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가 그에게 준 해운압신라발해양번사는 바다를 통해 이루어지는 발해와 신라의 외교 및 교역 업무를 당담하는 직책이다. 그가 차지한 산동반도 일대는 발해, 신라가 당나라와 교역하는 최단거리에 위치해있어, 발해와 신라로부터 오는 물자가 모이는 요충지다. 이정기는 발해와 신라와의 교역을 토대로 크게 세력을 키울 수 있었다.
이정기는 차츰 산동일대를 복속시켜 치(淄), 청(青), 제(齊), 해(海), 등(登), 래(萊), 기(沂), 밀(蜜), 덕(德), 체(棣) 10주를 확보했다. 775년에는 이웃한 이영요의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 참여하여, 당나라 최대 요충지인 서주(徐州)를 비롯한 조(曹), 박(濮), 예(兗), 운(鄆) 5주를 더 얻어 15개주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의 주변에 있는 절도사들이 7~9주 땅과 , 5만~9만 군사를 거느린 것에 비해 그는 10만이 넘는 군사력, 한반도에 버금가는 면적, 인구 540만(84만 호)을 달하는 사실상 독립된 왕국의 임금이었다. 큰 영토를 가진 당나라 최대의 강력한 번진(藩鎭)이 되었다.
번진은 당나라 시대에 절도사를 최고권력자로 한 지방지배체제다. 절도사는 특정 지역에 치소를 두고, 그 관할 하에 지역의 군사, 재정, 행정, 사법 등의 모든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다. 번진의 절도사들은 차츰 자립의 움직임을 보였고, 반란을 일으켜 당나라를 위협하기도 했다. 번진의 절도사들은 차츰 절도사 지위를 세습하면서, 번진 영내에서 거둔 세금을 당나라에 바치는 상공(上供)을 하지 않으면서 자립하고자 했다. 이정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나라와 전쟁을 한 이정기
이정기의 힘은 단순히 영토와 군사력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그가 다스린 산동지역은 당나라 전체 소금 생산량의 절반에 차지하는 거대한 염전이 조성되어 있었다. 또 당나라 곡물 생산량의 10%를 차지할 만큼 비옥한 농토가 있었다. 또한 발해 및 신라와의 무역의 이익도 누리고 있었다. 이정기는 법을 엄정하게 하고, 백성들의 세금을 균등하고 가볍게 함으로써 백성들의 지지도 얻고 있었다.
강력한 경제력과 함께 강한 군사력을 가진 이정기의 치청 번진을 당나라도 차츰 두려워하여 번진 억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정기도 당나라에 대항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구당서] ‘이보신’ 열전에는 절도사 이보신과 이정기를 두 황제로 일컫는 기록이 보인다. 이정기가 대륙을 통치하는 천자(天子)의 야심이 있거나, 황제의 위상을 가질 만큼 권력이 강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779년 이정기는 치청의 수도를 청주에서 당나라 수도 장안과 가까운 운주로 옮겼다. 운주로 수도를 옮긴 것은 당나라 수도 장안을 공격하려는 계획을 실천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당과 치청은 781년 전쟁을 하게 된다. 전쟁은 781년 성덕절도사 이보신이 죽자, 당나라 덕종(德宗)이 이보신의 아들 이유악의 절도사 세습을 인정하지 않은 사건에서 비롯했다. 이보신은 이정기의 아들 이납의 장인이었다. 이정기는 이보신 등 절도사와 동맹관계에 맺고 있었다. 따라서 이정기는 당나라가 성덕 번진을 제압할 경우 치청 역시 무사할 수 없기 때문에, 이유악의 절도사 세습을 인정하라고 당나라에 압박을 가한 것이다. 이정기는 자신의 지위를 이납에게 물려주려고 계획했다. 따라서 당나라의 번진 억압책에는 당연히 반대해야 했다. 반면 당나라는 황제의 인사권에 대해 절도사가 반기를 든 것이므로, 이를 반란으로 규정했다.
