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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9-04 17:29
[기타] 동방으로부터의 광풍: 바투의 유럽 원정
 글쓴이 : 관심병자
조회 :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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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세계 전략

 1234년, 우구데이는 북중국 금나라의 저항을 최종적으로 무너뜨린다. 그 이듬 해에 우구데이는 쿠릴타이를 개최하여 새로운 원정 계획을 논의하는데, 그 결과 각기 다른 네 지역에 대한 새로원 원정이 결정되었다. 그 목적지는 고려와 남송, 서아시아와 킵차크 초원 등 동·서방을 모두 포괄하는, 유라시아 전역에 대한 광역적인 세계 전략이었다. 이 글에서는 네가지 원정 가운데 킵차크 방면으로의 원정만을 다루도록 하겠다.


왜 이러한 원정을 결의하게 되었을까? 주베이니에 따르면, 칭기스 칸은 가족들에게 분봉을 행할때 주치에게 “카약릭과 호레즘에서부터 삭신과 불가르에 이르기까지, 나아가 몽골 말들의 발굽이 닿는 곳까지”를 위임하였다. 때문에 호레즘 왕국에 대한 원정 후반부에 주치의 병사들은 시르다리아 이북의, 현재의 카자흐스탄 방면으로 나아가 예정된 경략활동을 한창 전개하고 있었다.

주치가 죽은 뒤에도 주치 일가를 중심으로 킵차크 초원에 대한 경략 활동은 이어졌으나, 지지부진했다. 게다가 일대의 불가르 및 킵차크 계통의 유목집단들은 점차 몽골의 지배를 거부하며 반발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연유로 그들을 돕기 위하여, 또 칭기스의 유지를 잇기 위하여 원정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장자 원정군의 구성


칭기스 칸의 시대에는 본래 이런 오랜 기간에 걸친 원거리 원정에 ‘민족 이동’의 방식을 취했다. 그러나 우구데이의 시대 이후로는 어느 한 천호가 모두 참가하는 형태는 적어진다. 그 대신 몽골인들은 매 10호마다 몇 명의 전사를 공출하는 방식으로 원정군을 편성하였다. 이 원정의 경우 각 만호萬戶·천호千戶·백호百戶·십호十戶에서도 장자들을 차출하여 병력을 충원하였는데, 그 수가 5만 명 가량이었다. 아울러 칭기스 칸의 사자가문四子家門에서 각각 장자長子들을 차출하여 지휘를 맡겼기 때문(주치 가문의 바투, 차가다이 가문의 부리, 우구데이 가문의 구육, 톨루이 가문의 부첵)에 ‘장자원정군’으로 불린다.

장자원정군은 몽골의 전통에 따라 원정군은 우익右翼과 좌익左翼으로 구성되었다. 주치 일문과 차가다이 일문이 우익을 담당하고, 바투가 그 지휘관이 되었다. 우구데이 일문과 톨루이 일문은 좌익을 담당하고 구육이 그 지휘관이 되었다. 전체의 통수권은 바투에게 주어졌다. 이 원정에서 정복되는 새로운 영토는 주치 일문의 소유가 될 것이기 때문에, 그 원정의 지위와 책임이 주치 일족에게 맡겨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여기에 역전의 노장인 수베에데이가 참전하여 원정군의 실질적인 지위를 맡았다.


킵차크 원정


 1235년의 쿠릴타이의 결의에 따라, 차가다이 가문의 장자 부리, 우구데이 가문의 구육과 카단, 톨루이 가문의 뭉케와 부첵 등 제왕들에게 서정이 명해졌고, 수베데이를 비롯한 대신들이 동반토록 했다. 1236년 봄에 원정군은 출발하여 여름 내내 이동하고 가을에 불가르 지방에 도착, 이미 전에 그곳에 파견되어 있던 주치 가문의 바투, 오르다, 시반, 탕구트 등과 합류했다. 그 해 겨울, 제왕들은 우랄 강을 건너 킵차크 초원에 진입한다.

원정군은 여기서 둘로 나뉘어져, 바투의 우익군은 불가르 지방의 경략을 행하고, 구육의 좌익군은 볼가 강을 근거로 활동하던 킵차크의 수령 바츠만Bachman과 아스의 수령 카치르 우굴라Qachir Ukula에 대한 공격을 시작한다. 이듬해 봄 바치만은 추적하는 몽골군을 피해 도주하지만, 결국 생포당해 처형당한다. 원정군은 모두 합류하여 볼가 강 서쪽의 보크시Boqshi와 부르타스Burtas를 정복한다. 이 과정을 통해 원정군은 킵차크계 유목민 10여 만명을 군대로 편입, 일거에 그 규모를 15만 가량으로 늘렸다. 이 해 가을, 제왕들은 쿠릴타이를 열고 러시아에 대한 원정을 결의한다.


