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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11-08 19:17
[한국사] 내몽골지방 소위 '고려성' 떡밥에(펌)
 글쓴이 : 고이왕
조회 : 2,171  

내몽골지방 소위 '고려성' 떡밥에 관해 역사


                                                                 

 

- 1966년에 작성된 『中華民國地圖集』의 일부(한자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어야 함)


꽤 오래전부터 떠돌던 이 떡밥은 잊을만하면 식지 않고 되살아난다. 여기에 대한 간단한 결론을 미리 내리자면, 사실 위 지도 상단의 좌측~중앙 부분에 그려진 장성 노선들은 현지 몽골인들이 칭기즈칸장성[成吉思汗壘城]·고린성[高麗城·뜻은 아래 참조] 등으로 불러왔음에도, 위 지도가 그려지기 훨씬 전부터 많은 학자들은 이 유적을 금(金)나라의 계호(界濠)로 추정해왔고, 발굴조사도 이뤄져서 금 계호 유적으로 판명되었다.[참고]


일찍이 금 계호 유적에 대한 발굴 조사결과까지 인용해서 이것이 왜 금 계호 유적인지를 설명하고자 했으나, 시간상 그것이 어려울듯하다. 다만 이것이 왜 고구려와 연관성이 희미해보이는지는 망각하기 전에 정리해두고자 짤막하게 남겨놓는다.



지도 좌측 상단에 파란색으로 표시해둔 "고려성자(高麗城子, Koreachengtzu)"라는 지명은 이 떡밥을 물고 나타나는 사이비 신봉자들이 금과옥조처럼 취급하여 들고나오는 핵심근거이다. 문제는 이 지명이 표기된 지도는 유독 1930~40년대에 작성된 만주괴뢰국 지도와 이를 참조하여 만든 미육군 정보국이 작성한 지도 및 대만(중화민국)에서 작성된 지도들에 한정된다. 근래의 중화인민공화국에서 발간한 지도에서는 전혀 발견할 수 없는 지명이다.


물론 이런 지적에 대해 사이비 신봉자들은 전가의 보도처럼 "중공측이 고구려사를 왜곡하고자 지명을 바꿔놓았다"는 근거 불명의 주장으로 이를 대신한다. 물론 그들의 이러한 주장은 근거가 없어서 논증할 수 없는 것이기에, 이에 반론을 할 수 있는 논거를 마련할 수는 없는 법이다.


일부에서는 요동반도 일대 및 압록강 유역에서 발견되는 고려성·고력성(高力城) 등등으로 불리던 여러 산성들이 실제로 고구려의 성곽유적으로 판명된바가 있음을 들어 만주괴뢰국 지도 등에서 보이는 내몽골 지방의 연관지명들도 고구려와 필연적인 상관관계를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이 지명들이나 그 주변에서 발견되는 고대 유적들이 실제로 고구려의 유적들과 어떠한 상관관계에 있는지는 전혀 다루질 않으며, 문헌상으로도 고구려가 이 지역까지 진출하였음을 입증할만한 타당한 근거들을 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당시 고구려가 이 일대까지 진출하였다는 주장의 근거를 이 지명으로 대신하는 순환논증을 반복하는 오류를 저지른다. 학술적인 접근을 하고자한다면 응당 전래되는 말과 지명만 가지고 판단할 것이 아니라 그를 입증하는 사료적 근거를 갖춰야한다는 기본 명제 자체를 받아들이질 못한다.



불행한 일은 이 상한 떡밥을 북괴 어용학자들이 물어버렸다는데 있을 것이다. 사실 대동강문명설이나 혹부리의 솔방울수류탄드립마저 '역사적 사실'로 다루는 북괴 어용사가들의 수준은 남한의 사이비들과 큰 질적 차이가 없긴 하다. 다만 사회주의국가들이 역사학을 '사회과학'으로 다루는 특징 때문에, 아래에서도 살펴보겠지만 내용적 측면에서는 수준이하의 뻘글 수준이라할지라도, 일단 남한의 사이비 신봉자들과는 달리 형식적이나마 학술적인 형태의 글을 발표하여 주장을 한다는 점이 다를 것이다.


