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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8-13 19:01
[기타] 온달과 평강공주
 글쓴이 : 관심병자
조회 : 673  

평원왕과 평강공주

 

고구려 25대 평원왕은 널리 알려진 인물은 아니다. 559년부터 589년까지의 재위기간 동안 그는 흔들렸던 나라의 기강을 바로 잡고 고구려 문명의 번영을 이루었던 인물이다.

그의 이름은 양성이며, 양원왕의 첫째아들이다. 평원왕은 담력이 크고, 말을 잘 타며, 활쏘기도 잘하였다. 그의 정식호칭은 평강상호왕이다. 좋아한다는 뜻의 호()라는 글자가 왕의 이름에 들어간 것은 고구려 사람들이 그를 훌륭한 임금님으로 존경했음을 알려 준다.

평원왕에게는 자식들이 여럿 있었다. 뒷날 영양왕이 되는 첫째아들 원, 영류왕이 되는 건무, 보장왕의 아버지인 태양, 그리고 유명한 평강공주가 그들이다.

그런데 평강공주는 어려서부터 울기를 잘하여 평원왕이 딸을 자주 놀리곤 했다.

“네가 항상 울어서 내 귀를 시끄럽게 하니 커서는 좋은 데 시집 보낼 수 없겠구나. 자꾸 우니 바보 온달에게나 시집보내야겠다.”

바보 온달. 그는 누구이길래 고구려 왕의 대화에서 거론되었을까?

온달은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성, 즉 안학궁성 주변에서 살았다. 그의 얼굴은 비루먹은 당나귀처럼 파리하여 우습게 생겼다. 그는 집이 몹시 가난하여 밥을 빌어다가 앞을 보지 못하는 어머니를 봉양했다. 온달은 항상 떨어진 옷과 헤진 신을 신고 평양 시내를 돌아다녔고, 남들이 뭐라고 하더라도 늘 명랑하게 웃으면서 받아넘겼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바보 온달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가 본래부터 바보는 아니었을 것이다. 어쩌면 자신의 능력을 숨기면서 세상을 달관하던 인물이었는지도 모른다. 궁궐 밖의 소문이 임금의 귀에 들어간 것을 보면 그의 행동이나 말투가 보통 특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평원왕은 평강공주가 16세가 되자, 당시 권력을 가진 상부 고씨 집안의 아들과 혼인을 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평강공주는 고씨 집안으로 시집갈 생각이 없었다.

평강공주는 평원왕에게 자기 생각을 분명히 밝혔다.

“대왕께서는 항상 저를 온달에게 시집보낸다고 하시고서 이제 와서 어찌 다른 이에게 시집을 보내신다고 하십니까. 보통 사람도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 하는데, 대왕께서 거짓말을 하신다면 누가 왕명을 따르오리까. 지금 대왕의 명령은 잘못된 것입니다. 저는 온달에게 시집을 가겠습니다.”

평원왕은 크게 역정을 냈다.

“고구려의 공주가 어찌 비천한 온달에게 시집갈 수 있느냐. 네가 어릴 적에 한 말은 농담이었다고 했는데도 내 말을 듣지 않고 고집을 부릴 수가 있느냐. 정녕 네가 내 말을 듣지 않는다면 너는 내 딸이라고 할 수 없다. 네 마음대로 가고 싶은 곳으로 가거라.”

평강공주는 끝내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궁궐을 나서기로 했다. 평강공주는 금팔지를 갖고 궁궐을 나와 혼자 길을 나섰다. 사람들에게 물어 물어서 온달의 집에 이르렀다.

온달과 평강공주의 결혼

평강공주는 맹인 노모가 있음을 보고 앞으로 다가가 절하고 온달이 있는 곳을 물었다.

온달의 어머니가 대답했다.

“우리 아들은 가난하고 못생겨서 귀한 사람과 짝이 되지 못합니다. 지금 그대의 냄새를 맡으니 향기가 이상하고, 손을 만지니 부드럽기가 풀솜과 같은즉 반드시 귀한 사람임이 분명한데, 누가 당신을 속여서 이곳까지 오게 했는지 모르겠군요. 내 자식은 배고픔을 참지 못하여 산으로 느릅나무 껍질을 벗기러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평강공주는 온달의 집에서 나와 산 아래에 이르러 느릅나무 껍질을 지고 오는 온달을 만났다. 평강공주는 온달에게 자신이 찾아온 이유를 말했다.

그런데 온달은 평강공주의 말이 너무도 이상하다고 여겨서 오히려 성을 내며 말했다.

