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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7-16 13:43
[기타] 조선시대 기병의 무기와 기병전술
 글쓴이 : 관심병자
조회 : 541  

. 조선시대 기병의 무기와 기병전술

조선시대 기마전은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야인정벌을 단행한 조선전기의 기마전, 일본을 상대로 전개한 임진왜란시기의 기마전, 누루하치의 여진족을 상대로 교전한 정묘병자호란시기의 기마전이 그것이다.

먼저 조선의 야인정벌과 관련한 기마전을 살펴보자. 조선이 여진족을 상대로 전개한 최초의 기마전은 태종 10(1410) 2월 동북면의 모련위 야인정벌이다.41 당시 정벌군은 북청 이북의 기병 1,150기를 동원하여 승리하였다. 야인들의 기병전술은 산골짜기에 기거하면서 모이고 흩어지는 것이 자유롭고, 지형이 험한 곳으로 유인하며, 한밤중에 일어나 기습공격을 감행하였다. 일반적으로 기병은 경사진 곳에서 미끄러지거나 말발굽의 마모가 심해 보행이 불가능했다. 그러나 여진의 기병은 구릉에서 기마전에 능숙했는데, 그것은 그들의 말이 호마(胡馬)인 것과도 관련이 있지만, 산성전투를 위해 馬蹄鐵을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야인들의 기마전에 착안하여 조선은 세종 15(1433) 4월 서북면 1차 야인정벌 때42 기병 1, 보병 5천의 대규모 원정군을 7개 부대로 편성하여 여진부락을 동시에 공격하였다. 활을 사용하는 야인 기병은 그들의 군사가 많으면 포위해서 사로잡고, 숫자가 적으면 지형지물을 이용해 활을 쏘았다. 당시 조선군은 대오를 이루고 한 곳에 집결했기 때문에 부대의 피해가 컸다. 따라서 세종은 야인에 대응하기 위해 모이고 흩어지는 진법을 익히고, 한편으로 편전43을 발명하여 실전에 배치하였다.

서북면의 2차 야인정벌은 세종 19(1437) 9 7일부터 14일까지 이만주의 근거지인 오미부를 기습하여 조명간구자를 국경선으로 확장하였다. 당시 정벌전은 평안도 도절제사 이천이 주도했는데, 그는 휴대하기 간편한 소형 총통인 세총통(細銃筒)을 정찰기병에게 지급하여 큰 성과를 올렸다. 정찰병이 적의 출현을 알리면, 본대를 다섯 개 부대로 나누어 진을 쳤다. 모든 부대는 중위의 명령에 따랐다. 각을 한 번 불면 각 부대에서 마병이 나와 경계에 들어가고, 다음으로 각 부대의 바깥쪽에 방패군을 배치했다. 이어서 창장검군(槍長劒軍), 화통궁수군, 기창병, 기사병이 차례로 안에 벌리어 섰다. 다섯개의 부대가 모두 그렇게 진을 쳤다.

기병은 창병과 궁수의 두 종류가 있다. 전투가 시작되면, 말을 탄 창병이 먼저 공격하고, 창을 든 보병이 뒤를 따랐으며, 말을 탄 궁수는 주로 측면에서 공격했다. 두 사람이 한 조를 이루었는데 경우에 따라 방패군의 보호를 받았다. 기병과 보병의 관계는 서로 협조하는 관계였다. 전투 중 적군이 패하여 도망하면 기병이 곧 추격하였다. 다만 기병은 창에 약했고, 공격을 하고 돌아설 때 특히 취약하였기 때문에 보병이 보호하였다. 그러나 야인 기병은 산악지대의 지형지물에 엄폐하여 상대적으로 안전한 반면, 대오를 갖추고 있던 조선군은 야인의 화살에 노출되어 피해가 컸다.

그러면 임진왜란시기 조선군의 기병전술은 어떠하였을까? 조선군은 방군수포제가 법제화된 중종대 이후 양인 상층 이상의 군역이탈이 심화되면서 기병의 전투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반면에, 일본군은 1575년 국내의 세전신장(細田信長)이 조총으로 무장한 보병대가 기병대를 격파하는 보병우위전술체계를 확립하였다. 1582년 풍신수길은 전투부대를 기병과 보병으로 구분하고, 기병총병궁병창검병의 단위부대를 편성함으로써 조총 중심의 전술이 일반화되었다.44

임진왜란 시기의 기마전은 3도순변사 신립장군의 탄금대 전투에서 확인할 수 있다. 4 27일 신립은 8천의 군사를 이끌고 탄금대에 진을 쳤다. 같은 날 1 8 7백 명을 이끌고 단월역에 도착한 일본군은 28일 새벽에 군사를 세 부대로 나누어 진을 쳤다. 중군이 충주성을 점령하였고, 좌군은 달천 강변을 따라 내려가면서 공격하였으며, 우군은 강을 건너 신립군의 후방을 쳤다.