이정기는 10만 대군으로 당나라와 전투를 벌여 강회(江淮)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용교(埇橋), 와구(渦口) 등 대운하가 지나는 길목마저 점령했다. 당시 당나라는 양자강 유역에서 거둔 세금을 대운하를 통해 황하 유역에 위치한 장안으로 옮겼다. 따라서 대운하가 막히면, 당나라 중앙정부는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정기는 당나라의 목덜미를 쥔 셈이 되었다. 대운하를 손에 쥔 이정기는 당나라 수도 장안을 향한 공격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이정기의 후손들에 의한 제나라
그러나 그해 여름, 이정기가 악성종양으로 갑자기 죽고(病死) 말았다. 그리 길지 않은 49년간의 생애였지만, 그는 독립된 왕국을 만들어냈고, 그가 만든 왕국은 더욱 번영했다. 그가 죽자, 그의 아들 이납이 지위를 계승했다. 당나라가 이납의 지위 계승을 인정하지 않자, 이납은 당나라를 향한 공격을 계속하게 되었다. 782년 11월 이납은 국호를 제(濟)라 칭하고 왕위에 올랐다. 그는 문무백관을 임명, 온전한 국가의 모습을 갖춰나갔다. 이때 다른 번진들 가운데 기왕(冀王), 위왕(魏王), 조왕(趙王)을 칭하는 자들이 등장했다. 여러 번진이 당나라에 대항하자, 당나라 덕종은 이들이 당에 반기를 한 것을 사면해주고 자신의 잘못을 시인했다. 당나라로부터 번진의 독립성을 인정받자, 이납 등은 왕호를 철회하고 당나라와 전쟁을 일단 끝냈다.
왕호를 철회한 것은, 당나라의 침략을 받지 않기 위함이다. 당나라로부터 독립된 정권을 인정받았기 때문에 당나라를 멸망시킬 욕심이 없는 한 굳이 전쟁을 할 필요성도 줄어든 것이다. 이정기에서 이납으로 권력이 계승되고, 이납이 792년에 죽자 그의 아들 이사고(李師古)가 뒤를 이었다. 806년 이사고가 죽자, 이복동생 이사도(李師道)가 계승했다. 819년 이사도가 피살되어 제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765년부터 4대 55년간 이정기의 자손들은 권력을 세습하는 독립된 국가를 이룩했던 것이다.
발해와 우호적이고, 당에게 대항했던 이정기 왕국
이정기는 당나라가 시행한 절도사에 의한 지방통치 제도의 가장 큰 수혜자였다. 그는 번진의 힘을 키워 당나라로부터 독립된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했다. 그는 공식적으로는 당나라의 절도사였다. 하지만 그가 다스린 지역은 그가 전쟁을 통해 확보한 것이며, 당나라로부터 위임받아 다스린 땅이 아니었다. 따라서 그는 당나라의 통치를 거부했다. 당나라가 그의 왕국을 위협할 때, 이정기와 그의 자손들은 전쟁도 마다하지 않고 맞섰다. 대운하의 통행을 막거나, 당나라 창고를 불사르거나, 번진의 억압 정책을 펼친 자들을 암살하기도 했다.
이정기와 그의 자손들은 그들의 왕국을 유지 발전시키기 위해 당나라와의 관계를 조율했다. 이정기 왕국이 존속하던 시기 발해는 54회에 걸쳐 당나라에 사신을 보냈고 이들은 대부분 이정기의 평로 번진을 경유했다. 반면 779년 이정기가 당나라에 맞서기 시작한 이후부터 814년까지 신라는 겨우 7회 당나라와 사신왕래를 한다. 819년 당나라가 이사도를 공격할 때에 신라가 3만 명이 원군을 보낸 것은 이정기 왕국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탓도 이유가 될 것이다. 이것은 이정기가 고구려 유민출신인 탓도 없지는 않겠지만, 발해로부터 많은 말을 구입해야 했던 이정기 왕국의 현실적 욕구 탓도 있다. 이정기 왕국은 당나라와 전쟁에 대비해 매년 발해의 명마를 거래했다. 발해와는 활발한 무역을 통해 긴밀한 관계를 맺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정기 왕국은 발해와 연합하거나, 또는 당나라를 완전히 멸망시키고 고구려를 부흥시키려는 의지를 구체적으로 드러내 보이지는 못했다. 그의 왕국 구성원에서 차지하는 고구려 유민의 숫자가 많지 않았고, 현실적으로 치청 외 다른 번진들의 존재 탓에 이정기 왕국의 행동에는 제한이 많았던 탓이라고 하겠다.
그는 고선지와 더불어 고구려 유민들 가운데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이다. 고선지가 당나라의 충실한 장군으로 생애를 마친 것에 비해, 그는 당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난 독립된 나라를 건설했다는 점에서 차별화될 수 있는 인물이다. 한국사의 입장에서는 고선지에 비해 이정기를 더욱 높게 평가해야 마땅하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