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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9-26 15:03
[한국사] 삼국사기 기록으로 본 백제
 글쓴이 : 감방친구
조회 : 2,877  

졸본부여의 공주이자 과부인 소서노
소서노의 두 아들 비류와 온조
비류와 온조의 아비이자 소서노의 첫 남편은 위구태로 추정

부여를 탈출한 고주몽은 소서노와 결혼함으로써 졸본부여에 의탁, 이를 기반으로 고구려 창업

졸본은 현도군 동쪽 인근, 지금 요하의 상류쯤으로 추정
당시 고구려는 지금의 요동중북부에서 남만주로, 횡적 성장을 하고 있었고 고주몽과 유리왕 당시에는 세력이 크지도 그 체제와 체계가 치밀하지도 않았음

비류ㆍ온조ㆍ소서노의 남하
처음의 이주는 원거리가 아니었음
즉 우리가 알듯이 남만주에서 경기도에 이르는 근 2천리 이주가 아니었다는 말
또 기록에 한국으로 갔다는 말도 없음
준왕세력, 위만조선에서 망명한 세력, 유리왕에 반대하고 망명한 협보(?) 등은 모두 한국으로 갔다거나 남한으로 갔다고 기록돼 있음
그런데 이들 세 모자 세력의 이주에는 한국에 갔다든가 남한으로 갔다든가 왔다든가 하는 기록이 없음

즉 초기 백제의 터전은 한반도가 아니었다는 말, 적어도 우리가 아는 삼한이 차지한 남한이 아니었다는 말

단지 기록에는 최초 패수와 대수를 건너 정착했고 북쪽에 말갈, 동쪽에 낙랑이 있다고 돼 있음

즉 이들이 처음 정착한 곳은 지금의 요동반도 남부로 추정할 수 있음

또 비류와 온조가 서로 다른 땅에 도읍을 삼았다는 기록에서 보듯 백제 최초기에는 두 거점이 있었을 것으로 보임

나는 이곳을
지금의 요동반도 남부와 서북한 지역에 이르는 지역으로 봄

또한 백제 초기에 요동남부 외에 마한의 동북면에 새 거점을 마련했을 것으로 봄

서북한 지역의 고구려계 무덤들은 초기 백제의 것일 가능성이 있음

또 백제 초기 기록은 비류백제와 온조백제의 역사가 혼재돼 승자인 온조에게 유리하게 재편집되었을 가능성이 있음

이것이 온조왕 대에
늙은 할미가 남자로 변하고
호랑이 다섯 마리가 성에 들어오고
소서노가 죽고
온조가 마한왕에게 도읍(원문에는 도읍이 아니라 나라라고 돼 있음)을 옮기겠다고 하고
이후 영토를 확정하고 마한을 병합하는 과정으로 나타난다고 생각됨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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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방친구 17-09-26 15:06
   
1. 백제가 도읍할 당시에 북쪽에 말갈이 있었다
고구려가 도읍할 당시에 말갈이 그 주변에 있었던 것과 같다

백제가 말갈에 대비하고자 성과 책을 쌓으니 낙랑태수가 항의하고 백제가 듣지 않으니 낙랑과 백제의 사이가 나빠졌고 이후 낙랑은 말갈을 시켜 백제를 자주 괴롭힌다

이 때 쌓은 마수성은 낙랑이 사라진 200 여 년 동안에도 계속하여 말갈의 공격을 받은 곳으로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기록 정황 상백제의 동북쪽에 위치했다

또한 백제 건국 초기에 백제와 고구려는 남북으로(백제의 동북면이 고구려윽 남서면과 잇닿음) 붙어 있었다

즉 백제의 동쪽에 낙랑, 동북쪽에 고구려, 북쪽에 말갈이 위치했다
말갈은 일부는 낙랑과 일부는 고구려와 이해를 공유하면서 백제와 고구려 사이에서 이리저리 부족단위로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ㅡㅡㅡㅡㅡㅡ
고구려 본기 동명왕
나라 이름을 고구려(高句麗)라 하고, 이로 인하여 고(高)를 성씨로 삼았다.[다른 설로, 주몽이 졸본부여(卒本扶餘)에 이르렀을 때 그곳의 왕에게 아들이 없었는데 주몽을 보고는 비상한 사람인 것을 알고 그의 딸을 아내로 삼게 했고, 왕이 돌아가시자 주몽이 왕위에 올랐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때 주몽의 나이가 22세였다. 한(漢)나라 효원제(孝元帝) 건소(建昭) 2년(기원전 37), 신라 시조 혁거세(赫居世) 21년 갑신년이었다. 사방에서 소문을 듣고 와서 따르는 무리가 많았다. 그 땅이 말갈 부락에 붙어 있어 침략과 도적질로 해를 입을까 걱정이 되었기에 마침내 그들을 물리치니, 말갈이 두려워 굴복하고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다.

