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
스포츠
토론장


HOME > 커뮤니티 > 동아시아 게시판
 
작성일 : 17-07-26 12:59
[한국사] 백제는 신라에 '한 주먹 거리'도 안 되었나?
 글쓴이 : 강철백제
조회 : 2,936  

백제는 신라에 '한 주먹 거리'도 안 됐다고?






 고구려를 방문한 김춘추. <대왕의 꿈 > 제38부에 방영된 장면.
▲  고구려를 방문한 김춘추. <대왕의 꿈> 제38부에 방영된 장면.
ⓒ KBS

관련사진보기


서기 660년에 백제가 신라·당나라 연합군(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했다는 사실 때문에 '7세기 초중반의 백제는 어차피 망할 수밖에 없는 약소국이었을 것'이란 느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이 점과 관련하여, 지난 2월 23일 방영된 KBS <대왕의 꿈> 제38부를 음미해볼 만하다. 제38부에서는, 백제군의 침공으로 딸과 사위를 사별한 김춘추가 고구려의 연개소문을 찾아가서 군사동맹을 제의하는 장면이 나왔다. 드라마 속의 연개소문은 김춘추의 기를 꺾고자 다음과 같이 호통을 쳤다. 

"네 놈이 고구려 군사를 청해 백제를 쳐서… 여식의 사사로운 원수를 갚으려는 속내를 (갖고 있음을) 내 모를 줄 알았느냐?"

드라마 속의 김춘추는 호탕하게 한바탕 웃은 뒤, 다음과 같이 응수했다. 

"여식의 사사로운 원한을 갚기 위해 백제를 치려고 마음먹었다면, 김유신 휘하의 철기병만으로도 충분히 사비성(백제 수도)을 무너뜨릴 수 있었을 것이오. 고구려의 군사를 빌려 당나라 황제를 치면 모를까, 내 고작 백제 따위를 치려고 목숨을 걸고 고구려 땅을 밟았겠습니까?"

드라마 속 김춘추의 답변은 한마디로 "당나라를 치기 위해 고구려와 동맹하면 모를까, 한 주먹 거리도 안 되는 백제를 치기 위해 고구려와 동맹하려 하겠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삼국사기> '신라본기' 선덕여왕 편에 따르면, 실제의 김춘추는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지금 백제가 도리를 어기고 뱀과 돼지처럼 우리 영토를 침범하고 있습니다. 저희 임금은 대국의 군대를 얻어 이 치욕을 씻고자 합니다."  

이에 따르면, 실제의 김춘추는 "고구려의 힘을 빌려 백제를 치고 싶다"고 말했다. 신라 혼자서는 백제를 상대할 수 없음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외교관의 발언에는 허장성세가 어느 정도 들어가기 마련이지만, 만약 김춘추가 <대왕의 꿈> 제38부에서처럼 발언했다면 그는 국제적으로 '허풍쟁이'가 됐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그는 국제적으로 신용을 잃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멸망 직전까지도 백제가 신라보다 압도적인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또 누가 보더라도 신라는 백제한테 '한 주먹 거리'도 안 됐기 때문이다.

멸망 직전까지 '절대적 우위' 보인 백제의 군사력

 백제군의 군복. 충남 부여군 규암면의 백제문화단지 안에 전시되어 있다.
▲  백제군의 군복. 충남 부여군 규암면의 백제문화단지 안에 전시되어 있다.
ⓒ 김종성

관련사진보기

백제의 절대적 우위는 백제 역사의 초·중기뿐만 아니라 말기까지도 계속 이어졌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편에 따르면, 백제 최후의 왕인 의자왕은 집권 이듬해인 642년에 신라의 40여 성(城)을 불과 한 달 만에 점령했다. 멸망 5년 전인 655년에도 그는 고구려·말갈과 연합하여 고작 한 달 만에 신라의 성을 30여 개나 점령했다. 그가 19년간 빼앗은 신라의 성은 근 100개나 된다. 

일반적으로 읍 단위에 세워지는 성 하나를 빼앗으면, 읍 주변의 지역들까지 덤으로 얻게 된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주변의 면(面)들까지 얻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근 100개의 성을 빼앗았다는 것은, 지금 식으로 말하면, 근 100개의 읍에 더해 300~400개의 면까지 얻었다는 뜻이 된다. 이처럼 멸망 직전까지도 백제 군사력은 절대적 우위를 과시했다.  

