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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8-13 20:50
[한국사] 낙랑국의 역사 정리 -4-
 글쓴이 : 꼬마러브
조회 : 261  

4. 낙랑국의 쇠퇴

 

낙랑국은 한 때 한반도 중북부 지역을 장악하고 강원도 지역까지 진출하여 신라를 두려움에 떨게 만들 정도의 강국이었다. 하지만 낙랑국은 최리왕 대에 이르러 멸망의 길을 걷게 된다. 이 과정에서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설화가 등장한다. 낙랑국의 멸망을 논한다면 빼놓을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자세히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대무신왕 12(서기 32) 여름 4왕자 호동(好童)이 옥저(沃沮)에서 유람하고 있었다그때 낙랑왕(樂浪王최리(崔理)가 그곳을 다니다가 그를 보고 물었다.

그대의 얼굴을 보니 보통 사람이 아니로구나그대가 어찌 북국 신왕(神王)의 아들이 아니리오?”

 

위의 기록은 삼국사기<고구려본기> 대무신왕조의 기사이다. 나는 이 기록에서 낙랑왕이 호동왕자에게 북국 신왕의 아들이 아니냐고 묻는 부분에 주목하고자 한다.

 

당시 낙랑국의 북쪽 즉, 살수 이북에는 커다란 변화가 일고 있었다. 바로 고구려가 급격히 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전쟁의 신이라고 불리는 대무신왕(大武神王)이 등극한 이후, 고구려는 동쪽으로는 개마국과 구다국을 정벌하고 서쪽으로 한()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 북쪽으로는 부여를 공격하여 부여왕의 목을 베는 무시무시한 성장을 이룩하고 있었다.

 

당시 살수 이남의 낙랑국은 이런 고구려의 성장에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특히, 당시 낙랑국은 남쪽으로 백제와 신라 정복에 주력하고 있었기에, 북쪽의 안보 위협은 커다란 독이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낙랑국의 왕인 최리의 입장에서는 북쪽의 고구려와 우호관계를 맺을 필요가 있었다.

 

우리나라의 역사 뿐만이 아니라 세계의 역사를 보면, 국가 간의 혼인은 우호관계를 맺기 위한 도구로써 자주 사용되어 왔다. , 낙랑왕 최리는 북쪽의 고구려와 혼인 관계를 맺어 북쪽 경계를 안정시키고자 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낙랑왕 최리가 호동왕자에게 북국 신왕의 아들이 아니냐고 물은 것은 의도적인 접근일 가능성이 높다.기록을 계속 살펴보자.

 

대무신왕 12(서기 32) 그 후호동이 본국에 돌아와서 남몰래 아내에게 사람을 보내 말하였다.

네가 너의 나라 무기고에 들어가서 북을 찢고 나팔을 부수어 버릴 수 있다면 내가 예를 갖추어 너를 맞이할 것이요그렇게 하지 못하다면 너를 맞이하지 않겠다.”

 이전부터 낙랑에는 북과 나팔이 있었는데적병이 쳐들어오면 저절로 소리를 내기 때문에 그녀에게 그것을 부수어 버리게 한 것이었다이에 최씨의 딸은 예리한 칼을 들고 남모르게 무기고에 들어가서 북과 나팔의 입을 베어 버린 뒤에 호동에게 알려 주었다호동이 왕에게 권하여 낙랑을 습격하였다최리는 북과 나팔이 울지 않아 대비를 하지 않았고우리 병사들이 소리 없이 성 밑까지 이르게 된 뒤에야 북과 나팔이 모두 부서진 것을 알았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낙랑국에는 저절로 소리를 내는 북과 나팔이 있었다. 이는 당연히 구라이다. 아마, 이 북과 나팔이라는 것은 낙랑국의 제사 도구가 아니었을까 한다. 고대는 제정일치 사회이다. , 국가의 왕은 제사를 담당하기도 했었다. 스스로 소리를 내는 북과 나팔이라는 것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한 신성한 물건이었을 것이다. 당시에 종교라는 것은 지금보다 역할이 훨씬 거대했기 때문에, 제사도구인 북과 나팔을 없앤다는 것은 낙랑국의 구심점을 잃는 것과 같다. 고구려는 이를 알고 있었기에, 낙랑국의 제사도구인 북과 나팔을 없애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낙랑공주는 여기에 이용되었다. 기록을 계속 살펴보자.

 

대무신왕 12(서기 32) 그는 마침내 자기 딸을 죽이고 나와서 항복하였다

 

결국 낙랑국은 고구려의 전략에 넘어가고 왕이 항복하였다. 그런데 기록을 살펴보면 이상한 부분이 있다. 낙랑국의 왕은 분명 서기 32년에 고구려에게 항복했다. 그러나 기록을 계속 보면

 

유리이사금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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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러브 17-08-13 20:51
 
유리이사금 13년(서기 36) 가을 8월, 낙랑이 북쪽 변경을 침범하여 타산성(朶山城)을 점령하였다.