최초로 내몽골 지역의 '고구려성' 존재를 주창한 이는 괴뢰로동당의 '주체적 지도'를 충실히 이행하는 어용학자 손영종이다. 그는 북괴 정권이 한국사 전체를 각 왕조별로 엮은 전집인 『조선단대사』편찬의 고구려사 부분을 맡았는데, 여기에서 내몽골 지방에 '고구려'관련 지명이 존재하며 이는 고구려 영토가 내몽골에 이르렀음을 입증하는 확고한 증거(...)라고 주장했다. 『조선단대사』의 고구려사편이 출간된 무렵에 고고학자들이 편찬한 고구려성 유적들을 정리한 책에서는 이러한 주장이 반영되지 않았으나, 이후 『조선고고연구』에는 이러한 손영종의 주장이 '정설'(...)이 되었는지, 오철민(「고구려장성의 분포상태와 그 특징」·「고구려장성의 축조형식에 대하여」)이나 김창호(「고구려평지성의 축조형식」)의 논문에서 내몽골의 고구려 유적을 언급하는 모습들이 관찰된다.



손영종은 내몽골의 고구려 연관 지명들이 왜 고구려 성곽인지를 아래와 같이 서술했다.


 장성방위체계가운데서 제일 서쪽에 있는 장성은 대흥안령산줄기 동남기슭 눈강의 지류인 낙민하의 오른쪽기슭에서 시작하여 치치하얼의 서북, 포특합기의 동남을 거쳐 우란호터시 서북부근부터 대흥안령산줄기를 따라 서남으로 흥안맹, 철리목맹, 소오달맹의 파림좌기, 파림우기, 극십극등기, 달이호(달라이노르)부근까지 뻗어있는것이다. 중간중간에 없어져서 끊어진 곳들이 있으나 본래는 하나로 이어진 장성으로서 총 연장길 이 1,000㎞에 달한다.

 이 장성은 지형지세로 보아서는 더 남쪽 차하르맹의 정람기(正藍旗), 란하상류지대까지 뻗어있었다고 생각된다. 이 장성은 대체로 두줄기의 장성성벽이 평행선으로 나가면서 그 사이는 움푹 꺼져 들어가게 한 구조를 가지고있어서 적의 기병이 마음대로 넘어오지 못하게 하는것을 중요사명으로 한것이다. 도간도간 적대가 있고 또 장성에 맞달린 보루가 있으며 장성안쪽 가까운 곳에는 좀 큰 방위성들이 있다.


 이 장성은 금나라의 《계호(界濠)》라고 하며 그것이 더 서쪽 내몽고자치구의 남변부근으로 련결되여있었다고 한다. 한편 북쪽에서는 아르군(액이고납)하기슭에서 현 몽골공화국쪽으로 뻗은 720㎞가량 되는 《계호》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계호》에 대해서는 축조기사가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그것은 우연한것 이 아니라 대흥안령산줄기와 그 남쪽 사극사로산줄기 의 장성은 지방주민들이 《고려성》이라고 부르는것처럼 고구려때에 축조한것이고 금나라는 그것을 얼마간 수축하고 연장하여 국경을 지키기 위해 고을성 등을 쌓거나 보수하기만 하였기 때문일것이다.* 지방주민들은 이 장성동쪽에는 고려(고구려)사람들이 살고있었다고 전하고있다.

* 《대금국지》권24 장종황제본기 태화 원년(1201년) 겨울조 기사에는 《경계를 준설하었는데 깊이와 너비가 각각 세길이고 동쪽으로는 고려에 접하고 서쪽으로는 하나라경계에 이르렀는데 수천리구간에 둔을 늘여놓고 그들(서하, 서료, 몽골 등. 인용자)이 다시 오는것을 막았다》[하나라는 송나라때 원호(元昊)가 세운 나라(1038~1227년)이다. 서료는 료나라의 잔여세력이 세운 나라(1124~1201 년)이고 몽골은 1147년에 세운 나라이다]고 하였다.