특이한 것은 이 시기에 신라 김유신 부대만큼은 승승장구했다는 점이다. 전체적으로 백제가 우세를 유지하는 속에서도 유독 이 부대만큼은 승리를 거두었다. 그런데 <삼국사기> '신라 본기'나 '김유신 열전'을 살펴보면, 김유신의 승리가 전투력이나 무기 체계의 승리라기보다는 심리전의 승리였다는 점을 쉽게 알 수 있다. 

김유신은 부하들의 사기를 극대화시키는 기술을 갖고 있었다. 그는 백제·고구려를 무서워하는 장병들의 용기를 북돋우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지휘하는 군대는 죽기 살기로 싸웠고, 이것이 신라군의 승리를 이끈 핵심 요인이었다. 이런 예외를 제외하면, 신라군은 백제군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백제 군사력이 우세했다는 점은 660년 황산벌 전투에서도 확인된다. 백제와 신라의 전투가 황산벌(충남 논산시 연산면)에서 벌어진 사실 자체가 이 점을 반영한다. 멸망 직전에 백제 조정의 야당인 성충파는 동부전선 최전방인 탄현(대전 동부 식장산 고개)에서 신라군을 방어하자고 제안했지만, 여당인 임자파는 신라군을 후방으로 끌어들여 한 번에 일망타진하자고 제안했다. 

의자왕은 '최전방에서 방어하면 전쟁이 장기화될 위험이 있다'는 판단에 따라, 임자파의 의견대로 신라군을 안쪽으로 끌어들여 전쟁을 조기에 끝내기로 결심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탄현보다 훨씬 더 후방인 황산벌에서 전투가 벌어진 것이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백제는 자기 집 담에서 신라군을 방어하지 않고 일부러 마당까지 신라군을 끌어들인 셈이다. 신라군을 마당에 가둬 놓고 한 번에 일망타진하려 했던 것이다. 이 점만 보더라도, 백제가 신라군을 얼마나 가벼이 생각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황산벌 전투의 전개 양상에서도 이 점을 포착할 수 있다. 당시 백제군은 고작 5000명이고 신라군은 무려 5만 명이었다. 그런데도 백제군은 제1라운드에서 제4라운드까지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5000명이 5만 명을 상대로 4연승을 거둔 것은, 신라군 속에 비전투 병력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백제군이 압도적으로 우세했기 때문이다. 

이 전투에서 신라가 역전승을 거둔 것은 군사력 때문이 아니었다. 소년 화랑인 반굴과 관창의 영웅적인 죽음을 목격한 김유신 부대가 죽기 살기로 달려든 것이 분위기 역전의 결정적 요인이었다. 이런 돌발 변수가 없었다면, 제5라운드에서도 백제군이 승리하고 신라군은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랬다면 서부전선의 당나라 군대 역시 고립무원의 상황에 빠졌을 것이다.

김춘추의 호언장담, 그야말로 대왕의 '꿈'일 뿐

 백제군의 모습. 서울시 송파구 올림픽공원 안의 한성백제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  백제군의 모습. 서울시 송파구 올림픽공원 안의 한성백제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관련사진보기


"백제군 5000명이 신라군 5만 명을 4번이나 격파한 것은, 백제군이 죽음을 각오하고 덤벼든 결사대였기 때문이 아니겠는가?"라고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삼국사기>에 나오는 사사(死士) 즉 '결사대'란 표현은 너무나도 생뚱맞은 표현이다. 

신라군을 무시한 백제군은 일부러 최전방을 열어주고 신라군을 황산벌까지 끌어들였다. 따라서 백제가 멸망을 예감하고 결사대를 파견했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 결사대란 용어는 백제 멸망의 당위성을 주입하고자 <삼국사기> 필진이 의도적으로 삽입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 

위와 같은 역사적 사실들을 보면, 백제는 멸망 직전까지도 신라에 대해 군사적 우위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나당연합군의 협공을 받는 중에 황산벌 전투에서 의외의 돌발변수가 나타났기 때문에 백제가 멸망했다고 판단할 수 있다.  

