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의 경계, 요하=난하설의 오류
유사역사학자들은 수경주나 한서에 대한 잘못된 해석을 하고 있다 또 양평이나 진 유주 위치 문제에 대해서도 자위적인 해석을 하고 있다 핵심 요하인데 유사역사학자들은 요하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했다고 본다
여기서 반그시 검토해야 될 또 하나의 사항은 요하에 대한 해석이다. 기원전 8~7세기 고조선과 연나라의 경계로 기록된 요하가 현재의 요하가 아니고 북경 동북쪽에 위치한 난하라는 주장이 있다.(37:리지린, 1963 앞 책; 사회과학출판사, 1989 《조선전사》2, 90쪽.) 이것은 북한 학계의 기본적인 견해인데, 남한 학계에서는 윤내현이 따르고 있다.
난하를 요수로 보는 주장은 《산해경》<해내동경>의 "요수는 위고(衛皐)의 동쪽에서 나와 동남으로 흘러 발해에 물을 대고 요양에 들어간다"는 기록과 《염철론(鹽鐵論)》'험고' 편의 "연은 갈석으로 막혀 있고 여러 계곡을 끊고 요수를 둘러싸고……"라는 기록에 의거한다.
이 기록을 그대로 보면 동남으로 흐르면서 갈석이 있는 강이 요수인데, 현재 산해관(山海關)과 갈석산(碣石山)이 위치한 곳에 난하가 있으므로 지금 북경 근처의 난하를 요수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북경 근처의 현 만리장성을 연나라 장성으로 보아 북경 동쪽의 난하를 요수로 볼 수 있는 여지도 있다.
그러나 이 주장에서 먼저 유념해야 할 것은 요서 지역을 고조선의 영역으로 보고자 하는 선입관이 깔려 있다는 점이다. 이 주장은 강의 흐르는 방향만을 근거로 요수의 위치를 고증하여 요수나 갈석이 바로 고조선과 경계 지역이라는 논리이다. 그러나 《산해경》에 나오는 강의 방향만을 갖고 난하를 요수라고 주장하는 것은 단순한 정황 논리일 뿐이며 대릉하(大凌河)나 요하(遼河)도 같은 방향으로 흐른다는 점에서 주장의 신빙성이 떨어진다. 또한 《염철론》에 기록된 갈석은 꼭 '요수' 근처에 있는 것으로만 해석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주장대로라면 고조선은 처음부터 북경을 중심으로 한 연나라와 대립하면서 요서 지역에 위치한 것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요수나 갈석이 연의 장새(鄣塞) 근처에 위치하나 그것이 꼭 고조선과 경계 지역이라는 증거가 없고 산융(山戎)·동호(東胡)와 경계한 지역일 가능성이 오히려 높다. 무엇보다도 일차적인 문제점은 만일 기원진 8~7세기경 현 난하가 요수였다면, 그 당시의 요하는 또 어느 강이고 왜 현재의 요하가 열수로 불리지 않게 되었는지를 설명해야 한다. 그리고 기원전 4세기(전국시대) 이후 요하로 불리는 강을 모두 현재의 요하로 규정하게 된 이유와 과정을 입증해야만 그 주장에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38:이순근, 1990 <고조선의 성립과 사회성격> 《북한의 한국사인식》[1], 한길사, 90~91쪽.) 이 주장에 대한 비판은 중국 고대 지리서의 하나인 《수경주(水經注)》의 기록을 검토하는 것으로 대신하겠다.
"대요수는 장새의 바깥 위백평산(衛白平山)을 나와 동남쪽으로 장새에 흘러 들어가고 요동의 양평현(襄平縣) 서쪽을 지나며 또 동남쪽으로 방현(房縣)의 서쪽을 지나고 동쪽의 안시현(安市縣)을 지난다."
"또 현도 고구려현에는 요산이 있는데 소요수가 나오는 곳이다. (소요수는) 서남쪽으로 흘러 요대현에 이르러 대요수에 들어간다."(39:"大遼水出塞外衛白平山 東南入塞 過遼東襄平縣西 又東南過房縣西 又東過安市縣 西南入於海" "又玄菟高句麗縣有遼山 小遼水所出 西南至遼隊縣 入於大遼水也"(《水經注》卷14 小遼水條).)
위 내용을 정리하면 요수는 장새 바깥의 위백평산(현 지석산)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흘러 장새 쪽으로 들어가고, 양평현(현 요양시)의 서쪽을 거쳐 동남쪽으로 흘러 방현의 서쪽을 지나며, 다시 동쪽으로 흘러 안시현의 서남쪽을 거쳐 바다로 들어간다. 또 세주(細註)에 보면 소요수(小遼水, 현 혼하)가 양평현 부근에서 '못[淵]'을 이루었는데, 309년(영가 3) 무렵 물이 말랐다가 다시 양평현을 거쳐 요수에 합류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수경주》에 디록된 요하와 혼하(渾河)의 흐름에 대한 설명은 현재의 요하와 혼하의 흐름과 거의 일치한다. 물론 요하 중·하류 지역의 경우 시대에 따라 해로가 달라지며 포하(蒲河)와 대릉하 하류가 합쳐져 한대 이래 요하의 본류가 되었다.(40:孫守道, 1992 <漢代遼東長城列燧遺蹟考> 《遼海文物學刊》92-2, 13~32쪽.) 하지만 요하의 기본적인 위치는 북한 학계나 남한 학계 일부의 주장처럼 변하지 않았다.
이상의 《산해경》과 《수경주》의 기록은 전국시대(기원전 4세기) 이전 조선의 존재와 대략적인 위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다만 위 두 사료는 모두 기록 자체에 대한 비판적인 이해가 필요하기 때문에, 이를 바탕으로 구체적인 논의를 전개하기는 어렵다.
'조선'의 존재가 처음으로 명확하게 나타난 기록으로는 앞서 말한 《관자》권23 '경중갑'편과 '규도'편을 들 수 있다. 그중 '규도'편에서는 제나라(기원전 685~기원전 643)와 조선 등과의 관계를 논하면서 조선의 특산물, 즉 호랑이 가죽과 모피로 만든 옷과의 교역을 언급하고 있다. 또 조선은 제(지금 산동반도에 위치)에서 8,000리 떨어진 곳에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 8,000리라고 하는 것은 그만큼 거리가 멀다는 뜻이다.(41:리지린, 1963 앞 책; 학우서방, 1989 재발간, 12쪽.) 왜냐하면 실제 8,000리가 안 되거니와 오월(吳越)·우씨(禺氏)·곤륜(崑崙) 등 다른 지역과의 거리도 모두 동일하게 8,000리라고 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의미상 멀다는 표현일 뿐이므로, 이를 가지고 고조선과 제나라의 거리를 생각해서는 안된다.
처음으로 역사 무대에 등장한 고조선은 중국에서 매우 멀어진 곳으로 짐승 가죽과 그것을 이용한 특산물을 생산하는 '지역'으로 묘사되어 있다. 요서 지역에 조선이 위치했다는 내용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관자》의 기록을 통해 고대 중국인들이 이미 기원전 4세기(전국시대) 이전부터 조선이라는 존재를 알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출처
송호정, 2003, 『한국 고대사 속의 고조선사』, 서울;푸른역사, 56~6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