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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10-28 18:29
[한국사] 고구려가 피휘를 명분으로 북위황실계보를 요구헀을까요?
 글쓴이 : 국산아몬드
조회 : 1,816  

한민족 국가의 어느 역대 왕조도 피휘를 한다고 중국 국가의 황실 계보를 달라고 한 적은 없습니다.

고려도 조선도 피휘를  했지만 황실계보를 요구한 적은 없습니다.
고구려만 북위를 상대로 황실계보를 달라고 당당히 요구를 했습니다

즉 고구려가 북위가 고구려의 속국임을 각인시키기 위해 그냥 황실 계보를 달라고 했을 수도 있단 뜻입니다.

북위가 황실 계보를 그냥 바치기 창피하니까 억지로 피휘를 핑계로 사서를 조작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당시 고구려는 유연-고구려-남조로 이어지는 대북위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던 시기였는데 피휘를 할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실제 피휘를 한적도 없습니다.
북위의 2대 황제인 명원황제(明元皇帝)와 고구려 문자명왕의 명(明)
남안은왕(南安隱王)와 고구려 안장왕의 안(安)등 겹치는 글자를 당당히 지속적으로 쓰고 있는데
고구려가 피휘를 황실계보 요구의 명분으로 삼았을 리가 없습니다

북위는 고구려의 속국이었던 겁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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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배시러 17-10-28 18:59
   
겨울 10월, 임금이 부여에 행차하여 태후묘에 제사를 지내고, 곤궁한 백성들을 위문하고, 차등에 따라 물품을 주었다.
숙신(肅愼)의 사신이 와서 자주색 여우 가죽 옷과 흰 매와 흰 말을 바쳤다. 임금이 연회를 베풀어 노고를 위로하고 돌려보냈다.

11월, 임금이 부여로부터 돌아왔다.
임금이 아우 수성으로 하여금 군사와 국정에 대한 일을 통괄하게 하였다.
12월, 임금이 마한(馬韓)과 예맥의 1만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나아가 현도성을 포위하였다. 부여왕이 아들 위구태(尉仇台)를 보내 병사 2만 명을 거느리고, 한나라 병사와 힘을 합쳐 막고 싸우니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태조대왕 [太祖大王] 69년 AD121(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2012. 8. 20., 한국인문고전연구소)
..
설득력 있는 주장이지만... 속국에 관한 부분은 문제가 있네요.
위의 내용처럼 숙신이...받쳤다 라는 유형의 문구가  북위-고구려 관계에 없습니다.
북위가 고구려에게 무언가를 받쳤다는 양측 기록이 없기 때문에 토론불가
도배시러 17-10-28 19:03
   
23년(서기 435) 여름 6월, 임금이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역대 황제의 이름을 알려줄 것을 요청하였다. 위나라의 세조(世祖)가 그 정성을 가상히 여겨서 황제들의 계보와 이름을 기록하여 보내게 하였으며, 원외산기시랑(員外散騎侍郞) 이오(李敖)를 보내 임금을 도독요해제군사정동장군영호동이중랑장요동군개국공고구려왕(都督遼海諸軍事征東將軍領護東夷中郞將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으로 책봉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장수왕 [長壽王] 23년 435(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2012. 8. 20., 한국인문고전연구소)

속국이 북위의 계보를 요구한 사례가 고구려 밖에 없다면 고구려를 동급이상으로 보는게 맞는듯하고요.
촐라롱콘 17-10-28 19:06
   
1.[[북위의 2대 황제인 명원황제(明元皇帝)와 고구려 문자명왕의 명(明)
남안은왕(南安隱王)와 고구려 안장왕의 안(安)등 겹치는 글자를 당당히 지속적으로 쓰고 있는데
고구려가 피휘를 황실계보 요구의 명분으로 삼았을 리가 없습니다]]
.
.
피휘는 묘호가 아닌 왕 또는 황제의 이름을 피하는 건데요...??
따라서 왕이나 황제 입장에서 자신의 이름자를 피해서 문자생활을 해야 하는
신하와 백성들의 고충을 혜아리고 배려하여
이름을 주로 외자로 짓고, 일상생활에서 잘 쓰이지 않는 한자를 주로 사용하는 것이
통상적인 관례였습니다.