“이는 어린 여자의 행동이 아니다. 사람이 아니라 여우나 귀신이다. 내 곁에 오지 마라.”

온달은 평강공주를 돌아보지도 않고 서둘러 집으로 갔다.

평강공주는 혼자서 온달의 집으로 돌아와 사립문 아래에서 잠을 자고, 이튿날 다시 들어가서 온달 모자에게 다시 한 번 자세히 이야기를 했다. 온달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온달의 어머니도 가난을 이유로 거듭 사양했다.

하지만 평강공주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마음만 같다면 어찌 반드시 부귀한 후에야 함께 지낼 수 있겠습니까. 제가 가져온 금팔찌가 있으니 이것을 팔면 그리 어렵지 않게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평강공주는 온달과 함께 살기 시작했다. 평강공주는 가져온 금팔찌를 팔아서 집과 농토와 노비, 소와 말, 각종 세간들을 샀다.

평강공주는 궁궐에서 살아왔지만 세상물정도 잘 알고 있었다. 특히 말을 보는 눈이 뛰어났다. 평강공주는 온달에게 쓸만한 말을 사라고 일렀다.

“시장 상인이 파는 말을 사지 말고 꼭 나라에서 파는 말을 사오되, 병들고 파리해서 내다 파는 것을 사오도록 하세요.”

평강공주는 온달이 사온 말을 열심히 먹이고 보살펴서 날마다 살찌고 건강하게 만들었다. 평강공주는 온달이 이 말을 타고 멋진 장군이 되기를 바랐다.

바보 온달에서 장군 온달로

평강공주는 온달이 고구려의 훌륭한 무사가 되도록 열심히 도와 주었다. 구걸을 하지 않아도 된 온달은 공주의 기대에 보답하기 위해서 글 공부와 말 타고 활쏘기를 열심히 익혔다.

고구려에서는 항상 봄철 3월 3일이면 낙랑 언덕에 사람들이 모여 사냥을 하고, 그날 잡은 산돼지와 사슴으로 하늘과 산천 신에 제사를 지냈다. 사냥을 좋아하는 평원왕을 비롯해서 여러 신하들과 병사들이 함께 사냥을 나갔다.

온달도 기른 말을 타고 참여했다. 온달은 월등한 실력으로 남들보다 많은 짐승을 사냥했다. 온달의 놀라운 실력은 사냥대회의 화제가 되었다. 그러자 평원왕은 그를 불렀다.

“그대의 이름이 무엇인가.”

“대왕마마, 저는 온달이라고 하옵니다.”

“뭐라고, 온달이라고?”

평원왕은 깜짝 놀랐다. 어떻게 바보 온달이 이렇게 늠름한 무사가 되었는지 모두들 이상하게 여겼다. 평민 온달은 뛰어난 무예솜씨로 장군으로 등용되는 특혜를 얻었다. 사냥대회는 당시에 인재선발의 장이었던 셈이다. 신분에 상관없이 재주만 있으면 일정하게 출세할 수 있는 사회가 고구려였다. 그러나 평민이었던 온달이 단 한 번의 사냥솜씨로 왕의 사위로 인정받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578년경 북주의 무제왕이 군사를 보내어 고구려를 공격해 왔다. 북주는 북중국의 서쪽지역에 있던 나라인데, 동쪽에 있던 북제 나라를 멸망시키고 그 여세를 몰아 고구려를 공격한 것이었다.

평원왕은 즉시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배산 아래 들판에서 맞아 싸웠다. 이때 온달은 선봉장이 되어 날쌔게 적진을 휘저으며 싸워 적 수십여 명을 칼로 베었다. 그러자 고구려군의 사기가 올라가서 후주의 군대를 크게 이길 수 있었다.

싸움이 끝나고 승리의 공을 이야기할 때 모두들 온달을 첫째 가는 공이 있다고 추켜세웠다. 평원왕은 기쁨에 넘쳐 주위사람들에게 말했다.

“여러 장군들은 보시오. 이 사람이 내 사위라오.”

평원왕은 온달과 평강공주를 궁궐로 불렀다. 평강공주를 용서하고, 온달에게는 대형이라는 높은 직위를 주었다. 평원왕은 이후에도 온달을 총애하였고, 온달은 왕의 사위로서 날로 직위가 올라갔다.