백제 본기 온조왕
2년(기원전 17) 봄 정월, 임금이 여러 신하에게 말하였다.
“말갈(靺鞨)은 우리의 북쪽 경계와 맞닿아 있고, 용맹하고 속임수가 많으니 무기를 수선하고 양식을 비축하여 방어할 계획을 세워야 한다.”
3월, 임금은 족부(族父) 을음(乙音)이 지혜와 담력이 있다하여 우보(右輔)의 직을 제수하고 병사의 일을 맡겼다.

8년(기원전 11) 봄 2월, 말갈군 3천 명이 침입하여 위례성을 포위하니 임금은 성문을 닫고 나가지 않았다. 열흘이 지나 적병이 군량미가 떨어져 돌아가므로, 임금이 날쌘 병사를 이끌고 추격하여 대부현(大斧峴)에서 크게 싸워 죽이고 사로잡은 자가 5백여 명이었다.
가을 7월, 마수성(馬首城)을 쌓고 병산책(甁山柵)을 세웠다. 낙랑태수(樂浪太守)가 사신을 보내 말하였다.
“지난날 서로 사신을 보내고 우호를 맺어 한 집안처럼 지냈는데 이제 우리 땅 가까이에 성을 쌓고 목책을 세우니, 혹 우리 국토를 야금야금 차지하려는 계책이 아닌가? 만일 지금까지의 우호를 생각하여 성을 헐고 목책을 부순다면 의심할 바가 없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한번 싸워 승부를 내겠다.”

임금이 답하여 말하였다.
“요새를 만들어 나라를 지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떳떳한 일이다. 어찌 이 일로 우호관계에 변함이 있겠는가? 당연히 태수가 의심할 일이 아니다. 만약 태수가 강함을 믿고 군대를 일으킨다면 우리도 대비책이 있다.”
이로 인하여 낙랑과 사이가 좋지 않게 되었다.

고구려 대무신왕
2년(서기 19) 봄 정월, 서울에 지진이 났다.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백제의 백성 1천여 호가 귀순하여 왔다.

백제 온조왕
37년(서기 19) 봄 3월, 달걀만한 우박이 떨어져 새들이 맞아 죽었다.
여름 4월, 가뭄이 들었는데, 6월이 되어서야 비가 왔다. 한수의 동북 마을에 흉년이 들어 민가 1천여 호가 고구려로 도망가니 패수(浿水)와 대수(帶水) 사이가 텅 비어 사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백제 본기 건국설화 부분

비류가 동생 온조에게 말하였다.
“처음에 대왕께서 이곳으로 도망해 왔을 때, 어머니는 집안의 전 재산을 내놓아 나라의 기틀을 다지는 데에 공이 많았다. 대왕이 돌아가시고 나라는 유류에게 돌아갔으니 우리가 여기 남아 답답하게 지내기보다는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좋은 땅을 찾아 따로 나라를 세우는 것이 낫겠다.”
그리고는 동생과 함께 무리를 거느리고 패수(浿水)와 대수(帶水) 두 강을 건너 미추홀에 와서 살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감방친구 17-09-26 15:10
   
2. 늙은 할미가 남자로 변하고
호랑이 다섯 마리가 성 안으로 들어오고
이어서 왕의 어머니(소서노)가 죽고
도읍을 옮긴 연차의 사건이 암시하는 것은 무엇일까?

