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무신왕 2년(서기 19)
2년(서기 19) 봄 정월, 서울에 지진이 났다.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백제의 백성 1천여 호가 귀순하여 왔다.
二年 春正月 京都震 大赦 百濟民一千餘戶來投
온조왕 37년(서기 19)
37년(서기 19) 봄 3월, 달걀만한 우박이 떨어져 새들이 맞아 죽었다.
여름 4월, 가뭄이 들었는데, 6월이 되어서야 비가 왔다. 한수의 동북 마을에 흉년이 들어 민가 1천여 호가 고구려로 도망가니 패수(浿水)와 대수(帶水) 사이가 텅 비어 사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三十七年 春三月 雹大如雞子 鳥雀遇者死 夏四月 旱 至六月乃雨 漢水東北部落饑荒 亡入高句麗者一千餘戶 浿帶之間 空無居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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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역사 상식으로는 고구려(남만주)와 백제(경기도) 사이에 낙랑 (군이든 국이든, 평안ㆍ황해도)이 위치해야 하는데
위 기록으로는
백제와 고구려는 땅을 직접 맞대고 있다
그것도 대무신왕이 낙랑을 정복하기 18 년 전 기사에 말이다
ㅡ 한수의 동북면에 패수와 대수가 있고
ㅡ 그 패수와 대수의 주민들이 대거 고구려로 귀순해서 그 쪽에 사람이 텅텅 비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