온달의 출세배경

평강공주와 온달이 만난 평원왕 시기 고구려는 빈부의 차이가 극심했다. 평강공주는 비록 궁궐에서 홀로 나왔지만, 좋은 향내가 나는 화장품을 바르고 있었고, 손은 부드럽기가 풀솜과 같았고, 얼굴 또한 예뻤다. 손목에는 금팔찌를 하고 있었다. 금팔찌는 대단히 비싼 물건이었다. 반면 온달은 집이 가난하여 농사 지을 땅도 없어서 느릅나무 껍질을 벗겨다 먹기도 하고, 구걸을 하거나 막노동으로 살아야 했다. 당시에도 돈이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사회였다. 평강공주는 집과 밭, 노비, 소와 말, 각종 세간 모두를 자신의 금팔지를 팔아 시장에서 살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왕, 귀족, 평민, 노비 사이에는 엄연한 신분적 질서가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왕족과 평민간의 결혼이 가능했던 것일까. 『삼국사기』「온달열전」에서는 평강공주의 고집으로 결혼하였고, 온달이 뛰어난 무예솜씨로 평원왕의 사위로 인정받았다고 하지만, 여전히 의문은 존재한다.

평강공주가 궁궐을 나간 후 평원왕이 공주를 찾으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을까? 만약 평원왕이 마음만 먹었다면 평양성 근처에 사는 온달과 평강공주를 찾기란 쉬웠을 것이고, 그랬다면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일찍 종결되었을 것이다.

또 온달이 사냥대회에서 선발된 후 즉시 사위로 공인받지 못하고 북주와의 전투에서 공을 세우자 비로소 사위로 공인받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러한 의문을 풀기 위해서 평원왕 시대의 정치상황을 살펴보자.

평원왕이 왕위에 오르기 16년 전인 544년 겨울, 평원왕의 할아버지인 안원왕은 큰 병이 들어 언제 죽을지 몰랐다. 그런데 안원왕에게는 첫째 부인에게서 자식이 없고, 둘째 부인과 셋째 부인 사이에는 각기 아들이 있었다. 안원왕이 위독하자 둘째 부인과 셋째 부인의 외가측에서는 자신들의 외손자가 다음 왕위를 이어받게 하려고 혈안이 되었다.

두 집안간의 다툼은 급기야 수천 명이 죽는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결국 둘째 부인의 외가 쪽이 이겨 양원왕이 545년에 왕이 되었지만, 귀족사회의 내분은 쉽게 가라앉지 않아 지방까지 확산되었다. 양원왕 13년인 558년에는 환도성에서 간주리란 자가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귀족간의 내분은 특정 집단이 권력을 독점하려고 했기 때문에 일어났다. 양원왕의 외가는 양원왕 집권시기에 왕을 능가하는 권력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마치 명림답부의 혁명 이후 연나부가 일시에 왕실을 능가하는 실력을 가졌던 것과 같다.

이런 상황에서 왕들은 막강한 권력을 가진 귀족세력을 견제하고 왕실의 지지기반을 견고히 하려는 노력을 하게 마련이다. 고국천왕이 연나부의 반란을 진압하고 을파소를 등용하여 왕실의 권위를 세웠던 것이 그러한 예다.

마찬가지로 559년에 즉위한 평원왕도 자신의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귀족세력 견제, 백성들의 지지 획득, 친위세력 구축이라는 세 가지 과제를 수행했다.

왕권강화와 특정 세력의 권력장악을 막기 위해 여러 귀족들에게 권력을 분산하면서 귀족회의에서의 합의를 중시하고 서로간의 견제를 유도했다. 대대로, 막리지, 울절, 태대사자, 위두대형 등 1위부터 5위까지의 관등을 가진 귀족들만이 참석하여 국가의 모든 정보를 장악하고 정치와 군사에 관한 일을 논의하며 관리의 인사권을 좌우했던 귀족회의는 고구려 후기 정치의 한 특색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런데 귀족합의 정치는 왕권의 약화라기보다는 오히려 왕실이 특정한 귀족의 독점적 권력장악을 막기 위한 안배로 지속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왕권이 약했던 양원왕과 보장왕 시기에는 귀족합의 정치가 아닌 특정 집단의 독재권력이 등장했다. 반면 귀족회의가 정상적인 기능을 하던 평원왕과 영양왕, 영류왕 시기의 왕권은 결코 약세가 아니었다. 평원왕과 영양왕은 모두 자신이 군대를 직접 거느리고 전쟁을 지휘했으며, 3명의 왕 모두 25년 이상의 재위기간 동안 안정적인 정치를 펼쳤다. 동맹행사에서도 왕은 최고의 권력자로서 행사를 주관했다. 평원왕이 유력한 귀족인 상부 고씨와 사돈관계를 맺지 않을 수 있었던 것도 왕권이 강해졌기 때문이다.