신립의 조선군은 전방을 공격한 일본군 선봉군을 제압하고, 일본군 좌군을 격퇴하였다. 일본군 우군이 조총을 쏘면서 후방을 공격하자, 충주성으로 후퇴하였지만, 성을 점령한 중군의 공격을 받고 크게 패배하였다. 처음 신립장군은 요새지 조령에 군사를 매복시키자는 종사관 김여물의 건의를 물리치고 탄금대에 배수진을 쳤다. 신립이 탄금대 평지 기마전을 주장한 이유는 그동안 여진족과의 기마전에서 대부분 승리했을 뿐 아니라, 한편으로 부족한 군사의 숫자를 배수진으로 극복하려 했기 때문이다.

일본군은 전술적으로 유리한 지형을 선점하여 울타리를 만들고 참호를 설치했다. 그리고 조총부대와 창검부대를 숲속에 매복하고 일시에 공격했는데, 원거리에서는 조총을, 근접전에서는 단검을 사용하였다. 따라서 조선군의 전술은 기병을 주력군으로 하는 평지전투보다 방어에 주력하다가 틈이 보이면 성문을 나가 공격하는 수성전이 현실적 대안일 수밖에 없었다.

1593 2 12일 전라도 순찰사 권율이 지휘한 행주성 대첩 이후 조선군의 전술은선수비 후공격의 수성전술로 고착화되었다. 다시 말해서 조선 초기 북방의 여진족을 상대로 전개된 공격적 평지 기마전이 임란 이후부터는 방어적인 수성전을 전개하다가 적진에 틈이 보이면 성 밖으로 나가 출격하는 형태로 전환하였으며, 이러한 현상은 병자호란 때까지 지속되었다.45

마지막으로 정묘병자호란시기 조선의 기마전에 대해 살펴보자. 후금의 태종은 정묘호란(1627 1) 3만의 팔기병을, 병자호란(1636 12) 12 8천여 명의 팔기병을 이끌고 의주를 침공했다. 여기서는 정묘병자호란 때 조선군의 기마전을 당시의 진법, 무기, 포수 양성과 관련하여 살펴보려고 한다.

조선은 두 번의 호란에서 성에 의지하는청야입보전술을 쳤다. 그것은 조선 기병의 숫자가 크게 부족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청나라 주력군은 기병이었던 반면에, 조선의 주력군은 보병이었다. 그렇다면 서북 국경지역 선봉대가 험준한 지형을 이용해 지구전을 감행했다면 청나라 기병의 속전속결 전술을 막을 수 있었는데, 처음부터 성에 들어가 방어에 치중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를 설명하려면 임진왜란시기의 전략전술을 살펴보아야 한다.

임진왜란 때 조선 기병의 전투력은 일본군의 조총 앞에서 무력했다. 그것은 신립장군의 탄금대전투 패배에서 확인되었다. 다시 말해서 조총의 탄환이 활보다 멀리 나간 것이 이유였다. 한편, 1593 1 9일 명나라 지원군이 평양성전투에서 승리했는데, 그것은 조선이 척계광의 삼수병체제(포수사수살수)를 수용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후 조선은 군역체제와 전술체계를 모두 보병 중심의기효신서진법으로 전환하였다.46

그런데 광해군대에 이르러 군사강국으로 부상한 후금의 침략에 직면하여 조선은 여진족 방어에 효과적인 기병 중심의 전술로 복귀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기병 중심의 전술은 척계광이 여진족을 물리치기 위해 편찬한 『연병실기』 진법을 지칭한다. 척계광은 남쪽의 왜를 정벌할 때는 『기효신서』의 포살법(砲殺法)을 썼고, 북쪽의 오랑캐를 막을 때는 『연병실기』의 거기보법(車騎步法)을 썼는데, 『기효신서』의 포살법은 모두 보병이므로 서북의 돌격하는 철기병을 상대할 수가 없었다.

반면에, 『연병실기』의 거기보법(車騎步法)은 기병(騎兵)보병(步兵)거병(車兵)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여진족을 방어하는데 효과적이었다.47 그러나 『연병실기』에 바탕을 둔 전술을 곧바로 실행하기가 어려웠다. 당시는 『기효신서』를 바탕으로 군역과 군제를 편성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은 이를 실행하지 못한 상황에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맞이했다.