또한 해석과 달리 원문에는
夏五月 王謂臣下曰 國家東有樂浪 北有靺鞨 侵軼疆境 少有寧日 况今妖祥屢見 國母棄養 勢不自安 必將遷國 予昨出巡 觀漢水之南 土壤膏腴 宜都於彼 以圖久安之計 秋七月 就漢山下 立柵 移慰禮城民戶 八月 遣使馬韓 告遷都

必將遷都가 아니라 必將遷國이라고 돼 있다
도읍을 옮겨야 한다가 아니라 나라를 옮겨야 한다고 돼 있는 것이다

ㅡㅡㅡㅡㅡㅡ
백제 본기 온조왕
13년(기원전 6) 봄 2월, 서울에서 한 늙은 할미가 남자로 변하였다.
호랑이 다섯 마리가 성 안으로 들어왔다.
왕의 어머니가 61세로 돌아가셨다.
여름 5월, 임금이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나라의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 국경을 침범하므로 편한 날이 없다. 하물며 요즈음 요상한 징조가 자주 나타나고 어머니마저 돌아가시니, 형세가 불안하여 반드시 도읍을 옮겨야겠다. 내가 어제 순시하여 한강의 남쪽을 살펴보았는데 토지가 매우 비옥하였다. 그곳에 도읍을 옮겨 오랫동안 편안할 계획을 세울 것이다.”
가을 7월, 한산(漢山) 아래에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가를 옮겼다.
8월, 마한에 사신을 보내어 도읍을 옮길 것을 알렸다. 드디어 경계를 그어 국경을 정하였으니, 북쪽으로는 패하, 남쪽으로는 웅천(熊川), 서쪽으로는 대해(大海), 동쪽으로는 주양(走壤)에 이르렀다.
9월, 성과 궁궐을 쌓았다.
감방친구 17-09-26 15:11
   
3.낙랑은 200 년 동안 나타나지 않는다
이 기간 낙랑은 전혀 등장하지 않고 말갈만 등장하며
말갈은 북쪽과 동북쪽 국경을 계속 침입한다
이 기간에 백제는 말갈과 신라, 두 세력과 계속 전투를 치른다
서북한지역에 낙랑군이 있었다면 대체 마음대로 활동하는 말갈은 무엇이며 어찌하여 200 여년 간 등장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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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본기
온조왕
8년 (기원전 11)
가을 7월, 마수성(馬首城)을 쌓고 병산책(甁山柵)을 세웠다. 낙랑태수(樂浪太守)가 사신을 보내 말하였다.
“지난날 서로 사신을 보내고 우호를 맺어 한 집안처럼 지냈는데 이제 우리 땅 가까이에 성을 쌓고 목책을 세우니, 혹 우리 국토를 야금야금 차지하려는 계책이 아닌가? 만일 지금까지의 우호를 생각하여 성을 헐고 목책을 부순다면 의심할 바가 없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한번 싸워 승부를 내겠다.”
임금이 답하여 말하였다.
“요새를 만들어 나라를 지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떳떳한 일이다. 어찌 이 일로 우호관계에 변함이 있겠는가? 당연히 태수가 의심할 일이 아니다. 만약 태수가 강함을 믿고 군대를 일으킨다면 우리도 대비책이 있다.”
이로 인하여 낙랑과 사이가 좋지 않게 되었다.

11년(기원전 8) 여름 4월, 낙랑이 말갈을 시켜 병산(甁山)의 목책을 습격하여 부순 뒤 백여 명을 죽이고 노략질하였다.
가을 7월, 독산(禿山)과 구천(狗川)에 두 개 목책을 설치하여 낙랑의 통로를 막았다.

13년(기원전 6) 봄 2월, 서울에서 한 늙은 할미가 남자로 변하였다.
호랑이 다섯 마리가 성 안으로 들어왔다.
왕의 어머니가 61세로 돌아가셨다.
여름 5월, 임금이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나라의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 국경을 침범하므로 편한 날이 없다. 하물며 요즈음 요상한 징조가 자주 나타나고 어머니마저 돌아가시니, 형세가 불안하여 반드시 도읍을 옮겨야겠다. 내가 어제 순시하여 한강의 남쪽을 살펴보았는데 토지가 매우 비옥하였다. 그곳에 도읍을 옮겨 오랫동안 편안할 계획을 세울 것이다.”
가을 7월, 한산(漢山) 아래에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가를 옮겼다.
8월, 마한에 사신을 보내어 도읍을 옮길 것을 알렸다. 드디어 경계를 그어 국경을 정하였으니, 북쪽으로는 패하, 남쪽으로는 웅천(熊川), 서쪽으로는 대해(大海), 동쪽으로는 주양(走壤)에 이르렀다.
9월, 성과 궁궐을 쌓았다.