 여기서는 마치도 고려접경지대부터 서하국경까지 《계호》가 있는것처럼 썼으나 그것은 지나친 생략방법으로 쓴것이다. 고려와의 접경지대에있는 《계호》는 오늘의 연변자치주에 있는 장성유적들을 가리키고있다.


 여기서 주목되는것은 새로 굴설하었다고 한것이 아니라 준설 즉 이미 있는것을 더 깊이 파서 그 깊이와 너비를 보장하였다고 쓴것이다.

 대흥안령산줄기부근의 《계호》나 연변자치주의 《계호》는 그 형태로 볼 때 참호가 있고 변장(장성)이 있고 보루가 있는 점에서 일치 한다고 하였다(《료해문물학간》 1987년 1기 , 107페지).

 그린데 연변장성의 C¹⁴수치는 그것이 대략 495년경에 건설되었다는것을 립증하고있다. 또 대흥안령산줄기부근의 장성유적도 고구려가 지두우땅을 차지하였던 5세기말경에 축조되였다고 보인다. 따라서 두 장성유적은 다 고구려때 처음 쌓은것임이 분명하다고 할것이다.

손영종, 2008, 『조선단대사』고구려사 3, 75~77쪽.

금 계호에 대한 사전정보가 없는 상태라면, 이러한 주장이 일견 타당해보일 수는 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의도적으로 왜곡을 저지르고 있는 부분들이 드러난다.


우선 연변장성과 내몽골 일대에 있는 계호는 같은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언급을 해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연변장성의 방사성탄소연대 하나만을 가지고 금 계호 전체가 연변장성과 같은 시기에 형성된 것이라 주장하고 있는 점을 살펴볼 수 있다. 손영종은 금의 계호가 축조된 기사가 잘 보이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대금국지>의 원문 표현도 "굴설이 아닌 준설"이라 주장하는데, 이는 1960년대 이후 금 계호의 축성시기와 관련한 논의가 있었을 때 <금사(金史)>파로화(婆盧火)전에 파로화가 태주(泰州)에 둔전한 기록을 두고 금 계호가 이 무렵 축설되었다고 주장하던 학자의 견해를 비판하는 다른 학자의 논문을 보고 옮겨온 듯하다. 당연하겠으나 이 논의들은 "계호가 언제부터 축성되었는지"에 관한 논쟁이지, 계호 각 구간별로는 축조와 관련한 기사가 없지는 않다. 손영종은 관련 연구를 대충 살펴봤거나, 최소한으로도 <금사>의 계호 관련 기사를 살펴보지 않은 것이다.


또 손영종은 현지 지방주민들이 이 장성 동쪽에 고려사람들이 살았었다고 전했다는 주장을 하였는데, 그 '고려사람'이 어느 시대의 사람인지를 확인하지 않았다. 그의 주장대로 고구려인일 가능성이 없지는 않겠으나, 고려 원침략기에 몽골에 피랍되거나 귀순한 고려인들이 그 지역에 거주했던 전승일 수도 있고, 가까이는 근대에 들어 만주지방으로 이주한 동포들일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후술하겠으나, 손영종이 이 지방주민들을 실제로 만났는지 조차 회의스럽다.


인용문 첫 문단에 손영종이 금 계호의 위치를 표현하고자 여러 지명들을 언급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 다시 옮겨오자면 흥안맹, 철리목맹, 소오달맹의 파림좌기, 파림우기, 극십극동기 등인데, 이 가운데 철리목맹(1999년 通辽市로 개편)과 소오달맹(1983년 赤峰市로 개편)은 현재 사용되고 있는 지명이 아니다. 그의 글이 2008년 무렵에 작성된 것임을 볼 때, 그가 현지답사를 거쳐 현지 지방주민들을 직접 취재하였다면 이런 지명을 사용할 리가 없고, 어디서 들은 이야기라면 응당 그 출전을 밝혀야함에도 그러지 않았다.