만약 백제와 신라가 단둘이 맞붙었다면, 설령 황산벌에서 백제가 패했더라도 나머지 전투에서는 백제가 분위기를 뒤집었을 공산이 크다. 황산벌에 파견된 5000명이 백제군의 전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연합군의 협공을 받지 않았다면 백제군은 황산벌에 훨씬 더 많은 병력을 파견했을 것이고, 그랬다면 제2·제3의 반굴·관창이 신라군의 사기를 높인다 해도 신라군이 승리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대왕의 꿈>의 김춘추는 '백제는 한 주먹 거리도 안 되므로, 신라 혼자서도 충분히 멸망시킬 수 있다'는 식으로 호언장담했지만, 신라는 당나라의 도움이 없었다면 두 주먹 아니 세 주먹으로도 백제를 이길 수 없었다. 신라 혼자서도 백제를 상대할 수 있다는 김춘추의 호언장담은 그야말로 대왕의 '꿈'이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840242



사람들 인식과는 다르게 백제가 망하기 직전까지도 군사적으로 신라에 우위에 있었나 보군요?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가생이닷컴 운영원칙
알림:공격적인 댓글이나 욕설, 인종차별적인 글, 무분별한 특정국가 비난글등 절대 삼가 바랍니다.
꼬마러브 17-07-26 13:28
   
백제 멸망의 근본적인 원인은 군사력의 부족이 아니라 내분에 있습니다.

나당연합군이 사비성으로 진격하자,,
의자왕은 사비성을 그의 둘째 아들 '태'에게 맡기고 태자와 함께 웅진으로 도피했지요.
그런데 웃긴 건 의자왕이 피신한 다음 '태'가 스스로 왕으로 즉위해버렸단 점입니다. 즉, 왕위찬탈입니다.

이런 혼란 속에 사비성은 제대로 전투 한 번 해보지 못하고 함락당하고 맙니다. 이게 백제 멸망의 근본 원인이지요.

만약 백제에서 내분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백제는 멸망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사비성 함락 이후 일어난 부흥군의 위력을 감안한다면 말이지요.. (물론 이 부흥운동도 내분으로 사그라들었습니다만)

뭐 사실 이것은 백제뿐만 아니라 고구려 역시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고구려 역시 나당연합군의 군사적 우위에 의해 멸망한 것이 아니라 내분으로 망했지요 ..

다시 말해, 고구려나 백제나 이전부터 깊숙히 내분과 분열로 멍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걸 흔히 '망조가 들었다' 라고 하죠.

이런 것들을 보면, 고구려와 백제의 멸망은 굳이 신라가 아니었어도 이미 예견된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신라가 민족을 배신하고? 외세와 함께 동족을 멸했다는.. 사람들의 인식과는 반대로
그들은 스스로 멸망을 자초한 겁니다.

특히, 연남생이 당나라에 투항한 것을 비추어도.. 당시의 혼란이 짐작 가능하지요.
     
꼬마러브 17-07-26 13:47
   
흔히 사람들의 인식을 보면,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 (사실 통일도 아니지만)
우리 민족의 영역이 축소되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오히려 고구려와 백제의 땅, 전부가 당나라에게 넘어가지 않고
신라에 흡수되어 민족혼을 지켰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애초에 삼한 (三韓) 의 적통은 본래 '진한'에게 있습니다.
따라서 진한의 후예인 신라가 삼국을 흡수한 것은 자연스러운 역사의 흐름이었다고 할 수 있지요.

반대로 많은 사람들이 상상하듯,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다면...
우리는 현재 중국어를 쓰는 중국인으로 살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karin123 17-07-26 14:16
   
어째서 진한에게 있나요? 그리고 중국어를 쓰는 이유가 있나요? 중국인으로 산다는 것은 너무 멀리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만.
          
냉혈잔심 17-07-26 14:40
   
꼬마러브 //
삼한의 적통이 "진한"에게 있다는건 무었을 근거로 주장하는겁니까 ?

삼한중에 마한의 세력이 가장 컸고, 특히 마한 목지국의 지배자는 진왕(辰王)으로
추대될정도였는데, 마한보다 작은 세력인 진한에게 적통이 있다니 무슨말인지 모르겠군요.

신라의 삼국통일(?)을 옹호하기위해 말도 안되는 주장을 사실인것 마냥
주장하시면 안됩니다.
               
도련님납쇼 17-07-27 02:04
   
꼬마러브 난 경상도사람 이야~너무 티내지는 마시구요, 말도 안되는 판타지역사 쓰시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뭔 고구려가 통일 하는데 우리가 중국인으로 살아요;; 
삼국시대때도 신라가 제일 별 볼일없고  항상 전쟁에 침략만 당하던 겁쟁이 멍청이국가 아니였나,혼자힘이 아닌 외세힘으루 통일 하니 당연히 그 무능력함이 한반도에 영향을;;
무능력한 신라는 포장해도 노예근성 신라 제발 추악한짓좀 하지마세요
                    
꼬마러브 17-07-27 10:10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님도 아시다시피 중국 역사의 대부분은 북방의 유이민이 남하하여 정복왕조를 이룬 것으로 나타납니다. 하지만 북방에서 발원한 종족들은 중원은 장악한 뒤에 대부분 중원문화에 동화되어 정체성을 잃지 않았습니까?