고구려-중국보다 훨씬 더 중국과의 관계가 불평등했던 조선의 역대 국왕들도 태조,태종,세종,
세조,성종...등의 경우에서 보듯이
중국황제들과 같은 묘호를 마음대로 사용해 왔는데요....??



2.[[북위는 고구려의 속국이었던 겁니다]]
.
.
이 정도면 역사를 그냥 상상속에서 마음대로 규정하겠다는 거지요...? ^^

[[世祖時,釗曾孫璉始遣使者安東奉表貢方物, 並請國諱. 世祖嘉其誠款,詔下帝系名諱於其國,
遣員外散騎侍郞李敖拜璉為都督遼海諸軍事、征東將軍、領護東夷中郞將、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
세조(북위 태무제)시기에 쇠(고국원왕)의 증손 련(장수왕)이 처음으로 사신 안동을 파견하여 표를 올리고
방물을 바치면서 아울러 국휘를 청하였다. 세조(태무제)가 그 정성을 가상히 여겨 조서를 내려
제계(왕실계보)의 이름자를 그 나라에 내려주고 원외랑기신랑 이오를 파견하여 련(장수왕)을 도독요해제군사
정동장군 영호동이중랑장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에 배수하였다.

위의 출처는 위서 고구려전이며...삼국사기에도 고구려의 북위와 남조에 대한 조공사실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물론 상식적으로 고구려가 북위와 조공책봉관계를 맺었다면 그 외 남조를 비롯한 여타 국가들과는
조공-책봉관계를 맺을 수 없는 것이 상식적이겠지만... 고구려는 북위의 눈치를 보지 않고
북위와 적성국가인 남조와도 조공-책봉관계를 맺었고, 북위의 가상적국인 유연과도 우호관계를 유지하며
오히려 북위를 견제하면서.. 고구려의 이익을 극대화합니다.

고구려-북위관계가 다분히 형식적으로만 조공-책봉관계였을 뿐 실질적으로는 대등한 관계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를 꼬투리로 삼아 북위가 고구려의 속국이었다는 표현은 무지무지 과장되고 부풀린
표현에 불과합니다.
     
국산아몬드 17-10-29 01:50
   
피휘에 대해서는 제가 일부 못알고 있었네요.
그렇더라도 고구려가 북위의 상국이었단 견해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피휘는 상호적으로 하는 것이므로 고구려가 피휘를 했다면 북위도 했겠지만 북위는 고구려 왕실 계보를 요구안했거든요
스스로 알아서 고구려왕실계보를 파악했어요. 그것이 국제관례이기도 하고.
그래서 북위에서도 왕실계보를 줘야 하느냐에 대해 상당한 논란이 있었지만 결국 주었습니다
그러니 고구려가 북위보다 상국이란 겁니다
도배시러 17-10-28 19:07
   
60년(서기 472) 봄 2월,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7월,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이때부터 공물의 수량이 종전에 비하여 배로 늘었으며,
이에 대한 보답으로 위나라에서 주는 물량도 다소 증가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장수왕 [長壽王]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2012. 8. 20., 한국인문고전연구소)

이 부분은 긍정적일수도 있지만... 이후에 북위가 백제를 공격하는 계기가 될수도 있겟네요.
도배시러 17-10-28 19:15
   
72년(서기 484) 겨울 10월,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이때 위나라의 사람들은 우리나라가 이제 강성하다고 생각하여, 여러 나라 사신들의 숙소를 배치할 때 제(齊) 나라의 사신을 첫 번째, 우리나라의 사신을 두 번째에 두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장수왕 [長壽王]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2012. 8. 20., 한국인문고전연구소)

===> 여기서 제(齊) 나라의 사신은 남제를 뜻합니다. 남제 본기를 뒤져도 북위의 조공을 받은 기록이 없네요.
남제나 고구려나 같은 입장에 있다고 보셔도 될듯 합니다.
감방친구 17-10-28 22:43
   
