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비록을 쓴 노력도 허무하게 몇십년 후 병자호란 당하고 몇백년 후 일제에게 나라 빼앗기었으니 이 모든게 임진왜란에 명을 불러들인 탓입니다. 굳이 명이 없었어도 임진왜란 승리는 가능했었는데 초반 4개월간의 대패에 너무 놀랐던 거죠. 이여송이 평양수복할 때쯤 이미 일본은 공세종말시점이었고 전세가 역전되고 있었습니다.
난 저 사람 맘에 안들던데,
하기사 우리나라 지식인이란 인간들도 역사인식에 있어선 대개가 식민사학적 사고에 쩌들어 있긴 하지.
무엇보다 현재의 국제정세를 임진왜란과 고대 삼국시대와 연결짓는 부분에서 진짜 개 어이가 없었음.
윗분 말씀처럼 임진왜란은 다른 나라에서 원인을 찾을것도 없이 조선이 제대로 자주국방에 임했다면 충분히 억지할 수 있는 전쟁이였고
삼국시대의 일본이 과연 오늘날의 일본과 비견될 수 있는 상황이 전혀 아님에도, 마치 무슨 일본이 백제를 도와주기 위해 군사를 파견한것처럼 이바구 떠는데 솔까 졸 토나왔음.
그렇다고 정황설명따위도 없음. 저 당시 일본이 백제 식민지였다는 건 바라지도 않아. 하지만 적어도 일본이
백제에 종속된 상태였음은 언질은 해줘야지. 무슨 마치 지금처럼 우리만 빼고 주변은 모두 강대국 이런식으로
도매금으로 넘겨버리니.
노예족과 야만족은 없는 역사도 지꺼, 남의 역사도 지꺼라는데
자국의 역사를 논한다는 작자들이
한국역사는 왜곡이 진리이자 비하가 목적이며 신념인거 같음.
역사를 알고 있는 우리가 명나라 황제라면 어떻게 할까요?
곧 후금이 명을 망하게 하고 청나라를 세울거라는걸 뻔히 아는데...
조선은 명만 바라보면서 정작 후금이 그리 성장 할 줄 몰랐던겁니다.
명나라가 임진왜란에 깊숙히 개입했다면, 후금이 그 기회를 놔뒀을 까요?
명나라가 더 일찍 망했다면... 임진왜란은 어떻게 됐을거라 추측하기 어렵죠.
물론 반대로 명나라가 사활을 걸고 임진왜란을 끝내고 군사를 수습하고 집중해서 후금과의 전쟁에서 이겼다면 것도 몰랐겠지만...
국뽕을 얼마나 처드시면 이제는 임란을 명나라 도움없이 '우리 힘만으로도'
극복할 수 있었다는 과대망상이 나올 수 있는지.....ㅋㅋㅋ
마치 6.25를 미국과 UN회원국 도움이 없었어도 북한군과 중국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는
허황된 주장과 크게 다를 것이 없는 논리입니다!
또한 마치 2차대전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의 패배와 무조건 항복이 없었더라도
우리 자력으로 광복을 맞이할 수 있었다는 주장과 크게 다를 것이 없는 논리이구요~~
그렇게 엄청난 저력을 지니고 있었으면 당시 한반도 북방에 주둔한 일본군에게는
가장 불리한 계절인 겨울철임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조선은 자력으로 평양성을 탈환하지도 못하고
함경도방면에서도 일본군주력이 몰려있는 함남지역은 조-명연합군의 평양성 함락까지도
그대로 일본군이 건재하고 있었을까요.... 겨우 별동대 수준의 2,0000명 미만의 병력이 주둔했던
함북지역의 일본군들만 몰아냈을 따름이었지요! (그것도 전멸시킨 것이 아니라 일본군이 성을 버리고 철수)
물론 조선에 들어온 명나라군이 자국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설렁설렁 싸운 측면이 큰 것은 사실이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결정적인 전환점이 된 전투들에는 명나라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무엇보다 심리적으로 명나라가 개입하려는 움직임을 보인 뒤부터 적어도 일본군은 북진의지가 한풀 꺾였고
평양-함경도 방면까지 진출했던 일본군이 남해안 일대로 철수하는데도 명나라의 존재가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당신이야 말로 완전 맛이 갔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결정적인 전환점이 된 전투들에는 명나라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 이 말이 제일 어이없네. 도데체 명군이 참여한 결정적인 전환점이 된 전투가 어떤것이 있습니까?
왜군이 평양에서 공세를 멈춘 이유는 병참 조달이 안된 상태에서 이미 고니시군은 더이상 진공할 여력이 없는 상태에서 선조가 의주에서 주기적으로 군사 2~3만은 동원해 평양성을 공격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니시군은 평양성까지 진공했지만 이미 2개월동안 보급이 끊긴 상태에서 식량뿐 아니라 화약, 무기등이 절대 부족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서해안을 타고 오는 보급선을 기다리고 있었던 겁니다. 물론 이순신장군때문에 막혀버렸죠
그러니까 평양선전투 직전 왜군은 6개월(부산침공부터는 8개월)간의 고립으로 거의 소멸직전에 있었어요.
식량, 탄약,장병기 뿐 아니라 겨울준비를 못한 상태에서 의복조차 제대로 보급을 받을 수가 없었던 겁니다.
고니시가 명의 눈치를 봐서 진공을 주저한 면은 있는데 병참문제가 더 큽니다
그상태로 2~3개월만 더 있었다면 고니시군은 굶어죽던지 철수해야 했어요
더이상 버틸수도 없는 상황에서 명군이 온겁니다. 더군다나 왜군에 가장 불리한 겨울(93년 2월)에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명군이 평양성 수복말고 한 게 뭐가 있죠?
해전은 이순신장군이 전공을 세웠고 육전에서는 진주성 전투, 행주산성, 웅치,이치 등 굵직한 전투외에도 대부분 전과는 조선군이 세운겁니다.
그리고 일본군의 전면적 철수는 행주산성의 전과와 조선특공대가 한양에서 왜군의 식량창고를 불태운 덕분이지 명군의 전과는 아닙니다
이미 명군은 벽제관전투에서 막혀서 평양으로 패퇴한 상태였는데 왜군이 명군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조선군이 패퇘하는 일본군을 공격도 못하게 하여 왜군 병력을 온존시키고 전쟁을 장기화시켜 버렸죠
대체 200여회 전투에서 달랑 전과라고는 어짜피 이루어질 평양성 수복하나뿐이고 오히려
명군 식량조달하느라 의병들 다 해산되고 남원성 작전 잘못세워서 교룡산성가자는 조선군의 의견을 무시하다가 허무하게 함락당하고 덕분에 전라도,충청도가 점령과 학살당하고 어처구니없는 사로병진 계획세워서 애꿎은 군사들 다 죽이고 하여튼 희안한 짓은 다하고 다녔습니다
남원성전투만 제대로 치뤘어도 직산전투까지 가지도 않았어요
명군이 임진왜란에서 죽기는 많이 죽었는데 도데체 왜 그렇게 많이 죽었는지 모를 따름입니다
아마 어처구니 없는 작전계획인 사로병진에서 대부분 죽었을 걸로 생각이 됩니다
촐라씨 임진왜란에서 명군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주장하려면 팩트를 가지고 주장하세요
도데체 어떤 팩트가 있습니까?
당신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결정적인 전환점이 된 전투들에는 명나라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라고 하셨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전투입니까?
그리고 그 전투가 어떤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