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성재 박사님이 또 새 글을 한 편 올리셨네요. 갱단의 윤용구, 오영찬 등이 "낙랑인", "낙랑문화" 타령 하면서 엄청 빨아 제끼는 "왕온묘지명".... 그 자들이 그동안 이 묘지명을 낙랑은 평양에 있었고 313년에 요령성 금주로 교치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증거라면서 엄청 선전해 왔죠.
그런데 문박사님 말로는 자세히 분석해 본 결과 그게 거꾸로 낙랑평양설 낙랑교치설 엿먹이는 증거랍니다!! 실증주의 실증주의 하는데 이런게 실증주의라고 봅니다. 윤용구, 오영찬 이것들 정말 바보였네요 지들 명을 재촉하는 유물을 갖고 와서 똥폼을 잡았으니 ㅉㅉㅉ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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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단의 숨통을 찌른 ‘양날의 검’ 왕온묘지명
(문성재)
<이 글은 어제 제가 이덕일 소장님의 한가람역사연구소에서 발표한 내용의 일부입니다. 여러분의 가르침을 받아 수정한 후 이번 책에 반영할 계획이오니 아낌없는 가르침 주시기 고대하겠습니다!>
갱단 학자들은 평양의 낙랑군이 313년(고구려 미천왕 14년)에 멸망하고 그 행정체제가 그대로 요령성 금주(錦州)로 철수하면서 새로운 낙랑군이 탄생했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이게 그 유명한 ‘교군설(僑郡說)’ 또는 ‘교치설(僑治說)’이지요. 그러나 그들이 결정적인 근거라는 문헌기록은 두 가지 뿐이었습니다.
①《삼국사기》“미천왕 14년”조 기사
②《자치통감》〈진기10〉“효민황제 상-건흥 원년”조 기사 (“장통 귀순” 관련 페북 글 참조)
2000년후로 ‘평양설’과 ‘교치설’을 뒷받침“한다는” 근거가 또 하나 추가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③1990년대에 중국 낙양에서 발견된 ‘왕온묘지명(王溫墓誌銘)’
그러나 갱단들이 자신만만하게 내놓은 그 근거들은 전혀 진실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1차 사료를 오독, 심지어 악용한 갱단 사기꾼들의 망상이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하니까요.
‘왕온묘지명(王溫墓誌銘)’은 5-6세기 북위의 명장인 왕온이 생전에 세운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만든 것입니다. 당초 갱단에서 ‘낙랑인’이라는 종족개념의 조작을 통하여 이론적 돌파구를 모색하고 국민들을 또한번 바보로 만들려는 못된 심보로 2000년대부터 급히 도입한 ‘떡밥’이지요.
그러나 그 내용을 자세히 보면 이 묘지명은 오히려 그들의 숨통을 죄는 ‘양날의 칼’임을 알 수 있습니다.
1) 갱단들이 보는 낙랑군 멸망(축출) 시점
갱단 학계에서는 장통이 모용외에게 귀순하는 시점을 313-314년 사이로 보고 있지요. 여기에는 낙랑의 멸망 및 교치 문제도 걸려 있어서 그런지 이 시점에 대한 갱단의 입장은 확고해 보입니다. 갱단 홍위병 집단인 ‘무서운 아이들’은 그 시점을 이렇게 단언했습니다.
“미천왕 14년(313) 겨울 10월에 낙랑군을 침범하여 남녀 2천여명을 포로로 잡았다. … 15년(314) 가을 9월에 남쪽으로 대방군을 침범하였다. … 이는 … 고구려가 장통의 낙랑군, 대방군 세력을 제압한 사실을 전해준다. 장통은 왕준의 설득도 있었지만, 고구려의 남진에 압박을 받아 모용선비에 귀부하였던 것이다. …
이상을 통해 살펴본 것처럼 낙랑군은 4세기 전반 대동강 유역에서 요서지역으로 교치되었고, 5세기 전반 요서지역에서 롼허강 유역으로 교치되었다. 그러므로 후대의 문헌에서 낙랑군 또는 그와 관련된 지명이 롼허강 유역에 보인다고 해서 이를 한사군과 직접 연관시키기는 어렵다.” (가소로운 아이들의 책)
그러나 앞으로 이 친구들은 ‘가소로운 아이들’로 명칭을 바꿔야 될 것 같습니다. 그들의 기대와는 정 반대로, 왕온의 묘지명은 갱단의 주장이 역사적 사실이 아닌 과대망상의 산물임을 방증해 주니까요.
