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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9-25 13:53
[한국사] 삼국사기로 본 신라와 백제의 접촉
 글쓴이 : 감방친구
조회 : 1,536  

<신라 본기>

혁거세 거서간
40년(기원전 18), 백제(百濟)의 시조 온조(溫祚)가 왕위에 올랐다.

탈해 이사금
7년(서기 63) 겨울 10월, 백제왕이 영토를 개척하여, 낭자곡성(娘子谷城)까지 이르러 사신을 보내 만나기를 청했으나, 임금은 가지 않았다.

8년(서기 64) 가을 8월, 백제가 병사를 보내 와산성(蛙山城)을 공격하였다.
겨울 10월, 백제가 다시 구양성(狗壤城)을 공격하자 임금은 기병 2천 명을 보내 공격하여 물리쳤다.

10년(서기 66), 백제가 와산성을 공격하여 빼앗고, 2백 명을 그곳에 남겨 지키게 하였으나, 얼마 되지 않아서 그곳을 다시 빼앗았다.

14년(서기 70), 백제가 침범하였다.

18년(서기 74) 가을 8월, 백제가 변경을 노략질하기에 병사를 보내 이를 막게 하였다.

19년(서기 75), 큰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리므로 창고를 열어 구제하였다.
겨울 10월, 백제가 서쪽 변경의 와산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20년(서기 76) 가을 9월, 병사를 보내 백제를 공격하여 와산성을 다시 찾았다. 백제로부터 와서 살고 있던 2백여 명을 모두 죽였다.

파사 이사금
6년(서기 85) 봄 정월, 백제가 변경을 침범하였다.
2월, 길원(吉元)을 아찬으로 삼았다.

8년(서기 87) 가을 7월, 임금이 명을 내렸다.
“내가 덕이 없는데도 나라를 맡았다. 우리나라는 서쪽으로는 백제를 이웃하고 남쪽으로 가야와 닿아있다. 나의 덕망은 백성들을 편안히 살게 하지 못하고, 위엄은 그들로 하여금 두렵도록 하기에 부족하니, 성과 보루를 수리하여 침략에 대비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이달에 가소성(加召城)과 마두성(馬頭城)을 쌓았다.

(하략)

<백제 본기>

다루왕
36년(서기 63) 겨울 10월, 임금은 낭자곡성(娘子谷城)까지 국경을 개척하였다.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모임을 청하였으나 신라왕이 듣지 아니하였다.

37년(서기 64) 임금이 병사를 보내어 신라의 와산성(蛙山城)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병사를 옮기어 구양성(狗壤城)을 공격하였다. 신라가 기병 2천 명을 일으켰는데, 이를 공격하여 패주시켰다.

39년(서기 66), 와산성을 공격하여 빼앗고 2백 명의 병사를 두어 지키게 하였으나, 얼마 후 신라에 빼앗겼다.

43년(서기 70), 병사를 보내어 신라를 침범하였다.

47년(서기 74) 가을 8월, 병사를 보내어 신라를 침범하였다.

49년(서기 76) 가을 9월, 와산성이 다시 신라의 소유가 되었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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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방친구 17-09-25 14:02
   
감방친구 17-09-25 14:09
   
삼국사기 백제를 중심한 낙랑ㅡ대방ㅡ고구려 관련 기록

온조왕 2년(기원전 17)
2년(기원전 17) 봄 정월, 임금이 여러 신하에게 말하였다.
“말갈(靺鞨)은 우리의 북쪽 경계와 맞닿아 있고, 용맹하고 속임수가 많으니 무기를 수선하고 양식을 비축하여 방어할 계획을 세워야 한다.”
3월, 임금은 족부(族父) 을음(乙音)이 지혜와 담력이 있다하여 우보(右輔)의 직을 제수하고 병사의 일을 맡겼다.
二年 春正月 王謂群臣曰 靺鞨連我北境 其人勇而多詐 宜繕兵積穀 爲拒守之計 三月 王以族父乙音 有智識膽力 拜爲右輔 委以兵馬之事

온조왕 4년(기원전 15)
4년(기원전 15), 봄과 여름에 가물어서 기근이 들었고 전염병이 돌았다.
가을 8월, 사신을 낙랑(樂浪)에 보내어 우의를 다졌다.
四年 春夏 旱 饑 疫 秋八月 遣使樂浪修好

