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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9-19 20:44
[한국사] 백제 성왕, 한강 유역 재점령 – 551년
 글쓴이 : 옐로우황
조회 : 1,775  

일반적으로 교과서나 백과사전 등을 보면 551년의 백제 한강유역 재점령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538년 사비로의 천도 후 백제 성왕은 한강 유역 회복작전을 기도하였다. 그러나 자력으로 고구려를 공격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신라·가야군과 연합군을 형성하였다. 이 시기 고구려는 대외적으로는 서북으로부터 돌궐(突厥)의 남하에 따른 압력을 받고 있었고, 내적으로는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외척들이 싸움을 벌이는 등 내분에 처해 있었다. 이 틈을 이용하여 신라·가야군과 연합한 백제군은 551년에 고구려에 대한 공격을 단행하여 마침내 백제는 한강 하류를 차지했고, 신라는 한강 상류를 점령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 당시의 사건에 대해 자료를 찾아 보았다. 『일본서기』는  <동북아 역사재단>의 번역본을 참조하였고, 삼국사기는 1145년에 완성되었으며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를 참조하였다.



548년
 
 ※ 삼국사기 제4권 신라본기 제4(三國史記 卷第四 新羅本紀 第四) – 진흥왕
9년(서기 548) 봄 2월, 고구려가 예인(穢人)과 함께 백제의 독산성(獨山城)을 공격하자 백제가 구원을 청하였다. 임금은 장군 주령(朱玲)을 보내었다. 주령은 굳센 병사 3천 명을 거느리고 그들을 공격하여, 죽이거나 사로잡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九年 春二月 高句麗與穢人攻百濟獨山城 百濟請救 王遣將軍朱玲 領勁卒三千擊之 殺獲甚衆
 
 

※ 삼국사기 제19권 고구려본기 제7(三國史記 卷第十九 高句麗本紀 第七) – 양원왕
4년(서기 548) 봄 정월, 예(濊)의 병사 6천 명으로 백제의 독산성(獨山城)을 공격하였다. 신라 장군 주진(朱珍)이 와서 백제를 도와주었기 때문에 승리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가을 9월, 환도(丸都)에서 상서로운 벼이삭을 바쳤다.
 
동위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四年 春正月 以濊兵六千 攻百濟獨山城 新羅將軍朱珍來援 故不克而退 秋九月 丸都進嘉禾 遣使入東魏朝貢
 
◎ 한강 북쪽의 독산성(漢北獨山城)이라는 말은 551년 한강 유역의 회복이라는 사실과 맞지않다.  백제본기가 전하는 475~551년 사이의 영역 관련기사는 그대로 신뢰하기 어려운 요소들이 있다는 주장이 있다. 
◎ 독산성의 정확한 장소는 알 수 없으나 충주 지역으로 비정하기도 한다. 
 

 
※ 삼국사기 제26권 백제본기 제4(三國史記 卷第二十六 百濟本紀 第四) – 성왕 
26년(서기 548) 봄 정월, 고구려왕 평성(平成, 양원왕)이 예(濊)와 공모하여 한수 이북의 독산성(獨山城)을 공격해오자, 임금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신라왕이 장군 주진(朱珍)을 시켜 갑옷을 입은 병사 3천 명을 거느리고 출발하게 하였다. 주진은 밤낮으로 행군하여 독산성 아래에 이르러 고구려 병사들과 일전을 벌여 크게 이겼다.
 
二十六年 春正月 高句麗王平成與濊謀 攻漢北獨山城 王遣使請救於新羅 羅王命將軍朱珍 領甲卒三千 發之 朱珍日夜兼程 至獨山城下 與麗兵一戰 大破之
생포된 병사들이 이번 침공은 백제를 공격해 달라는 안라와 일본부의 부탁을 받고 감행했다는 사실을 털어 놓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550년
 
※ 삼국사기 제4권 신라본기 제4(三國史記 卷第四 新羅本紀 第四) – 진흥왕
11년(서기 550) 봄 정월,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道薩城)을 빼앗았다.
 
