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적인 곳으로서 산동(
山東)반도, 강회(
江淮)지방, 항주만(
杭州灣) 등이 꼽힌다. 신라방이 형성될 수 있었던 원인으로는 당나라의 개방적인 이민족 정책, 신라와 당나라의 지속적인 교류와 우호적 관계, 두 나라 사이의 지리적 접근성 등을 들 수 있다.
당나라 때 다양한 신라 사람들이 중국대륙으로 건너가 살았다. 주로 교역하던 상인들이 많았으나, 견당사(
遣唐使)라고 불리는 사신단, 학문을 익히러 간 유학생, 불법을 배우러 간 구법승(
求法僧), 그리고 경제적 난민과 정치적 망명객도 상당수 머물렀던 것으로 알려진다. 본래 중국에서 방(
坊)이란 성(
城) 안에 구획된 거주지역을 일컫는 용어이다. 중국의 성은 여러 방(
坊)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각 방에는 방정(
坊正)이라는 책임자가 있었다. 그러므로 신라방이란 신라인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방을 가리킨다. 신라방의 방정은 신라인이 맡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신라방의 책임자가 총관(
總管)이었다는 견해도 있다.
한편, 성 바깥에 형성된 신라인의 집단 거주지역은 흔히 신라촌(
新羅村)으로 불리었다. 신라촌의 책임자도 신라인으로서 흔히 촌장(
村長)으로 불리었으며, 여러개의 신라촌을 묶어 신라소(
新羅所) 혹은 구당신라
압아소(
勾唐新羅押衙所)라는 관청에서 통제했다고 한다.
신라방은 주로 바다 근처 도시에 설치되었기 때문에 그곳에 거주하는 신라인들은 주로 상업과 해운업을 생업으로 삼았다. 신라인의 해상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조선업과 선박수리업 등이 발달했으며, 당나라에 왕래하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교통 편의를 제공하고 현지 사정을 알려주는 역어(
譯語)와 통사(
通事)가 있었다. 당나라의 관리가 된 신라인도 다수 확인된다. 이에 비해 성 바깥 신라촌의 경우에는 농업과 어업 등 주로 1차 산업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방과 신라촌의 정치구조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신라인의 자치지구이며 일종의 치외법권(
治外法權)이 작용했다는 견해가 유력하였으나, 최근에는 이들이 당나라의 강한 통제를 받았다는 견해도 제기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신라방 [新羅坊] (두산백과)
8세기 중엽 이후 신라와 당나라의 관계가 원활해지고 양국간의 인적·물적 교류가 활발해짐에 따라 많은 신라인들이 당나라에 건너가 거주하였다. 그 중 화이허(淮河)와 양쯔강 하류지역의 신라인들은 추저우(楚州)·롄수이(漣水) 등의 도회지에 모여 살았고, 도시의 한 구역에 집중적으로 거주해 자치구역을 형성하였다.
이 구역을 신라방이라 하며, 이를 중심으로 인근의 신라인들을 통할하였다. 신라방에는 장(長)으로서 총관(總管)이 있었고, 그 아래에 전지관(全知官)이 실무를 담당한 듯하며, 역어(譯語)가 있어 교섭업무를 주관하였다.
한편 도시가 아닌 시골에 형성된 신라인들의 촌락들을 총괄하는 자치적 행정기관으로 구당신라소(勾當新羅所)가 있었고, 일정한 지역내의 신라인 사회를 관할하였다. 그 중 산둥성 원덩현(文登縣)의 신라소가 유명하였다. 신라소의 장인 압아(押衙)와 신라방의 총관은 대등한 위계였으며, 당나라의 지방관의 통제하에서 업무를 수행하였다.
신라방이 설치된 지역은 도회지였으므로, 그곳의 신라인들은 주로 상업·운송업·무역업·조선업 등의 상공업에 종사했고, 수부(水夫)·공인(工人) 등 이와 연관된 직업 종사자들이 다수였다.