온조왕 8년(기원전 11)
8년(기원전 11) 봄 2월, 말갈군 3천 명이 침입하여 위례성을 포위하니 임금은 성문을 닫고 나가지 않았다. 열흘이 지나 적병이 군량미가 떨어져 돌아가므로, 임금이 날쌘 병사를 이끌고 추격하여 대부현(大斧峴)에서 크게 싸워 죽이고 사로잡은 자가 5백여 명이었다.
가을 7월, 마수성(馬首城)을 쌓고 병산책(甁山柵)을 세웠다. 낙랑태수(樂浪太守)가 사신을 보내 말하였다.
“지난날 서로 사신을 보내고 우호를 맺어 한 집안처럼 지냈는데 이제 우리 땅 가까이에 성을 쌓고 목책을 세우니, 혹 우리 국토를 야금야금 차지하려는 계책이 아닌가? 만일 지금까지의 우호를 생각하여 성을 헐고 목책을 부순다면 의심할 바가 없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한번 싸워 승부를 내겠다.”
임금이 답하여 말하였다.
“요새를 만들어 나라를 지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떳떳한 일이다. 어찌 이 일로 우호관계에 변함이 있겠는가? 당연히 태수가 의심할 일이 아니다. 만약 태수가 강함을 믿고 군대를 일으킨다면 우리도 대비책이 있다.”
이로 인하여 낙랑과 사이가 좋지 않게 되었다.
八年 春二月 靺鞨賊兵三千來圍慰禮城 王閉城門不出 經旬 賊糧盡而歸 王簡銳卒 追及大斧峴 一戰克之 殺虜五百餘人 秋七月 築馬首城 竪甁山柵 樂浪太守使告曰 頃者 聘問結好 意同一家 今逼我疆 造立城柵 或者其有蠶食之謀乎 若不渝舊好 隳城破柵 則無所猜疑 苟或不然 請一戰以決勝負 王報曰 設險守國 古今常道 豈敢以此 有渝於和好 宜若執事之所不疑也 若執事恃强出師 則小國亦有以待之耳 由是 與樂浪失和

온조왕 11년(기원전 8)
11년(기원전 8) 여름 4월, 낙랑이 말갈을 시켜 병산(甁山)의 목책을 습격하여 부순 뒤 백여 명을 죽이고 노략질하였다.
가을 7월, 독산(禿山)과 구천(狗川)에 두 개 목책을 설치하여 낙랑의 통로를 막았다.
十一年 夏四月 樂浪使靺鞨襲破甁山柵 殺掠一百餘人 秋七月 設禿山狗川兩柵 以塞樂浪之路

온조왕 13년(기원전 6)
13년(기원전 6) 봄 2월, 서울에서 한 늙은 할미가 남자로 변하였다.
호랑이 다섯 마리가 성 안으로 들어왔다.
왕의 어머니가 61세로 돌아가셨다.
여름 5월, 임금이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나라의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 국경을 침범하므로 편한 날이 없다. 하물며 요즈음 요상한 징조가 자주 나타나고 어머니마저 돌아가시니, 형세가 불안하여 반드시 도읍을 옮겨야겠다. 내가 어제 순시하여 한강의 남쪽을 살펴보았는데 토지가 매우 비옥하였다. 그곳에 도읍을 옮겨 오랫동안 편안할 계획을 세울 것이다.”
가을 7월, 한산(漢山) 아래에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가를 옮겼다.
8월, 마한에 사신을 보내어 도읍을 옮길 것을 알렸다. 드디어 경계를 그어 국경을 정하였으니, 북쪽으로는 패하, 남쪽으로는 웅천(熊川), 서쪽으로는 대해(大海), 동쪽으로는 주양(走壤)에 이르렀다.
9월, 성과 궁궐을 쌓았다.
十三年 春二月 王都老嫗化爲男 五虎入城 王母薨 年六十一歲 夏五月 王謂臣下曰 國家東有樂浪 北有靺鞨 侵軼疆境 少有寧日 况今妖祥屢見 國母棄養 勢不自安 必將遷國 予昨出巡 觀漢水之南 土壤膏腴 宜都於彼 以圖久安之計 秋七月 就漢山下 立柵 移慰禮城民戶 八月 遣使馬韓 告遷都 遂畵定疆埸 北至浿河 南限熊川 西窮大海 東極走壤 九月 立城闕

온조왕 17년(기원전 2)
17년(기원전 2) 봄, 낙랑이 침범해서 위례성에 불을 질렀다.
여름 4월, 사당을 세우고 국모에게 제사를 지냈다.
十七年 春 樂浪來侵 焚慰禮城 夏四月 立廟以祀國母

온조왕 26년(서기 8)
26년(서기 8) 가을 7월, 임금이 말하였다.
“마한이 점점 약해지고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으니 나라가 오래 갈 수 없으리라. 혹시 다른 나라에게 병합되면 순망치한(脣亡齒寒)1)의 격이 될 것이니 뉘우쳐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남보다 먼저 마한을 손에 넣어 후환을 없애는 것이 좋겠다.”
겨울 10월, 임금이 사냥을 한다는 핑계로 병사를 내어 마한을 습격하여 드디어 나라를 합병하였으나, 오직 원산(圓山)과 금현(錦峴) 두 성은 항복하지 않았다.
二十六年 秋七月 王曰 馬韓漸弱 上下離心 其勢不能久 儻爲他所幷 則脣亡齒寒 悔不可及 不如先人而取之 以免後艱 冬十月 王出師 陽言田獵 潛襲馬韓 遂幷其國邑 唯圓山錦峴二城固守不下
21. 온조왕 27년(서기 9)
27년(서기 9) 여름 4월, 원산과 금현 두 성이 항복해서 그 백성을 한산(漢山)의 북쪽으로 옮기었다. 이것으로 마한이 드디어 멸망하였다.
가을 7월, 대두산성(大豆山城)을 쌓았다.
二十七年 夏四月 二城降 移其民於漢山之北 馬韓遂滅 秋七月 築大豆山城