3월, 고구려가 백제의 금현성(金峴城)을 함락시켰다. 임금은 두 나라의 병사가 피로해진 틈을 타 이찬 이사부에게 명하여 병사를 내어 공격하게 했다. 두 성을 빼앗아 증축하고, 병사 1천 명을 두어 지키게 하였다.
 
十一年 春正月 百濟拔高句麗道薩城 三月 高句麗陷百濟金峴城 王乘兩國兵疲 命伊飡異斯夫出兵擊之 取二城增築 留甲士一千戍之
 
◎ 도살성은 충북 괴산군 도안면(민덕식), 충남 아산(이병도) 
◎ 금현성은 현재의 충북 진천군 진천읍으로 비정하는 견해와 충남 연기군 전의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다. 
 


※ 삼국사기 제19권 고구려본기 제7(三國史記 卷第十九 高句麗本紀 第七) – 양원왕
6년(서기 550) 봄 정월, 백제가 침입하여 도살성(道薩城)을 빼앗았다.
 
3월, 백제의 금현성(金峴城)을 공격하였다. 신라가 이 기회를 틈타 두 성을 빼앗았다.
 
여름 6월, 북제(北齊)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가을 9월, 북제가 임금을 사지절시중표기대장군영호동이교위요동군개국공고구려왕(使持節侍中驃騎大將軍領護東夷校尉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으로 책봉하였다.
 
六年 春正月 百濟來侵 陷道薩城 三月 攻百濟金峴城 新羅人乘間取二城 夏六月 遣使入北齊朝貢 秋九月 北齊封王 爲使持節侍中驃騎大將軍領護東夷校尉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
 
 

※ 삼국사기 제26권 백제본기 제4(三國史記 卷第二十六 百濟本紀 第四) – 성왕
28년(서기 550) 봄 정월, 임금이 장군 달기(達己)를 보내 병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도살성(道薩城)을 공격하게 하여 빼앗았다.
 
3월, 고구려 병사가 금현성(金峴城)을 포위하였다.
 
二十八年 春正月 王遣將軍達己 領兵一萬 攻取高句麗道薩城 三月 高句麗兵圍金峴城
 
 


 
551년
 
※ 삼국사기 제4권 신라본기 제4(三國史記 卷第四 新羅本紀 第四) – 진흥왕
12년(서기 551) 봄 정월, 연호를 개국(開國)으로 바꾸었다.
 
3월, 임금이 지방을 돌아보다가 낭성(娘城)에 묵으며, 우륵(于勒)과 그의 제자 이문(尼文)이 음악을 잘한다는 말을 듣고 그들을 특별히 불렀다. 임금이 하림궁(河臨宮)에 머무르며 음악을 연주하게 하니, 두 사람이 각기 새로운 노래를 지어 연주하였다. 이보다 앞서 가야국 가실왕(嘉悉王)이 열두 달의 음률을 본떠 십이현금(十二弦琴)을 만들고, 우륵에게 명하여 악곡을 만들게 했었다.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우륵은 악기를 가지고 우리에게 귀순하였기에, 그 악기의 이름을 가야금(加耶琴)이라 하였다.
 
임금이 거칠부 등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침공하게 하였는데, 승세를 타고 10개 군을 취했다.
 
十二年 春正月 改元開國 三月 王巡守次娘城 聞于勒及其弟子尼文知音樂 特喚之 王駐河臨宮 令奏其樂 二人各製新歌奏之 先是 加耶國嘉悉王製十二弦琴 以象十二月之律 乃命于勒製其曲 及其國亂 操樂器投我 其樂名加耶琴 王命居柒夫等 侵高句麗 乘勝取十郡
 


※ 삼국사기 제19권 고구려본기 제7(三國史記 卷第十九 高句麗本紀 第七) – 양원왕
7년(서기 551) 여름 5월, 북제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가을 9월, 돌궐(突厥)이 신성을 포위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자, 군대를 이동하여 백암성을 공격하였다. 임금이 장군 고흘(高紇)에게 병사 1만을 주어 그들을 물리치고, 1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신라가 침공하여 10개의 군을 빼앗았다.
 