바퀴벌레마냥 우글거리는 그 물량을 어떻게 감당합니까? 요나라를 건국한 거란족은 현재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수,당나라를 세운 선비족은 어떤가요? 우리와 피를 나눈 만주족의 흔적은 지금 너무 미미하지 않습니까.

만약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다가 중원과 대결하는 과정에서 멸망했다면? 아니면 삼국을 통일한 대고구려가 중원을 지배했다면?

두 가정 모두 우리민족의 독자적 정체성을 잇기는 힘들어보입니다.

물론 역사에 이런 가정을 넣는다는 것은 의미없는 일입니다. 제가 너무 멀리 생각한 것일수도 있지요.

그러나 제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앞서 말했듯 고구려와 백제는 신라의 공격으로 멸망한 것이 아니라 내분으로 망했다는 점입니다.
이미 안으로 골아 썩고 있었다는 소리입니다.

황산벌전투는 백제 멸망의 근본적인 원인이 아니에요. 백제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나라가 아닙니다. 신라의 군사력으로 멸망할 정도의 나라가 아니란 말입니다.

약소국이었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유는 신라가 강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 무너져서입니다.

이런 혼란 속에신라가 적극적인 정책을 취해 고구려, 백제를 흡수하여 민족혼을 지켰다는 것을 저는 가치있게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함니다.

그리고 저는 강원도 사람이에유
                         
karin123 17-07-27 17:39
   
꼬마러브님 진한이 적통인 이유를 알려주세요.
도배시러 17-07-26 14:54
   
언어 문제는 고구려-백제-부여-읍루-옥저-동예 가 대동소이 - 위지동이전
마한은 낙랑과 언어가 달라 통역을 하였었고... 진한은 중국이민자들이 섞여있어서 마한과 언어가 다름.
     
Marauder 17-07-26 17:29
   
읍루는 다르다고 알고있는데요?
          
도배시러 17-07-26 18:10
   
읍루 言語不與<夫餘>·<句麗>同
읍루는 부여 말과 다르나 고구려와 동일하다. 그런데 고구려는 부여와 언어가 동일함.
위구르 17-07-26 17:58
   
백제 마지막 대왕인 의자황제 때 조차 신라가 백제에게 밀려 망하기 직전까지 갔었죠. 예식진이라는 놈이 없었으면 백제가 망하지도 않았을 것 같습니다.
도련님납쇼 17-07-27 01:29
   
신라는 항상 백제 고구려 눈치보고 이리저리 치이기 바쁜 국가였는데
백제가 한주먹거리 라니 그 반대겠지
신라는 역사를 판타지로 쓰는구나
     
징기스 17-07-27 08:18
   
이 양반은 역사를 역사로 해석할 생각은 없이 역사를 정치로 해석하려고 드는구만.
보세요 역사를 판타지 소설로 만드는건 당신 같이 정치색 지역색 드러내면서 으르렁거리는 자들입니다!
꼬마러브님 말씀처럼 백제가 저렇게 우위에 있으면서 망한 결정적인 이유가 뭡니까?
자기 편끼리 서로 티격태격 싸우고 이권다툼이나 하면서 망한가 맞잖아요?

나당연합은 그저 외적인 요인일 뿐입니다.
외적인 요인이 내적인 요인보다 결정적이었다면 모르지만 내적인 요인이 더 치명타였죠.
위만조선이 한나라군에게 군사적으로 밀려서 망했습니까?
후백제가 견훤이 군사적으로 왕건한테 밀려서 망했습니까?
왜 우리나라 사람들은 신라에 대해서 그렇게 흥분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역사를 제대로 알자고 떠들면서 꼭 현실정치 하고 끼워맞춰서 싸우자고 들기나 하고 ㅉㅉㅉㅉ

최근 복기대 교수님 등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고구려의 평양성은 평안도가 아니라 중국 요령성 요양에 있었고
고려시대의 공험진 역시 함경도가 아니라 길림성 수분하에 있었다고 합니다.
만일 저 새로운 연구 결과가 진실에 부합된다면
신라는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와의 연합 대가로 요동반도 동쪽을 접수했다는 소립니다.
물론 나중에는 그 넓은 땅이 관리가 안되서 토해냈고 발해가 다시 그 땅을 접수했지만요.

