 나기 시작 한것이었다.

"탄약이 없다, 탄약이....."

누군가가 소리치었다.

"총알이 떨어 지었다 큰일났다"

드디어 한국군은 총소리가 멎고 말았다.

싸움에 가담 하였던 장병들은 이제 일본군의 눈을 피하여 산속으로 숨어 들어갔다.


이 싸움에서 한일 양국군의 사상자는 일본군 장교 야진진무등 사병 100 여명이 사망하였고 한국군은 중대장인 정위(대위) 오의선, 권중협, 참위(소위) 장세정, 견습 참위(준위) 이긍주등 많은 장교들과 50 여명의 사병들이 전사하였다.


일본군은 종로거리와 덕수궁 주변, 등에는 기관총을 여러대를 설치 해놓고 만일에 대비하고 있어서 거리는 살벌 하였다.

군무대신 이병무는 각 지방 진위대도 해산 시키기 위해 자기 명의로 각 지역에 있는 진위대장들에게 서울로 집합 할것을 전문으로 보내었고, 일본군사령관도 그들 대로 별도로 일본 헌병과 수비대들에게 전문을 보내 한국군이 갖고 있는 무기를 모두 수거 하라고 특명을 하달 하였다.


한편 서울의 시위대가 일본군과 항전을 벌리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각 지역 진위대장들은 서울에 집합하라는 이병무의 명령에 어리둥절하고 있을때 뒤이어 일본군이 들여 닥치며 무기를 수거하려 하였다.


함경도 북청 진위대에 들여닥친 일본군에게 북청 진위대장 우원무가 항의하였다.

"누가 우리 한국군의 무기를 수거 하라 하였는가?"

일본군 장교 하나가 오만하게 우원무를 노려보았다.

"대한제국 군부 대신의 명령이오, 순순히 무기를 내 놓으시오"

우원무도 지지않았다.

"그 증거를 내놓으시오"

일본군 장교는 갖고온 전문을 내보였다.


"대한제국 각 진위대에 명한다. 지금 나라의 형편상 군대를 더 유지 할수 없게 되었다. 이 전문을 소지한 일본군의 명령에 따라 무기를 모두 일본군 에게 내 주도록 하고 각 진위 대장은 모든 군복과 장비를 일본군에게 주도록하라.

그동안 각진위대 노고를 치하하는 뜻에서 은사급을 줄것이니 각 병졸들 에게 규정대로 내 준후 모두 해산하여 귀가 토록하라.

군부대신 이병무

헌병사령관 장곡천호도"


이 전문을 받아 든 우원무는 눈에 핏발이섰다.

"이놈들 어디서 이따위 가짜 전문을 가지고 와서 우리 군대를 무장해제 시키려하느냐"

하면서 그 자리에서 전문을 찢어 버렸다.

이 모습에 일본군 장교가 칼을 빼어 우원무를 내려치자 그자리에서 쓸어지고 말았다.


진위 대장이 쓰러지는것을 보고있던 병사들이 가만 있지를 않았다.

"일본놈들을 모두 처죽여라"

누군가가 소리치자 일본군과 그자리에서 백병전이 벌어지었다.

총소리와 화약냄새가 병영을 뒤흔들었다.


일본군이 일단 물러갔다.

그러나 신포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1개대대가 급히 들여닥쳐 쌍방간에 교전이 벌어지었다.

그러나 우수한 기관포를 가진 일본군은 삽시간에 병영을 점령하고 말았다.

한국군은 인근 산속으로 숨어들지 않을수 없었다.


각지의 진위대는 서울 시위대와 북청 진위대 소식을 듣고 모두 들고일어났다.

원주 진위대 특무 정교(원사) 민긍호가 대대장 대리 정위(대위) 김덕제를 설득하여 전대원과 총기와 탄약을 미리 나누어주고 원주에 있는 일본 경무 분견소를 습격하였다.


이 소식을 보고 받고 뒤이어 지원 나온 일본군 충주 수비대까지 원주 진위대는 두시간에 걸친 격전 끝에 일본군을 격퇴 시킨 전과까지 올렸다.

