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한 백이숙제 고사의 주인공인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왕위계승권을 지닌 고죽국孤竹國의 왕자였다는 것은 모든 기록의 공통점입니다.
다만, 고죽국孤竹國의 지리적위치와 시기에 대해서는 민족사학에서는 기존 견해와 다른데 그 강역상의 위치에 대한 견해차이는 백이와 숙제가 살던 역사적 시기를 잘못 비정한 것에 있지 않는가 생각되어 새로운 견해를 적어보고자 합니다.
단군세기는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등장한 역사적 시기를 기존의 사서와는 다르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단군세기] 21세 단군 소태(재위 52년간) 52년(BC1286)에 우현왕 고등이 죽고 그의 손자 색불루가 우현왕이 되었다. 임금이 나라안을 두루 살피다가 남쪽 해성에 이르러 그곳 노인들과 함께 하늘에 제사지내고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이어 곧 오가를 불러 이들과 임금자리를 물려주는 일을 의논하고, 늙어서 부지런히 일할 수 없다고 하며 나라 다스리는 일을 서우여에게 맡기려고 했다.... 우현왕이 이말을 듣고 사람을 보내어 임금의 결정을 중지하게 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듣지 않았다. 이에 우현왕이 좌우신하와 사냥꾼 수천을 거느리고 부여의 신궁에서 즉위하고 말았다. 임금이 할 수 없이 옥책국보를 우현왕에게 전하고 서우여를 폐하여 서민이 되게하고는 아사달에 숨어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이 해에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도 고죽군孤竹君의 아들로서 나라를 버리고 도망하여 동쪽평원의 하수변에서 힘써 농사지으며 스스로 살아갔다. (海는 바다가 아닌 평원으로 풀이) |
즉, 단군세기는 백이,숙제가 은왕조를 멸망시킨 주(周)의 통치가 아닌 무력과 위압으로 조선을 무너뜨리고 진국(辰國)-이칭 단군조선-을 세운 색불루를 거부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 기록을 따른다면 우리가 현재 알고있는 백이숙제에 대한 고사성어는 지나인들이 조선과 진국(辰國)의 교체기에 일어난 일을 모방하여 은-주 교체기로 배경을 바꾸어 꾸민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조선과 진국(辰國)교체기에 마한은 색불루에 승복하지 않았으며 마한은 새로 등극한 색불루단군과 전쟁을 벌였으나 패전하였고 번한은 이미 소태단군때 색불루의 할아버지인 우현왕 고등의 부하 상장 서여에 의해 번한왕 소정이 피살되어 굴복하였습니다.
그외에도 소태단군이 양위하고자 했었던 서우여도 이에 항거하여 군대를 일으켰으므로 당시 색불루의 진국(辰國)이라는 새왕조에 반대하는 세력이 많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 거수국이었던 고죽국孤竹國의 군주인 고죽군孤竹君은 천하를 움켜쥐고 있던 색불루를 단군으로 인정하고 대세를 따랐던 것으로 보이며 그의 아들들인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역사상 처음인 무력에 의한 승계를 옳지 않게 여기어 나라를 버리고 은거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지나인들이 말하는 주왕조 성립시기는 BC1122년으로 25세 단군 솔나 재위년간에 해당합니다.
대략,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조선의 소태단군말엽의 사람이라면 주왕조 성립 160여년전의 인물이 됩니다.
그런데, 왜 고죽국孤竹國이 인용되었는지 생각해보면 주왕조때에도 고죽국이 강성하였지만 태백일사의 기록에서는 조선의 소태단군과 진국(辰國)의 색불루단군 통치시기에도 거수국인 고죽국孤竹國은 상당히 강성하여져 남국과 함께 은나라국경에까지 밀고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백이-숙제고사도 주왕조 초기에도 강성하였던 고죽국孤竹國에서 은나라 후기인 조선-진국 교체기에 일어났던 인구에 회자되던 유명한 이야기를 지나인들이 은말주초의 고사로 끌어와 차용하여 사용한 것이 아닌지 의문이 듭니다.
당시의 변방세력 은의 교체기인 은말주초라면 고죽국孤竹國이 은왕조영향을 받던 나라로 볼 수도 있겠지만 백이-숙제가 살던 때를 시기적으로 이보다 오래전인 조선-진국의 당대 천하중심세력의 교체기로 본다면 고죽국孤竹國의 위치에 대한 이해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http://www.coo2.net 솟대님 글
http://blog.naver.com/knightblack/100308332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