북위를 고구려의 속국이었다라고 표현하는 것보다는 호구였다라고 표현하는 게 근사해 보입니다

광개토대왕 때의 후연부터 당태종까지 근 300 년은 선비족의 여러, 역대 북조 국가는 고구려의 호구, 고구려에게 좆밥이었습니다

(요ㆍ송ㆍ고려 삼강 100 년 시대의 송나라한테 갑질했던 고려보다 더 위세가 심했다고 저는 봅니다)

후연부터 북연, 북위, 북제, 북주까지 고구려에게 개길 깜도 안 되었고 깝치다가 좆나게 혼구녕 났구요 중앙에는 고구려계가 대대로 활약을 했습니다.

북위에게 조공을 참 많이 바친 왕이 고구려 시대 가운대 가장 강성했다 할 수 있는 장수왕 때입니다.
ㅡ 조공을 득실나게 바친 것도 장수왕 때,
ㅡ 북위가 가장 강성할 때도 장수왕 때,
ㅡ 북위의 중앙정계에서 고구려계가 권력을 휘두리기 시작한 것도 장수왕 때,
ㅡ 북위 뿐만 아니라 북위의 적성 국가인 유연, 남조 (송)와도 조공ㆍ책봉ㆍ우호 관계를 동시에 맺은 것도 장수왕 때,
(북위는 이걸 그냥 속수무책으로 두고 봤을 뿐이죠)
ㅡ 백제가 북위에 고구려를 같이 치자고 제의했으나 북위가
거절한  때도 장수왕 때,
ㅡ 오히려 백제와 북위가 세 차례나 그것도 수십만 병력이 맞서는 대 전쟁을 치러서 북위가 백제에게 털린 때도 장수왕 때

ㅡ 북위는 멸망할 때 (동서로 나라가 분열)까지 고구려계가 실권, 또는 권력의 중요 위치에서 활약
ㅡ 뒤를 이은 북제 (동위)와 북주( 서위)에서도 고구려계가 활발히 활동
ㅡ 북주는 북제 접수하고 고구려한테 개깝치다가 물똥 지리게 혼꾸녕 나고는 나라 망할 때까지 찌그러져 있었고
ㅡ 뒤를 이은 수나라는 주제파악 못 하고 고구려 정벌 어쩌구
허세 발광하다가  영혼까지 탈탈 털리고 이승탈출 넘버원
감방친구 17-10-28 22:48
   
장수왕이 북위에 국휘를 청하였다든지
또 조공을 참 열심히 한 왕이었다든지
ㅡ 삼국사기 내용을 보면 장수왕 시대에는 기사가 '북위에 조공하였다'가 거의 대부분입니다

하는 것만 보면 북위가 고구려의 속국이었다라는 해석이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런데 이밖의 여러 사실 정황 + 중국계 사서 특유의 춘추필법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보면

북위가 고구려의 속국이었을 가능성, 고구려의 위세에 기대어 나라를 건사했을 가능성(이는 실제 그러했고)이 충분합니다.

즉 결코 대등한 관계가 아니었다는 것이죠. 고구려가 대가리, 북위는 수족.

북위가 고구려의 힘에 기대어 나라를 건사했다면
남제는 백제의 힘을 빌려 북위를 견제했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감방친구 17-10-28 22:57
   
또 삼국사기 문제인데요
삼국사기는 그 사실의 정확성이 매우 높은 우리의 정사입니다만 그 '조공'이라는 표현에 의문이 듭니다

20 대 시절에 삼국사기를 처음으로 완독하면서
참 실망을 많이 했습니다

그 막강하다고 생각한 고구려조차 중국계 나라에 열심히 조공을 바쳤고 신라는 나라 초부터 왜에 계속 시달렸고 백제는 왜에 인질을 보냈고ㅡ

삼국사(기)는 모본인 (구)삼국사를 토대로 하되 중국의 역대 사서, 또 당시까지 남아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우리 사서 등을 교차 검증 하여 정리한 사서입니다.

만약 고구려가 스스로 적은 사서가 있다면 거기에 '조공'이라고 표현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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