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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11-01 11:01
[한국사] 조선후기 소위 실학자들의 강토 인식
 글쓴이 : 감방친구
조회 : 1,411  

조선후기 최고급 지식인들의 강토 인식의 면모를 살펴볼수 있는 글을 몇 편 한 데 모아봤습니다

이익과 정약용의 경우는
각각 동북계(공험진)와 서북계(요동)를 논하면서
실력이 부재한 현실에서 본래의 영토를 주장하는 것은 무의미하며 오히려 손실을 초래할 것이라는 견해를 취하고 있고

안정복은 지리를 논증하면서도 해당 지리를 한반도 안에서 찾고 또 비정하려 하면서 지리멸렬한 모습을 보이고있습니다 이는 정약용의 여타 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찬찬히 잘 읽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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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李瀷)의 성호사설 제1권~제2권 / 천지문(天地門)

● 두만쟁계(豆滿爭界)

북방의 국경은 두만강으로 경계선을 삼고 있다. 그런데 고려 시대에 윤관(尹瓘)의 비(碑)가 선춘령(先春嶺)에 있고 선춘령은 두만강 북쪽 칠백리 밖에 있는데 무슨 까닭으로 지난번에 국경선을 정할 때 두만강의 원류(源流)만을 찾았는지 알 수 없다. 두만이란 것은 바다로 들어가는 위치를 말한 것이니, 토문(土門)이라고 하는 곳이 바로 여기인데, 어음이 비슷해서 와전된 것이다.
백두산의 물이 이리로 모여드는데, 만일 토문에서 여러 물의 근원을 따라 올라간다면 지금 강 북쪽에 있는 지역은 모두 우리의 소유이며 선춘령도 그 안에 포함된다. 말하는 사람들은, 경계선을 논쟁할 때에 세밀히 따지지 못한 것을 탓하는데 그 말도 옳다.
그러나 오랫동안 버려두었던 것을 갑자기 회수한다 하여 찾아질 바가 아니며, 방어와 수호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장래에 큰 걱정거리가 되므로 반드시 영토를 넓히는 것만을 능사로 삼을 것은 아니다. 지금 중국과의 관계가 잘되고 있어 국경에 걱정이 없는 터에 다만 욕심만 부리고 문제가 발생할 것을 염려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옛적에 한 광무(漢光武)는 옥문관(玉門關)을 폐쇄하고 서역(西域)에서 보내는 인질을 사절하였으며, 송 태조는 도끼로 대도하(大渡河)를 그으면서, “이 밖은 우리의 소유가 아니다.” 하였는데 사람들은, 이를 원대한 생각이 있는 처사라고 하였다. 토지만 넓은 것이 영구히 안정된 방법이 아니므로 서혜비(徐惠妃)의 간한 글이 사실 깊은 생각에서 나온 것이니, 우리의 땅덩어리는 한 곳도 건드리지 못한다고 하면서 사람의 말을 거절한 양 무제(梁武帝)가 잘못된 것이다.

● 윤관비(尹瓘碑)
윤관의 비는 선춘령(先春嶺)에 있으니 두만강(豆滿江) 북쪽으로 7백 리가 되는 곳이다. 그 비에 새긴 글은 비록 호인(胡人)이 긁어버리기는 했으나 옛날 흔적이 아직도 다 없어지지는 않았다.
윤관이 육성(六城)을 설치하고 공험진(公嶮鎭)을 개설하였는데, 고령진(高嶺鎭)으로부터 두만강을 건너 소하강(蘇下江) 가에 이르면 옛 터전이 그대로 있으니 곧 선춘령의 동남쪽이요 백두산의 동북쪽이다. 그는 이만치 국경을 멀리 개척해 놓았는데, 지금 두만강으로 경계를 정한 것은 김종서(金宗瑞)로부터 시작되었다.
연전에 목극등(穆克登)이 와서 경계를 정할 적에 우리의 대표로 나갔던 사람이 윤관의 비를 가지고 옛날에 서희(徐熙)가 소손녕(蕭遜寧)에게 항쟁하듯이 해보았는지 모르겠다.
윤관이 병사령할(兵使鈴轄)인 임언(林彦)으로 하여금 그때의 일을 기록하되, “이 땅은 동으로 대해(大海)에까지 연접했고, 서북으로 개마산(蓋馬山)까지 들어갔으며, 남으로 장주(長州)와 정주(定州) 두 고을과 연접했으니 산천도 수려하고 토지도 비옥하다.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땅으로 고비(古碑)의 유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하였다.
지금 그곳이 바로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두만강 밖에 있는 것만은 틀림이 없다. 그러면 윤관의 비만이 있는 것이 아니고 윤관 전에 벌써 고구려에서 새겨 세운 비가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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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복(安鼎福)의 동사강목 부록 하권

