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도 그걸 잘알고있는데 왜 그렇게 단정짓는지 그 근거가 무엇인지 궁금해서요. 사실 의무과정 12년만 마치면 그걸 모르는사람이 어딧겠습니냐만은 왜 그렇게만 단정하는지 궁금해서요.
가령 주나라나 일본만 따져도 수십개 국가가 있었던 곳이죠. 공후백자남들도 자기 영지로 들어가면 왕행세하던 시기였죠. 연맹왕국이라는 실체가 희미한 것보다는 봉건국가라는 이름으로 묶여있다는것도 설득력있지 않나요. 동아시아 삼국에서 유독 한국만 특이한 정치체계를 가지고있었다고 가정하는게 이상해서 말이죠.
밑에도 썼는데 같은내용 붙이자면
중 일 전부 봉건제를 겪었는데 그 사이에있던 우리나라는 그 영향이 없었다는게 신기해서 말이죠. 사실 중국은 주나라부터 봉건제였고 건너간 한반도 도래인이 일본에 봉건제를 퍼뜨렸죠. 물론 건너가서 자연발생한거라면 별 상관이 없을수도 있긴하겠습니다만...
근데 뭐 이건 추측이니까 혹시 관련해서 기록이나 확실한 증거가 있냐고 물어본겁니다.
고조선은 기록이 없으니 추정 불가하나
삼한은 단순 연맹 국가가 아니라 봉건국가였을 가능성이 있어요
ㅡ 마한의 목지국왕이 진왕으로서 마한을 지배한 것
ㅡ 변한과 진한의 왕을 마한에서 보낸 사람이 대대로 했다는 것
ㅡ 백제가 상대한 것은 특정 소국이 아니라 마한이었고
ㅡ 마한이 멸망한 뒤에도 백제에 저항하다 죽은 마한 장수가 있으며, 신라에 귀순한 마한 장수가 있으며, 고구려에 부용한 마한세력이 있는 등
ㅡ 단순히 소국연맹체가 아니라 마한이라는 하나의 정치체의 지배를 받았고 거기에 속한 사람들도 마한인이라는 정체성을
지녔다는 것으로 봉건국가였다고 볼 게재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중.. 일 전부 봉건제를 겪었는데 그 사이에있던 우리나라는 그 영향이 없었다는게 신기해서 말이죠. 사실 중국은 주나라부터 봉건제였고 서기 200 ~ 300년에 건너간 한반도 도래인이 일본에 봉건제를 퍼뜨렸죠. 그런데 정작 한반도를 건너간 봉건제 창시자들이 한반도에서는 부족연합국가 수준이었다는게 좀 이상해서요.
물론 일본 문물이나 봉건제가 일본 순수 자생문화라면 별 고민할여지는 적어지겠죠.
봉건제가 필요한게아니라 각 국가간의 사이가 병렬적이었던건지 아니면 기본적으로 한국가를 축으로 움직였는지 궁금해서 말이죠. 예전부터 궁금한게 있을때마다 많이올렸는데 제가 최초로 올린 글중 하나가 사실 우리나라의 직계시조를 따지자면 진나라가 거론되야하는데 항상 고조선만 언급되고 진국은 무시되던게 궁금해서 그것도 물어봤는데 사료부족때문이라고 그러시더군요. 그런데 그렇다해도 교과서에서도 딱히언급이없는건 문제가 아닐지...
봉건제는 feud 내지 봉(封)이라는...형식적으로 하사되는 토지 위에 세워진 제도(-ism)인데, 이는 그 이전에 중앙집권국가가 있어야 한다는 전제에 성립됩니다. 유럽의 경우는 로마(Rome)의 멸망 이후, 왜는 남북조 시대 붕괴하면서 막부(무로마치)가 들어서는 등... 중앙정권의 실질적 부재에 따라 생겨난 일종의 퇴행적인 제도입니다.
중앙집권국가가 나오기 전 여러 나라의 연계는 연맹이나 연합 방식일 수 밖에 없지요. 이는 그리스의 도시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의 경우 오랜 동안 헤게모니를 쥐는 도시국가(아테네 등)는 있었어도 그리스 도시국가 전체를 통제하는 나라는 없지요. 아마 우리 역사에서 마한이나 고조선, 부여 등 모두 주변 열국 들도 그러한 상태였을 것입니다. 동양의 경우 주나라의 봉건제가 있었다 하더라도 혈연 간 나눠먹기 식이었을 뿐이고, 유럽이나 왜의 봉건 또한 지극히 퇴행적인 정치체제였을 뿐 우리 역사에 있었으면 하는 그런 부러워할 그런 제도는 아닙니다.
그런데 삼한의 경우는
현 강단학계 통설로는 진국이 있었잖아요?
그리고 진한과 변한, 그리고 이들 소국들도 이주민들에게 조금씩 땅을 떼어준 경우구요
진한ㆍ변한의 왕을 마한에서 마한 사람을 보내 왕노릇을 시켰다는 기록도 있구요
또 진왕이라는 개념도 있구요
마한이 백제에 망한 한참 다음에도
ㅡ 백제에 저항하거나
ㅡ 신라에 귀순하거나
ㅡ 고구려에 부용한 사례 등을 보면
마한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있었구요
왜정시대 때 왜인들이 자기네가 다른 아시아 국가보다 역사발전 측면에서 앞서 있었다고 주장했던 근거로 제시한 것 중 하나가 바로 막부시대의 유사 봉건제도였습니다. 왜정시대 때 왜의 학자 중 다수가 유럽의 역사발전이 선진적이라고 보았고 이러한 선진적 역사발전 형태가 아시아에서는 나타나는 국가가가 유일하게 왜라고 했지요. 즉, 선진 유럽처럼 왜가 봉건제를 기반으로 발전하였다는거지요. 특히 이는 유물사관 관점에서 고대사회 다음 역사 발전은 봉건사회로 이어지고 그 다음 자본주의로 발전하는데, 아시아에서는 왜만이 유일하게 고대사회에서 봉건제 사회로 변화했다 뭐
그런 어설픈 주장이었고...이는 탈아입구를 꿈꿔온 왜의 희망을 잘 대변하는 흐름으로 본거지요. 그래서 봉건제가 왜가 역사발전적으로 앞서있었다는 증거였다고 주장하거나 이를 옹호하는 부류도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그래서가 아닐까 하는...즉, 봉건제가 고대사회의 연맹체보다 앞서는 체제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었고, 우리 나라 일부 학자들도 이러한 관점을 따르 경우도 있었습니다. 뭐 이런 주장 들을 좀 보다 보니...봉건제가 부러워하거나 앞선 정치체제가 아니라는 것을 얘기하고자 했었던 것입니다.
로마시대 북독일지역 즉, 게르마니아 지역은 국가가 없었던 지역입니다. 물론 초기 게르만 사회에 봉건제와 유사한 종사제도(comnitatus)가 있었지만 이 것을 프랑크 왕국 시대 때 정착된 봉건제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주나라의 봉건제는 봉작과 함께 하는 특징이 있지만, 유럽의 봉건제는 정치와는 별도로 장원제도를 기반으로 합니다. 초기 게르만 사회의 종사제도는 정치적 측면에서 중세유럽의 봉건제와 비슷한 측면이 있지만 장원제도와 같은
특징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봉건제는 정치적인 측면도 중요하지만 경제적인 면이 더 중요하지요. 유물사관에서는 바로 경제적인 중요도를 더 강조하지요. 어쨌든 유럽식 봉건주의는 막스와 같은 초기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역사적 의의가 다소 과장된 것이 아닐까 합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