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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9-11 16:16
[기타] 치우
 글쓴이 : 관심병자
조회 : 2,059  

1. 인물 개요

전설 속 동방 구려족()의 수령으로 ‘양호(, 태호 복희씨소호씨)’ 집단의 중요한 구성원이었다. 그의 활동 중심은 지금의 산둥성 · 허난성 · 허베이성 경계 지대로 알려져 있다. 형제 81명이 모두 짐승의 몸뚱이에 사람 말을 하는데, 머리는 동()이고 얼굴은 쇠였다고 한다. 이런 형상을 하고 어딜 가나 싸움을 일으켰다고 한다.

치우는 성질이 강하고 사나워 용맹하게 싸움을 잘 했다고 하는데, 신화전설 시대의 가장 위대한 제왕이자 중화인의 선조로 꼽히는 황제와 천하를 다툰 동이족의 대표적인 수령이었다. 그가 황제와 벌인 탁록 전투는 신화시대 최대의 전투이자 전쟁으로 꼽힌다.

2. 황제 부락과의 전투(탁록 전투)

구려족은 원래 중국 남방에 거주하다 일찌감치 중원 지구로 진입하여 중원 쪽으로 세력을 뻗치고 있던 염제(, 신농씨족과 부딪쳤다. 쌍방은 오랫동안 싸웠는데, 치우가 구려족을 이끌고 염제족을 물리쳤다. 염제는 북쪽 탁록(지금의 허베이성 쭈오루 남쪽) 일대로 도망쳤다. 그 뒤 염제족은 황제족과 연합하여 구려족에 대항했고, 마침내 탁록에서의 전쟁을 통해 치우를 물리쳤다. 남은 치우족은 염제나 황제 두 부족에 편입되거나 남쪽으로 내려가 묘만()족과 합류하기도 했다.

이 전쟁에서 치우는 짙은 안개를 일으켜 황제 군대가 방향을 잃게 만들어 기선을 제압하기도 했지만, 후에 황제가 지남거를 발명하여 전세를 만회하고 치우를 잡아 죽였다고 한다.

치우는 훗날 전쟁의 신() 내지 군대의 신으로 받들어졌는데, 그의 강인한 성격과 용맹함 때문이었다.


3. 탁록 전투의 의의와 과정

‘탁록 전투’는 『사기()』의 첫 권인 「오제본기」에 기록된 중국사 최초의 전투라 할 수 있다. 기타 다른 기록들을 참고로 하여 ‘탁록 전투’의 과정을 개괄하면 이렇다.

상고시대 중국 황하 유역과 장강 유역에는 많은 부락과 부락연맹이 거주하고 있었다. 황하 상류와 중류 일대에는 황제 부락이나 염제 부락과 같은 이른바 화하() 부락연맹이 거주하고 있었고, 황하 하류에는 태호, 소호, 구려() 등과 같은 부락이 동이() 연맹을 이루며 거주하고 있었으며, 장강 중류 지역에는 묘만() 연맹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 부락 사이에는 끊임없이 전쟁이 벌어졌는데, 이는 인류 문명이 원시사회에서 점점 계급사회로 진입해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이 전쟁들 중에서 화하 부락연맹의 수령인 황제와 구려 부락연맹의 수령인 치우 사이에 벌어졌던 ‘탁록 전투’가 후대에 큰 영향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중화민족의 형성단계에 있어서 기본적인 틀을 결정했다.


구려 부락연맹은 원래 장강 유역에 있었으나 점점 황하 하류 일대로 세력을 넓혀갔는데, 구려 부락이 남에서 북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염제 부락과 충돌하여 중원에서 끊임없이 전쟁을 치렀다. 황하 유역의 기름진 땅을 빼앗기 위한 전쟁이었지만 결과는 늘 염제의 패배였다. 이로써 염제는 토지를 빼앗지도 못하고 부락 소속의 소수민족마저 치우에게 빼앗겼다. 염제는 치우를 물리칠 능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하여 강대한 황제 부락에게 도움을 청했다. 황제는 치우의 세력 확장에 진작부터 경계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염제 부락의 요청을 받아들여 공동으로 치우에 대항하기로 했다.