후금의 철기군은 막강했다. 따라서 조선은 성을 지키는 수성전술로 방어하고, 서북방의 방어체계가 붕괴되면 강도와 남한산성을 정비하여 수성전을 전개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그런데 강화도로 피난하면 기마전을 전개할 수 없지만, 남한산성을 피난지로 선택 할 경우, 공성전을 수행하다가 성 밖으로 나가 기마전이 가능했다.

정묘호란 이후 조선은 군마를 확보하고 기병의 진법을 훈련하여 국경과 수도방위체제를 확립해야 했다. 그러나 인조는 군제개혁에 실패함으로써 10년 전과 똑같이 요충지의 성을 지키는 수성전에 주력하였다. 이때 청나라 군대는 소수의 공성군만을 남겨둔 채 주력군을 이끌고 신속히 남하하였다.

정묘호란 때 후금의 기병은 기동력과 타격력에서 조선 기병을 압도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북 국경지역의 산성 방어군은 두 가지 전술을 폈다. 먼저 의주성과 창성진, 용천의 용골산성, 곽산의 능한산성에서는 청야입보전술에 따라 모집한 수만의 주민과 관군이 후금군의 공성전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수성전을 전개하면서 성 밖으로 기병을 출격시켰다. 당시 의주성과 창성진의 공성전투는 승리한 반면, 개문 출격하여 수행한 성 밖 기마전은 모두 패배하였다. 다만 정봉수 의병장이 지휘하는 용골산성만이 성 밖 기마전에서 승리하였다.48

그러면 당시 청나라 기병의 전략전술은 어떠했을까? 팔기군의 공격전술은 행군 중 전투와 공성전투 및 대규모 적과 대치한 평지전투로 구분한다. 행군 중 전투는 팔기병의 기본 단위인 3백 명을 좌우군으로 나누고 각 부대는 기동력이 뛰어난 10여 명의 정찰병을 배치하여 적의 정세를 사전에 탐지하였다. 적을 발견하면 정찰병은 적의 규모에 따라 대응했다. 먼저 적의 규모가 적으면 정찰병이 직접 공격하였지만, 규모가 크면 1 5백 명으로 구성된 갑나액진에 연락하여 함께 공격하였다. 규모가 더 크면 7 5백 명의 고잔액진에 알렸다.

청군의 기병은 행군하다가 성을 만나면 성의 지세나 방비 정도에 따라 우회 통과하거나 성을 함락하는 공성전을 전개했다. 성을 함락하는데 실패하면, 3백 명의 우록액진 부대를 남겨두고 계속 행군했는데, 이는 성을 고립시키는 우회작전이다. 이때 청군은 3백 명의 최소 인원으로 성을 포위하고 위장공격을 시도하였다. 먼저 성의 주변도로를 차단하여 고립시키고, 다음으로 야간에는 성문의 양쪽에 군사를 매복시켜 외부와 연락을 차단하였다. 그리고 성을 공격할 때는 성 주변의 숲과 참호를 제거했는데, 그것은 성을 공격하기에 앞서 청군의 활동을 쉽게 하려는 조치였다. 성벽을 오를 때는 포로로 잡힌 노인과 어린애를 앞세워 그들의 정예 병사가 손상되는 것을 막았다.

한편으로 대규모 적과 대치할 때는 교전하기 전에 주변의 지형지물과 하천, 도로 등을 숙지하여 적보다 먼저 신속하게 유리한 지형을 장악한다. 이러한 요건 등을 고려하여, 전투 부대를 편성하였. 청군은 적진을 사면에서 포위 공격하는 것을 기본으로 했다. 이때 3백 명을 한 우록액진으로 하고, 다섯 우록이 한 갑나액진을 구성했다. 그리고 다섯 갑나 즉, 7 5백 명이 한 면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각 면에는 고잔액진이 임명되어 지휘했다.

공격 방법은 부대를 주대(駐隊)와 전대(戰隊)로 구분하여 전대가 공격하여 승기를 잡으면 일제히 공격하고, 성과가 없으면 주대가 공격하고 전대는 돌아와 방어하거나 휴식을 취했다. 한편, 적이 한 쪽에서 공격해 오면 그들은 양 측방에서 공격하고, 적이 양쪽에서 공격해오면 일부 병력을 돌려 적의 후방을 공격하였으며, 적이 사방에서 공격해 오면 원형진으로 대응하였다. 만약 적이 도주하면 즉각 추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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