루시 원정


장자원정군은 러시아 대공이 주재하던 근거지인 블라디미르를 곧바로 공략하지 않고, 먼저 서남쪽으로 우회, 먼저 랴잔을 점령한다(12월 22일). 1238년에는 거기서 북상하며 이어 오카Oka를 함락시켰으나 전투에서 쿨겐이 전사한다. 이후 콜롬나, 모스크바를 차례로 함락시키고 마침내 블라디미르까지 점령한다(2월 7일). 블라디미르의 대롱 유리 브세볼로드는 볼가 강 상류로 퇴각하면서 전역을 재저비하려고 했다. 그러나 뒤이어 추격한 몽골군과 시트Sit' 강가에서 전투가 벌여졌고, 유리는 전사했다. 몽골군은 다시 서쪽으로 군대를 돌려 트베리를 거쳐 토르조크를 함락시킨다(3월 5일). 봄이 되어 하천과 호수의 결빙이 풀리면서 군사작전이 어려워지자 연합군은 남쪽으로 방향을 돌려 킵차크 초원으로 향한다.

도중에 바투는 코젤스크를 7주간 포위하나 함락에는 실패한다. 카단과 부리의 군대는 단박에 성주를 참살하고 3일 만에 이를 점령한다. 가을, 뭉케와 하단은 체르케스를 공략하여 겨울에 그 왕 투카르Tuqar를 살해한다. 겨울에는 시반, 부첵, 부리가 크림 반도를 공략하고 베르케는 킵착을 원정한다.

1239년 겨울, 구육과 뭉케는 아스인들의 근거지인 메게스 성을 공격한다. 3개월 동안의 포위 끝에 함락에 성공한 두 사람은 캅카스 지방의 데르벤트를 장악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는 한편, 그 자신들은 바투의 군대에 합류, 원정군은 다시 북상하여 1240년 11월 19일(또는 12월 6일)에 키예프를 점령한다. 1241년 1월 ~ 2월, 우구데이는 구육과 뭉케의 귀환을 명령하는 조칙을 내린다.


헝가리 원정


1241년, 부대를 나누어 서진한다. 그 가운데 하나는 카이두와 바이다르가 이끄는 부대로, 폴란드 방면으로 나아갔다. 이들은 츠미엘니크Chmielik에서 폴란드 군대에 대한 대승을 거둔다. 이후 몽골군대는 상 슐레지엔으로 나아가 브레슬라우Breslau(지금의 브로츨라프)를 파괴했다. 몽골군은 북진을 계속하여,  4월 9일, 리그니츠(현재의 레그니차)에서 슐레지엔 공 헨리크 2세가 이끄는 독일-폴란드 연합군을 격파한다. 이후 이 편원에는 왈슈타트라는 마을이 들어서는데, 왈슈타트라는 말은 독일어로 ‘시체의 마을’이란 의미로, 이 전투 뒤에 죽은 사체가 너무 많이 나와서 붙은 이름이라 전해진다.

  그러나 이 전투가 실제로 일어난 일인지는 확실치 않다. 동시대 문헌에서는 기록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15세기 문헌에 들어와서야 언급된다. 또한 레그니차 전투 이후 독일기사단의 구성원이 크게 변했다는 기록 또한 찾을 수 없다. 레그니차 전투가 있었다 하더라도 실제로는 보잘 것 없는 전투였을 가능성이 높다. 어쨋든, 카이부와 바이다르의 군대는 이후 모라비아를 분탕질치며 다시 남하, 헝가리로 진입한다.

 그동안 다른 장자원정대는 카르파티아 산맥을 넘어 헝가리로 진입했다. 당시 헝가리는 몽골군에 대한 대비도 모잘랐지만, 국왕과 귀족 사이의 사이도 좋지 않아 제대로 된 대응책을 준비하지도 못했다. 가장 쟁점이 되었던 문제는 쿠만, 즉 킵차크 난민 문제였다. 쿠텐이 이끄는 킵차크 난민들은 1239년, 헝가리 왕 벨러 4세에게 자신들을 받아들여 달라고 간청했다. 벨러 4세는 이를 허락했으나, 곧 킵차크 유목민들과 헝가리의 봉건 농업 사회는 갈등을 빚었다.