전설에 따르면 치우에게는 81명의 형제가 있었다고 한다. 이 형제들은 맹수의 몸뚱이에 모래와 돌을 먹고 바닷물을 마시며 살았다. 사납고 용맹하기가 이를 데 없었으며, 모두가 각자의 부락을 이끌고 있었다. 이들은 칼과 창, 활과 쇠뇌 등과 같은 병기를 만들어 늘 다른 부락을 침략했다. 몇 번의 전쟁에서 염제를 물리친 뒤 치우는 그 승기를 몰아 형제들과 염제 부락을 추격하여 황제 땅에까지 들어왔다. 황제는 곧 각지의 병사를 거느리고 치우에 맞서 싸웠다. 쌍방은 쭈오루(탁록)에서 맞닥뜨려 대결전을 벌였다.

황제는 평소 곰, 호랑이, 이리 등과 같은 야수를 기르고 있었는데, 전투에서 이들 맹수를 풀어 전투를 돕게 했다. 치우의 병사들이 사납고 용맹하긴 했지만 맹수를 앞세운 황제의 군대를 당하지 못했고 허겁지겁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황제는 부대를 이끌고 치우 군대를 뒤쫓았다. 그런데 이때 갑자기 천지가 암흑으로 변하고 안개가 짙게 끼더니 광풍이 몰아치고 천둥과 번개가 몰려와 한 치 앞도 분간할 수가 없었다. 치우가 ‘풍백()과 우사()’의 도움을 청해 황제가 치우를 추격하지 못하게 하늘의 기상을 바꾼 것이었다. 황제도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없어 법력을 가진 자들을 불러 비바람을 멈추게 했다. 순식간에 비바람이 멎고 날이 개자 황제는 다시 군대를 정돈하여 마침내 치우를 물리쳤다.


치우를 물리친 다음 황제와 화하 부락연맹은 광대한 중원지구를 차지했고, 이 소식을 들은 각지의 부락들이 앞을 다투어 황제에게 귀순했다. 황제는 수많은 부락의 지지를 바탕으로 보다 광범위한 중원지구 부락연맹의 수령이 되었다.

황제와 치우의 전쟁은 중화민족의 형성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중국의 유명한 역사학자인 부사년() 선생은 상고시대 오랜 세월을 거친 중화민족의 형성과정을 ‘이하동서설(西)’로 요약한 바 있다. 말하자면 동방의 이족과 서방의 화하족이 끊임없이 충돌하고 융합하면서 오늘날 중화민족을 형성했다는 것이다.

4. 치우 관련 유적 일람표

치우성
치우가 쌓은 성으로 전해진다. 서북 황제성에서 3km 떨어져 있다.
허베이성 쭈오루현 동남 33km 용왕당촌 남쪽 소재
관련문헌: <수경주> 인용 <위토지기>

치우채()
일명 ‘치우삼병채’ 성 담장 유지. 치우가 황제와 싸울 때 군대를 주둔시켰다는 곳.
허베이성 쭈오루현 동남 용왕당촌 서쪽 언덕 소재

치우천()
치우가 황제와 싸울 때 마셨다는 우물. 직경 7m의 돌로 쌓은 연못으로 이 물은 북으로 흘러 판청과 합류한 뒤 상건하로 흘러든다.
동남 용왕당촌 소재
관련문헌: <수경주>, <진태강 지리기>

참고문헌

  • <사기(史記)>
  • <이하동서설(夷夏東西說)>(부사년傅斯年)
  • <오제시대연구(五帝時代硏究)>(중주고적출판사;中州古籍出版社, 2005년)
  • <중국대백과전서(역사)>(중국대백과전서출판사, 1992년)
  • <중국대백과전서(고고학)>(중국대백과전서출판사, 1986년)
  • <중국고대신화>(원가;袁珂, 화하출판사;華夏出版社, 2013년)

    [네이버 지식백과] 치우 [蚩尤, Chī yóu] (중국인물사전, 한국인문고전연구소)



