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은말삼인 중 한 명
본명은 서여(胥余)이며, 상나라 28대왕 문정(태정)의 아들이자 29대왕 제을의 아우, 상나라 마지막 왕 주의 숙부이다.
기자는 기(箕, 지금의 허난성 서화(西華)현) 지방의 땅을 봉지로 받았고, 작위가 자(子)이기 때문에 기자(箕子)라고 일컫는다. 벼슬은 태사(太師, 황제의 스승)를 지냈으며 상(은)나라의 운이 다하자 조선으로 가서 동방군자국(東方君子國)을 건립하였는데, 그 유풍이 지금까지 전해진다.
기자는 미자, 비간과 더불어 ‘은말삼인(殷末三仁)’으로 불린다
2. 시대상황
1) 상주혁명
상의 마지막 임금 주는 힘과 총명함을 동시에 갖춘 대단한 통치자였다. 하지만 자만심이 너무 강하여 나라를 독단적으로 통치하고 주색을 지나치게 밝히는 등 백성들로부터 많은 원성을 샀다. 주왕의 또 다른 친척이었던 비간은 “군주가 과실이 있는데도 죽을힘을 다해 직언하지 않는다면, 백성들에게만 죄가 있다는 말밖에 더 되겠느냐?”며 주왕에게 달려가 직언했다. 주왕은 크게 성을 내며 “성인의 심장에는 구멍이 일곱 개나 된다던데 정말 그럴까?”라며 비간을 죽여 심장을 갈랐다.
주왕의 배다른 형이었던 미자는 이런 동생의 모습에 놀라 태사(太師) · 소사(小師) 등과 함께 제기(祭器, 제사에 쓰이는 각종 물품)를 들고 주(周)나라로 도망쳐버렸다. 주나라의 무왕은 이런 상나라 내부 상황을 속속들이 파악하고는 군대를 일으켜 일거에 주왕을 물리쳤고, 주왕은 타오르는 불길에 뛰어들어 xx했다. 이로써 상나라가 망하고 주나라가 들어서는 전격적인 정권교체(상주혁명)가 이루어졌다.
2) 기자의 견미지저
상나라가 점점 멸망으로 치닫고 있다는 것을 진작에 감지한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주왕의 숙부였던 기자였다. 기자는 주왕이 상아 젓가락을 사용하는 것을 보고 그가 장차 더욱더 사치와 향락에 빠져 나라를 망칠 것이라고 예견했다. 여기서 ‘미미한 것을 보고 앞으로 드러날 것을 안다’는 ‘견미지저’라는 고사성어가 나왔다.
사마천은 『사기』 「송미자세가」에서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주 임금이 상아 젓가락을 사용하기 시작하자 기자는 ‘상아 젓가락을 쓰기 시작한 이상 이제 옥잔을 사용할 것이 틀림없고, 옥잔을 쓰면 곧 먼 지방에서 올라온 귀하고 기이한 기물들을 사용하려 들 것이다. 앞으로 수레와 말 그리고 궁실의 사치스러움도 이렇게 시작되어 진정시킬 수 없을 것이다’라며 탄식했다.”
3. 기자조선 건국
기자의 예견대로 주왕은 날이 갈수록 음탕한 생활에 빠졌다. 기자가 충고했으나 듣지 않았다. 주위에서는 기자에게 차라리 떠나는 것이 낫지 않겠냐고 했으나 기자는 “신하된 자가 자신의 충고를 듣지 않는다 하여 떠나버리는 것은 군주의 잘못을 부추기는 꼴이 되고, 나 자신도 백성들의 기쁨을 뺏게 되니 차마 그럴 수 없다”며 머리를 풀어헤치고 미친 척하다가 잡혀서 노예가 되었다.
미친 척하다가 감옥에 갇혀서 화를 피한 기자는 훗날 주 무왕이 은나라를 정벌하여 멸망시키고 주나라를 건국한 다음에야 감옥에서 석방되었다.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고 그에게 통치의 이치를 묻자, 기자는 ‘홍범구주’로 통치의 요체를 설파했는데 이것이 『상서』 「홍범(洪範)」 편이라고 한다.
한편, 기자는 망국의 한을 담은 <맥수가(麥秀歌)>를 지었다고 전한다.
기자가 조선에 봉해졌다는 기록 때문에 기자조선의 실체에 관해 오랫동안 논쟁이 끊이지 않았고, 이 문제는 아직도 진행형이다. 특히 일본 식민사학에 의해 기자조선이 철저하게 부정됨으로써 고조선 연구의 한 고리를 잃은 측면도 있어, 향후 이 문제에 관한 논의가 어떻게 진행되느냐에 따라 고조선 문제에 대한 논의도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4. 관련 유적
중국 내에 기자와 관련한 유적지가 몇 군데 전해오기는 하지만 특별한 것은 없다. 평양에 기자의 무덤이 남아 있다는 기록이 『고려사』 등에 있는데, 고려 때부터 나타난 기자 숭배에 따른 것으로 본다.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참고문헌
- 『사기(史記)』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 「은본기(殷本紀)」
- 『상서(尙書)』 「홍범(洪範)」
- 『논어(論語)』
- 『성찰』, 김영수, 위즈덤하우스,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