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위서동이전 고구려, 고구려의 남쪽에는 조선이 있다.
高句麗在遼東之東千里,南與朝鮮、濊貊,東與沃沮,北與夫餘接。都於丸都之下,方可二千里,戶三萬。
후한서 동이전 고구려, 고구려의 남쪽에는 조선이 있다.
高句驪,在遼東之東千里,南與朝鮮、濊貊,東與沃沮,北與夫餘接。地方二千里,多大山深谷,人隨而為居
양서 제이 고구려, 고구려의 남쪽에는 조선이 있다.
其國,漢之玄菟郡也,在遼東之東,去遼東千里。漢、魏世,南與朝鮮、穢貃,東與沃沮,北與夫餘接。
(북)위서의 고구려, 고구려의 남쪽은 소해(발해만)에 다다른다.
云:遼東南一千餘里,東至柵城,南至小海,北至舊夫餘,民戶參倍於前。
魏時,其地東西二千里,南北一千餘里。
양(梁)나라 AD 502 ~ 587
북위(北魏) AD 386 ~ 534
주류사학에서는 [南與朝鮮] 이 문구를 [낙랑군 조선현]으로 해석한다.
고구려의 남쪽에 낙랑군이 있었고 그위치는 대동강 평양 이라 하는것이다.
그래서 위서동이전 의 설명을 통해 고구려 남쪽에 한사군이 있었다고 주장하는것이다.
그리고 자치통감을 들먹이며 〈진기 10(晉紀十)〉“효민황제 상-건흥 원년(孝愍皇帝上-建興元年)”조
장통이 모용외에게 귀부하면서 낙랑군이 대동강 평양에서 요서로 교군/교치 되었다고 주장한다. AD 313년
313년은 서진의 마지막 효민황제(313~317)의 시작이다. 이후 동진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양(梁)나라 사관은 훗날 한국의 주류사학자들이 헛소리 할것을 미리 알았는지
똑같은 문구를 사용해 고구려의 위치를 설명한다.
漢、魏世,南與朝鮮、穢貃,東與沃沮,北與夫餘接。
전한과 조위(조조의 위나라)때까지 고구려 남쪽에는 [조선]이 있었다.
예맥, 옥저...의 존재 때문에 북위라고 해석 할수는 없다.
위촉오 삼국이후에 서진/동진의 시대가 이어진다. AD265 ~
서진의 낙랑군은 후한 초기 61,492戶 에서 [낙랑 3,700 + 대방 4,900戶]로 축소된다.
樂浪郡 漢置。統縣六,戶三千七百
朝鮮-周封箕子地。屯有 渾彌 遂城-秦築長城之所起。鏤方 駟望
帶方郡 公孫度置。統縣七,戶四千九百
帶方 列口 南新 長岑 提奚 含資 海冥
소속현의 숫자는 후한 18개현에서 13개현으로 축소된다.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다는 헛소리가 후대에 왜 나왔는지... 이해가 되실지도...
주류사학에서 313년 낙랑군의 교치를 설명하고자 생쑈를 보여주었지만...
265년 서진 시작할 무렵에는 고구려 남쪽에 [조선]은 없는것으로 간주했다.
게다가 고구려가 대동강 평양을 점유한 시기도 맞지 않는다.
낙랑군 교치는 서진 초기부터 시작되었다고 주장해야한다.
교치의 근거는 알아서 자알 찾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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