● 마자수고(馬眥水考)

《한서》지리지에,
“현도군(玄菟郡) 서개마현(西蓋馬縣)에 마자수가 있어 서북쪽으로 염난수(鹽難水)에 들어가고, 서남쪽으로 서안평(西安平)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가는데, 2군(현도군ㆍ요동군)을 지나며 그 거리는 1천 1백 리이다.”
하고, 《통전》에는,
“마자수는 일명 압록수(鴨綠水)라고도 한다. 그 수원이 동북말갈(東北靺鞨) 백산(白山)에서 나오는데, 물빛이 오리 머리 빛깔과 같으므로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요동과 거리가 5백 리이며, 국내성(國內城) 남쪽을 지나고 또 서쪽으로 한 강과 합하니 곧 염난수(鹽難水)이다. 두 강이 합류하여 서남쪽으로 안평성(安平城)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고구려에서는 이 강이 가장 크므로 특히 천참(天塹)을 삼는데, 평양 서북쪽 4백 50리, 요수(遼水) 동남쪽 4백 80리에 있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개마산(盖馬山)이 곧 백산(白山)이니, 지금의 백두산이다. 마자수는 지금 의주(義州)의 압록강을 가리킨다. 《한서》 지리지에는 마자수와 패수가 같지 않은데, 오운(吳澐)은,
“압록강을 또한 패수라 한다.”
하였으니, 아마 ‘위만이 패수를 건넜다.’는 패수를 해당시킬 데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리라.
염난수(鹽難水)는 지금의 파저강(婆猪江)으로 일명 동가강(佟家江)이다.
《성경지》에도,
“동가강은 곧 염난수이다.”
하였다. 패수고(浿水考)와 비류고(沸流考)에 보인다.
○ 압록수(鴨綠水)에 대해서는 옛날 언자(言者)의 주장이 동일하지 않다. 고구려기에는,
“주몽(朱蒙)의 어머니 유화(柳花)가 ‘해모수(解慕漱)가 나를 웅심산(熊心山) 밑 압록강 가의 집 속으로 유인하여 간음하였다.’고 하였다.”
하고, 《응제시주》에는, 《고기(古記)》에 ‘부여성(扶餘城) 북쪽에 청하(靑河)가 있는데 그 하백(何伯)의 딸이 유화(柳花)이다.’한 것을 인용하여,
“청하는 지금의 압록강이다.”
하였는데, 잘못이다.
《고려사》 지리지에는,
“압록강은 일명 청하이다.”
하였고, 《여지승람》에도 그러하였으니, 모두 잘못을 답습해서 그런 것이다. 청하는 부여성 북쪽에 있다고 이미 말하였으니, 지금 압록강과는 남북이 판연하게 갈려 있다.
《성경지》에는,
“지금의 개원현(開原縣) 옛 부여(扶餘) 지경에 청하가 있는데, 서쪽으로 흘러 요하(遼河)에 들어간다.”
하였으니, 아마 이 강은 옛이름이 오히려 있었는 듯하다.
《삼국유사》에는,
“요수(遼水)는 일명 압록강인데, 지금은 안민강(安民江)이라 한다.”
하고, 호 삼성(胡三省)은,
“지금 사람은 압록강을 혼동강(混同江)이라 한다.”
하고, 주자(朱子)는,
“여진(女眞)이 일어난 곳에 압록강이 있는데, 또한 혼동강이라고도 한다.”
하였으니, 대개 옛날 동북쪽의 물은 압록(鴨緣)으로 이름한 것이 많았던 모양이다. 주자는 또 압록강을 천하 3대강(江)의 하나로 삼아 황하(黃河)와 함께 칭하였는데, 지금 압록강을 보건대 어찌 황하와 비견할 수가 있겠는가? 동북쪽의 모든 강은 다 흑룡강(黑龍江)으로 들어가 동해(東海)에 쏟아지는데, 더불어 비할 수가 없이 크니, 주자가 칭한 것은 아마 이것을 가리킨 듯하다.
압록이란 이름이 중국 책에 나온 것은 수(隋)ㆍ당(唐)이 군사를 일으킬 때부터 비로소 보이는데, 대개 한(漢)ㆍ위(魏) 때에는 고구려가 요동 동북 지경에 있었기 때문에 중국이 군사를 출동하면 항상 동북 지경에서 시작하였으니 ‘관구검(毌丘儉)이 현도(玄菟)로 나왔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수ㆍ당 때에는 고구려가 평양에 도읍하였기 때문에 중국이 군사를 출동하면 동남쪽으로 해서 압록강을 건넜던 것이다.