 몽골군대의 접근이 감지된 것은 이떄의 일이었다. 헝가리 방면의 몽골 군대는 5개로 나뉘어 카르파티아 산맥을 넘었다. 벨러 4세는 데네스Dénes를 보내 베렉케Verecke 협곡에서 몽골군의 카르파티아 통과를 막고자 하였다. 그 길은 러시아 길이라 불리며, 896년 머저르인들이 카르파티아를 넘었던 길이었다. 1241년 3월, 바투가 이끄는 몽골군은 데네스를 격파하고 카르파티아로 진입한다. 그때 우구데이의 아들 카단Qadan이 이끄는 군대는 북쪽으로 돌아 카르파티아 산맥을 넘어 트란실바니아의 작센계 도시, 라드나Radna를 점령했다. 3월 말, 수베에데이가 이끄는 군대는 오즈토즈Ojtoz를 통해 트란실바니아로 진입했다. 톨루이의 아들 부젝이 이끄는 군대는 왈라키아와 세베린을 거쳐 남쪽으로 헝가리로 진입했다.

이때 벨러 4세는 페슈트Pest에 머물며 헝가리 군대와 이전에 진입한 킵차크인들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몽골군과 마주하기 전에 사단이 났다. 부더 시민들과 헝가리 귀족들은 쿠텐과 킵차크 귀족들을 살해한다. 킵차크 난민들은 그길로 헝가리를 떠나 불가리아로 향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거치는 모든 헝가리땅을 불태웠다. 그때 몽골군대가 접근했다.

 리그니차 전투로부터 2일 뒤인 4월 11일, 바투가 이끄는 본대는 셔요Sajo 강변의 모히 초원에서 헝가리 국왕 벨러 4세가 이끄는 헝가리 군대를 격파한다. 최초에 바투를 비롯한 제왕들은 적의 군세가 강하다는 이유로 공격을 꺼렸으나, 수베에데이가 적을 강가까지 유인한 뒤 군대를 자신과 바투, 오르다, 시반, 카단 등이 지휘하는 5개로 나눠, 수심이 얕고 다리가 있는 중류를 통해 네 명의 제왕들이 도하하고, 자신은 수심이 깊어 적이 방심하는 하류에서 뗏목을 엮어 도하, 적의 후방을 급습하는 기책을 제시했다. 그러나 제왕들은 수베에테이가 강을 건너기도 전에 도하를 시작하여 전략적으로 실책을 범하고 말았다. 도하한 뒤에도 바투는 적의 수가 여전히 많다는 이유로 후퇴할 것을 요청하지만, 수베에데이는 “왕이 돌아가기를 원한다면 혼자서 돌아가시오. 나는 도나우 강과 마자르 성에 이르지 않고서는 돌아가지 않겠소!” 라고 돌진하는 바람에 바투도 할 수 없이 합세하여 적을 격파했다.

 벨러는 황급히 도주하여 목숨만 겨우 건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동생을 비롯하여 휘하의 장군 대부분과 2명의 대주교가 사망했고, 페스트도 함락되었다. 벨러는 우선 오스트리아 방면으로 도주하여 아내와 합류한 뒤, 자그레브로, 다시 스플리트로 도주하였다. 몽골 군대는 1241년에서 42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에 다뉴브 강이 얼기를 기다렸다.


파국


1241년 초, 원정군에 구육과 뭉케의 귀환을 명하는 우구데이의 칙령이 닿는다. 그 해 여름, 몽골 군대는 티서와 다뉴브 강가에서 휴식하며 ‘이별의 잔치’를 가진다. 이때에 이르러 우익군의 바투와 좌익군의 구육 사이의 언쟁이 폭발하고 만다. 『비사』 275절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바투가 킵차크 원정 중에 우구데이 카안에게 사자를 통해 아뢰어 보내기를, “영생의 하늘의 힘으로, 카안 숙부의 음덕으로 메게드 성을 부수고, 오로스 사람들을 약탈하고 열하나의 외방 백성을 옳은 방향에 들게 하고, 황금 고삐를 돌려 잡고 ‘이별의 잔치를 하자!’고들 하여 큰 천막을 세우고 잔치를 할 때, 제가 이들 모든 왕자들의 연장자로서 한두 잔 의식의 술을 먼저 마셨다고 하여 부리와 구육이 제게 기분 나빠하며 잔치를 아니하고 떠나버리를 수모를 당했습니다. 부리가 떠나가면서 “바투는 동등한 사이에 어떻게 먼저 마시는 것이었는가? 수염난 노파들이 대등하게 되었으니 발로 밀고 발로 밟아야 하겠다.”고 했습니다. 구육은 “저들 활을 찬 노파들의 가슴을 너와 내가 도려내 버리자!”고 했습니다. 엘지기데이의 아들 하르가순은 “그들에게 나무꼬리를 붙여주자!”고 했습니다.”

