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사서를 보면 고구려 장수태왕 대에 수많은 조공 기록이 있다. 그래서 이 기록들을 고구려가 중국에 조공을 바쳐, 중국의 책봉조공체제에 편입하여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는 동북공정의 주요 논리중 하나로 활용하고있다.하지만 그것이 진짜 명분과 실제가 일치하고 실체가 있는 조공이었을까?
장수태왕 23년(435년) 고구려는 북위에 사신을 보내 북위 역대 황실 계보를 바치라고 요구한다. 역대 황실 계보를 바친다는 것은 그 나라의 역사를 바치는 것으로 신하의 나라가 임금의 나라에게만 행하는 행위이다. 그 예를 북위가 고구려에 행한 것이다. 더욱이 장수왕이 죽자 북위의 고조는 소위모라는 흰색 모자와 포심의라는 상례 때 입는 옷을 입고 동쪽 교외에 나가 애도를 표하는 의식을 거행했다.
뿐만 아니라 519년 문자명왕이 죽었을 때 북위에서는 전왕 세종의 부인이자 숙종의 어머니인 영태후가 슬퍼하며 동쪽 사당에서 애도를 표시했다. 게다가 508년에는 당시 북위의 세종이 청주에 고구려 시조를 제사지내는 고려묘라는 사당을 세우기도 했다.
더욱이 문자명왕은 북위의 사신이 왔을 때 접견을 거부하기도 했다. 만약 고구려가 북위의 질서에 포함된 조공국이라면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북위는 고구려의 사신이 오면 최고의 대우를 해준다. 그래서 남제의 사신이 고구려 사신과 자신을 동급으로 대우한다고 항의하기도 하였다. 이래도 고구려가 중국 질서에 포함된 종속국이라 할 수 있을까?
그리고 고구려가 북위 왕조에게 책봉 받았다고 해서 그것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될 것이다. 당시 책봉 조공 체제는 동아시아 국제질서로 하나의 외교 관례이다. 일례로 한이 자주 조공을 바친 흉노와 돌궐 역시 중국 왕조로부터 책봉을 받은 바 있다. 흉노와 돌궐은 자주 중국을 공격하여 중국을 위기로 몰고간 종족인데(천고마비라는 고사성어는 흉노의 한나라 침탈에서 유래했다고 함), 이들 종족이 중국 왕조에 책봉을 받았다고 해서 흉노와 돌궐이 중국 왕조의 종속국인가? 아니다.
역대 중국사가들은 춘추필법이라며 자국의 불리한 기사는 숨기는 것을 사서의 기본원칙으로 삼았다. 그래서 이웃 국가의 사신이 오면 이를 무조건적으로 이웃 국가가 우리 중국 왕조에 조공을 바쳤다는 식으로 기술했다. 중국 사서에 기록된 것들이 전부 다 사실은 아니고, 그 기록이 쌍방이 아닌 일방적이기 때문에 주요사례들을 살펴봐야한다
대표적으로 한나라와 남북조 시대의 강자 북위와 서위 등은 각각 흉노와 돌궐에 조공을 바쳤다. 그런데 중국 사서에는 거꾸로 이들 종족이 중국 왕조에 조공을 바쳤다고 기록한다. 그렇기 때문에 고구려가 북위에 조공을 바쳤다, 남조에 조공을 바쳤다는 기록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다른 기록들과 교차검증을 통하여 무리가 있다고 받아들일수밖에 없다.
물론 고구려는 전연에 확실하게 조공을 바친적이 있었고 조공을 바치지 않았다고 부인하는것이 아니다
하지만 고구려가 전연에 조공을 바친 이유는 전연이 무서워서가 아니다. 그렇다고 고구려가 중국의 체제에 편입되기를 원해서가 아니다. 그리고 고구려가 조공을 바친 전연은 중국 한족과 무관한 선비족이 세운 왕국으로, 고구려가 전연에 조공을 바쳤다고 해서 고구려가 중국의 질서에 편입되었다는 말은 무식한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342년 전연의 공격으로 고구려는 환도성이 함락되고 미천왕의 시신과 고국원왕의 어머니 주씨와 왕후가 잡혀간다. 고구려는 미천왕의 시신과 왕모, 왕후를 돌려받기 위해 전연에 조공을 했을 뿐이다. 그리고 13년 후 왕모가 고구려에 돌아옴으로써 고구려는 전연에 조공을 바치지 않았다.
만약 고구려가 전연의 속국, 조공국이라면 370년 전연이 전진에게 멸망당하고 전연의 모용평이 고구려에 망명했을 때, 소수림왕이 그를 붙잡아 전진에 보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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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역사에 문외한이라서 인터넷에서 이런글을 읽었는데 진짜인가요? 지금껏 고구려가 장수왕때에 북위에 조공한것으로 알고있었는데 사실이 아닐수도 있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