고려 때에도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공험진과 철령이 다 요동에 있었잖아요?
그야말로 권력욕에 미친 이성계가 등신같이 위화도 회군 하는 바람에 우리 강역이 한반도로 쪼그라든 겁니다.
멀 역사 공부나 똑바로 하고서 흥분을 하든가 진짜!
역사 공부나 연구는 이성적으로 객관적으로 해야 하는거에요.
감정적으로 흥분해서 하는게 아닙니다.

인터넷 공간에서 익명성 보장된다고 이딴 식으로 무책임한 선동질이나 일삼는 당신!
적을 앞에 두고도 시기심과 사리사욕 지키기에 급급해서 나라 팔아먹은 백제 간신배와 똑같습니다!!
뻑하면 정치색 드러내고 으르렁거리고 국론분열이나 일으키려는 자들은 제2의 이완용이에요.
당신 같은 사람은 그냥 정치나 하세요 역사판에 기웃거리지 말고
 
 
Total 19,949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공지 [공지] 게시물 제목에 성적,욕설등 기재하지 마세요. (11) 가생이 08-20 83873
19949 [한국사] 우리 고대사 #7 : 맥족의 이동 윈도우폰 03-22 241
19948 [한국사] 우리 고대사 #12 : 한민족과 재가승 윈도우폰 03-22 281
19947 [한국사] 우리 고대사 #11 : 한반도의 왜(倭) 윈도우폰 03-22 168
19946 [한국사] 우리 고대사 #10 : 진국의 한(韓)족 윈도우폰 03-22 290
19945 [한국사] 우리 고대사 #9 : 고조선 유민과 신라 윈도우폰 03-22 109
19944 [한국사] 우리 고대사 #8 : 고조선의 이동 윈도우폰 03-22 244
19943 [한국사] 우리 고대사 #6 : 예족의 이동 윈도우폰 03-22 90
19942 [한국사] 우리 고대사 #5 : 맥족과 예족 윈도우폰 03-22 251
19941 [한국사] 우리 고대사 #4 : 단군조선과 토템 윈도우폰 03-22 99
19940 [한국사] 우리 고대사 #3 : 홍산문화와 적봉지역 주민 윈도우폰 03-22 263
19939 [한국사] 우리 고대사 #2 : 하화족과 동이족 윈도우폰 03-22 112
19938 [한국사] 우리 고대사 #1 : 우리 민족의 조상 윈도우폰 03-22 292
19937 [한국사] 《인류와 한국조선의 변천사 - 한경대전》 (1) 에피소드 03-21 156
19936 [한국사] 아래 지도에 대한 내 관점... 고조선 중심의 열국시대… (4) 윈도우폰 03-21 381
19935 [한국사] 위만조선 시기 판도 (2) 위구르 03-20 263
19934 [한국사] 우리는 동이가 아니다. (2) 윈도우폰 03-19 567
19933 [한국사] 2022년 고고학계의 경주 월성 발굴조사 보고서 (6) 홈사피엔스 03-19 265
19932 [한국사] 삼국사기 이해 (1)신라사 (7) 홈사피엔스 03-16 579
19931 [한국사] 《(고)조선의 "가르침"과 직접민주주의 "국민의원"》 에피소드 03-14 332
19930 [한국사] 《고구려 최초의 이름은 '홀본(일본)' 이다》 에피소드 03-14 541
19929 [중국] 대륙계보? 아랫글 관련... (6) 윈도우폰 03-11 602
19928 [한국사] 《안문관,연운16주,송나라.. 화하족 관점 대륙계보》 에피소드 03-09 688
19927 [한국사] [한겨례] 2024/3/8 [단독] 고대 일본 권력층 무덤 장식품… (2) 외계인7 03-09 493
19926 [기타] 세계인들이 주목하는, 감미로운 모지혜(다니엘) - 인… 아비바스 03-08 663
19925 [한국사] 《고려 조상님들이 건축한, 서경(북경성)의 모습》 (7) 에피소드 03-08 642
19924 [기타] 동아시아에서의 국가의 형태라면? 그냥 잡설 (3) 윈도우폰 03-06 757
19923 [한국사] 발해 멸망 이유 - 야율아보기의 쿠데타 (4) 하늘하늘섬 03-05 1807
 1  2  3  4  5  6  7  8  9  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