七年 夏五月 遣使入北齊朝貢 秋九月 突厥來圍新城 不克 移攻白巖城 王遣將軍高紇 領兵一萬 拒克之 殺獲一千餘級 新羅來攻 取十郡
◎ 고구려는 유연이라는 우방을 잃고 돌궐이라는 강적을 만났다.
◎ 돌궐이 551년에 고구려와 전쟁을 한 것에 대해 의문이 있다. 돌궐은 552년에 유연을 격파한다.



※ 삼국사기 제44권 열전 제4(三國史記 卷第四十四 列傳 第四) – 거칠부
진흥대왕(眞興大王) 6년(서기 554) 을축에 그는 왕명을 받들어 여러 문사(文士)들을 소집하여 신라의 국사를 편찬하였고, 벼슬이 파진찬으로 올라갔다.

진흥왕 12년(서기 560) 신미에 왕이 거칠부와 대각찬 구진(仇珍), 각찬 비태(比台), 잡찬 탐지(耽知)ㆍ비서(非西), 파진찬 노부(奴夫)ㆍ서력부(西力夫), 대아찬 비차부(比次夫), 아찬 미진부(未珍夫) 등 여덟 장군을 시켜서 백제와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도록 명령하였다. 백제인들이 먼저 평양을 격파하고, 거칠부 등은 승세를 몰아 죽령(竹嶺) 이북 고현(高峴) 이내의 10개 군을 빼앗았다. 이때 혜량법사가 무리를 이끌고 길가에 나와 있었다. 거칠부가 말에서 내려 군례로써 인사하고 앞으로 나아가 말하였다.

“옛날 유학할 때 법사님의 은혜를 입어 목숨을 보전하였는데, 지금 뜻밖에 만나게 되니 어떻게 보답하여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법사가 대답하였다.

“지금 우리나라는 정사가 어지러워 멸망할 날이 머지않았으니, 귀국으로 데려가 주기를 바라오.”

이에 거칠부가 같이 수레에 타고 돌아와서 왕에게 배알시켰다. 왕이 그를 승통(僧統, 승려의 가장 높은 지위)으로 삼고 처음으로 백좌강회(百座講會)와 팔관법회(八關法會)를 열었다.

(眞智王) 원년(서기 576) 丙申에 거칠부가 상대등이 되어 군국사무를 자임(自任)하다가 늙어 자기 집에서 죽으니 향년 78세였다진지왕.

眞興大王六年乙丑 承朝旨 集諸文士 修撰國史 加官波珍飡 十二年辛未 王命居柒夫及仇珍大角飡比台角飡耽知迊飡非西迊飡奴夫波珍飡西力夫波珍飡比次夫大阿飡未珍夫阿飡等八將軍 與百濟侵高句麗 百濟人先攻破平壤 居柒夫等 乘勝取竹嶺以外 高峴以內十郡 至是 惠亮法師 領其徒 出路上 居柒夫下馬 以軍禮揖拜 進曰 昔 遊學之日 蒙法師之恩 得保性命 今 邂逅相遇 不知何以爲報 對曰 今 我國政亂 滅亡無日 願致之貴域 於是 居柒夫同載以歸 見之於王 王以爲僧統 始置百座講會及八關之法 眞智王元年丙申 居柒夫爲上大等 以軍國事務自任 至老終於家 享年七十八
◎ 위에서 말한 평양(平壤)은 남평양(南平壤)을 의미한다는 주장이 있다.  남평양은 위례성의 다른 이름, 경기도 양주, 황해도 재령 등 다양한 주장이 있다.