1. 개요

치우천왕()은 환인이 다스리던 환국의 뒤를 이어 환웅천왕이 건국했다고 하는 배달국()의 제14대 천왕으로서, 『한단고기()』 삼성기편에 의하면 B.C. 2707년에 즉위하여 109년간 나라를 통치했던 왕이라고 한다. 다른 이름으로 자오지()환웅이라고도 한다. 삼성기 하편에 의하면 그는 신처럼 용맹이 뛰어났고 구리로 된 머리와 쇠로 된 이마를 하고 큰 안개를 일으키며 세상을 다스렸다고 전해진다. 광석을 캐어 철을 주조하는 병기 제작술이 뛰어나 세상 사람들은 치우천왕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치우란 세속의 말로 우레와 비를 크게 만들어 산과 강을 바꾼다는 뜻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단고기』는 치우천왕이 중국의 황제와 73회 싸워 다 이겼으나, 74회 탁록 전쟁 때 탁록에서 전사했다고 전한다. 치우천황은 도깨비 부대를 이끌었고, 황제는 귀신부대를 이끌었다. 치우천왕을 도깨비라고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황제는 싸움에서 이기자 치우천왕의 시신을 다섯 토막 내어 다섯 방위에 각각 묻었다. 무속에서 굿을 할 때 군웅거리에서 청제, 적제, 황제, 백제, 흑제의 5제를 청하는 것은 5방위에 흩어져 있는 치우천왕의 신명을 불러 모으는 것이다.
치우천왕은 군웅신으로 무속의 병굿에서 오방신은 바로 치우천왕이고, 치우천왕이 백마신장인 증여곤에게 명하여 귀신을 잡아들이는데 귀신은 바로 그의 적인 황제의 별신이 된다. 치우의 생김새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가 여덟 개의 팔 다리에 둘 이상의 머리를 지녔다는 설도 있고 사람의 몸, 소의 발굽에 네 개의 눈과 여섯 개의 손을 지녔다는 설도 있다. 또 그의 귀 밑 털이 칼날과 같고 머리에는 뿔이 돋았다는 설도 있다.

2. 『한단고기()』

『한단고기』는 평안북도 선천 출신의 계연수()가 1911년 초기에 편집한 책으로, 계연수로부터 1980년에 공개하라는 말을 들었다는 제자 이유립()이 1979년에 영인하였다. 이 책을 처음 번역한 사람은 일본인 카시마 노보루[]이다.
내용은 삼성기(), 단군세기(), 북부여기(), 태백일사()로 구성되어 있는데, 고대 우리나라의 역사, 신앙, 풍습, 정치,·경제, 예술,·철학 등에 대한 풍부한 자료가 담겨 있다.
상하 2편으로 이루어진 삼성기()는 신라의 승려인 안함로()와 행적을 알 수 없는 원동중()이 쓴 것이다. 환인(), 환웅(), 단군()을 중심으로 민족의 기원부터 단군조선의 역사를 간략히 서술하였는데, 1421년에 세조가 전국에 수집 명령을 내린 삼성기와 책명이 일치한다. 한인으로부터 7세 단인까지 3301년의 역사와 신시시대의 한웅으로부터 18세 단웅까지 1565년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단군세기는 1363년(공민왕 12) 문정공 이암이 전했다는 내용으로,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이름을 조선이라 칭한 단군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1대 단군 왕검부터 47대 단군 고열가까지 2096년에 걸친 단군 조선의 시기별 역사를 편년체로 싣고 있다.
북부여기는 고려 말의 학자 휴애거사() 범장()이 전했다는 것으로, 상·하· 가섭원부여로 구성되어있는데, 시조 해모수에서부터 6세 고무서까지의 204년과 가섭원부여 108년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단군세기의 속편이다.
태백일사는 이암의 현손이자 조선 중기의 학자인 이맥()이 편찬했는데, 한국()· 신시시대, 고려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삼신오제()를 중심으로 한 천지만물의 생성으로부터 단군과 광명숭배, 3조선, 단군 경전, 고구려· 발해· 고려의 대외 관계사를 서술하고 있다. 전체적인 내용은 단군 이래의 기층문화에 뿌리를 둔 고유 신앙을 정신적 기반으로 민족의 자주성과 위대함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서술되었다. 또한 『천부경()』과 『삼일신고()』가 실려 있다.
태백일사에는 1923년에 중국 뤄양(낙양())에서 천남생() 묘지가 발견된 후에야 알려진 연개소문 조부의 이름 자유()가 실려 있다. 나아가 해방 이후에 이루어진『단기고사()』의 영향까지 받고 있는 점을 근거로 이 책을 계승했다는 이유립이 편찬자이며 40년대 후반에 완성되었을 것이라고 지적되기도 하였다.