지명에 관한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지가 않는다. 『조선단대사』고구려편 3권의 뒷부분엔 고구려성 유적지의 위치와 목록을 정리한 표가 수록되어 있는데, 손영종은 여기에서 내몽골 지역의 유적(...)들의 목록도 빠뜨리지 않았다. 아래는 그 목록을 최대한 원문에 가깝게 옮겨본 것이다.


No.

성이름

딴이름[고구려때 이름]

위치

류형

재료

둘레(m)

비고

136

고려성자


 내몽고자치구 통료시





137

고력판성


    〃    돌천현 남 50리





138

고성(고구려성)


    〃    과이심우익전기 우란호터시 동북

산세

1,200


139

공주령고성

금와진

    〃        〃   공주령향

평지

내성, 외성 수천m


140

소성자

고려성

    〃     〃 우익전기 빠라커따이향 소성자둔



141

허리에하다

(제가둔고려성)

    〃           〃       제가둔

산세

210


142

호우터카사고성

(빠오리후영자고려성)

 내몽고자치구 귀류하진 하라테이향

1,110


143

비로촌고성

백호산고성

    〃       〃    고적향

300


144

쓰륜(색륜)고성

고려성

    〃    쓰륜기 호인향

평지


2,800


145

고려성(장성)

칭기스한변강

    〃  대흥안령산중기동남기슭, 사극사로산줄기기슭

장성

1,000,000


146

고려성자


    〃    소오달맹파림좌기(림동현)

평지



147

고려성자


    〃    적봉시 동쪽

산세


148

고려성자

고구려성

    〃        〃   


149

고려성자


    〃        〃   


150

다리강가 고구려성


 몽골공화국 수헤바따르도 달리강가

평지



- 위의 책, 235~236쪽. △표시는 확인되지 못하였거나 고구려가 이용하였을 가능성 있음을 의미.


이 표의 위치란에 적힌 주소들은 대부분 현재 사용되지 않는 지명이다. 이 기괴한 주소들을 올바르게 교정하면 다음과 같아진다.(몇몇은 지명이 바뀐 관계로 찾을 수 없었다.)

136 : 内蒙古自治区 通辽市 科尔沁区 大林镇 霍家屯?

137 : 内蒙古自治区 兴安盟 科尔沁右翼中旗 高力板镇 - 고력판진의 위치가 突泉县에서 남쪽으로 50여㎞ 떨어진건 사실

138 : 内蒙古自治区 兴安盟 乌兰浩特市 - 울란호트 시는 커얼친우익전기의 직할이 아닌 싱안 맹(兴安盟)의 직할임

139 : 内蒙古自治区 兴安盟 科尔沁右翼前旗 미확인지명(공주령향)

140 : 内蒙古自治区 兴安盟 科尔沁右翼前旗 巴拉格歹乡 小城子

141 : 内蒙古自治区 兴安盟 科尔沁右翼前旗 巴拉格歹乡 미확인지명(제가둔)

142 : 内蒙古自治区 兴安盟 科尔沁右翼前旗 科尔沁镇 - 哈拉黑乡은 귀류하진 직할이 아니며 현재는 科尔沁镇으로 개편됨

143 : 内蒙古自治区 兴安盟 科尔沁右翼前旗 科尔沁镇 - 古迹乡은 귀류하진 직할이 아니며 현재는 科尔沁镇으로 개편됨

144 : 内蒙古自治区 兴安盟 科尔沁右翼前旗 好仁苏木 - 索伦은 기의 이름이 아닌 진(镇)의 명칭이며, 苏木는 향급 행정구역 단위다(...)

146 : 内蒙古自治区 赤峰市 巴林左旗 林东镇 苏家营子? - 임동현은 1932년 8월~1933년 3월 사이에만 있던 지명(...)


위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그가 언급한 지명 중에는 1932년 이전의 만주괴뢰국에서나 발견할 수 있는 지명이 언급된다. 행정구역 단위가 올바르지 않은 점은 그가 현지답사를 한 것이 아닌 단순히 소축척지도 한 두장만을 보고 그 지도에 고려나 고력 비슷한 글자가 쓰여있으면 무작정 옮겨온 것이 아닌가하는 의구심을 피하기가 어렵다. 결정적으로 그가 제시한 주소들 중엔 137번 고력판진 하나를 제외하고는 현재 지도에서는 그와 연관이라도 있는 지명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가 참고한 자료는 도대체 어느 시기의 것인가.