낙랑왕이 고구려 항복한 이후에도 낙랑은 신라의 북쪽 변경을 공격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이는 낙랑국의 왕은 고구려에 항복했으나 나라 자체는 멸망하지 않고 각지에 부흥운동이 일어난 것으로 보아야 타당하다. 즉, 낙랑국의 사람들은 왕이 항복을 했음에도 고구려에 끝까지 저항한 것이다. 그렇다면 낙랑국은 언제 멸망할까? 《삼국사기》<고구려본기>의 기록을 살펴보자.

대무신왕 20년(서기 37), 임금이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켰다.

낙랑국은 서기 37년에 멸망한다. 즉, 낙랑국의 왕이 고구려에 항복을 한 이후로 5년 동안이나 부흥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백제의 부흥운동이 3년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상당히 긴 기간이다. 같은 시기 신라 측의 기록을 보면 이와 교차검증이 된다.

유리이사금 14년(서기 37), 무휼(無恤, 대무신왕)이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키자, 그 나라 백성 5천 명이 투항해왔다. 그들을 6부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대무신왕이 낙랑국을 멸망시킨 서기 37년과 같은 시기에 낙랑국의 유민 5천 명이 신라로 투항해 온 것이다. 다시 말해, 낙랑국이 서기 37년에 멸망한 것은 확실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의문이 생긴다. 왜 낙랑국의 백성들은 하필이면 신라로 투항을 했을까? 앞서 밝혔듯, 낙랑국은 스스로 고조선의 후예임을 자칭했다. 그리고 《삼국사기》<신라본기>에는 신라를 구성하는 사로 6부의 사람들은 고조선의 유민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낙랑국과 신라는 모두 '고조선'이라는 공통된 정체성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낙랑국의 백성들이 신라로 투항한 이유에 이러한 것들이 기인하지 않았나 추측된다.

계속해서 기록을 살펴보자. 낙랑국은 서기 37년에 멸망했다. 그러나 낙랑국의 사람들은 멸망 이후에도 고구려에 쉽사리 복종하려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유리이사금 17년(서기 40) 가을 9월, 화려(華麗)와 불내(不耐) 두 현(縣)의 사람들이 함께 모의하여 기병을 거느리고 북쪽 국경을 침범하였다

멸망 3년 뒤엔 서기 40년의 낙랑군의 화려현과 불내현이 신라의 북쪽 국경을 침범했다는 기록이 바로 그것을 증명한다. 즉, 고구려는 낙랑국을 멸망시켰음에도 주민들의 반발이 거세, 제대로 된 통치를 하지 못했던 것이다. 낙랑국은 멸망 이후에도 그의 속현이 신라의 국경을 침입할 정도로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후, 고구려는 결국 낙랑국의 영토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 계속해서 기록을 살펴보자.
꼬마러브 17-08-13 21:11
 
추가 )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설화에서의 낙랑이 중국의 낙랑군이라고 주장하는 인간들이 있다.
그러나 위의 기록을 보면

<삼국사기> 대무신왕 12년 (서기 32년) 여름 4월, 왕자 호동(好童)이 옥저(沃沮)에서 유람하고 있었다. 그때 낙랑왕(樂浪王) 최리(崔理)가 그곳을 다니다가 그를 보고 물었다.

기록은 최리를 낙랑태수가 아니라 낙랑왕이라고 적고 있다. 일개 군현의 태수가 스스로를 왕이라고 칭할 수는 없기 때문에, 이는 중국의 낙랑군이 아니라 별개의 낙랑국으로 보아야 타당하다.
애초에 군현의 태수가 외국과 혼인동맹을 맺는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또한 일부 인간들은

<삼국사기> 유리이사금 17년(서기 40) 가을 9월, 화려(華麗)와 불내(不耐) 두 현(縣)의 사람들이 함께 모의하여 기병을 거느리고 북쪽 국경을 침범하였다

이 기록의 화려현과 불내현이 낙랑군의 화려현과 불내현을 말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이 기록에서의 낙랑은 낙랑군이 아니라 낙랑국으로 보아야 타당하다. 그러면 화려현과 불내현을 무엇을 말할까?

이는 열국시대의 혼란기 속, 요서에서 평양으로 이주한 최씨낙랑국이 정치체 뿐만 아니라 그 지명까지도 같이 이동하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낙랑군의 화려현 불내현과 낙랑국의 화려현 불내현이라는 지명이 중복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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