18년(기원전 1) 겨울 10월, 말갈이 습격을 하여 임금이 병사를 거느리고 칠중하(七重河)에서 맞아 싸웠다. 추장 소모(素牟)를 사로잡아 마한으로 보내고 나머지 적들은 모두 묻어 죽였다.
11월, 임금은 낙랑의 우두산성(牛頭山城)을 공격하려고 구곡(臼谷)에 이르렀는데, 폭설을 만나 돌아왔다.


고이왕
13년(서기 246) 여름, 크게 가뭄이 들어 보리를 거두지 못하였다.
가을 8월, 위(魏)나라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이 낙랑태수(樂浪太守) 유무(劉茂)와 삭방태수(朔方太守) 왕준(王遵)과 함께 고구려를 쳤다. 임금이 그 틈을 타서 좌장 진충을 보내 낙랑 변경을 습격하여 백성을 잡아왔다. 유무가 소식을 듣고 분노하니, 임금이 침범 당할까 두려워 백성들을 돌려보냈다.
감방친구 17-09-26 15:17
   
4. 백제는 최초 패수를 경계로 고구려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그런데도 고구려는 무려 근 400 년 동안 백제를 신경쓰지 않는다

그 400 년 동안 백제는 마한을 병합하고 말갈, 신라와 끊임 없이 싸우면서 강국이 돼 가고 있었다

이걸 고구려가 두고 본 이유는 무엇인가?

고구려와 처음으로 격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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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초고왕
24년(서기 369) 가을 9월, 고구려왕 사유(斯由, 고국원왕)가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거느리고 치양(雉壤)에 와서 주둔하며 병사를 풀어 민가를 노략질하였다. 임금이 태자에게 병사를 주어, 지름길로 치양에 이르러 불시에 공격하여 그들을 격파하고 5천여 명을 사로잡았는데, 노획한 물품은 장병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겨울 11월, 한수 남쪽에서 크게 군대를 사열하였다. 모두 황색의 깃발을 사용하였다.

26년(서기 371), 고구려가 병사를 일으켜 쳐들어왔다. 임금이 이를 듣고 패하(浿河, 예성강) 강가에 복병을 배치하고 그들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불시에 공격하니, 고구려 병사가 패배하였다.
겨울, 임금이 태자와 함께 정예군 3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침범하여 평양성(平壤城)을 공격하였다. 고구려왕 사유가 필사적으로 항전하다가 화살에 맞아 죽었다. 임금이 병사를 이끌고 물러났다. 도읍을 한산(漢山)으로 옮겼다.

30년(서기 375) 가을 7월, 고구려가 북쪽 변경의 수곡성(水谷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임금이 장수를 보내 방어하게 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임금이 다시 병사를 크게 동원하여 보복하려 했으나 흉년이 들었기 때문에 실행하지 못했다.
겨울 11월, 임금이 돌아가셨다.

4 세기 후반 백제의 국경 관문

진사왕
2년(서기 386) 봄, 국내의 15세 이상 된 자를 징발하여 관문의 방어 시설을 설치하였다. 청목령(靑木嶺)에서 시작하여 북쪽으로는 팔곤성(八坤城)에, 서쪽으로는 바다에 이르렀다.
가을 7월, 서리가 내려 곡식을 해쳤다.
8월, 고구려가 침범해왔다.
감방친구 17-09-26 15:17
   
