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왕의 동생인 대문예가 무왕의 흑수말갈 정벌에 반대하며 논리로 내세운 것이
고구려가 30만 대군을 동원할 수 있던 것에 반해 발해는 고작 그 몇 분의 일밖에
동원할 수 없는 현실을 내세우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로부터 대략 100년 후 발해의 전성기인 선왕대에 옛 고구려의 영역인 요동과
부여일대, 그리고 흑수말갈까지 아우르기는 했지만, 대체로 한시적인 영유에 그친
것으로 보입니다.
예를 들어 요동지역에서는 지금까지 발굴되거나 발견된 발해유물-유적이 거의 전무한
것이 근거입니다.
따라서 결론적으로 발해전성기를 기준으로 삼는다 하더라도 고구려인구를 능가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리고 상경용천부의 인구가 80만~120만이라는 것은 도대체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
상경용천부 외성 둘레가 16km로 조선시대 한양도성의 17~18km보다 규모가 오히려
약간 작은 정도인데....
게다가 둘레 17~18km의 한양도성의 인구 10만여명도 당시로서는 비교적 조밀한
인구밀도였습니다.
도대체 둘레 16km안에 100만 인구를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이 어떻게 나올 수 있는지....???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가 되지를 않네요!
둘레 16km라는 것은 오늘날 서울의 일개 구 정도의 둘레밖에 안되는데
물론 만주지역 전체에서는 요동지역을 제외한다면 둘레 16km의 도성규모라는 것이
거의 최대규모급의 도성이기는 하지만....
대체로 900~1200년때 북반구 평균기온이 올랐다고는 하지만, 그래봤자 0.1~0.5도 내외이고 21세기 지금보다 낮다고는 하죠. 발해 698-926과도 조금 어긋나고요. 그래서 온난화보다는 다른데서 이유를 찾아야 할듯합니다. 미국과의 국경근처 몇몇 도시에만 대부분의 인구가 몰려 있는 캐나다처럼 극히 일부 도시지역에만 인구가 있었을 것으로 예상되죠. 위로는 어차피 빈땅이니 러시아처럼 시베리아 알라스카까지 진출은 왜 안했을까 생각은 드네요. ㅎㅎ
지금도 도시는 농촌지역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도시는 농경문화에서 발달된 개념이 아니라 유목문화에서 나온 개념이란 말이죠. 도시에서 식량이 생산 됩니까? 도시와 농촌간의 유통로만 단절되도 도시민의 상당수는 굶어 죽는 것이 사실이죠.
단군신화에서도 나오듯이 한국은 도시민 즉 당시에는 성민城民이 세운 국가로 도시국가에서 고대국가 그리고 현재의 현대국가로 발전한 나라 입니다. 기본문화가 농촌문화가 아니란 말이죠.
고대나 중세의 역사를 보면 성안의 사람들이 지배층을 이루고 이들이 성밖의 농촌이나 어촌민 등에게 세금을 받는 구조로 되있죠. 당연히 한국의 직계조상들은 기마유목민으로 지배계층 이었단 말이죠. 이들이 식량생산을 신경 썼을까요? 당연히 신경 안쓰죠. 식량생산은 천민이나 노예의 몫이지 이들 지배층이 신경 쓸 일이 아니란 말입니다.
식량이 부족하면 약탈해서 충족 하거나 교역을 해서 충족하면 되는 것 입니다. 지금의 제국주의의 원형이 바로 저런 사고 방식에서 나오는 것이죠. 당연히 식량이 생산 안되도 많은 인구를 부양 할 수 있단 말이죠. 게다가 이들은 자국민에겐 세금을 적게 받았습니다. 그럼 이 부족한 재원을 어디에서 얻었을 까요? 당연히 그 들의 노예국가라는 지역을 약탈해서 얻었을 것이란 말이죠.
어떤 한 나라가 세금을 많이 걷는 다는 것은 어디 론가 지출해야 하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죠. 주위의 많은 나라들이 세금을 많이 걷었다는고 그와 비례해서 한국은 세금을 적게 걷었다는 것은 주위의 나라가 한국에 재원을 약탈 당했다는 것을 의미 합니다.
당연히 우리는 기마유목민족으로 전투력과 호전성이 강한 용사의 나라 인지라 당연히 타국을 약탈 하였을 것이고 이 약탈에 대해 조금도 죄책감을 가지지 않았을 것도 추론이 되죠.
세금이 적으면 주위의 사람들이 이주해 오는 것은 당연 상식입니다. 본래 조선의 인구가 적었을 것 인데 그 것은 왕실의 의사와는 달리 고려의 호족들이 세금을 많이 걷었을 것이고 몽골의 영향을 받은 조선왕실은 세금을 경감 했을 것이란 것도 쉽게 추론이 되는 것이죠.