● 패수고(浿水考)

《한서》 지리지의 낙랑군(樂浪郡)ㆍ패수현(浿水縣) 아래에 반고는 자주하기를,
“물이 서쪽으로 증지현(增地縣)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하였는데, 후세의 사전(史傳)이 증거가 없으므로 언자(言者)들의 주장이 한결같지 않다. 혹은 평산(平山)의 저탄(猪灘)이라 주장하고, 혹은 평양(平壤)의 대동강(大同江)이라 주장하고, 또는 의주(義州)의 압록강(鴨綠江)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그래서 국중에는 삼패설(三浿說)이 있게 되었으니, 어느 설을 따라야 할지 모르겠다. 두루 상고해서 갖추 논하겠다.
저탄이라 주장한 자는 다음과 같이 생각한 것이다.
백제기에,
“온조(溫祚) 13년 강역(疆域)을 정할 때 북으로는 패하(浿河)에 이르고, 남으로는 웅천(熊川)에 이르렀다.”
하고, 《고려사》에,
“평주(平州) 저천(猪淺)을 패강(浿江)이라고도 한다.”
하고, 《여지승람》 평주 저탄(猪灘) 조에도,
“평양(平壤) 패강(浿江)은 고구려 도성 곁에 있는데, 어떻게 백제의 경계가 될 수 있었겠는가? 이른바 패하(浿河)는 아마 저탄인 듯하다.”
하였으니, 이것이 저탄을 패수라고 칭한 하나의 증거이다.
《고려사》에,
“김관의(金寬毅)가 ‘당 숙종(唐肅宗)이 천보(天寶) 12년에 바다를 건너 패강 서쪽 포(浦)에 이르렀다.”
하였으니, 포는 곧 전포(錢浦)요, 전포는 지금의 개성부(開城府) 서쪽 벽란도(碧瀾渡)에 있고 벽란도는 곧 저탄의 하류이니, 이를 패강이라 칭하는 것이 마땅하다. 숙종이 동쪽에 왔다는 설은 비록 황탄(荒誕)하여 믿을 만한 것이 못되지만, 어찌 지명까지 아울러 그르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저탄을 패수라고 칭한 두 가지 증거이다.
고구려기에,
“평원왕(平原王) 13년에 패하(浿河)의 언덕에서 사냥하고 50일 만에 돌아왔다.”
하였다. 이때 고구려가 평양에 도읍하였으니, 그것이 대동강이 아님은 분명하다. 또 백제기에,
“고구려와 백제의 싸움은 패수 가에서 많이 있었다.”
하였으니, 아마 〈패수가〉 양국의 경계에 있었기 때문이리라. 또
“성왕(聖王) 원년에 고구려 군사가 패수에 이르매, 왕이 장수를 보내 출전하여 그를 물리쳤다.”
하였으니, 이것이 저탄을 패수라고 칭한 세 가지 증거이다.
이 세 가지 증거 외에도 《수경(水經)》에,
“패수는 낙랑(樂浪)의 누방현(鏤方縣)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임패현(臨浿縣)을 지나 동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
하였다. 역도원(酈道元)의 주가 아래에 보인다.
상고하건대, 임패현이란 이름은 어느 때 정해졌는지는 모르나 《여지승람》을 보면, 우봉현(牛峯縣) 흥의역(興義驛)의 옛이름이 임패(臨浿)이니, 《수경》에서 칭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것 또한 저탄을 패수라고 칭한 방증(旁證)이 될 만하다.