5. 고이왕 대에 정부조직을 대대적으로 개편하여 체계를 잡는다
ㅡ 이런 일은 국력이 크게 신장하였을 때에 보통으로 생긴다

ㅡㅡㅡ
27년(서기 260) 봄 정월, 내신좌평(內臣佐平)을 두어 왕명출납에 관한 일을, 내두좌평(內頭佐平)을 두어 재정에 관한 일을, 내법좌평(內法佐平)을 두어 예법에 관한 일을, 위사좌평(衛士佐平)을 두어 친위병에 관한 일을, 조정좌평(朝廷佐平)을 두어 형벌에 관한 일을, 병관좌평(兵官佐平)에게는 지방의 병사에 관한 일을 맡겼다. 또 달솔(達率)ㆍ은솔(恩率)ㆍ덕솔(德率)ㆍ한솔(扞率)ㆍ내솔(奈率)과 장덕(將德)ㆍ시덕(施德)ㆍ고덕(固德)ㆍ계덕(季德)ㆍ대덕(對德)ㆍ문독(文督)ㆍ무독(武督)ㆍ좌군(佐軍)ㆍ진무(振武)ㆍ극우(克虞)를 두었다. 6좌평은 모두 1품, 달솔은 2품, 은솔은 3품, 덕솔은 4품, 한솔은 5품, 내솔은 6품, 장덕은 7품, 시덕은 8품, 고덕은 9품, 계덕은 10품, 대덕은 11품, 문독은 12품, 무독은 13품, 좌군은 14품, 진무는 15품, 극우는 16품이다.
2월, 명을 내려 6품 이상은 자주색 옷을 입고 은화로 관을 장식하고, 11품 이상은 붉은색 옷을 입고, 16품 이상은 푸른색 옷을 입게 하였다.
3월, 임금의 동생 우수(優壽)를 내신좌평으로 삼았다.
감방친구 17-09-26 15:19
   
6. 대방이 처음 등장한다
그런데 이 시기는 고구려 서천왕 시기(270~292)인데
정작 고구려 본기 서천왕 대에는 이와 관련한 아무 기록도 없다
앞뒤 왕인 중천왕과 봉상왕 대에도 역시 아무런 기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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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본기
책계왕
1년 (서기 286)
고구려가 대방(帶方)을 쳐서 대방이 우리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앞서 임금이 대방왕의 딸 보과(寶菓)를 부인으로 삼았기에, 임금이 이르기를 “대방은 장인의 나라이니 그 청에 응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고 드디어 병사를 내어 구원하니 고구려가 원망하였다. 임금은 고구려의 침략을 두려워하여 아차성(阿旦城)과 사성(蛇城)을 수리하여 대비하였다.
감방친구 17-09-26 15:19
   
7. 망해 없어진 한나라가 등장하고
백제의 왕이 두 대에 걸쳐 중국계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13년(서기 298) 가을 9월, 한(漢)나라가 맥인(貊人)들과 합세하여 침범하였다. 임금이 나가서 막다가 적병에게 해를 입어 돌아가셨다.

분서왕
7년(서기 304) 봄 2월, 몰래 병사를 보내 낙랑(樂浪)의 서현(西縣)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겨울 10월, 임금이 낙랑 태수가 보낸 자객에게 해를 입어 돌아가셨다.
     
감방친구 17-09-26 15:38
   
거듭 말하지만 낙랑군이 북한지역에 있었다면
왜 위나라는 현도와 낙랑에서 양동작전을 펼치지 않았는가?
감방친구 17-09-26 15:23
   
8. 위나라와 백제의 전쟁
동성왕
10년(서기 488), 위(魏)나라가 병사를 보내 쳐들어왔으나 우리에게 패하였다.

그런데 고구려가 육로와 해상을 장악하고 있어서
위나라는 사신조차 백제에 보내지 못 했고
백제는 중국의 송, 남제 등에 사신을 보내는 것도 번번이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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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로왕
18년(서기 472),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임금이 표문을 올렸다.

(중략ㅡ내용은 위나라 보고 고구려 나쁜 놈이니 때찌때찌 해달라는 것)

고구려왕 연(璉, 장수왕)에게 조서를 보내 안(安, 위나라 관리) 등을 보호하여 백제로 보내도록 하였다. 안 등이 고구려에 이르자 연이 예전에 여경(餘慶, 개로왕)과 원수를 진 일이 있다 하여, 그들을 동쪽으로 통과하지 못하게 하였다. 안 등이 이에 모두 돌아가니 곧 고구려왕에게 조서를 내려 엄하게 꾸짖었다. 그 후에 안 등으로 하여금 동래(東萊)에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여경에게 조서를 주어 그의 정성과 절조를 표창하게 하였다. 그러나 안 등이 바닷가에 이르러 바람을 만나 표류하다가 끝내 백제에 도달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임금은 고구려가 자주 변경을 침범한다 하여 위나라에 표문을 올려 병사를 요청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임금이 이를 원망하여 마침내 조공을 중단하였다.