고이왕
13년(서기 246) 여름, 크게 가뭄이 들어 보리를 거두지 못하였다.
가을 8월, 위(魏)나라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이 낙랑태수(樂浪太守) 유무(劉茂)와 삭방태수(朔方太守) 왕준(王遵)과 함께 고구려를 쳤다. 임금이 그 틈을 타서 좌장 진충을 보내 낙랑 변경을 습격하여 백성을 잡아왔다. 유무가 소식을 듣고 분노하니, 임금이 침범 당할까 두려워 백성들을 돌려보냈다.
十三年 夏大旱 無麥 秋八月 魏幽州刺史毌丘儉 與樂浪太守劉茂朔方太守王遵 伐高句麗 王乘虛 遣左將眞忠 襲取樂浪邊民 茂聞之怒 王恐見侵討 還其民口

책계왕
고구려가 대방(帶方)을 쳐서 대방이 우리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앞서 임금이 대방왕의 딸 보과(寶菓)를 부인으로 삼았기에, 임금이 이르기를 “대방은 장인의 나라이니 그 청에 응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고 드디어 병사를 내어 구원하니 고구려가 원망하였다. 임금은 고구려의 침략을 두려워하여 아차성(阿旦城)과 사성(蛇城)을 수리하여 대비하였다.
責稽王[或云 靑稽] 古尒王子 身長大 志氣雄傑 古尒薨 卽位 王徵發丁夫 葺慰禮城 高句麗伐帶方 帶方請救於我 先是 王娶帶方王女寶菓 爲夫人 故曰 帶方我舅甥之國 不可不副其請 遂出師救之 高句麗怨 王慮其侵寇 修阿旦城蛇城 備之

2년(서기 287) 봄 정월, 동명왕의 사당에 참배하였다.
二年 春正月 謁東明廟
13년(서기 298) 가을 9월, 한(漢)나라가 맥인(貊人)들과 합세하여 침범하였다. 임금이 나가서 막다가 적병에게 해를 입어 돌아가셨다.
十三年 秋九月 漢與貊人來侵 王出禦 爲敵兵所害 薨

분서왕
7년(서기 304) 봄 2월, 몰래 병사를 보내 낙랑(樂浪)의 서현(西縣)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겨울 10월, 임금이 낙랑 태수가 보낸 자객에게 해를 입어 돌아가셨다.
七年 春二月 潛師襲取樂浪西縣 冬十月 王爲樂浪太守所遣刺客賊害 薨

진사왕
5년(서기 389) 가을 9월, 임금이 병사를 보내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침략하였다.
五年 秋九月 王遣兵 侵掠高句麗南鄙
8년(서기 392) 여름 5월, 초하루 정묘일에 일식이 있었다.
가을 7월, 고구려왕 담덕(談德, 광개토왕)이 4만 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와서 북쪽 변경을 침범하여 석현성(石峴城) 등 10여 개의 성을 함락시켰다. 임금은 담덕이 병사를 부리는데 능하다는 말을 듣고 나가 막지 않았기에 한수 북쪽의 여러 부락이 함락된 것이다.
겨울 10월, 고구려가 관미성(關彌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임금이 구원(狗原)에 사냥을 나가 열흘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11월, 임금이 구원의 행궁에서 돌아가셨다.
八年 夏五月丁卯朔 日有食之 秋七月 高句麗王談德 帥兵四萬 來攻北鄙 陷石峴等十餘城 王聞談德能用兵 不得出拒 漢水北諸部落 多沒焉 冬十月 高句麗攻拔關彌城 王田於狗原 經旬不返 十一月 薨於狗原行宮

아신왕
2년(서기 393) 봄 정월, 임금이 동명왕의 사당에 참배하고 또한 남쪽 제단에서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냈다.
진무(眞武)를 좌장으로 삼아 병마에 관한 일을 맡겼다. 진무는 왕의 외삼촌으로서 침착하고 굳세며 지략이 많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에게 감복하였다.
가을 8월, 임금이 진무에게 말하였다.
“관미성(關彌城)은 우리나라 북쪽 변경의 옷깃처럼 중요한 곳이다. 지금 그 땅이 고구려의 소유가 되어 있으니, 이것을 과인은 애통해 하는 바이다. 경은 마땅히 마음을 기울여 치욕을 갚아야 할 것이다.”
임금은 마침내 병사 1만 명을 동원하여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칠 것을 계획하였다. 진무는 병졸보다 앞에 서서 화살과 돌을 무릅쓰면서 싸웠다. 석현(石峴) 등 5개 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먼저 관미성을 포위했으나, 고구려 사람들이 성을 굳게 지켰다. 진무는 군량미가 계속 이어지지 못하여 병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감방친구 17-09-25 18:57
   
낭자곡성 ㅡ 청주
와산성 ㅡ 보은
구양성 ㅡ 옥천 
으로 비정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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