대동강이라 주장한 자는 다음과 같이 생각한 것이다.
역도원의 《수경주(水經注)》에,
“위만(衛滿)이 패수로부터 조선에 이르렀다 하니, 만일 패수가 동으로 흐른다면 패수를 건넜을 리가 없다. 내가 번사(番使)에게 물었더니, 성(城) 상고하건대 평양성(平壤城)을 가리킨다. 이 패수는 북쪽에 있다 한다. 그 강이 서쪽으로 흘러 낙랑군(樂浪郡) 조선현(朝鮮縣)을 경과한다. 그러므로 《지리지》에 ‘패수가 서쪽으로 증지현(增地縣)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하였으니 《수경》이 착오다.”
하였으니, 이 주는 《수경》에 “패수가 동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는 말을 착오라 하였으니, 이 주가 옳다. 이것은 대동강을 패수라고 칭한 하나의 증거이다.
《당서》에,
“평양성은 한(漢)의 낙랑군인데, 산세를 따라 굽게 성곽을 쌓고 남쪽으로 패수에 다다랐다.”
하고, 또,
“등주(登州)에서 동북쪽으로 바닷길을 따라가 남쪽으로 해연(海壖)을 끼고 패강(浿江) 어구와 초도(椒島)를 지나면 신라(新羅) 서북쪽의 〈장구진(長口鎭)〉에 이른다.”
하였다. 초도는 지금 풍천부(豊川府) 북쪽 40리 바다 가운데 있으니, 이것이 대동강을 패수라고 칭한 두 가지 증거이다.
신라가 당(唐)과 함께 고구려를 평정하고 남쪽 경계를 정하였는데 현종(玄宗) 개원(開元) 23년, 성덕왕(聖德王) 34년에 당이 패강 이남의 땅을 주었으므로 이에 신라의 땅은 비로소 북쪽으로 지금 중화(中和)ㆍ상원(祥原)의 땅을 한계로 하였고, 진훤(甄萱)이 고려 태조에게 준 글에,
평양의 누대에 활을 걸고 / 掛弓平壤樓
패강의 물을 말에게 먹인다 / 飮馬浿江水
한 글귀가 있으니, 이것이 대동강을 패수라고 칭한 세 가지 증거이다.
이상 두 설은 각기 증거한 바가 있고 증거도 어긋나지 않으나 두 패수는 다 평양 이남에 있다. 그런데 평양은 조선의 도읍지이고, 《한서》에서는,
“조선과는 패수로 경계를 하였다.”
하였고, 또,
“위만이 동쪽으로 도망하여 새(塞)를 빠져나가 패수를 건넜다.”
하고, 또,
“한(漢)의 사신 섭하(涉何)가 조선으로부터 돌아와 경계에 이르러 패수에 다다랐다.”
하고, 또,
“순체(荀彘)가 요동(遼東)으로부터 군사를 내어 조선 패수 서쪽의 군사를 격파하였다.”
하고, 또,
“조선 태자(太子)가 입조(入朝)하려다 패수를 건너지 않고 다시 돌아갔다. 체(彘)가 패수 가의 군사를 깨뜨리고 전진하여 성 아래에 이르러 그 서북쪽을 포위하였다.”
한 것은, 모두 패수를 건넌 뒤에야 조선의 왕도(王都)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때문에 《여지승람》과 오운(吳澐)의 《동사찬요(東史纂要)》에서는 ‘위만이 패수를 건넜다.’는 설을 의심하고 압록강을 패수라고 하였는데, 후인들도 또한 그 설을 많이 따른다. 그러나 그 설도 착오이다.