인구의 경감은 포로로 끌려가고 하는 것 보다 세금의 영향이 휠씬 큽니다. 근세조선 시기에는 당연히 주위의 나라 사람들이 살기 좋은 조선으로 이주해 왔을 것이란 추측도 어려운 것이 아니죠. 누가 봐도 근세조선은 주위의 어떤 나라 보다 살기 좋은 나라 였다는 것은 사실이죠.
지금은 본래의 한국인이 이주해 온 한국인에게 핍박받고 이주해 온 한국인들이 자신들이 본래의 한국인이라 말 같지 않은 주장을 하면서 원주인 행세를 하는 것 입니다. 이래서 한국은 이민을 받으면 안된단 말이죠.
함(咸), 신(信). 소(蘇), 복(復), 진(辰), 해(海), 동(同), 은(銀), 오(烏), 수(遂), 춘(春), 태(泰) 등의 요동 50여 곳 성안에서
해안가에 인접한 곳곳의 주에는 각각 창고가 있어서 조종법(祖宗法)에 따라 내어서 새 것으로 바꾸고,
백성들이 임시로 빌리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빌려주고 2푼의 이자를 받았다. 20~30만석 정도는 근심하지 않았고,
비록 누차에 걸쳐 전쟁이 일어났으나 일찍이 사용하기에 부족했던 적이 없었다.
- 요사(遼史) 식화지(食貨志)-
[요동은] 편호(編戶)가 수십여만에 이르렀고, 경지도 1000여리가 되었다.
-송사(宋史) 송기전(宋琪傳)-
남북국시대 우리 고구려 후신인 해동성국 대발해의 도시문명은 이후 동북아의
패자였던 북방의 요와 금나라에도 지대한 영향을
지속적으로 미치게 됩니다. 고구려 5부의 영향을 받은 발해가 5경체재의 다중 수도 체재를
이루었듯 이후 요나라 역시 5경 체재를 구축하게 되는데 수도가 상경임황부이지만
실질적 수도는 중경대정부로 이를 건설한 사람 역시 우리 발해인이군요. 이후 발해인과 신라계 황제
여진족 연합의 금나라가 요나라를 무너뜨리고 송마저 멸망시키면서 북경에 세운 중도 역시 당시
금나라 황실의 주요행정 요직을 장악하고 있던 국무총리격인 고구려계 장호의 지휘 아래 건설.
그리고 위에 기록을 보면 알겠지만 요나라가 발해를 멸망시키면서 얻은 요동은 연운16주와 함께
요나라의 양대 곡창지대로 이런 중세 온난기와 맞물려 이 요동만해도 수십만호로 2,300여만명에 이를 정도.
한나라 말기에 공손탁(公孫度)이 점거하여 아들 공손강(公孫康)을 거쳐 손자 공손연(公孫淵)은 스스로 연왕(燕王)을 자칭하고 소원(紹漢)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 위(魏)나라가 멸망시켰다. 진(晉)나라가 고려(高麗 ; 고구려)를 함락시켰고, 나중에는 모용수(慕容垂)에게 귀속하였다. 아들 보(寶)는 고구려 왕 안(安 ; 광개토왕)을 평주목(平州牧)에 임명하여 거주케 하였다. 원위(元魏 ; 북위) 태무제(太武帝)가 그들이 거주하는 평양성(平壤城)에 사신을 보냈으니, 요(遼)나라 동경(東京)이 바로 이곳이다. 당(唐)나라 고종(高宗)이 고구려를 평정하고 여기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였지만, 나중에 발해(渤海)의 대씨(大氏)가 차지하였다. 대씨는 처음 읍루(挹婁)의 동모산(東牟山)을 차지하고 있었다. 무후(武后 ; 측천무후) 만세통천(萬歲通天) 년간에 거란(契丹) 이진충(李盡忠)이 핍박을 받자 걸걸중상(乞乞仲象)이 요수(遼水)를 건너 스스로 지키니 무후가 진국공(震國公)에 봉하였다. 아들 대조영(大祚榮)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진왕(震王)이라 자칭하였다. 발해 북쪽을 영역을 병합하니 영토가 사방 오천리나 되고, 병사가 수십만이나 되었다. 중종(中宗)이 도읍한 곳에 홀한주(忽汗州)라는 명칭을 내려주고 발해군왕(渤海郡王)에 책봉하였다. 12대 지나 대이진(大彝震) 때에 참람되게 연호를 고치고, 궁궐을 본따서 짓고, 5경(京) 15부(府) 62주(州)를 두었으니 요동에서 가장 번성한 나라가 되었다. 홀한주는 바로 옛 평양성으로, 중경현덕부 (中京顯德府)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