3. 중국의 치우천왕

중국인 학자 왕동령이 저술한 『중국민족사()』에 의하면 4천년 전 현재의 호북성, 호남성, 강서성 등지를 이미 묘족들이 점령하고 있었으며 중국의 한족()이 들어오면서 차츰 이들과 접촉하게 되었는데, 이 민족의 나라 이름은 구려()이며, 군주는 치우()라 기술되어 있다. 중국의 유명한 역사서인『사기()』를 당나라의 장수절이 주해한 책에는 '구려의 군주는 치우이다' 라고 되어 있고, 같은 『사기』를 송나라의 배인이라는 인물이 주해한 책에 따르면 '치우는 옛 이다'라고 하여 동이족의 제왕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치우천왕은 고대 중원에서 군신(), 병주()로 추앙되었다고 하는데, 특히 치우의 능에서 붉은 연기 같은 것이 깃발처럼 휘날리면 반드시 전쟁이 일어날 조짐으로 믿었다고 한다. 『사기』봉선서에 의하면 한나라를 세운 유방()은 전쟁에 나아가기에 앞서 언제나 치우에게 제를 올린 다음에 출전하였다고 하며, 그 후 한나라를 세운 뒤에는 치우의 사당까지 세웠다고 한다.
대만의 역사학자 원가()는 그의 『중국고대신화()』에서 고전에 의하면 치우는 72인의 형제가 있었으며, 황제가 여러 차례 협상하려 하였으나 치우가 거절하였다고 썼다. 치우는 막강한 군세를 가지고 있어서 황제군은 전투마다 참패를 거듭하였고, 한번은 황제의 군대가 치우천황군의 철통같은 포위망을 뚫을 수가 없었는데 때마침 풍후()가 만든 지남거()가 계속 남쪽을 가리키므로 치우가 뿌려놓은 유황 안개 속에서 방향을 잃지 않고 포위망을 뚫고 나올 수가 있었다는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4. 치우천왕 관련 설화

4.1 『한단고기(桓檀古記)』의 ‘황제와 싸운 치우’