《한서》 지리지에 의하면, 서개마현(西蓋馬縣)에 마자수(馬眥水)가 있으니, 바로 지금의 압록강이다. 패수와 마자수가 만일 한 강이라면 어찌 나누어 말하였겠는가?
상국(相國) 남구만(南九萬)의 《약천집(藥泉集)》에도,
“《한서》 지리지 요동 번한현(番汗縣)에 패수(沛水)가 있으니, 패(沛)와 패(浿)는 글자는 비록 다르나 음이 같으니, 아마 한 강인 듯하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패(沛)와 패(浿)를 비록 혼용한다 하더라도 《사기》와 《한서》두 책에서 누차 패(浿)라 칭하고 끝내 패(沛)라고 말하지 않았으니, 어찌 모두 착오로 그랬겠는가? 이것은 믿을 수가 없다.
《성경지》에는 《요사(遼史)》를 인용하여,
“요양현(遼陽縣)은 한(漢)의 패수현(浿水縣) 북쪽에 있다. 패수는 어니하(淤泥河)라고도 하고 점우락(蔪芋濼)이라고도 한다.”
하였는데, 《일통지》에서도 그것을 따라,
“지금은 어니하라고 칭하는데 해성현(海城縣) 서남쪽 60리에 있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한서》 지리지에,
“요동군(遼東郡)의 서안평현(西安平縣)은 마자수가 바다로 들어가는 바로 그곳에 있다.”
하였으니, 압록강 이북은 모두 요동에 속하였는데, 낙랑의 여러 현(縣)이 어떻게 그 사이에 끼어들었겠는가? 대저 《요사》 지리지에는 믿을 수 없는 것이 많다. 《요사》 지리지에,
“숭주(崇州)는 본래 한(漢)의 장잠현(長岑縣)인데, 지금 요영(遼陽) 동북쪽 1백 50리에 있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장잠(長岑)은 뒤에 대방(帶方)에 속하였으니, 그 땅이 평양이남에 있었는데, 어찌 요양의 동북쪽에 있다고 했을까? 또,
“자몽현(紫蒙縣)은 본래 한의 누방현(鏤方縣)인데, 지금의 개원(開原) 지경 안에 있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개원은 압록강 북쪽 1천 리쯤에 있고, 요동과 현도 두 군이 그 중간에 가로 놓여 있는데, 낙랑이 어떻게 그 땅을 가졌겠는가? 이것은 비록 중국의 책이지만, 전연 믿을 것이 못된다.
그렇지 않으면, 낙랑이 뒤에 요동 땅에 교설(僑說)되고 그때 또한 옛날
고을 이름을 설치하였는데, 후인들이 그릇 한(漢)이 설치한 것으로 알았던가?
어떤 이가,
“참으로 자네 말과 같다면, 여러 설들은 취할 만한 것이 못되는데, 혹시 따로 그 땅이 있다는 말인가?”
하기에 나는,
“여러 설이 남김없이 밝혔으니 다시 어떻게 별도의 의논을 제기하겠는가? 어리석은 나의 견해로는 여러 설 중에 대동강을 패수라고 칭한 설이 가장 명백하고, 저탄을 패수라고 칭한 것은 우리 나라 사람이 따로 칭한 것이며, 그 나머지는 모두 옳은지 모르겠다.”
하자,
