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음력 6월 5일~6일
용인전투
전쟁발발 약 두달이 못된 시점
그동안의 전투에서 계속해서 패배만 반복하던 조선군.
해유령에서 빛과 같은 승전보를 올렸지만,
작은 실수로 인하여 승전의 주인공인 부원수 신각을 참수해버리면서
조선육군의 사기는 걷잡을 수 없게 추락한다
뭔가 전환점이 필요했다
그리고 때마침 조선군의 대대적인 반격이 시작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전라도의 주력병력과
경상도, 충청도의 패잔병을 합쳐서 만든
3도근왕군
이광, 곽영, 윤선각, 김수, 권율, 백광언, 이지시, 이경복, 이지례, 윤국형, 식익, 유옥, 유세옥, 김충민, 박태고, 정기룡, 강만남, 김경로, 황진, 이광인, 정연 등
엄청난 장수진과
그 수가 무려 8만에 육박하는 병력
예상치 못한 대병력에 당황한 왜군은
우선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방어를 위해 출진하였다
와키자카가 급히 끌어모은 병력은 약 1600여명이었다
하지만 이 덩치만 큰 대병력은
종이 호랑이였다
급조된 통합부대였기 때문에 제대로 된 보급선도 준비되지 않았었고,
병사들은 물론 오합지졸이었고 장수들의 지휘역량도 미달이었다
그리고
광주목사 권율은 아군의 사기를 축적하면서 조정의 명을 받아 움직이자는
신중론을 내세웠으나,
다른 장수들의 산성 농성 의견에 막히는 등 의견 합의도 되지 않았다
음력 6월 5일 조선군이 초기 작은 교전에서 왜군 5명을 베었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총사령관인 전라도 순찰사 이광은
전병력의 돌격을 명령했고,
광주 목사 '권율'을 비롯한 여러 제장들이 반대하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 접전에서
조방장 백광언은 단신으로 23명의 왜병을 베는 등 분전하였지만,
결국 백광언을 비롯한 이지시, 이지례, 이광인, 정연
5명의 장수를 잃었고 병력도 큰 피해를 입었다
결국 사기가 꺾여 한차례 후퇴한다
다음날, 음력 6월 6일 조선군이 밥을 짓는 때를 노려
왜군이 기습을 가했고
이광을 비롯한 지휘부가 도주하자 병력 역시 뿔뿔히 흩어지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약 천여명의 전사자를 내고 말았다
다행히도 전사자가 전체에 비하면 적은 편이라
대다수의 병력은 무사했지만,
이 병력이 무사히 한양을 탈환하고 왜군의 보급선을 끊었다면
이미 내륙 깊숙히 들어와 있던 왜군은 큰 피해를 입었을 확률이 높으며,
그렇게 되었다면 전쟁은 어떻게 흘러갔을지 모를 일이다
이광은 결국 이 전투의 책임을 물어 파직되어 유배되었으며,
권율은 이 전투의 실패를 반면교사 삼아 훗날 큰 활약을 보인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렇게 기세등등했던 3도근왕군은 허무하게 와해되고 말았고
조선군이 한양을 탈환한 것은 1년 뒤인 1593년 음력 5월이 되어서였다
훗날 당시 재상이었던 류성룡은 이 전투를
"흡사 봄놀이같았더라" 라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