물론 평원왕 초기부터 왕이 귀족세력을 쉽게 능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따라서 평원왕은 자신의 지지기반을 확충하기 위해 자연재해에 시달린 백성들을 위한 적극적인 배려로 백성들의 지지를 얻었다.

평원왕 5년인 563년 여름에 큰 가뭄이 있었다.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는데, 어찌 백성들의 어버이 된 자가 홀로 배부르게 먹을 수 있겠느냐. 앞으로 내게 올리는 식사를 크게 줄이도록 하라. 나 역시 백성들과 고통을 나누겠노라. 이렇게 비가 오지 않으니 내가 산천에 나아가 천신에게 기도하여 가뭄이 멈추기를 기도해야겠다.”

평원왕은 이렇게 말하며 직접 산천에 나아가 종일토록 비가 오기만을 기도했다. 또 왕이 솔선수범해서 식량을 절약했던 일은 삼국시대 왕들 가운데 평원왕이 유일하다.

평원왕 13년 8월에는 고구려의 새로운 수도인 장안성을 짓는 공사가 한참 진행중이었다. 그런데 메뚜기떼와 가뭄의 재앙이 있자 평원왕은 즉시 공사를 중지시켰다. 성을 만드는 일도 중요했지만, 그보다는 백성들이 굶주리지 않아야 하고 농사일이 더 소중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장안성 내성의 을밀대의 겨울 모습

장안성 내성의 을밀대의 겨울 모습

평원왕 23년 10월에도 백성들이 굶주림을 당하자, 평원왕은 직접 백성들의 생활을 살피며 그들을 위로하기도 했다. 평원왕 25년에는 명령을 내려 긴급하지 않은 일을 줄이고, 관리들을 여러 고을에 내려보내 농사와 길쌈을 장려하는 등 백성들의 살림살이가 먼저 넉넉해지도록 노력을 기울였다.

이처럼 평원왕은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통해 자신의 지지기반을 넓혔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왕권이 안정될 수는 없었다. 평원왕에게는 자신의 친위세력이 필요했다. 평원왕 시기에는 돌궐, 백제와 신라, 북주와의 전쟁이 있었다. 이때 등장한 신진 장수들이 그의 친위세력이 될 수 있었다.

평민이었던 온달이 재주만으로 장군이 되고 왕의 사위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평원왕의 정치적 이해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연개소문의 연씨 가문도 이때에 새롭게 등장한 신진세력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을파소의 등용이나 온달의 등용은 모두 왕권강화를 위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즉 평강공주와 온달의 결합이야기는 실제 사실에서는 그 시작과 끝이 반대가 아닐까 한다. 전해 오는 이야기를 합리적으로 이해한다면, 온달이 평민으로서 장군으로 출세한 후에 평강공주와 만났으며, 왕의 사위로 인정되는 과정이 워낙 파격적이었기에 이와 같은 이야기가 만들어진 것이며, 두 사람의 결합이 가능했던 것도 당시의 정치사회적 상황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고구려의 위기극복과 온달의 출세

5~6세기 고구려 궁성이었던 안학궁성 복원모형

5~6세기 고구려 궁성이었던 안학궁성 복원모형내전1궁전.

고구려가 귀족간의 내분으로 혼란하던 551년 고구려의 오랜 동맹국이자 북방 유목세계의 패자였던 유연을 꺾고 새롭게 등장한 돌궐이 고구려의 신성과 백암성을 공격해 온 사건이 일어났다. 고구려에게는 근래에 드문 외적의 침입이었다. 비록 고흘 장군이 출전하여 돌궐을 격파했지만, 강적 돌궐의 위협은 상당 기간 계속되어 고구려는 국력을 기울여서 맞서야 했다.

이때를 틈타서 552년 신라와 백제 연합군이 고구려 남부의 한강 유역을 공격해 왔다. 고구려는 돌궐을 막는 것이 더 중요했던 상황이라 몰래 신라와 협정을 체결했다.

“신라가 한강 유역과 마운령과 황초령 이남의 동해 연안을 차지하는 것을 허락한다. 그 조건으로 신라는 백제의 침입을 막고 더 이상 고구려를 공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조건을 통해 신라의 진흥왕은 고구려의 동의를 받은 상태에서 백제를 역습하여 백제 성왕을 죽이고 한강 유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고구려는 이때에 넓은 한강 유역을 빼앗겼지만, 북쪽으로 돌궐을 막는 것이 중요했으므로 남쪽을 포기했다.