이들은 중국 동해안 연안운송업 및 상업 외에도 밍저우(明州)·쑤저우(蘇州)·양저우(揚州) 등 당시 국제적인 무역항에서 아라비아·페르시아 등의 상인과 교역하였다. 그리고 신라 본국과 일본을 왕래하면서 국제무역의 중요한 일익을 담당하였다. 또한 북으로 산둥성 등주에 이르기까지 내륙수로와 연안지역에서 위에 열거한 각종 생업에 종사하며, 각지에 있던 신라인 사회와 밀접히 연관된 생활을 영위하였다. →신라소
[네이버 지식백과] 신라방 [新羅坊]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풀이
신라는 나당 전쟁을 승리한 뒤 삼국 통일을 이룩했다. 따라서 전쟁 직후에는 당과 관계가 나빴는데, 8세기 무렵부터는 다시금 관계를 회복해 두 나라 사이의 교류가 활발해졌다. 특히 신라의 유학자들은 당으로 건너가 주로 산둥 반도 근처에 모여 살았다. 이에 당에서도 자치를 허용했고, 이후 신라인들의 집단 거주 지역을 ‘신라방’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신라방이 설치된 지역은 주로 중국의 동해안 일대에 있는 도시 근처였는데, 신라인들은 상업이나 운송업, 무역업 등의 상공업에 종사하며 살았다. 이들은 아라비아나 페르시아 등의 서역 상인과 교역 활동을 벌이는 한편, 신라와 일본을 왕래하면서 국제 무역과 관련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심화
신라방의 규모가 커지자 여러 계층의 신라 사람들을 통솔하기 위한 행정 기구도 생겨났다. 당의 통제 아래에서 신라인 스스로 운영하던 자치 기관인 이곳을 ‘신라소’라고 불렀다. 또한 신라인이 세운 절을 ‘신라원’이라고 불렀는데, 당시에 지은 대표적인 절이 바로 장보고가 세운 ‘법화원’이다. 장보고는 훗날 신라로 돌아가 청해진을 설치하여 해적을 소탕하고 국제 무역을 이끄는 등 활약을 펼치게 된다. 장보고가 지은 법화원은 신라와의 연락은 물론 신라와 일본에서 온 유학생들에게 도움을 주기도 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신라방 - 당나라에 건너간 신라 사람들이 살았던 집단 거주지 (한국사 사전 1 - 유물과 유적·법과 제도, 2015. 2. 10., 책과함께어린이)
중국 광서장족자치구 백제향(百濟鄕)
백제가 중국 요서나 해안지역으로 진출했다는 중국진출설에는 다양한 가설이 제시되었다. 중국의 광서장족자치구(廣西壯族自治區) 역시 백제의 중국진출과 관련하여 일부 학자들은 백제와 관련성을 지닌다고 하면서 지명과 이곳 주민들의 생활방식을 그 근거로 들고 있다. 하지만 대다수 역사학자들은 이곳이 백제의 중국진출과 관련 지을 수 있는 자료가 희박한 것으로 판단하고 관련이 있다면 백제멸망 당시의 부여풍의 유배지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광서장족자치구백제향 [-百濟鄕]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대백제이야기), 2007., 한국콘텐츠진흥원)
신문을 보다가 이상하게 백제 무령왕릉과 닮았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소진철 교수가 방문한
광서장족자치구에 있는 옹령현 백제향 사람들은
"우리는 오래전 산동성 백마강에서 온 사람들"이라 하였는데
이와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닌지 .....
관목으로 사용된 “금송”도 일본 특산물이 아니라
중국 절강성에서도 나온다는 사실을 누누이 설명해 주어도
잘 믿지를 않는 현실이 이상합니다
동성대왕시절의 7태수가 지배한 대륙의 하북성, 산동성 백제 영토
그리고 광서장족자치구의 백제 후예들......
방문하시는 네티즌 분들은 이 사진을 보고 무슨생각을 하실지 궁금합니다
마냥 중국남조의 영향을 받았다는 생각보다는
그곳에 백제가 있다가 건너왔을 가능성은 없는지
산동성 래주만의 동성대왕 무덤이 발굴된다면 ......
출처: http://bluehua.tistory.com/381 [삶 기쁨 노래 책]
kbs일요스페셜 백제 22담로의 비밀에서 발췌.
광서 장족 자치구에서도 백제향이라는 마을에서 전라도식의
방아와 멧돌이 나왔다고합니다.
백제향의 중심지는 백제허로 이지역에 백제 사람들이 살았다고 하는
데 중국 역사서 남제서에서도 대륙백제가 나왔는데 왜
정설이 아니고 역사교과서 같은 곳에 나와있지 않은겁니까?
http://cafe.naver.com/wehistoryworld/10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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