간단한 결론을 내리자면, 손영종은 내몽골지역의 장성이 금대 계호임을 부정하지는 않았으나, 중국학자들의 견해를 부회하여 마치 그것이 고구려가 있던 5세기 무렵에 축조된 것으로 단정하였고, 그 근거는 앞서 살펴봤듯이 의구심 투성이다. 그가 제시한 지명들의 상태를 보더라도 어느 특정 시기의 지도 하나만 본 것이 아니라 여러 장의 지도를 짜집기하였거나 그렇게 짜깁기 해둔 매체를 참고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아무래도 인터넷을 통해 남한 사이비 추종자들의 떡밥을 접한게 아닐까? 보위부는 뭐하냐


다만 한가지 성과(?)가 있었다면 위 표의 137번 지명인 고력판진은 현재에도 있는 지명이기에 그 정체를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내몽골 지방의 근대 지도들에서 왜 '고려'지명들이 나오게 되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高力板镇 [Golin Baixing Zhèn] 在科尔沁右翼中旗东南部。面积43.3平方公里,人口0.6万,有蒙古、汉等民族。辖3嘎查、3居委会。1949年建高力板镇,1959年改高力板公社。1980年复置镇。农牧业结合。农作物有玉米、高粱、小麦、谷子等,牲畜以羊居多。境内有旗属企业7家。高力板大麯酒有名。有中、小学3所。镇人民政府驻地高力板,在白音胡硕东南44公里。人口4,800。“高力板”系蒙古语“高勒白辛”之转音,“高勒”意为河,白辛为平房。1932年成村。通海公路经此。

崔乃夫 主编, 1999, 『中华人民共和国地名大词典』第一卷, 上海;商务印书馆, 721쪽.


고력판진[고린바이신 전] : 커얼친우익중기(科尔沁右翼中旗)의 동남쪽에 있다. 면적은 43.3㎢이고 인구는 6천명이다. 몽골족·한족 등의 민족이 있다. 가차(嘎查-村에 대응하는 내몽골 고유 행정단위) 3곳과 거민위원회(居民委员会=居委会-우리의 '리'에 상응하는 단위) 3곳을 관할한다. 1949년에 고력판진이 세워졌고, 1959년에는 고력판공사(公社)로 개편되었다. 1980년에 다시 진으로 복귀했다. 농업과 목축을 병행하는데, 농작물로는 옥수수·수수·밀·조 등이 있고, 축산물로는 양을 키우는 곳이 많다. 경내에는 기(旗)에 소속된 기업을 경영하는 7가구가 있다. 고력판누룩주[大麯酒-백주의 일종인듯]가 유명하다. 중·소학교 3곳이 있다. 진()의 인민정부는 고력판촌에 위치해있는데 바얀후수(白音胡硕, Bayan Huxu) 동남쪽으로 44㎞ 거리로, 인구는 4,800명이다. "고력판"이란 몽골어 "고린바이신(ᠭᠣᠣᠯ ᠤᠨ ᠪᠠᠢᠢᠰᠢᠩголын байшин)"을 음차한 것인데, "골(ᠭᠣᠣᠯ, гол)"은 강(江)을 가리키고 "바이신"은 작은 집을 가리키는 말이다. 촌은 1932년에 성립되었다. 통-해공로(通海公路)가 여기를 지나간다.

여기서 살펴볼 수 있듯이, 몽골어 "고린(ᠭᠣᠣᠯ ᠤᠨ, голын)"은 우리말로 옮기면 '강변'이 되는데, 음이 '고리'와 유사하다. 내몽골에서 발견되는 고려 지명들은 이런 부류의 몽골어 지명들을 한역(漢譯)하면서 발생된 것일 가능성이 크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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