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몽의 졸본, 홀승골성 - AD3 국내(불내성, 위나암성), 유리왕 - AD212 환도(집안?), 산상왕 -
AD247 평양(왕검성) 동천왕 - AD342 환도성, 고국원왕 - AD343 평양 동황성, 고국원왕 -
AD427 평양, 장수왕 - AD586 장안성, 평원왕
● 삼국사기등의 사료
AD3 二十二年 冬十月 王遷都於國內 築尉那巖城 - 유리왕 국내성, 위나암성
212 冬十月 王移都於丸都 산상왕 환도성
246 魏將到肅愼南界 刻石紀功 又到丸都山 銘不耐城而歸 동천왕- 관구검 침략
括地志云 [不耐城卽國內城也 城累石爲之 此卽丸都山與國內城相接]
247 二十一年 春二月 王以丸都城經亂 不可復都 築平壤城 移民及廟社
平壤者本仙人王儉之宅也 或云 王之都王險(誤讀史記朝鮮傳) 동천왕 평양천도(왕검성)
334 四年 秋八月 增築平壤城 고국원왕 평양성 증축
342 十二年 春二月 修葺丸都城 又築國內城 秋八月 移居丸都城 고국원왕 환도성 천도
342 毁丸都城而還 모용황- 환도성 파괴
343 秋七月 移居平壤東黃城 城在今西京東木覓山中 遣使如晉朝貢 고국원왕 -평양 동황성
371 二十六年 高句麗擧兵來 王聞之 伏兵於浿河上 俟其至 急擊之 高句麗兵敗北
冬 王與太子帥精兵三萬 侵高句麗 攻平壤城 高麗王斯由(고국원왕) 力戰拒之 中流矢死
王引軍退移都漢山(위례성=>한산) B근초고왕
371 四十一年 冬十月 百濟王帥 兵三萬 來攻平壤城 王出師拒之 爲流矢所中 고국원왕
377 七年 冬十月 無雪 雷 民疫 百濟將兵三萬 來侵平壤城 소수림왕
400 九年, 百殘違誓與倭和通, 王巡下平穰. 광개토태왕 비문
409 十八年 八月 王南巡 광개토왕
427 十五年 移都平壤 장수왕 평양성
586 二十八年 移都長安城 평원왕 장안성 ~ 668
인터넷에서 고구려 수도관련 자료를 보다보니 사실과 맞지 않는 부분들이 제법 보여서 정리합니다.
관구검 관련 - 고구려를 정벌하고 정계비를 세운것이 아니라 불내성 바위에 업적을 각석 합니다.
이때까지 묘지용 비석을 기념용으로 활용하지 않습니다. 진시황, 한무제의 경우도 기념으로 바위에 각석합니다.
점제현 신사 비석은 다소 뜬금없는 사례이죠.
국내성(불내성, 위나암성) 과 환도성은 환도산에 있습니다.
고국원왕때 환도성은 모용황에게 철저하게 파괴되어 그 이후로 언급되지 않습니다.
평양성은 3가지가 있습니다. 조선의 왕검성 과 동황성, 장안성
3성 모두 평양에 위치 했으리라 생각됩니다.
백제는 평양성을 2회 공략합니다. (고국원왕 371년, 소수림왕 377년)
백제 근초고왕이 평양성을 공격했지만 점유한것은 아닙니다.
기록을 보시면 평양성 공격시 고국원왕을 죽인후에 백제 수도를 위례성에서 한산으로 천도합니다.
6년뒤에도 평양성을 또 공격합니다.
삼국사기 지리지4 :
근초고왕때 고구려 남평양을 취하여 한성 수도로 삼고 105년 거주 (古典記 인용)
自卒本扶餘至慰禮城 立都稱王 歷三百八十九年 위례성 389
至十三世近肖古王 取高句麗南平壤 都漢城 歷一百五年 남평양, 한성 105
至二十二世文周王移都熊川 歷六十三年 웅천 63
至二十六世聖王移都所夫里 國號南扶餘 至三十一世義慈王 歷年一百二十二 소부리 122
.
광개토왕의 下平穰 과 근초고왕의 南平壤은 언급된 고구려 수도와 어떤 관계 일까요 ?
남평양 한성백제 371+105= AD 476까지 존속했으니, AD 400의 하평양과는 무관하네요.
그리고 488년 북위-웅천백제 전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