“대동강을 패수라고 칭한 설은 과연 어찌해서인가?”
하기에 나는,
“《사기》와 《한서》의 문세(文勢)를 가지고 말하겠다. 그 말에 ‘조선(朝鮮)이 관리(官吏)를 두고 장새(障塞)를 쌓았는데, 진(秦)이 요동(遼東)의 변경에 소속시켰다.’ 하고, 또 ‘노관(盧綰)이 연(燕)이 쌓은 요동 장새가 멀어서 지키기 어렵다 하여 다시 요동의 옛 변방 요새를 고쳐 쌓고, 패수에 이르러 경계를 삼았다.’ 하고, 또 ‘위만(衛滿)이 옛 진(秦)의 공지(空地)인 상하장(上下障)을 구해 살았다.’ 하였으니, 이것은 모두가 일반 문세이다.
그 ‘변경’이라느니 ‘연이 쌓은 장새는 멀어서 지키기 어렵다.’느니 ‘옛 진의 공지를 구해 살았다느니’ 한 것은 모두 지금의 해서(海西) 지방인 것 같고, 그 중간을 비어둔 것은 지금 서북 두 나라의 경계와 같았던 것이다.
지금의 평양(平壤)은 기자(箕子)의 도읍지인데, 지금의 한양(漢陽)에도 평양이란 이름이 있다. 《삼국사기》 신라기에 ‘김헌창(金憲昌)의 아들이 자립하여 평양에 도읍하였다.’ 하고, 《삼국사기》지리지에 ‘백제의 근초고왕(近肖古王)이 고구려 남쪽 평양을 취하여 도읍하였다.’ 하였는데, 모두 지금의 한양을 가리킨 것이다. 한양을 또 평양이라고 칭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생각건대, 전국(戰國)의 말기에 기씨(箕氏)가 나라를 잃고 동쪽으로 지금의 한양에 옮기고서 옛이름을 그대로 칭한 것이리라. 그렇다면 위만이 도읍한 평양도 지금의 한양인 것이다. 만일 이와 같다면 패수가 지금의 대동강임이 틀림없다. 또 상고하건대, 《한서》 지리지는 모두가 당시 전벌(戰伐) 및 강역을 경계지을 때 편찬한 것이기 때문에 그 글이 모두 진실하고 답험(踏驗)한 말이요, 멀리서 잘못 전해 들은 것이 아니다.
열수(列水)는 지금의 한강(漢江)인데, 열구현(列口縣)은 열수가 바다에 들어가는 바로 그 어귀라 하니, 지금의 강화(江華) 지방이다. 강화를 옛날 혈구(穴口)라 칭하였으니, 아마 열구(列口)의 잘못인 듯하다. 열수고(列水考)에 보인다.
전후 제유(諸儒) 중에 패수를 논한 것은 하나뿐이 아닌데, 누구나가 지금의 평안(平安) 한 도를 우리의 강역으로 보고 또는 지금의 평양을 위씨(衛氏)의 도읍지로 삼고서는, 별도로 패수를 찾으니, 이는 그 실지를 얻지 못하고 더욱 후인들의 의심을 자아내게 하는 것이다.”
하였다.
[주-D001] 교설(僑設) :
교치(僑置)와 같다. 딴 이름을 빌어 세우는 일. 이를테면 딴 지방 이름을 그대로 옮겨 세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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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丁若鏞)의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제일집시문집 제십이권