“공은 휘가 온이고 자가 평인으로 연나라 낙랑군 낙도 사람이다. 가계는 희씨 성의 주나라 문왕으로부터 비롯되고 자씨 성의 진나라 때부터 분파되었다. 한나라 사도 패, 진나라 사공 침의 후예이다. 조부 평은 (북)위의 정로장군, 평주자사를 지내고 … 부친 장은 용양장군, 낙랑태수를 지냈다. …
지난날 영가 연간의 난리를 만났을 때 고조부 준은 진나라의 태중대부였는데 그 조부인 사공 유주목 준이 석씨에게 재앙을 당하매 건흥 원년에 계현으로부터 낙랑으로 피난했다가 그 일이 계기가 되어 그곳에 정착하였다. (북)위 흥안 2년에 조부인 평이 가솔을 이끌고 귀국하여 조정에서 요직을 맡으면서 (그를) 따라서 도읍에 정착하기에 이르렀다. …”
公諱溫, 字平仁, 燕國樂浪樂都人. 啓源肇自姬文, 命氏分于子晉. 漢司徒霸, 晉司空沉之後也. 祖評, 魏征虜將軍平州刺史. … 父萇, 龍驤將軍樂浪太守. …
昔逢永嘉之亂, 高祖準, 晉太中大夫, 以祖司空幽州牧浚遇石氏之禍, 建興元年自薊避難樂浪, 因而居焉. 至魏興安二年, 祖評携家歸國, 冠冕皇朝, 隨居都邑. …
묘지명에 등장하는 왕온의 6대조 왕준(王濬: 252-314)은 진나라 혜제(惠帝)와 회제(懷帝)의 옹립에 큰 공을 세우고 자신의 영향력을 강화한 동북방의 군벌이었습니다. 그러나 석륵(石勒)을 신임했다가 건흥 1년(양력으로 314), 석륵에게 사로잡혀 본인은 물론 휘하의 졍예병력 10,000명까지 모두 주살되었지요.
당시 그 손자이자 왕온의 고조부이던 또다른 왕준(王準)이 낙랑군으로 피신한 것은 바로 이같은 정치적 배경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묘지명의 내용을 근거로 할 때, 그 일족이 “건흥 원년”에 낙랑군에 정착했다면 313년에 계현에서 낙랑군으로 이주한 셈입니다. 늦어도 314년 연초에 벌써 낙랑군에 도착했다는 뜻이지요. 잠깐만 …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갱단 학계의 논리대로라면, 낙랑군은 당시 고구려와 몇 년째 험악한 군사충돌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낙랑군은 고구려의 거듭되는 침공으로 “남녀 2,000명”이 포로로 잡혀가고 그곳에서 할거하던 장통은 “백성 1,000여 가”를 데리고 탈출할 정도였습니다.
이처럼 정치, 군사적으로 풍전등화의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이 당시의 낙랑군이었지요. 그런데 왕준과 그 일족, 그리고 그들이 데리고 간 수천명 이상의 민호들이 바로 그 살벌한 전쟁터로 자진해서 뛰어들었다? 살겠다고 피난을 간 사람들이 정말 자진해서 범 아가리 속으로 들어간 것일까요? 전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왕온묘지명은 우리에게 다음의 세 가지 역사적 사실(fact)을 분명하게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①왕준 일족이 건흥 원년(313)에 낙랑군으로 이주함
②다시 중원으로 귀환하는 흥안 2년(452)까지 200년동안 “그곳에 정착”함
③그것이 계기가 되어 본향까지 ‘낙랑’으로 변경함
최근 ‘가소로운 아이들’을 앞세운 갱단에서는 왕준 일족이 피난을 간 낙랑군과 관련하여 그동안 평양에서 교치된 이후의 낙랑, 즉 요령성 금주시 인근으로 주장해 왔습니다. 그러면서 낙랑과 대방의 철수 시점이 313-314년 사이, 보다 넓게 보면 4세기 초엽에 이르러서 비로소 완료되었다고 단언하고 있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묘지명에서 알 수 있는 위의 사실에 근거할 때, 왕준 일족의 피난은 갱단에서 주장하는 ‘평양 액소더스’가 발생하기 이전에 이미 이루어졌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들이 피난한 곳은 한 무제 당시의 낙랑군과 동일한 지역인 거지요.