※ 일본서기 권 제19 / 흠명천황(킨메이 천황) 12년
12년 봄 3월에 보리 씨앗 1천 곡(斛)을 백제왕에 주었다.

이 해에 백제 성명왕이 친히 백제의 군사[衆]와 두 나라[두 나라는 신라와 임나를 말한다.]의 병사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쳐서 한성(漢城)의 땅을 차지하였다. 또한 진군하여 평양(平壤)을 쳤다. 모두 6군(郡)의 땅은 고지를 회복한 것이다.
◎ 1斛은 10斗이다.



※ 일본서기 권 제19 / 흠명천황(킨메이 천황) 23년(562년)
8월에 천황이 대장군 대반련협수언(大伴連狹手彦 ; 오호토모노무라지사데히코)을 파견하여 군사 수만 명을 이끌고 고구려를 치도록 하였다. 협수언은 백제의 계책을 써서 고구려를 격파하였다. 그 왕은 담을 넘어 도망하였다. 협수언은 드디어 승세를 타고 왕궁으로 들어가 갖가지 진귀한 보물, 칠직장(七織帳), 철옥(鐵屋)을 모두 빼앗아 돌아왔다[옛 책(舊本)에는 철옥은 고구려 서쪽의 높은 누각 위에 있었으며, 직장은 고구려왕의 내전 침실에 쳐 있었다고 한다.]. 칠직장은 천황에게 바치고 갑옷 두 벌, 금으로 장식한 칼 두 자루, 구리종 세 개, 오색 번(五色幡) 두 간(竿), 미녀 원(媛)[원은 이름이다]과 그의 시녀 오전자(吾田子)는 소아도목숙녜(蘇我稻目宿禰) 대신(大臣)에게 보냈다. 이때 대신은 두 여자를 처로 삼고 경(輕 ; 카루)의 곡전(曲殿)에 살도록 하였다[철옥은 장안사(長安寺)에 있다. 이 절이 어느 국(國)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어떤 책(一本)에서는 “11년에 대반협수언련이 백제국과 함께 고구려와 양향(陽香)을 비진류도(比津留都)에서 쫓아냈다.”고 한다.].

흠명천황 23년은 562년이고, 어떤 책(一本)에서 말한 흠명천황 11년은 550년이다.
삼국사기에는 562년을 전후로 하여 고구려에 어떠한 왜군의 공격도 없다. 더구나 백제군이 신라나 고구려를 성공적으로 공격하지도 못했다. 따라서 562년의 기록이 아니라 550년 전후의 사건일 가능성이 높다. 물론 진위여부나 과장되었는 지는 논란이다.



※ http://yellow.kr/blog/?p=2395 에서 발췌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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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고기초밥 17-09-19 21:19
   
재점령하지만 얼마 못 가죠.. ㅠㅠ

전 예전엔 막연히 군사력으로는 백제가 무조건 고구려 다음이라고 생각했는데

사람들이 그러는데 6세기부터는 신라에게 밀렸다고 하더군요.

뭐 사람마다 의견이 다 달라서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맴맴 17-09-19 21:46
   
백제는 근초고왕때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죽이면서 불행이 시작됐죠. 평양에서 힘을 기르던 그의 손자가 담덕.
광개토대왕 때 시작된 피의 복수로 백제는 7-8대에 걸쳐 고통받다가 왕권이 똥망하면서 신라에 역전당함...
도배시러 17-09-19 21:58
   
日本國者 倭國之別種也 일본국은 왜국의 별종이다. -구당서
621년 일본, [631년 왜], 703년 일본, 753년 일본 => 당나라에 조공한 동남쪽 열도의 국명
현재 일본의 서쪽은 왜도 아니고 일본도 아니었음.

즉, 일본서기에 기록된 AD 700 이전의 기록은 다른 나라의 이야기를 빌려왔거나
창작했을 가능성이 높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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