●요동론(遙東論)

고구려 때는 강토를 멀리 개척하였다. 그 북부는 실위(室韋)[지금의 만주로 또한 북부에 들어있다]에 접했고,  그 남부는 개모(蓋牟)[지금의 산해관(山海關) 이동이 모두 그 땅이다]에 이르렀다.

고려 이래로부터 북부남부는 모두 거란이 차지하였고, 금, 원 이후 다시는 우리 것으로 되찾지 못하였고 압록강 일대가 천연의 경계를 이루게 되었다.
우리 세종, 세조 때에 이르러 마천(摩天) 이북으로 천리의 땅을 개척하고 육진을 바둑돌처럼 설치하였으며, 밖으로는 창해에 닿았다. 그러나 요동은 끝내 되찾지 못하였다. (다른 여러) 논자는 그것을 유감으로 여긴다.

신(臣)은 요동을 되찾지 못한 것이 국가에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요동은, 화이(華夷)가 왕래하는 요충지이다. 여진은 요동을 지나지 않으면 중국에 도달할 수 없고, 선비, 거란은 요동을 얻지 않으면 그 적을 제어할 수 없으며, 몽고는 요동을 지나지 않으면 여진과 통할 수 없다. 진실로 삼가고 온순하여 무(武)가 없는 국가가 요동을 차지하고 있다면 그 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화친하면 사신을 맞아들이는 큰 비용과 병정을 징발하는 부역에 한 나라의 힘이 고갈되어 지탱할 수 없다. 화친을 잃으면 사면이 적이니 병화가 없는 때가 없을 것이므로 한 나라의 힘이 고갈되어 지탱할 수 없다.

이조(二祖 : 태조와 태종?) 때는 대명이 북경에 도읍을 정하여 요동과 심양의 사람들이 기내의 백성이 되었으니 이를 엿보아도 차지할 수 없었다. 설령 요동과 심양이 오히려 여러 오랑캐에 속했다 해도 이조(二祖)께서 이를 취하지 않았을 것이니 어째서인가? 척박한 황무지로 이득이 없는 땅을 얻고 천하에 적을 늘리는 행동은 영명한 군주라면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 당 때에도 오히려 주, 진 때의 옛 일을 살펴 도읍을 관중에 정한 후에 위세를 얻어 천하를 제어하였다. 고로 중국의 지략가들이 논한 바는 오로지 동서 이경(낙양과 장안)의 우열뿐이었다.

대명의 성조 문황제는 세상을 뒤덮을 뛰어난 지략이 있었으나 강성한 몽고와 여진을 멀리서 제어할 수 없음을 알았기에 마침내 대명[부](大名[府] : 北京)에 귀속시켰다. 이후 중국의 주인은 이를 바꾸지 않았고 대명[부]는 중국의 도읍이 되었다. 이러한즉, 요동에 대해 다시 말할 수 있었겠는가?

또 우리나라의 지세는 북으로 두 강[두만과 압록이다]을 경계로 삼고, 삼면이 바다에 둘러싸여 강역의 형태가 혼연히 천혜의 요새이니 요동을 얻는 것은 반대로 군더더기를 붙이는 것이다. 어찌 유감으로 여기겠는가?

그렇지만 진실로 나라가 부강하고 병사가 강성하여 하루아침에 천하를 다툴 뜻이 있고 한걸음이라도 중원을 엿보려 할 경우에는, 먼저 요동을 얻지 않고는 할 수 없다. 어쨌든 서로 요동을 얻고 동으로 여진을 평정하고 북으로 경계를 넓혀 흑룡강의 근원까지 올라가고 우측으로 몽고와 버틴다면 충분히 큰 나라가 될 수 있으니 이 또한 하나의 통쾌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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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제국 17-11-01 11:03
   
그냥 한사군 한반도설은 기자숭배 사상 때문에 생겨난거라고 보시면 됩니다
     
감방친구 17-11-01 11:04
   
잘 알고 있습니다
도배시러 17-11-01 16:52
   
실학자들은 역사를 거꾸로 추적해 나가는 방법이네요. (당시의 이념으로 역사를 재구성)
한사군 한반도설의 주장자들은 위만조선부터 역사를 시작하는 방식이구요.
(일제를 기준으로하는 역사재구성)

중국고대사부터 시작할려는 의지가 없는게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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