이러한 대사건이 평원왕의 부친인 양원왕 시기에 이루어졌다. 평원왕에게는 돌궐과 전쟁을 벌여 승리하는 것이 제일의 과제였고, 한강 유역을 회복하는 일은 그 다음이었다.

돌궐과의 전쟁은 비교적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그것은 돌궐이 고구려의 지배하에 있던 말갈과 거란까지 자신들의 세력 안에 넣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고구려와 돌궐과의 전쟁을 보여 주는 기록은 많지 않으나, 거란 지배를 둘러싸고 벌어진 돌궐의 이계찰대가 이끄는 대군과 고구려·말갈군의 싸움에서 고구려가 크게 이겼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이때 고구려는 돌궐을 크게 격파하고 멀리 외몽골 지역까지 쳐들어갔다고 추정된다.

백암성

551년, 돌궐군은 이곳 백암성을 공격해 왔으나 고구려군에게 격퇴되었다.

평원왕 시기에는 돌궐만이 아니라 앞서 보았던 북주와의 전쟁도 있었다.

5세기와 6세기 초까지 큰 전쟁이 없어 무장들의 출세가 드물었다면, 6세기 말에는 이처럼 잦은 전쟁으로 온달과 같은 전쟁영웅의 정치적 발언권이 강해질 수 있었다. 온달에게는 전쟁이 출세의 기회였다.

국토회복을 위한 온달의 의지

590년 평원왕이 죽은 후 처남인 영양왕이 왕위에 올랐다. 온달의 직위 또한 올라갔다. 이제 온달은 평소 자신이 생각했던 것을 왕에게 아뢰었다.

“신라가 우리 한강 유역의 땅을 빼앗아 저들의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그곳의 우리 백성들은 하루빨리 자신들을 구해 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원하옵건대 대왕께서 저를 믿어 주시어 군사를 주신다면 반드시 우리 땅을 도로 찾아오겠습니다.”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신라에게 넘겨준 것은 대륙에서 밀려오는 돌궐 등과의 싸움에 전력하기 위함이었다. 고구려 사람들은 돌궐의 침입만 아니었더라면 한강 유역을 빼앗기지 않았을 것이라고 믿었기에 그 땅을 되찾으려는 욕망이 매우 컸다.

고구려의 주변정세를 보면 북방에서는 돌궐이 약화되고 중원에서는 새롭게 수나라가 통일국가를 이루어 고구려를 향해 야심을 품고 있었다. 수가 고구려를 위협하기 전에 후방을 편안히 해둘 필요가 있었다. 영양왕은 온달의 제의를 기꺼이 수락했다.

온달은 전장에 나가기 전에 평강공주에게 맹세했다.

“조령과 죽령 이북의 땅을 되찾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을 것이오.”

온달은 강한 의지를 갖고 싸움터에 나갔다. 온달은 신라가 차지하고 있던 아차성을 공격했다. 아차성은 서울과 구리시 사이에 있는 아차산성으로 추정되는데, 단양에 있는 온달산성이란 견해도 있다. 온달은 아차성 아래에서 신라군과 싸우다가 그만 화살에 맞아 죽었다. 평강공주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온달은 편히 눈을 감지 못했다.

북한학계에서 온달 부부의 무덤으로 보고 있는 진파리 4호 무덤의 천장벽화

북한학계에서 온달 부부의 무덤으로 보고 있는 진파리 4호 무덤의 천장벽화

장례를 치르고자 온달의 시신을 넣어 둔 관을 옮기려고 했으나 관이 움직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온달이 약속을 지키지 못한 한 때문이라고 여기고 평강공주를 모셔왔다. 평강공주는 온달의 관을 어루만지면서 말했다.

“장군, 살고 죽는 것이 이미 결정되었는데, 이제는 돌아갑시다.”

그러자 관이 움직였다. 온달의 시신은 평양으로 옮겨졌고, 성대한 장례가 치러졌다. 영양왕도 이를 듣고 크게 슬퍼하였다. 백성들도 고구려 영웅의 죽음 앞에 크게 슬퍼했다.

온달은 바보라고 놀림을 받았지만, 고구려의 위대한 장군으로 백성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평강공주는 자신의 뚜렷한 의지를 갖고 삶을 스스로 개척하여 바보라 놀림받던 온달을 고구려의 영웅으로 변모시킨 현명한 아내이자 위대한 여성이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온달과 평강공주 (인물로 보는 고구려사, 초판1쇄 2001., 3쇄 2007., 도서출판 창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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