왜 구육과 부리, 하르가순은 바투를 모욕하였는가? 바투와 구육 사이의 불화 원인은 원정 내내 바투를 비롯한 일부 제왕들의 실책과 소극적 태도에 원인이 있었던 듯 싶다. 앞서 몇 차례 언급하였듯, 이 원정에서 주치 일문은 여러 차례 실책을 범했다. 애초에 원정 자체가 주치 일가의 경략이 지지부진했기 때문에 몽골 제국이 거국적으로 이를 돕기 위해 벌인 일이었다. 앞서 언급한 코젤스크의 함락에서도 바투가 3개월이나 고생하며 포위를 하였으나, 이에 실패했고, 카단의 군대는 고작 3일만에 이를 해결했다. 토르조크의 함락에서도 바투는 실패하여 수베에테이에게 원군을 요청, 결국 수베에데이가 소수의 군대를 이끌고 일거에 성주를 포획하고 3일만에 성을 함락시켰다. 모히 초원의 전투에서도 바투는 실책을 범한 주제에 티서 강의 잔치에서 수베에데이가 늦게 도하하는 바람에 자기 부하들이 죽었다고 불평을 했다. 수베에데이가 상황을 설명하며 잘못한 것은 바투측이라 지적하자 바투도 이를 시인하게 되었다. 이런 연유로 구육과 부리 등은 바투와 그 휘하 제왕들에 대한 불만을 마지막 이별의 잔치에서 폭발시킨 것이다


회군


이별의 잔치가 끝난 뒤인 1241년 가을, 구육과 뭉케는 우구데이의 명령에 따라 몽골 고원으로 귀환한다. 구육과 뭉케의 귀환이 좌익군 전체의 철수를 의미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귀환한 뒤에도 여전히 구육의 동생인 카단과 뭉케의 동생인 부첵이 남아서 작전하였기 때문이다. 이들이 회군한 것은 1241년 11월, 우구데이의 죽음이 전해진 뒤의 일이었다. 우구데이의 미망인 투레게네 카툰이 각지의 귀족들에게 카안의 사망과 새로운 군주의 선출을 위한 쿠릴타이의 소집을 알렸다. 이 소식에 원정군을 구성하고 있던 몽골 여러 왕가의 부대들은 차례로 동방으로 회군한다.

 그러나 바투 휘하 주치 가문의 군단은 몽골 고원으로 귀환하지 않았다. 바투는 후계자 선출에서 내분을 일으키고 있던 몽골 고원을 멀리서 바라보면서 안주한 채 요동도 하지 않았다. 대신 바투는 카안의 부재를 틈타 원정의 거대한 성과를 고스란히 독차지하였다.


원정이후 루시와 헝가리


이 원정을 통해 루시 지역과 헝가리 지역 전토가 폐허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는 과장이다. 러시아의 경우 실제로 많은 도시들은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다. 소수의 도시들만이 몽골의 공격을 받았다. 카르피니가 기록한 키예프의 참상이 마치 러시아 전역에서 벌어진양 여겨지지만, 스몰렌스크나 노브고로드는 몽골에게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았고, 사실 카르피니가 키예프에 대해 사용한 ‘엄청난’ 같은 수식어 따위들은 아무 의미도 없는 과장일 뿐이다. 러시아가 그리 참혹하게 당했다면 알렉산드르 네브스키가 1240년, 네바 강변에서 스웨덴 군대를, 또 1241년 독일기사단을 격파할 수 있었을까?

마찬가지로 헝가리 역시 그 피해가 과장되었다. 헝가리의 인구 추정치는 1240년 경 120만 ~ 135만, 1242년 102만 ~ 122만 명이다. 피해가 생각만큼 크지도 않으며, 그나마도 이 피해가 몽골에 의한 것인지, 그 이후 벨러 4세와 킵차크 난민들 사이의 갈등으로 인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참고문헌


- 스기야마 마사아키, 『몽골 세계제국』, 임대희·김장구·양영우 옮김, 신서원, 1999.
- 김호동, “구육(정종)과 그의 시대,” 『근세 동아시아의 국가와 사회』, 서울대학교 동양사학연구실 엮음, 지식산업사, 1998, 87 ~ 132쪽.
- 김호동, “해설,” 『몽골 제국 기행』, 까치, 2015, 9 ~ 25쪽.
- István Vásáry, “The Jochid realm: the western steppe and Eastern Europe,” The Cambridge History of Inner Asia: The Chinggisid Age, Peter B. Golden, Nicola di Cosmo & Allen Frank Eds.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9, pp. 67 – 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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