황제가 점차 세력을 키워가고 있을 무렵 신들의 세계는 이미 황제의 선배격인 염제() 신농()이 지배하고 있었다.
신들의 세계에서 신농과 황제는 결코 공존할 수 없는 대립적인 권능의 소유자들이었다. 즉 신농은 태양신으로서 불을 통해 능력을 발휘함에 반해, 황제는 뇌우()의 신으로서 물로 세상을 다스리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황제는 군사를 일으켜 신농에게 도전하였고 양군은 지금의 하북()성에 위치한 판천()의 들에서 격돌하였다. 이 전투에서 황제는 호랑이, 표범, 곰 등을 길들여서 선봉으로 삼고 독수리, 솔개, 매 등을 깃발처럼 날려 신농군을 공격하였다.
세 차례의 전투에서 황제군은 모두 승리하였고, 신농은 패배하여 남방으로 쫓겨 갔다. 사마천()의 『사기()』와 가의()의 『신서()』등 한() 나라 때에 지어진 책들은 이 전쟁을 두고 신농이 제후들을 침략하고 도리에 어긋난 일을 많이 했기에 황제가 징벌한 것이라는 식으로 서술하고 있다.
신농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판천의 전투는 오히려 훨씬 더 큰 전쟁의 서곡에 불과했다. 그것은 신농의 용맹한 신하 치우()가 등장하였기 때문이었다.
치우는 지금의 산동성()일대에 거주하던 구려()라는 신족()의 우두머리였다. 그는 형제가 많아 72명이라고도 하고 81명이라고도 하는데 그들은 모두 구리로 된 머리에 쇠로 된 이마를 하고 모래와 돌을 밥으로 먹었다고 한다. 아마 그들의 용감하고 강인한 성품을 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치우의 생김새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가 여덟 개의 팔 다리에 둘 이상의 머리를 지녔다는 설도 있고 사람의 몸, 소의 발굽에 네 개의 눈과 여섯 개의 손을 지녔다는 설도 있다. 또 그의 귀 밑 털이 칼날과 같고 머리에는 뿔이 돋았다는 설도 있다. 소의 발굽을 했다거나 머리에 뿔이 돋았다는 설은 신농이 소의 머리에 사람의 몸이었음을 생각할 때 그가 신농의 혈통임을 암시한다.
치우는 훌륭한 무기제작 능력을 갖고 있었다. 그의 일족은 갈로산()과 옹호산()이라는 곳에서 구리를 캐서 칼과 창 등의 무기를 많이 만들었고 무장한 군사력으로 신농 신족 내에서 가장 유력한 집단이 된다. 어떤 학자들은 치우 일족의 이러한 기능에 주목하여 그들이 고대 중국의 변방에 살던 대장장이 집단이고 치우가 우두머리 무당일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당시 신농은 이미 은퇴를 했고 그 후손인 유망()이라는 신이 신족을 다스리고 있었다. 일설에 의하면 치우의 세력이 커져서 유망의 자리를 넘보게 되고 결국 유망이 패하여 황제에게 도움을 청하면서 치우와 황제간의 전쟁이 벌어졌다고도 한다.
치우는 전군을 동원하여 황제의 영역인 탁록으로 진격하였다. 탁록은 지난번 황제와 신농이 싸웠던 판천 근처의 땅이다.
치우의 군대에는 앞서 말한 구리 머리에 쇠 이마를 한 72명 혹은 81명의 용맹한 형제들과 바람의 신 풍백(), 비의 신 우사() 그리고 사람의 얼굴에 짐승의 몸을 하고 다리가 넷인 이매 등의 도깨비 무리가 대거 참여하여 사나운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 하였다. 황제 측에서도 호랑이, 표범, 곰, 독수리, 솔개, 매 등의 맹금() 군단과 충직한 신하인 날개 돋은 용인 응룡(), 황제의 딸이자 가뭄의 여신인 발() 등이 군대를 이루어 치우군에 대항하였다.
전세는 처음부터 황제군에게 불리하였다. 일설에는 황제가 치우와의 처음 아홉 번의 전투에서 모두 패했다고 한다.
그러나 황제는 마지막 몇 차례의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치우를 완전히 제압할 수 있었다. 계속 치우군에게 밀리던 황제는 응룡을 시켜 천상에 엄청난 양의 물을 모아 두었다가 치우군에게 퍼부을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 계획을 미리 알아 챈 치우는 풍백과 우사에게 요청하여 그 물을 황제군에게 쏟아 붓도록 하였다. 황제군 위로 갑자기 폭풍우가 불어 닥쳐 병사들이 떠내려가고 우왕좌왕 혼란에 빠지자 황제는 딸인 발을 불러 지상에 내려오게 했다. 가뭄의 신이 나타나자 폭풍우는 곧 개었고 황제군은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도깨비 군단이 쳐들어 왔다. 이들은 신음하는 듯한 이상한 소리를 내어 황제군을 어지럽게 했다. 황제는 이에 호각을 크게 불어용의 울음소리를 내게 하였더니 도깨비 군단이 놀라 달아났다.
황제는 호각 외에도 신기한 북을 만들어 자기편의 사기를 돋우고 치우군의 혼을 빼놓았다. 그는 외다리에 천둥소리를 내는 기()라는 괴물을 잡아 그 가죽으로 북을 만들고 뇌택()이라는 호수 가에 살던 뇌수()의 뼈를 뽑아 북채를 만들었다. 그리고 북을 두들겼더니 그 소리가 어찌나 우렁찼던지 오백리 밖에서도 들렸다고 한다.
여러 번의 전투에서 손실을 본 치우는 이번에는 큰 안개를 일으켜 황제군으로 하여금 갈피를 못 잡게 했다. 황제는 이에 신하 풍후()로 하여금 북두칠성을 본 따 지남거()라는 수레를 만들게 하였다. 이 수레는 북두칠성과는 정반대로 항상 남쪽 방향을 가리키게 되어 있었다. 황제군은 지남거에 의지해 방향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게 되어 오히려 치우군을 격파할 수 있었다.
그토록 용감했던 치우 형제들도 하나 둘, 전사하고 치우만이 혼자 싸우다가 결국 힘이 딸려 응룡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황제는 치우를 형틀에 채운 뒤 즉각 처형하였다. 이로써 중국 신화에서 보기 드문 큰 싸움인 황제와 치우 간의 전쟁은 일단락되었다.
치우는 목이 잘려 몸과 목이 따로 묻혔고 신농과 치우의 신족은 죽거나 변방으로 쫓겨 갔다. 그리고 황제는 이제 명실 공히 신들의 세계의 주인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황제와 치우의 전쟁신화는 한() 나라 때에 이르러 중국민족의 정통성과 권위를 밑받침하는 역사 이야기로 탈바꿈 하였다. 즉 중국민족의 조상인 황제가 야만족인 치우를 물리침으로써 문명의 제국인 중국이 성립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죽은 치우는 얼마 안 있어 전쟁의 신으로 부활하였다. 그의 강렬한 투쟁 의욕은 여전히 살아 있어서 전쟁을 치르는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숱한 전쟁을 통해 한() 왕조를 건설하였던 고조() 유방() 조차도 치우의 힘을 빌기 위해 제사를 드렸다 한다.
치우는 또한 은() 나라 때에 도철이라는 무서운 괴물의 모습으로 청동기에 새겨져 귀신이나 사악한 기운을 쫓아내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치우의 이러한 형상과 역할은 신라 시대의 도깨비 모습을 새긴 귀면와()에까지 이어진다.