대대장 대리 김덕제는 평창 강릉을 거쳐 간성 통천까지 일본인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습격하여 일본군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민긍호도 해산된 병력을 이끌고 제천, 충주, 장호원, 안성의 죽산까지 항일전을 펴 새로운 형태의 의병으로 변해있었다.

이제 그들은 대한제국 군대가 아니었다.

시위대도 아니고 진위대도 아닌 의병으로 싸우고 있는것이었다.

이러한 의병들은 전국 각처에서 일본군과 대 격전이 끊이지 않았다.

강화도의 유명규, 허위, 안동의 이강년 등이 대표적 의병장 들이었다.

모두 진위대 출신들이었다.


http://blog.daum.net/kilmer/15138072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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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방친구 17-07-15 15:01
   
가슴이 뜨겁고도 먹먹해집니다
촐라롱콘 17-07-15 16:31
   
군대해산 당시 한국군V일본군 간의 시가전에서....
위 본문글에 언급된 사상자 숫자가 큰 오류가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 자료에서 공통적으로 한국군 사상자 숫자는 전사 68명 부상 100여 명, 포로 500여 명으로
대체로 일치하는 것 같은데....

일본군 사상자 숫자는 자료마다 큰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일본군 사상자 집계를 가장 많이
잡은 국가보훈처 자료에 의하더라도 일본군 전사자 10여 명 포함 총사상자가 60여 명입니다.

많은 자료들에서 나타나는 일본군 사상자 숫자는 구체적인 전사자수 언급없이 사상자 30여 명이 가장
많이 보이고 있으며...
어떤 자료에서는 일본군 전사자 4명, 부상자 28명으로 언급되기도 합니다.

위 본문글의 일본군 전사자 숫자만 100여 명이라면,
일반적으로 부상자 숫자는 전사자 숫자의 2배 정도가 일반적인지라..
부상자 200명 정도를 포함한다면,
일본군 총사상자 숫자는 300명에 달한다는 비현실적인 논리가 성립되는지라....

이 부분은 확인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다른 것 필요없이 1905년~1910년 사이의 항일투쟁으로 목숨을 잃은 일본군경의 총사망자 숫자가
적게는 180명~200명 내외에서 최대로 잡아도 400명 정도라는 것을 참고해야 하겠습니다.
     
관심병자 17-07-15 17:43
   
남대문 전투는 한국군 2개대대와 일본군 2개대대 양쪽합쳐 2000명 이상이 교전한 전투입니다.
당시 일본측 기록은 무장해제에 대한 저항의 규모를 줄이기위한 정치적인 목적이 있기 때문에 100% 신뢰하기 어렵습니다.
전투결과 일본군이 노획한 한국군 무기는 소총 74정밖에 안됩니다.
탈출한 한국군의 무기는 노획할수 없었다 치더라도,
사망한 한국군과 포로로 잡았다는 한국군의 무기는 어찌된 걸까요.
한국군 사상자는 기록에 숫자만 고치는식으로 쉽게 조작가능하지만,
적의 무기는 자신들이 쓸수있건 없건 회수해서 보고한후 파기하던가 합니다.
노획한 무기, 장비는 지휘관의 전공입니다.
사상자 160~170명 포로 500명인데 획득한 적의 무기가 소총 74정뿐 이란건,
사상자, 포로 숫자가 거짓일 가능성이 큽니다.

일본군 사상자.
일본군은 한국군 병영을 탈환하기 위해 3차례 돌격을 시도했다고 합니다.
이말은 즉, 2차례는 실패했다는 얘기입니다.
일본군이 아군 사상자 몇십명이 나왔다고 후퇴했을까요?
일본군에 그런 인명중시 풍조가 있었다면 태평양전쟁때 미군에게 전멸당하는 부대는 없었을겁니다.
당시 시위대는 외국군사고문에게 훈련받은 중앙군으로 최정예 입니다.
양측 합계2000명 이상이 교전한 전투에서, 2차례의 돌격실패의 사상자가 30~40여명 밖에 안된다는 기록은 신뢰할수 없습니다.
          
