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의 위치가 어디냐
근초고왕 고국원왕 시절의 평양은 어디고
장수왕 시절의 평양은 어디며
고구려 멸망 시의 평양은 어디냐
ㅡ 특히 멸망 시의 평양이 지금의 평양이 아닐 수 있음이 김유신 보급로를 근거로 학계 비주류에서 재기돼 왔고, 요동지역일 가능성이 높다는 견해가 재기돼 온 상황
고구려의 한성은 황해도 재령에 비정되나 이도 확실치 않음
초기 백제의 한성은 어디며
고구려에 정벌 당한 뒤 한강유역을 빼앗긴 뒤의 한성은 또 어디인가
위만조선 왕검성=고구려 평양=요나라 동경요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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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삼경
한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학설이 제기되고 있다. 하나는 지금의 황해도 재령(載寧)에 비정하는 설이다. 이와 관련되는 자료로『고려사(高麗史)』지리지(地理志)나『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등의 지지류(地誌類)에서 재령의 지명이 일명 ‘한성(漢城)’ 또는 ‘한홀(漢忽)’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하나는 지금의 서울 부근인 북한산성(北漢山城)에 비정하는 설이다.『삼국사기』지리지 한양군조(漢陽郡條)에 “본래 고구려의 북한산군인데 ‘평양(平壤)’이라고도 하였다”라고 한 것과『고려사』지리지 등에서 “남평양(南平壤)이라고도 하였다”라고 한 것에서 삼경제(三京制)에서의 수도의 명칭을 따 별호(別號)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신라 진흥왕 22년에 세운 「창녕비(昌寧碑)」에는 사방군주(四方軍主) 중 ‘한성군주(漢城軍主)’가 나오는데, 이는『삼국사기』지리지 한양군조에 고구려의 북한산군을 진흥왕이 주(州)로 만들고 군주(軍主)를 두었다고 한 것(『삼국사기』신라본기에는 진흥왕 18년으로 명시되어 있음)과도 부합되므로, 북한산군을 당시에 ‘한성’으로도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창녕비의 ‘한성’이 재령이 아님은 진흥왕이 영토 확장을 한 지역을 고려하더라도 알 수 있다. 재령 지역에서 고구려 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도시 유적이 발견되었는데, 이에 따르면 재령이 한성이었다는 설은 확고한 근거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이것이 한성을 북한산성으로 비정하는 설에 대한 완전히 부정적인 증거라고 단정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백제가 475년에 한강 유역을 고구려에게 빼앗기고 남쪽으로 천도한 후에도 다른 지역에서 여전히 ‘한성(漢城)’이라는 명칭을 사용했음을 보면, 고구려의 경우도 6세기 중엽 백제와 신라의 동맹군에게 한강 유역을 빼앗긴 뒤 한성의 위치가 변동되었을 가능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