문주왕
2년(서기 476) 봄 2월, 대두산성(大豆山城)을 수리하고 한수 북쪽의 민가를 옮겼다.
3월, 송(宋)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려 하였으나 고구려가 길을 막아 이르지 못하고 되돌아왔다.
여름 4월, 탐라국(耽羅國)에서 토산물을 바치니 임금이 기뻐하여 사신을 은솔(恩率)로 삼았다.
동성왕
6년(서기 484) 봄 2월, 남제(南齊) 태조 소도성(蕭道成)이 고구려왕 거련(巨璉, 장수왕)을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으로 책봉하였다는 말을 임금이 듣고, 남제에 사신을 보내 표문을 올리고 속국이 되기를 청하니 태조가 허락하였다.
가을 7월, 내법좌평 사약사(沙若思)를 남제에 보내 조공하려 했으나 사약사가 서해 가운데에 이르렀을 때 고구려의 병사와 마주쳐서 가지 못하였다.
8년(서기 486)
3월, 남제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7월, 궁궐을 수리하고 우두성(牛頭城)을 쌓았다.
겨울 10월, 궁궐 남쪽에서 대대적으로 군대를 사열하였다.
감방친구 17-09-26 15:27
   
9. 백제는 고이왕 시기부터 발해 서안 지역에 거점을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이게 아니라면 낙랑군, 대방군과의 기사들,
동서왕 대의 위와 전쟁을 설명할 길이 없다
ㅡ 이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삼국사기 최치원의 표문, 남제서의 기록에 교차 검증된다
감방친구 17-09-26 15:36
   
10. 만약 낙랑ㆍ대방군이 북한지역에 있었다면 고구려는 한군현이 자기들 턱밑에서 군사행동을 하는데도 가만히 뒀겠나?
백제왕을 두 명이나 죽이는 것이면 큰 군사적 격돌의 결과인데?
더구나
그 시기에 이미 고구려는 신라의 북쪽 국경을 침략하고 있었다
도배시러 17-09-26 15:38
   
위구태 관련 중국문헌 - 후한서
AD120 安帝 永寧元年 十二月,遼西鮮卑降。夫餘王遣子詣闕貢獻。- 嗣子 위구태(尉仇台)
부여왕의 아들, 위구태가 궁궐에 와서 조공했다.
AD122 安帝 延光元年 春二月 夫餘王遣子將兵救玄菟 擊高句驪、馬韓、穢貊,破之,遂遣使貢獻。
고구려, 마한, 예맥이 현도성을 포위했을때 위구태가 물리쳤다.

이때에 위구태가 눌러 앉았서 백제를 이루었을거라는 중국측의 추측이 있습니다.
     
감방친구 17-09-26 15:42
   
그렇죠
선비, 고구려에 의해 와해된 부여 세력의 일부가 훗날 백제와 결탁하고 이게 소위 말하는 요서 백제라는 얘기는 예전부터 들었습니다
     
도배시러 17-09-26 15:42
   
夫餘本屬玄菟。漢末,公孫度雄張海東,威服外夷,夫餘王尉仇台更屬遼東。時句麗、鮮卑強,度以夫餘在二虜之間,妻以宗女。尉仇台死,簡位居立。후한서 동이전
후한말(~ AD 220)부여왕 위구태가 선비, 고구려에 끼어 있어서
공손탁이 종실의 여자를 보내 부인으로 삼게 했다. 위구태가 죽은후 간위거가 부여왕이 되었다.
=> 위구태 백제 시조설의 문제점
          
도배시러 17-09-26 15:48
   
위구태 AD120 ~ AD220 220-120=100 + 왕자20세 = 120세
공손탁의 위구태는 왕자 위구태에서 100년 정도 지난 시점.
1. 위구태는 AD120년의 위구태이며, 대단히 장수하여 120세 정도에 공손탁의 종녀와 혼인
====> 완전 개소리
2. 또다른 위구태가 공손탁 시절의 부여왕이 되었고, 이전의 위구태는 현도성 방어시에 요동에 정착.
====> 당시 마한, 고구려, 예맥의 현도성 공략을 방해한 위구태에게 마한이 땅을 내줄리가 ?

위구태 시조설은 백제가 중국에게 알려준것이라 불가사의한 문제입니다.
위구태 시조설을 기준으로 한다면 백제 초기국가는 AD 120~220년 사이에 건국
               
감방친구 17-09-26 15:58
   
백제의 역사를 기술함에 있어서
소위 대방고지의 문제는
중국계 정권의 사서편찬자, 주석자들이
우리 역사와 그 역사영토에 대해 숟가락 얹으려는 개수작으로 충분히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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