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무신왕27년(서기 44) 후한 광무제가 병사를 보내 해를 건너와서 낙랑을 정벌하고, 그 땅에 군현을 만들었다. -삼국사기二十七年 秋九月 漢光武帝遣兵渡海 伐樂浪 取其地 爲郡縣 薩水已南屬漢
서기44년 후한 광무제의 시기는 建武二十年 입니다.
건무이십년의 후한서 광무제 본기를 볼까요 ?
二十年AD44 春二月戊子,車駕還宮。
夏四月庚辰,大司徒戴涉下獄死。〈古今注曰:「坐入故太公倉令奚涉罪。」〉大司空竇融免。
五月辛亥,大司馬吳漢薨。
匈奴寇上黨、天水,遂至扶風。
六月庚寅,廣漢太守蔡茂為大司徒,太僕朱浮為大司空。壬辰,左中郎將劉隆為驃騎將軍,行大司馬事。〈武帝省太尉,置大司馬將軍;成帝賜金印紫綬,置官屬,祿比丞相;哀帝去將軍,位在司徒上。見前書。〉
乙未,徙中山王輔為沛王。
秋,東夷韓國人率衆詣樂浪內附。〈東夷有辰韓、卞韓、馬韓,謂之三韓國也。〉
冬十月,東巡狩。甲午,幸魯,進幸東海、楚、沛國。
十二月,匈奴寇天水。
壬寅,車駕還宮。
是歲,省五原郡,徙其吏人置河東。復濟陽縣傜役六歲。
二十一年春正月AD45,武威將軍劉尚破益州夷,平之。
夏四月,安定屬國胡叛,屯聚青山,〈青山在今慶州馬嶺縣西北。〉遣將兵長史陳訢討平之。〈訢音欣。〉
秋,鮮卑寇遼東,遼東太守祭肜大破之。
冬十月,遣伏波將軍馬援出塞擊烏桓,不克。
匈奴寇上谷、中山。
其冬,鄯善王、車師王等十六國皆遣子入侍奉獻,願請都護。〈都護,宣帝置,始以鄭吉為之,秩比二千石。都,緫也。言緫護南北道。居烏壘城,察西域諸國動靜以聞。事見前書。〉帝以中國初定,未遑外事,乃還其侍子,厚加賞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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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년에 秋,東夷韓國人率衆詣樂浪內附
동이의 한국인 여러명이 낙랑군을 방문하였다는 기록이 있네요.
다시 후한서 동이전을 보니
建武二十年,韓人廉斯人苏馬諟等,詣樂浪貢獻。
光武封苏馬諟為漢廉斯邑君,使屬樂浪郡,四時朝謁。
44년에 한국의 염사인 소마시등 여러명이 낙랑에 공물을 받쳤다.
광무제는 소마시를 한나라 염사읍군 으로 봉했다.
염사읍은 낙랑군에 속해 사시로 조알했다. (삼한 사람이 낙랑의 영지를 받은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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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튼 교차검증 결과
삼국사기 고구려 대무신왕편에서 후한의 광무제 낙랑정벌기사는 교차검증 불가.
게다가 광무제는 5월에 흉노의 침입을 받은 상태이며,
가을에는 낙랑을 통해 삼한 사람들의 내방을 받았고,
, 10월에는 동해를 순시함. (전한의 무제가 낙랑조선 정벌에 1년 걸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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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무신왕편에 나오는 광무제의 낙랑정벌 기사는
후대에 누군가가 삽입한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삼국사기에서 간혹 발견되는 오류중에 흔히 보는 경우인데,
후한의 멸망후(AD220)에도
漢나라 사람이 백제나 고구려를 공격하는 기사가 나오는것처럼 말입니다.
광무제의 낙랑정벌은 사실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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