촐라롱콘 17-07-15 18:55
   
당시 전투를 마치고 한국군병영을 점령한 이후에.....
일본군측이 한국군전사자 시신들을 광희문 밖에 늘어놓고 유가족들에게 찾아가도록
공개적으로 공고했기 때문에.... 한국군 전사자 숫자에서 오류가 발생할 가능성은
희박합니다(그리고 참고로 포로로 잡힌 한국군들 가운데 시가전 지휘자-주동자급을 제외한
대부분은 며칠 구류한 이후 훈방조치로 풀어주는 당근정책을 실시했습니다.
여파가 전국으로 확산될 것을 두려워한 일제의 조치였겠지요~~~)

그리고 당시 일본군은 군대해산을 전후하여 한국군의 봉기를 어느 정도 예상하여
남대문 문루 등의 주요 거점과 교통로에 기관총을, 남산에는 대포를 거치하는 등
대비를 해놓은 상태이며, 무엇보다 한국군의 탄약고를 선점하여 장악했기 때문에....
결국 한국군은 탄환부족이 결정적인 패인으로 작용하고 맙니다.

이상과 같이 미리 한국군 봉기에 대비한 측면 외에도
당시 일본군은 대부분 러일전쟁을 통해서 전투경험이 풍부했으며,
가장 기본이 되는 소화기조차 연발이 가능한 소총으로 무장하여
한국군의 단발식 소총보다 성능이 우위에 있었습니다.

반면 한국군은 갑작스럽게 봉기한 측면이 컸기 때문에, 전투준비에 필요한 무기와
탄환이 부족했으며... 무엇보다 당시 한국군은 일본교관에 의해 훈련된 군대이기 때문에
당시 일본군이 한국군의 전투능력과 속성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무기의 질, 전투경험, 훈련도, 전술이해도 모든 면에서 열세였던 한국군이 3시간 이상
병영을 사수하고 일본군과 대적했던 점은 높이 평가할 부분이지만....

당시 전투에서 일본군 사상자수가 더 많이 발생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습니다.
               
관심병자 17-07-15 19:51
   
대한제국군은 여러나라 교관을 거치며 훈련됐고,
시위대는 이탈리아, 일본, 미국, 러시아등 여러나라 출신의 교관을 거쳤습니다.
잠깐 교관 1명 보낸걸로 한국군의 특성을 파악했다면 러일전쟁때는 왜그리 러시아군에게 고전했을까요?

남대문 전투는 시가전이기 때문에 민간인 피해가 컸을것입니다.
미리알고 대피할수 있는 여유가 없었습니다.
일본측 기록의 노획된 무기 수량과 사상자, 포로 숫자 차이가 몇배가 납니다.
이기록의 사상자와, 포로 숫자가 진실이라면,
사상자와, 포로에 민간인들도 포함시킨것일 겁니다.

소총같은 무기를 산산조각으로 날려버릴 무기는 동원되지 않았고, 당시 일본군에 그런 무기체계도 없었습니다.
적 사상자와 포로를 합쳐 600명 이상을 제압하는 전과를 올렸다면서,
노획한 적의 무기는 100정도 안된다는건
나머지 500정 이상의 무기를 잃어버렸다는 얘기입니다.
말이 안되는 얘기죠.

병영 점령 얘기로.
3번째 돌격에서 한국군 병영을 함락시켰습니다.
처음과 두번째에서는 실패하고 후퇴했다는 것은,
지휘관이 판단했을때 성공하기 어려웠다는 것입니다.
이 판단의 기준은 아군과 적군의 피해 비교입니다.

반자이돌격, 우라돌격은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단기간내에 목표를 획득하겠다는겁니다.
일본측은 시위대와의 전투가 다른 한국인에게 영향을 줘서 확산되는것을 막을 생각이었다고 볼수있습니다.
러일전쟁 이전까지의 일본군은 돌격전술을 쓰던 군대가 아니었습니다.
한국군의 탄약이 한정된걸 알면서도 무리했다는거죠.

일본군이 기록했던 사망 10명 이내는 꿈같은 소리입니다.
돌격전술을 쓰면서,
그것도 2번을 패했으면서 사망이 10명이내?
그게 사실이면 지휘관이 책임을 져야합니다.
1~2명밖에 안죽었는데 돌격하다 후퇴했으니까요.
돌격전술은 아군의 피해를 감수하면서 하는 전술이고,
돌격하다가 후퇴하면 더 많은 피해를 입게됩니다.
교전에서 대부분의 인명피해는 전투중 후퇴할때 발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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