4.2 치우의 투혼과 그 후계자들

치우는 강인한 신이어서 처형당한 이후에도, 몸은 비록 죽었어도 기운은 살아 있어 여러 가지 기이한 현상으로 살아 있음을 입증하였다.
그러한 현상은 그가 사로잡혀 처형당할 무렵부터 일어났다. 황제는 치우를 사로잡았을 때 움직이지 못하도록 손과 발에 수갑과 족쇄를 꽉 채웠다. 그리고 치우의 목을 자르고 난 후 피 묻은 수갑과 족쇄를 풀어 내버렸는데 그것들이 나무로 변해버렸다. 그 나무의 잎사귀는 핏빛처럼 붉어서 치우의 처참한 죽음을 말해주는 듯 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단풍나무는 이렇게 치우의 넋이 깃들어 생긴 것이라는 말도 있다.
치우의 목이 잘린 지역은 몸이 분해 되었다고 해서 해현()이라고 부르는데 이 해현에 있는 해지()라는 호수는 물 빛깔이 붉다. 그것은 치우가 목이 잘릴 때 흘린 피 때문이라고 한다.
치우의 잘린 목과 몸체는 그의 본거지였던 산둥 땅의 수장현()과 거야현() 두 지역에 따로 묻혔다. 『한서지리지()』에 따르면, 치우의 무덤은 그 높이가 일곱 자라고 한다. 진()나라 한()나라 때 사람들이 시월이 오면 여기 치우무덤에 와서 제사를 지내면, 그 때 그곳에서 붉은 기운이 솟아나는데, 그것이 마치 붉은 비단 같아서 사람들이 그것을 치우깃발()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붉은 안개 같은 기운은 붉은 단풍, 붉은 호수와 마찬가지로 치우가 죽을 때 흘린 피의 변형된 모습이지만 결국 이러한 모습들은 죽어서도 굴복하지 않는 치우의 기개와 투쟁 정신을 표현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이 때문에 치우는 고향인 산동에서 병주()로 숭배된다. 병주는 곧 군대와 전쟁의 신이다. 무속의 세계에서는 한()이 깊을수록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진천문지()』에 따르면, 치우깃발은 앞쪽이 꼬리별처럼 길고, 뒤쪽은 꼬부라지게 보이는데, 그 깃발이 보이는 바로 그 밑에 병란이 있게 된다고 한다. 이것은 치우천왕이 하늘위로 올라간 별이 되었기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라고 한다.
『한서병장도()』에 따르면, 치우기를 만들어서 그것을 중국군기()로 삼았던 일이 있었다고 한다. 머리가 매장된 수장현의 주민들은 해마다 10월이 되면 이 용맹한 신의 무덤에 제사를 지냈다.
치우 일족이 패망한 이후에도 신농의 자손은 중국 도처에 있어서 치우 말고도 수많은 신들이 복수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 중의 하나인 형천()은 본래 신농의 신하로서 음악을 담당하던 신이라는 것 외에 그의 신상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신농에게 무척 충성스러울 뿐만 아니라 끓는 피의 기질을 지녔던 신이었던 듯 하다. 치우가 실패하자 그는 다시 흩어진 신족()을 규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평소 잘 쓰는 무기인 도끼를 휘두르며 황제에게 덤벼들었다. 황제 역시 응수하여 두 신은 불꽃 튀는 대결을 벌였다. 교봉한지 얼마 안 되어 황제의 칼이 번득이더니 형천의 목이 날아갔다. 형천 역시 황제의 적수는 못 되었던 것이다.
황제는 형천의 목을 곧 땅에다 묻었다. 목이 몸에 다시 붙어 살아나기라도 하면 큰일이기 때문이었다. 목이 잘린 형천은 곧 쓰러질 것 같았는데, 무슨 조화인지 형천의 젖가슴이 눈으로 변하고 배꼽이 입으로 변하더니 그는 도끼와 방패를 들고 춤을 추기 시작하였다. 형천은 비록 목이 잘렸어도 황제에 대한 증오와 투쟁의 의지가 조금도 식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더욱 맹렬한 기세로 타올라서 마침내 자신의 몸을 변화시키고만 것이다.
황제는 결국 치우와 형천 등 크고 작은 반란의 움직임을 제압하고 신계()의 패권을 거머쥐었다. 이후 황제의 치세 동안 더 이상 시끄러운 일은 없었다.
그런데 황제가 중앙의 신의 지위를 잠시 증손자인 전욱에게 물려주고 쉬고 있을 때 큰 사건이 발생한다. 신농의 후손인 공공()이 치우와 형천의 뒤를 이어 반란을 일으켰다.
공공은 본래 수신()으로 서북방에서 세력을 키워나가다가 전욱이 무리한 정사를 펼칠 뿐 아니라 과거 신농 계통의 신들을 탄압하는 것을 보고 최고신에 도전할 마음을 품게 되었다. 마침내 공공은 아홉 개의 사람 머리를 지닌 구렁이인 신하 상류() 등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전욱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전욱은 비록 폭정은 했지만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었다. 그는 황제로부터 물려받은 강한 군사력을 아직 보유하고 있었다.
전욱군과 공공군은 맞붙었고 공공군이 점차 밀려나기 시작하였다. 점차 패색이 짙어지자 성미 급한 공공은 초조해졌다. 그는 절박한 심정으로 하늘을 지탱하고 있던 큰 산을 머리로 받아버렸다. ‘쿵’하는 굉음과 함께 기둥 노릇하던 산의 허리가 꺾어져서 천하의 서북쪽이 올라가고 동남쪽이 내려앉아 버렸다. 이 때부터 이 산은 온전하지 않게 되었다고 해서 부주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부주산의 허리가 꺾어짐으로 인해 세계는 한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즉 서북쪽이 높고 동남쪽이 낮아진 것이다. 그래서 중국의 지형을 보면 모든 강들이 지대가 높은 서북 지방에서 흘러나와 동남쪽으로 향해 흘러간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공공의 전쟁 신화는 겉으로는 신들의 다툼이지만 속으로는 중국의 지형적 특성을 설명해 주는 기원신화의 성격을 띠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전쟁신화는 중국의 신계()를 크게 양분하였던 황제계와 신농계 신들간의 갈등의 표현이었다. 아울러 이 두 가지 이질적인 세력의 구조는 중국인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어 이후 역사 시대에 들어와서도 중국인의 사유방식을 지배하였다. 그것은 질서와 혼돈, 중심과 주변, 문명과 야만의 구분법이었다.