그리고, 한중일 세 나라의 갱단 학계가 집요하게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미천왕이 침공했다는 313년 이후로도 낙랑군은 200년동안 6세기 초엽까지 여전히 건재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실제로 제가 ‘왕온묘지명’에 등장하는 낙랑군을 각종 중국 사서, 문헌들과 대조, 분석해 본 결과, 지리적으로든 역사적으로든 그 위치는 요서지역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왕준 일족이 난리를 피해 이주해서 150년동안을 정착해 살았던 낙랑은 상식적으로 평양 또는 금주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지역의 고구려가 313년 낙랑군을 침공한 데 이어 314년에는 대방군을 침공하는 등, 하루도 쉬지 않고 크고 작은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싸움판으로 ‘피난(난리를 피해감)’을 간다? 이건 그야말로 약간 뒤숭숭한 이라크를 떠나 엉망진창 개판 오분전인 시리아로 이주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xx행위입니다. 점입가경으로 거기가 너무도 평화롭고 살기가 좋아서 아예 거기에 말뚝을 박고 150년을 내리 정착해 살고, 심지어 본향까지 ‘낙랑’으로 바꾸었다??
그래도 그딴 말도 안되는 소리를 늘어 놓는 자가 있다면 그 자는 학자가 아니라 사기꾼입니다.
<지도1 - 갱단의 논리에 근거할 때 313년 왕온 집안이 낙랑으로 이주한 경로. 지도에서 흰색 지점이 지금의 평양, 주황색 지점은 실제의 낙랑군 추정지.>
갱단의 가장 큰 그리고 가장 치명적인 논리적 모순은 이것입니다. 낙랑군 및 3군은 한 무제 설치 당시부터 400년 넘게 중국의 요서지역에서 명멸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무리하게 한반도에 몰아 놓다 보니 아무리 문헌을 뒤지고 헤쳐도 실체가 아예 없을 수밖에요.
게다가 멀쩡한 요서의 낙랑을 억지로 평양에 갖다 놓았으니 그 다음부터는 낙랑군을 수시로 ‘강제로’ 이동시켜야 하는 겁니다. 평양에서 금주로, 금주에서 다시 북경 인근으로 말이죠. 이동시키지 않으면 중국 정사에서 6세기까지 건재한 낙랑군을 해명할 수 없으니까요. 첫 단추를 제대로 끼우는 것이 이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한번 잘못 끼우면 그 다음부터 벌어지는 사태는 도저히 수습할 수 없게 돼 버리니까 말입니다!
그냥 낙랑이 요서에 있었다고 인정하기만 하면 일이 쉽게 해결되고 이런 황당하고 멍청한 짓거리도 더 이상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갱단은 그 사실을 인정하기는커녕 자신들의 잘못과 죄악을 감추고 호도하기 위하여 말도 되지 않는 장통 기사나 왕온묘지명까지 끌어 대기에 바쁩니다. 그리고 그러다 보니 결국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동원했던 그 물증들이 어느 사이에 "거꾸로” 자신들의 주장을 부정하고 심지어 자신들의 숨통을 찌르는 치명적인 비수가 돼 버리고 만 겁니다.
만시지탄이 있기는 하지만, 갱단이 조금이라도 머리가 있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낙랑평양설과 낙랑교치설을 포기하면 됩니다. 그러지 않고 계속 침묵과 부정으로 일관한다? 그렇게 되면 갱단 학계 전체가 공중분해 되고 말 겁니다 흔적도 없이 말이죠.
아래 지도에 왕준이 이주한 낙랑과 장통이 귀순한 모용외, 그리고 장통과 몇 년동안 군사적 대결을 벌인 고구려의 위치를 표시해 보았습니다. 이것만으로도 낙랑군 및 고구려의 정확한 위치를 둘러싼 그간의 논란이 상당수 해명될 것으로 봅니다.
<지도2 - 낙랑군, 고구려, 모용외의 가장 이상적인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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