참고문헌 및 도판

▒ 참고 문헌
김광주,「」, 『 』, 지식산업사, 1988.
박용숙,『지중해 문명과 단군조선』, 집문당, 1996.
송호수,『한겨레의 뿌리 길』, 한터, 2000.
이우혁,『치우천왕기』, 들녘, 2003.
,「」,『 』제 4호, 1994.
임승국,『한단고기』, 정신세계사, 1986.

[네이버 지식백과] 치우천왕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오방대제), 2002., 한국콘텐츠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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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좀와라 17-09-11 20:17
   
저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치우에 관한 것은 부도지의 내용이 환단고기의 내용보단 더 정확한 것 같은 생각 입니다.

부도지의 내용은 중국 기록에만 나오지 않고 그리스 신화나 북유럽 신화 특히 독일 신화에 나오는 내용과 상당히 유사한 면이 많다고 보거든요.

실제로 치우는 메타포타미아 지방으로 가서 시우로 변했고 이것이 북유럽으로 가서 테오로 변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Tuesday가 원래는 테오스 데이로 싸우는 날이라고 합니다. 바로 치우의 날이라는 것이죠.
     
고독한늑대 17-09-11 23:41
   
켈트족 신화에 전쟁의 신 "티우"와도 비슷함..
     
셀틱 17-09-14 08:38
   
댓글을 3줄정도 읽어 가다가 '엥?' 하는 느낌에 아이디를 보고 조용히 뒤로가기를 누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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